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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0225설교 / 마태복음21장33-46절 / 하나님나라를너희는빼앗기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8.02.25|조회수45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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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33-46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리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은 분명 다른 가르침이었습니다.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와 같다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전혀 권위를 찾아볼 수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7:29). 즉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의 참된 의미를 잘 드러내는 가르침이었다면 저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종교지도자들은 굉장히 못마땅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가르침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으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들이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자신들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제대로 반박하거나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제기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반박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한가 하는 것만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한 것이 지난 주 본문의 내용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느냐? 다시 말해 성전에서 행하는 일, 그리고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을 보면서 누가 너에게 그런 권위를 부여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자신이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하여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사역과 관련하여 질문을 하셨는데, 저들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대답하더라도 그 대답은 예수님께 유리한 쪽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들의 자세를 보시고서 한 가지 비유를 드셨는데, 그것이 두 형제에 대한 비유입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을 때 맏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실상 가지 않았고, 둘째의 경우 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이후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자로 비유가 되고 있느냐 하면 맏아들로 비유가 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경건의 능력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외치고 있지만 하나님 사랑의 열매인 이웃 사랑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이웃 사랑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 역시 외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에 앞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자 하셨던 사건입니다. 비록 무화과 열매를 맺을 시기는 아니었지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통해 저주하심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의 열매 없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저주하실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지난주 두 아들에 대한 비유에 이어 오늘 본문의 비유까지 말씀하심으로 저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지난주 두 아들에 대한 비유와 다르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비유를 통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있는데, 33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구약에도 보면 종종 포도원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 이사야 5장입니다. 그 부분과 비교하자면 지금 집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이스라엘은 가시적 교회로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참된 이스라엘은 아니라는 것이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해서 다 약속의 자녀는 아닌 것입니다(9:6-8 참조).

포도원을 위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었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두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별히 여기서 산울타리는 어느 정도 포도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포도원을 마련해 두시고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포도원을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욥기를 보면 사탄이 하나님께 따지기를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1:10a) 즉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지키시고 보호하심 때문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욥기는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내용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에 복을 더하시는 것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소유와 관련해 울타리로 두른다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고, 그 복을 지키시고 보호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도 동일한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즙 짜는 틀과 망대에 대해서 칼빈은 백성의 신앙을 율법의 가르침으로 보강하기 위해 덧붙여진 제사와 기타 의식같은 보조 수단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이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 그리고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제사와 의식과 같은 법을 만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농부들을 두셨는데, 세를 주고 갔다는 말에서 이 포도원이 농부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 농부는 누군가? 포도원을 잘 가꾸어야 하는 자들인데, 칼빈에 의하면 제사장들이 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매튜 풀 주석에서는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인들이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 모든 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있는데, 그 목적이 뭐냐? 34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왜 포도원을 두시고 농부들에게 그것을 맡겼는가? 열매를 위해서입니다. 앞서 포도원이 이스라엘이라고 했고, 그들이 열매 맺도록 누구를 통해 교육하도록 하시느냐 하면 농부들, 즉 제사장과 레위 지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농부들 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기 종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입니다.

사실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에서 구분하는 것은 제사장들이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지자들 가운데서도 거짓 선지자가 있었지만, 지금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때는 그들까지 염두 해 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구약의 제사장들을 보면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보통 제사장 하면 제사를 드리는 것과 연관해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역대하 153절만 보더라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를 통해 저들의 잘못된 것들을 책망하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칼빈 주석을 보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본래 제사장들을 세운 것은 건전한 교훈으로 교회를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게으름과 무지로 그들이 자기들에게 부과된 임무를 소홀히 하게 되자 선지자들이 특별히 파송되어 그들의 손을 도와 포도원의 잡초를 뽑기도 하고 전지작업을 하는 가운데, 제사장들의 약점을 보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해 속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으로 하여금 열매 맺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제공하셨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제공하셨지만 그들이 열매를 맺지 않더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 밝히시는 것이 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다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파송하셨지만 선지자들을 반겼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35절과 36절을 보시면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실제 구약의 역사를 보면 참된 선지자들 가운데 핍박을 받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야의 경우 이런 탄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19:10) 여러분도 알다시피 엘리야는 주로 북이스라엘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로 당시 북이스라엘이 어떠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9장에도 보면 백성들의 죄를 자복할 때 이런 내용도 들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나이다”(9:26) 느헤미야의 경우 포로 귀환 시대의 인물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하여 자복한다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이런 모습으로 있다는 것인데, 한 마디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율법을 등질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에 등지다보니 참된 선지자를 통하여 그것은 너희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인 것이 곧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야나 느헤미야나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상을 말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백성들이 그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를 바로 제사장들, 다시 말해 종교지도자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이사야 5 부분을 조금 살펴볼텐데,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나타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로 보자면 이사야 5장의 경우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대변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약간 길지만 1절 이하 7을 보겠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1절 하반부를 보면 포도원이 기름진 산에 있다고 말하면서 2절에서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내용은 오늘 본문에서 산울타리로 둘렀다고 말하는 내용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포도나무 자체를 극상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연히 기름진 곳에다 심으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고 탄식합니다. 4절에서는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하나님 편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고 해서 하나님 편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님도 실패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것은 너희의 완악함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요, 짙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너희가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5절과 6절에서 말합니다. 7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밝히시는데, 그것은 정의요, 공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열매는 무엇이었는가? 그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포학과 같은 열매더란 것입니다. 불의함이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이런 문제가 이어져 왔던 겁니다.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했으며, 그래서 선지자를 보내셨지만 참된 선지자조차 거부하더란 것입니다. 지난주 예수님께서 언급한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어떤 면에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입니다. 선지자와 율법 시대에 속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사역과 관련해서 물었을 때 그들이 올바르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겁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처럼 참 선지자가 오기만 하면 때리기도 하며 죽이기도 하며 돌로 치기도 하는 등 그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서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 이후에도 계속해서 언급하는데, 마태복음 23에서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부터 보시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23:29-33) 놀라운 것은 저들 스스로는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 시대 때 있었더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외식하고 있는 너희의 모습을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결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37절로 넘어가시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3:37-39) 하나님 편에서는 여러 번 계속해서 그들을 부르셨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부르실 때마다 거부하더란 것입니다. 때문에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바로 이런 배경이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는 누구를 보내시는가? 바로 아들을 보내시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37절을 보시면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이 말씀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될지를 전혀 모르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전지하신 하나님이 그렇지 못한 인간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적응하여 계시하신다고 하는데, 하나님으로서는 분명 이후 말씀처럼 아들을 보내시지만 아들조차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대우할 것을 아시지만 그러한 사실을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내시고자 마치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38절과 39절을 보시면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여기서 아들은 구약에서 예언되어 온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때는 죽음 전의 일이지만 비유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계시는가? 대제사장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넌지시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는가? 그들의 완악함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미 조상 때부터 여러 선지자들, 다시 말해 참된 선지자들을 핍박했었는데 너희도 다르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들까지 너희에게 왔지만 아들에 대해서는 더욱 더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40절과 41절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일단 40절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물으시는 내용입니다. 거기에 대해 대제사장들, 백성의 장로들이 대답한 것이 41절인데, 놀라운 것은 비유를 들으면서 그 비유가 지금 자신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처럼 굉장히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20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20:15-16)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질문과 저들의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저들의 대답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기록 방식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종합적으로 보자면 마태복음의 내용처럼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비유를 통해 저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 저들이 어떻게 대답했느냐 하면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즉 비유를 듣고 있지만 그 비유 속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이 자신인 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낯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 할지라도 깨닫게 해 주시기까지는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였을 때(삼하11) 그 죄를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단을 통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내용인즉슨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경우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인데, 그 한 마리를 부한 자가 자기에게 온 손님을 위해 잡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때 다윗의 반응이 어떠했느냐 하면 노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노하여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비유 속에 부자가 바로 다윗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사건을 은폐하고자 결국 충신인 우리아까지 죽인 것, 그리고 그 아내를 차지한 것이 바로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와 같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조차 비유를 통해 말씀하실 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이미 저주가 확증된 저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에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깨닫고는 반응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튜 풀 주석을 약간 읽어드리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구주께서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시자,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은 처음에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라고 말하였지만, 주님이 그들의 말이 맞다고 하시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시는 가운데, 그 농부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스스로를 정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손을 내저으며 그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는 반응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리하자면 처음부터 비유로 하신 말씀이 자신을 향하여 하고 계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누가복음의 반응을 보면 비유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당신이 하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이요, 그렇게 될 일은 결코 없다고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앞서 살핀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저들의 자세를 통해서도 분명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는 다르다. 우리가 만약 그 시대에 있었더라면 결코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정확하게 자신들을 보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저들의 죄가 무엇인지, 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알라고 계신 것입니다. 심지어 비유를 통해 그들 스스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만들기까지 하십니다. 비록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자가 그들 자신이라고 알았을 때는 핑계하듯 하지만, 비유 자체를 통해 그들은 실상 그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 때문에 정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른 흐름 속에서 더욱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시편에 기록된 말씀의 인용입니다. 42절과 4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지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반응은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너희 조상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실 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면 우리는 영접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하면 시편 118편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118:22-23 참조). 시편 118편은 우리가 마태복음 21장을 시작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칠 때(21:9) ‘호산나라는 말이 들어 있는 시편입니다. 때문에 시편 118편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들어 있는 시편입니다.

바로 그 시편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건축자들이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버렸다고 되어 있느냐 하면 건물의 안전과 직결되는 모퉁이의 머릿돌을 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퉁이 돌이란 건물의 전 무게를 받쳐주는 돌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게를 받쳐주는 돌이 없으니까 결국 건물 자체가 무너지고 맙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러했고, 지금 너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너희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면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이미 시편에 예언하기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너희를 통해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취되지만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게 되는 것으로 있지 않고, 지금 너희 스스로가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자로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버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 구약과 신약, 모든 교회의 기초를 만들 것이라는 것까지 알리십니다. 이 일이 얼마나 기이한지 사람의 이해를 훨씬 넘어서는 일임도 덧붙이십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람이 납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의 주체로 계십니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되지 않는 일을 통해 교회를 세워 가시는 분이 누구신가? 저들은 그들 자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시는 주체라고 밝히고 계신 겁니다. 로마서 11장의 표현과 같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3-36)

그러므로 건축자들이 모퉁이의 머릿돌 되시는 분을 버렸다고 할 때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것 외에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주어졌다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주어지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볼 때 주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가시적 교회 안에 있어서 마치 참된 교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요,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 빼앗긴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무엇도 말씀하시느냐?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바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열매가 구원의 원인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기초는 모퉁이 돌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없이는 결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에 대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저들의 열매 없음에 대하여 탄식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열매 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때문에 열매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표로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다는 것은 너희의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 맺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20) 바로 이 부분입니다.

 

계속해서 44절을 보시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칼빈은 앞선 문장을 더욱 상세하가 확증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악인들의 배척 때문에 자신이 무슨 손실이나 감소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외고집이 돌맹이, 아니 쇠 같아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견고성으로 이들을 박살내고 그 파괴에서 더욱더 영광을 얻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매튜 풀 주석은 전반부와 후반부를 달리 해석하는데, 전반부의 경우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 그의 가르침, 그가 제정하신 규례들로 인해서 걸려 넘어지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나로 인해서 걸려 넘어져서, 나를 믿지도 않고 영접하지도 않는 자들은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후반부에 대해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나와 나의 지체들을 박해한다면, 내가 그들 위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그들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국을 맞아 멸망당하게 돌 것이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본문을 통해 확인해야 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어도 이처럼 철저히 그리스도를 배척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인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를 향하여 반기를 들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를 빼내려고 합니다. 교회의 근간을 흔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자들이 깨질 뿐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들이 흩어질 뿐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날 노골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교회는 정상적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지난주에 이어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린다면 권위 없는 가르침이라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리를 진리답게 전하지 않고 오히려 훼손하는 가르침이라면 과연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는 설교,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설교, 그리고 그분 안에서 하여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바라는 설교 등이 아니라 그저 인간관계나 성공적인 삶과 그것에 대한 어떤 방법론을 설교한다면 과연 그것이 그리스도 편에 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개척을 처음 시작하면서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을 드렸지만(고전3:10-15 참조) 그리스도의 터 위에 무엇으로 건물을 세우는가가 중요합니다. , , 보석인가? 아니면 나무, , 짚인가? 달리 말하면 터 되시는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것으로 건물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건물을 지을 것인가? 그때 바빙크라는 인물이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를 비교한 내용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루터주의는 인간론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개혁주의는 신론적으로 생각한다. 루터주의의 경우 구원사 중심으로 생각하여 더 깊이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지만, 개혁주의는 역사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념, 곧 영원한 하나님의 성정에까지 올라간다. 루터주의의 경우 칭의가 교회의 항존적인 출발이라면, 개혁주의는 선택이 교회의 핵심이다. 루터주의는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의 문제로 시작한다면, 개혁주의는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에 이르시느냐?”의 문제로 시작한다. 루터주의의 경우 유대주의와 행위거룩에 반대하는 싸움이라면, 개혁주의는 이교도주의와 우상에 반대하는 싸움이다. 루터주의는 현상에 만족하고 신앙을 통하여 부여받은 축복에 안락하지만, 개혁주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물의 원인을 추적하며 미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다.

여러분, 이런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분별, 진리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합당한 해석들이 무엇인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 역사를 통해 주어진 건전한 신앙고백의 내용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변함없이 동일하지만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다른 해석을 내놓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 속에서 참되고 바른 해석을 내놓은 우리의 것을 아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45절과 46절을 보시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여러분, 인생이 끝나기까지는 분명 회개의 기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 그 비유의 대상이 너희라고 말씀하실 때 여전히 회개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기가 등등할 뿐입니다. 그러나 함부로 하지는 못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진리도 진리가 아니었지만, 그들이 믿고 있던 진리 때문에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사람의 눈치를 보는 자들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오늘 본문 말씀 이후 이런 말씀이 덧붙여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20:20-22) 이 부분은 마태복음 상으로는 2215절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곧바로 연결되기 전에 한 가지 비유를 더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살펴볼 것인데, 어쨌든 저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걸고 넘어뜨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꾀를 내더란 것입니다. 회개가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인 마음을 계속해서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들의 이런 완악한 마음은 저들만이 아니라 은총을 받지 못한 모든 자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 저들은 가시적 교회 안에 있으며, 특별히 가시적 교회 안에서 종교 지도자들로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즉 우리 자신을 살펴보셔야 합니다. 다윗의 예를 들었지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주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전에는 우리가 말씀과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무지하고,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라 딱딱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깨닫게 하시면 회개하는 심령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저들처럼 아무런 열매도 찾아볼 수 없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열매 맺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주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금 돌이보시면서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하시고, 주 앞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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