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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0128설교 / 마태복음21장1-11절 / 겸손의왕이여이제구원하소서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8.01.28|조회수544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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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11

겸손의 왕이여, 이제 구원 하소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고난과 죽음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처음으로 말씀하실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일을 당하실 것임을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16:21). 물론 예수님께서 이때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여러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2:13, 5:1, 11:55). 유월절이 가까워 올 때면, 유대인의 명절이 되었을 때면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올라가신 일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예고한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결국 고난과 죽음을 위하여 올라가고 계시다는 것을 더욱 집중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위한 행보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그런 행보 가운데 제자들의 반응을 주목해 본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한 마음을 계속해서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가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했고(18:1),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는 주의 나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20:21). 그리고 그런 요청에 대해 다른 제자들은 분히 여기기도 했습니다(20:24). 이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진정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 반면, 그들은 죽음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그들에게 보이신 것이 오늘 본문,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서 들어가신 사건입니다.

 

우선 1절을 보시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하여 알리실 때 그 일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게 될 일임을 말씀하셨고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16:21, 20:17 참조).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벳바게라는 지역까지 오게 되었는데,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 의하면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11:1). 우리에게는 벳바게보다는 베다니가 더 익숙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곳에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살고 있었고(11: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그곳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11장 참조). 요한복음 11장에 의하면 베다니라는 지역이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는 그런 지역으로 소개하고 있는데(11:18), 벳바게 역시 베다니 근처에 있는 동네임이 분명하다고 할 때 예루살렘으로부터 대략 2-3km 정도 떨어져 있는 그런 동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절과 3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얼핏 보면 굉장히 의아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자면 분명 나귀와 나귀 새끼의 주인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인 것을 보거든 그냥 끌고 오라고만 말씀하십니다. 물론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면 즉시 보내줄 것이라고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누가라고 하는 대상은 주인이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왜냐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즉시 보낸 것으로 봐서는 그럴 가능성가 가장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으로 볼 때 순서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혹은 예수님께서 행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인성으로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성은 볼 수 없는 것을 아실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자기 뜻대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까지도 자신의 뜻대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금 드러내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라는 말은 하늘과 땅의 주인,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 가운데 일부를 맡기셔서 나귀와 나귀 새끼의 주인이 맡기신 그 사람에게 있다 할지라도, 욥의 고백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에(1:21) 여호와께서 거두어 쓰시겠다고 하시면 어느 누구도 거절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지까지도 자신의 뜻대로 이끄신다고 할 때 사람의 마음은 그럴 뜻이 없는데 억지로 행하도록 하시는 그런 방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에 보면 유효적 소명과 관련해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유효적으로 부르실 때 하나님의 일들을 영적으로 구원적으로 이해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비춰주시고,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그들에게 주시며, 그들이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그들을 선한 것을 구하도록 정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유효적으로 이끄시지만, 그들은 그의 은혜로 기꺼이 하도록 그렇게 되어 지극히 자유롭게 나아온다는 것입니다(1).

따라서 주인 입장에서 그럴 마음이 없는데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억지로, 어쩔 수 없이 내어준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는지, 아니면 알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분명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서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그 마음과 의지를 주장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또한 그들은 결코 억지로 그 일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하며 자유롭게 행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될 부분은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4절과 5절을 보시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왜 예수님께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실 때 나귀와 나귀 새끼의 주인은 기꺼이 내어주는 자로 있게 되는가? 한 마디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하게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즉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시해 놓으신 그의 불변하는 작정들을 실행하시기 위해서 이런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특히 8장에서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하십니다. 약간만 언급하자면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그리고 7절과 8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그러나 동시에 9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도 말씀하십니다. 4절만 읽어드리면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그러나 심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도 구원을 베푸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7절을 읽어드리면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질 것으로 말씀하시느냐? 한 왕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인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스가랴 9 9을 읽어드리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그리고 10에서는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그러니까 회복과 더불어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나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인용구인 겁니다. 한 마디로 왕이 오실 것인데,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은 특별히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신다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시는가? 스가랴 99절에 이어 나오는 10절에 의하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입니다. 한 마디로 화평을 전하는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그것도 어디에 화평을 전하느냐?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까지 화평을 전한다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신 것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할 때 오늘 본문 5절에서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분은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과, 왕이시지만 그분은 겸손하신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알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겸손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일반적인 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보통 왕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모든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있는 그런 행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귀나 나귀 새끼를 타는 것이 아니라 말이나 병거, 마차와 같은 것을 타고 화려한 모습으로, 그리고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쑥이거나 엎드리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왕으로 알리시지만 세상이 말하는 그런 왕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겸손의 왕, 그러나 겸손하여’(ynI[;[아니])로 번연된 히브리어 단어는 그 뜻이 가난한’, ‘고통스러운’, 그리고 약하고’, ‘비천한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겸손하시다는 것은 세상에서 볼 때 가난할 수밖에 없고,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만큼 약하고, 비천한 그런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왕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나귀 새끼를 타시고자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물론 사사 시대에서는 사사의 아들들이 나귀를 타기도 했습니다(10:4, 12:14 참조). 매튜 풀 주석에 의하면 사사 시대의 경우 신분이 높은 자들이 타는 것이 나귀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 이후에는 유대인들이 말을 길렀기 때문에, 나귀는 오직 가난한 자들만이 탔고, 대부분 짐을 나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5절도 보면 나귀에 대해 멍에 메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짐을 나르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나 그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마태는 예수님께서 왕이시지만 결코 세상의 왕 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왕으로서는 매우 초라한, 그러나 그런 방식을 통해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내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님이시지만 이 세상의 어떤 왕보다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히려 비교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행보와는 달리 제자들의 관심은 세상적인 측면에서 크고 높은 자리,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그런 위치라고 말할 때 그것이 얼마나 주님의 뜻과 먼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36). 만약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세상을 정복하는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잡아갈 때 잡히셨고, 죄인 취급하셨을 때 죄인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때리면 맞으셨고 죄인으로 정죄하여 십자가 형벌을 선고하실 때는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내려오고자 하셨으면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53절에 보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세상 앞에서의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사는가? 결코 주님처럼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왕으로서 화려하고 멋지고 힘이 있는, 그래서 누구든지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야 말겠다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전에 살폈던 말씀으로 하자면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기 원하고, 작은 자가 되기보다는 큰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용서보다는 정죄가 앞섭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하자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모습이 익숙합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내용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고 계신 모습도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분명 그분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왕처럼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의 왕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역시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주님께서 가신 길이지, 주님과 상관없는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대하여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 나라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시고 그 나라는 땅의 나라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이 세상의 일시적인 부() 안에 세우진 것이 아님을 교훈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방법을 택하신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비천한 신분이 우리가 이 광경 속에서 그의 영적 나라를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왕들의 온갖 치장으로 호화롭게 꾸미시는 것보다는 거지와 같은 가련한 모습으로 그를 꾸미셨다는 하늘의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서 이 세상 임금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더 이상 이 세상 괴로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병도 없고, 먹을 것 걱정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 임금과는 달리 나귀 새끼를 타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그것을 가져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신이 왕 됨은 이 세상에서의 낙을 누리가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달리 말하면 세상적으로 볼 때 가난하고 고난이 있고 약하고 비천한 그것을 위해 오셨다는 겁니다. 이 땅의 영광을 취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삶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일시적인 이 땅에서 마치 영원토록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기 때문에 결코 땅의 원리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소위 세상 사람들이 힘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고, 그것을 의지해서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갈 원리는 하늘에 대한 소망을 품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그러나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 속에서 겸손의 왕으로 오신 것만을 말씀하고 있지만,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알리신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 그분이 자기 백성들을 회복하시고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그가 가시는 길이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지만 부활하시고 난 뒤, 그리고 승천하시고 난 뒤에는 장차 다시금 이 땅에 오실 것인데, 그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의 날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두려운 날로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따라 살아가더라도 소망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 앞에서 가난한 자로 살아갈지라도, 또한 고난을 받으며 살아갈지라도, 그런 만큼 약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살아갈지라도 내 나라는 결코 이 땅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 땅에 대하여 주께서 친히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하면서 주께서 주신 삶을 인내와 감사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처럼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는데,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마태복음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귀의 주인에 대한 내용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끌고 왔을 때 제자들은 그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타셨는데, 8절과 9절을 보시면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미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부터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벳바게 지역까지 오게 되었는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오늘 본문 사건(12:12-15)이 있기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1).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전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그 소문이 퍼졌던 겁니다. 이 일로 인하여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왔다고 증거하고 있으며(12: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12:13).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예수님의 소문, 그것도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영접하였던 겁니다.

우선 무리들이 외친 말은 시편 118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118:25-26). 칼빈의 주석을 보면 성령께서 선지자(,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온 교회에 명하신 일련의 기도형태를 공손하게 본받은 것임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일부러 히브리어를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본래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호쉬아-라고 발음해야 한다고 합니다. 선지자 중에 호세아 선지자가 있는데 그 뜻이 구원자라는 뜻으로 호쉬아혹은 호쉐아로 발음합니다. 거기에다 라는 단어가 붙어서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됩니다. 시편 11825절을 읽어드리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여기서 이제 구원하소서호쉬아-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발음이 바뀌어 오늘 본문에서는 호산나라고 발음하게 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이 시편 말씀의 내용을 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확인하기 위해서 시편 118을 보면, 1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5에서는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말하며, 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고 고백합니다. 때문에 14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고 고백하면서, 17에서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선하심, 그의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22에 보면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 본문과 같은 장에 있는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인용하시는 구절이기도 합니다(21:42).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그의 서신을 통해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벧전2:7).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는 쓸모없다고 생각하여 버린 돌이 실제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어떤 것도 세워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24절과 25입니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이처럼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그것도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분으로서 이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외쳤던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는 상황 속에서 이제 응답하여 오신 분으로서, 그리고 그분은 내 편이 되어 나를 도우시는 분으로서, 특별히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셔서 나를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 12으로 가시면 본 사건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16을 보시면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주어가 제자들은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제자들의 경우 이 일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는 무리들의 소리를 듣기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왕이신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소리라는 것 또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됨이 세상이 말하고 있는 그런 왕이 아님을 친히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것을 통해 보여주고 계시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 세상의 왕이신 것처럼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렇다면 무리들 또한 대부분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시편의 말씀을 따라 호산나를 외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일치하여 부르기보다는 정치적 메시야로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쳤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그들을 가르쳐 조명하시면 그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14:26 참조).

 

이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 당시의 제자들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시편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내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왕이시지만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으며,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시다는 겁니다. 스가랴의 말씀과 시편의 말씀을 확인했지만 그 의미는 결코 지상 나라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지상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오셨는가?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다시 말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그것을 다시금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죄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의 형벌을 받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결국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이나 시편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의 백성으로 있다고 할 때 구약의 성도들이 단지 이 세상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호산나를 외쳤다면 우리 역시 동일한 마음으로 주의 구원을 소망해야만 합니다.

주기도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가 그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영광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부터 은혜의 나라가 임하여 주의 백성들이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일의 주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로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도와주시지 않는 이상 주님의 나라가 유지되기를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호산나라고 부르는 이 외침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요, 전투하는 교회로서 죄와의 싸움이 끊임없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이겨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겁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기 때문에, 특별히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때는 왕으로서 대우하는 그런 모습으로 있기 때문에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여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 역시 빛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 있는 자들 편에서 볼 때 초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성이 소동하였지만 곧바로 무슨 초취가 취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더 이상 숨겨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이시면 소리높여 찬송할 때 어떤 바리새인들이 책망하는 일이 있게 되는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19:40) 그만큼 이 일에 대해서는 드러내실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외적인 모습은 초라할 수 있지만 그분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들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드러내고 계셨던 겁니다.

또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른 말이 이는 누구냐?”란 물음이었는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나라의 중심지입니다. 스가랴 83절을 말씀드렸지만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는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물론 예언의 말씀이긴 하지만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고 할 때 진리의 성읍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 당시 그러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야지만 진리의 성읍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로 말해 교회는 진리 밖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는가? 그렇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당시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 아니라 진리와 상관없는 그런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님이십니다. 무리들이 이 말을 할 때 그 뜻을 분명하게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어쨌든 성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사렛이란 말에 대해 칼빈은 마태복음 2장 주석에서 구약의 나실인과 동일어로 본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한마디로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사신 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가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있지만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선지자(18:15), 그러나 정치적인 의미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 그가 바로 무리들이 외치고 환영했던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신학 안에서는 후천년주의라고 해서 천년왕국이 적어도 마지막 단계에서 교회가 복음화를 크게 성공하는 때로 생각하여 외적으로는 번영과 평화의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리고 교회의 복음화 성공에는 정치적 우세와 반기독교 세력의 억제도 포함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래서 마치 이 세상이 원리적으로 기독교회가 되는 시대를 기대하고 있지만(홍창표, 천년왕국), 이 세상은 결코 천년왕국 동안 복음화 되거나 기독교회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36)

우리 역시 우리가 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소망해야 할 나라는 결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살 수 있도록, 그래서 이 땅에서는 전투하는 교회로서 죄와의 싸움이 끊임없지만 주께서 친히 역사하시고 도우셔서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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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오하람 | 작성시간 18.0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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