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2장 34-40절
두 계명,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바리새인과 함께 헤롯 당원들이 모여 예수님을 시험할 뿐만 아니라, 사두개인들까지 예수님을 시험하였지만 모든 시험에서 예수님을 넘어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교리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놀라워할 뿐이었습니다(마22:22,33). 특히 지난주 본문인 33절에 보면 무리가 듣고서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되어 있는데, 사두개인들만이 아니라 그들이 질문하러 왔을 때 무리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그들도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들은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놀랐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과 비교해 보자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놀랐던 것입니다(마7:28-29 참조). 그러나 놀랐다는 것이 참된 믿음과 연관이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하였다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답변을 들었을 때도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놀랍게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2:22). 즉 놀랐다는 반응이 참된 믿음의 반응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을 언급했지만 가르침에 대하여 당시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과 같다는 이유로 놀라워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말씀의 분별을 맛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워할 뿐이라면, 다시 말해 그 말씀이 그의 인생은 바꿔놓지 못한다면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와 같을 뿐입니다. 즉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혹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리고 그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 앞에서 단지 말씀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서 있다면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정당한 해석으로서의 설교가 여러분에게 양식으로 있어 살이 되고 피가 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그저 놀랐다고 말하는 저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셔야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 그리고 사두개인으로 이어지는 질문 속에서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랍게 여기는 말씀, 즉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뜻을 알리셨는데, 오늘 본문은 한 율법사의 질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3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헤롯 당원이 예수님을 시험한 이후 사두개인들 역시 예수님을 시험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게 되자 그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다시금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35절에 보면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라고 하면서 율법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으로 있습니다.
일단 시험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15절의 의미, 즉 “어떻게 하면 예수로 하여금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을까?”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달리 이해해야 하는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의 본문을 보면 15절과 같은 의미로서 이해하기란 다소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먼저 확인하자면 마가복음 12장 28절입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여기서는 서기관 중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율법사입니다. 그리고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부활에 관한 변론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변론에 대해 듣고 지금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잘 대답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두개인과는 달리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부활에 대하여 믿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 생각하는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셨고, 그 답변을 통하여 부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서기관 입장에서는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질문으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마가복음에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변하셨을 때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는 내용도 기록하고 있는데, 32절부터 34절이 그 부분입니다.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께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셨을 때 서기관 쪽에서는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정하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이 인정하는 모습을 보시고서 그가 대답을 지혜 있게 하였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서 멀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서 시험이라고 할 때 과연 올무를 위한 시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들 중에서 어떻게든 올무에 걸리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와서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올무에 걸리도록 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부활을 지지하고 있는 예수님이 과연 율법에 대해서는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질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가르쳤던 말씀을 보자면 자주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어쩌면 부활에 대해서도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입장이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을 보고서 전체는 아닐지라도,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일부는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율법 이해는 어떤가 하고 질문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시면, 34절에서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여서 무엇을 의논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계속해서 살펴오던 말씀과 이후 말씀으로 판단해 보건대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을까란 의논을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예수님께 대하여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편을 들어준 것은 반가운 일이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과도 자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될 대상으로 낙인이 찍힌 상태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고 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대화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교리적인 내용에 있어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로서 공동의 적을 위해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손을 잡았다고 해서 함께 할 수 있는 성격은 분명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두개인의 질문, 즉 부활과 관련된 질문을 통하여 사두개인으로 하여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했을 때, 다시 말해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저들로 하여금 부활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저들의 말을 막았을 때, 어떤 면에서는 저들의 교리가 틀리고 자기네들의 교리가 맞다는 것을 증명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모든 바리새인들이 다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들 모두가 무조건 적대시하였는가?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비슷한 문제가 바울에게 있었는데,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부활에 대한 문제로 공회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공회 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과 그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 바울의 말, 즉 부활 문제를 언급했을 때 서로 대립 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때 바리새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바울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행23:9-10) 단순히 보자면 바울이 부활에 대한 소망을 말하자 자기와 같은 교리라는 이유로 바울 편을 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 있지만, 그래서 무엇으로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을까 의논하지만, 그들 가운데서는 부활이 있다는 것 때문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는 자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율법사, 마가복음에 의하면 서기관인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시험하였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보다는 부활과 더불어 율법에 대한 그의 이해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활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은 입장에 있는데, 그동안 율법에 대하여 자주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 과연 우리와 전혀 달라서인가? 아니면 오해해서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가 질문한 것입니다. 36절이 질문의 내용인데,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십니다. 37절 이하 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큰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먼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의 경우는 신명기 6장 4절 말씀까지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29절과 30절을 읽어드리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먼저 “왜 하나님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가?” 묻는다면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비교해서 보자면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고, 그 대답으로 신명기 6장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 번째 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을 통틀어 신명기 6장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할 때 그 이유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주님이시라면 그것은 십계명의 도입부로서도 설명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신명기 5장 6절이 도입부인데,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니까 모든 만물 가운데 유일하신 주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내용으로 하자면 우리를 죄와 비참함 속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때문에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1계명에서 4계명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요약하자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이 오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1계명을 통해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5:7)고 말씀하셨으면 하나님 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 재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시며, 부모 혹은 자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형상화 하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제2계명 안에는 그것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제3계명, 제4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만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내가 너희를 구원했다는 겁니다.
아니 구원하기에 앞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한 본분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타락의 성격으로 하나님과 분리가 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심지어 하나님 대신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 자리를 채우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가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요청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이신 증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보내신 것에 근거합니다.
물론 율법교사로서 율법을 이해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까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야 될 내용으로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다시금 말씀드리겠지만, 마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주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주어졌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참된 구원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 있었을지라도 그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지 못했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요, 그런 만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 있다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 사랑을 첫 번째로 말씀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어 말씀하시는 것이 둘째도 그와 같다고 하시면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나머지 계명, 즉 5계명에서 10계명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있습니다. 즉 율법을 요약하자면 한 마디로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와 둘째로 나누는 이유는 그 대상에 있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시고, 그 사랑이 흘러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할 때 이웃이라는 대상으로 그 사랑이 나타난다고 알리고 계신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웃 사랑에 있어서 ‘네 자신과 같이’라고 말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다음에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딤후3:1-2)라고 말할 때 자기 사랑에 대하여 주의를 요하고 있는 겁니다. 역으로 말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로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애(自己愛)가 강한 존재요,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다른 사람보다 항상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이웃을 너와 동등하게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는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시느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당연히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쉽게 말하면 구약 성경 전체는 바로 이 두 계명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오경부터 시작해서 선지서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모든 말씀을 통해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거룩하고 올바른 생활의 전 구조와 기초’라는 것입니다(칼빈).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나고 있지만 앞서 살펴 본 것처럼 마가복음에는 좀 더 상세하게 본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내용과 약간 비교해서 볼 내용이 있는데, 오늘 본문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지만 오늘 본문에서 답변하신 것이 어디에도 나타나느냐 하면 누가복음 10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 비교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25절부터 보겠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10:25-28) 여기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교해 보자면 분명 질문 자체가 다릅니다. 여기서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오늘 본문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율법사의 정신 가운데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와 있는 율법교사의 정신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12장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보면 분명 서기관으로서 율법사는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알았고,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도 고백하였습니다. 유대인이라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통하여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가 단지 어떤 제도 아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정의와 긍휼에 관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는 좀 더 나은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3장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어떤 비판을 하시느냐?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면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는 것을 책망하십니다(마23:23).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했던 서기관으로서 한 율법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은 자임이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적어도 마태복음 23장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즉 참된 구원의 교리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만이지 그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 10장과 비교해 보자면 율법의 한 면을 분명 보고 있는 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한 면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영생의 문제를 행함으로서 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저들이 생각하지 못한 면이 있는데 율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0장을 통해 한 율법교사가 무엇을 해야지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전 율법의 요약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할 때 이 율법교사의 경우 율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시면서 네가 말한 율법을 그대로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분명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레위기 18장 5절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어 어떤 비유를 말씀하시느냐 하면 우리가 보통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말하는 내용을 들려주십니다. 29절부터 37절이 그 내용인데,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 재차 질문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한 유대인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쳐 갔지만 너희 편에서 볼 때 원수라고 여겨질 수 있는 사마리아인은 이 유대인을 돌보아 주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주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질문하시기를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유대인의 이웃이겠느냐?” 그러니까 율법교사 입장에서는 자기가 옳다,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재차 질문했지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드러내고 계신 것은 너희가 생각하는 이웃은 이미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이웃의 범주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너희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틀렸다고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에 대한 이해에 있어 분명 한 면은 율법교사의 질문과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전 율법을 지켜 행하기만 하면 영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조차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오류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율법은 이웃 사랑의 범주로서 유대인으로 제한 시켰던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열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먼저 부르신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이방인까지 구원을 계획하시고서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만 선민인 것처럼, 자기들만 의로운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 앞에서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의를 가지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율법의 명확한 뜻으로 하자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육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그런 율법을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여 마치 행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던 겁니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았다고 할 때 율법의 정당한 면을 분명 바르게 깨닫고 있었지만 그 율법 앞에서 나는 할 수 없다는 것까지 깨달았느냐 하면 그렇지는 못했다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처럼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인 겁니다. 달리 말하면 왜 메시야가 오셔야 하는지를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 사람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은총을 따라 좀 더 진전한 바가 있다면, 다시 말해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메시야를 소망하는 자리까지 나아간다면 그에게는 구원이 주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여전히 율법의 한 면만 고수하여 자기 의를 가지고 영생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아니라 결국 저주가 선포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서기관, 즉 율법사의 경우는 어떠한 길을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이런 내용을 통해 우리는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레위기 18장 5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행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말씀은 분명한 사실로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이 그것을 지킬 수 있느냐?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겁니다(갈2:16). 오히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롬3: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바로 이것입니다. 그럼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알게 되었다고 해서 율법이 악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롬7:12). 따라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 가운데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의 불의를 알리고 책망하며 정죄합니다. 특별히 악인들에게는 공포심을 일으키고 절망 상태에 빠지게 하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인자를 바라게 합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3:24)
더불어 율법의 기능 가운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유용성이 있는데, 바로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되지만 우리가 마태복음의 내용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분명 복음서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내용이 많습니다. 산상수훈만 하더라도 율법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산상수훈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물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시고 성취하심으로써 더 이상 율법의 저주와 정죄 아래 있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가운데 의식법, 이스라엘을 위해 주신 시민법 혹은 재판법은 폐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왜냐하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알리는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사가 어떤 의미에서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우리가 지켜 행해야 할 내용으로서 말씀하신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측면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한다면(신6:4, 막12:29), 그분이 바로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건져내신 것처럼 우리를 죄와 비참함에서 건져냈다는 것을 믿는다면(신5:6),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막12:30). 그리고 그와 같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막12:31). 이 둘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는데, 이 둘은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 제12장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고백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인데, “...우리는 율법이 복음에 의해서 설명되어지면 교회에서 매우 유익함을 알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율법 읽기를 멀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멀리할 것을 가르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이단들을 정죄한다.” 더불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제15장 율법의 완전성과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고백에서는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우리는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바, 행함으로 율법에 복종할 것이 요구되었고, 요구되고 있으며, 또 요구되어질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할 때에, 우리가 무익한 종임을 엎드려서 진실되게 고백해야 한다(눅17:10). 따라서 자기의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헛된 것을 자랑하고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상숭배를 의지하는 것이다.”
이런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율법이 우리에게 어떤 기능을 하는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써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고, 그것을 따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고,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면서 그것이 나의 공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땅히 행해야 할 바요 행하고도 우리가 무익한 종인 줄 아는 그런 합당한 자세로써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