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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0415설교 / 마태복음23장1-12절 / 그들이하는행위는본받지말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8.04.15|조회수44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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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1-12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만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성으로만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성으로 오셔서 당시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다윗 왕 때처럼 모든 나라 위에 이스라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결코 다윗의 자손으로만 오시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셨습니다. 한편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것이 맞지만, 다윗 스스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분이 결코 인성으로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본래 참 하나님이시지만 때가 되어 인성을 취하심으로 참 사람이 되셨으며, 인성을 취하셨다고 해서 신성 없이 인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는 신성과 인성이 연합을 이루는, 그래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라고 불렀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반박할 수 있는 어떤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무지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더 이상 예수님께 묻는 자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본래 질문의 목적이 무엇이었나 하면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여 제거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묻지 않았다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으며, 더불어 질문과 대답의 방식을 통해서는 자신들의 무지만 더욱 드러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이런 저들에 대하여 주의해야 될 것을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1절 이하 3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왜 예수님께서 저들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로서 율법을 읽고 해석하여 가르치는 자로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이 말한 것과 그들이 행하는 것 사이에 너무나도 큰 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말을 하지만 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저들의 가르침이 정당한 가르침으로 있었는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9). 그리고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6). 다시 말해 그들의 교훈 자체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6:12).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과연 저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할 때 그들이 말하는 바에 대해서 단순히 율법의 해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읽는 것, 낭독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낭독하여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뜻으로 이해하면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라고 할 때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들은 전통을 중요시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말씀을 읽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는 듯합니다. 전통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거기에 해석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모세의 자리란 율법을 해석하거나 율법을 통하여 판결하는 자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을 따른다고 할 때 본문을 통해 주시는 교훈은 저들이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에 대하여 다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저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무분별하게 받아도 좋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양식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순수한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율법의 순수한 가르침 가운데 인간의 것이 뒤섞여 있는 그런 가르침이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저들이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에 대하여 무조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빈주석에 보면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는데, 저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을 분별없이 모두 순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어떠한 가르침과 행동에 대한 단순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속된 행동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누구든 모세의 자리에 앉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따라 가르치는 것이지 자신의 설명이나 해석을 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는 정당한 소명의 문제도 포함된다. 곧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서기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부탁하시는 것은 이들이 교회의 공적인 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들이 율법의 순수한 가르침에 자신들의 것을 뒤섞는 것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있는 만큼 그들이 멋대로 명령하는 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서기관들을 순종하도록 격려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 율법의 순수하고 단순한 해석을 고수하는 경우에만 한정된다.” 칼빈에 의하면 어거스틴 역시 동일한 뜻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가르치시지만 그들이 자기들의 생각을 가르치려 든다면 그것을 귀담아 듣지도 말고 실천하지도 말라”(Tract. in Ioan 46)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이 가르치는 모든 말씀에 대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정당한 가르침에 한해서만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튜 풀 주석의 경우 무엇이든지라는 말에 대해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것들 중에서 모세의 율법에 나와 있는 것들만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자주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의 누룩과 그들의 전통들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을 언급하는데,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르친 것들 중에서 도움이 되는 것들을 이용하고 이를 행할 것을 원하셨다. 그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왜곡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계명을 분명히 하고 무효화시키지않는 한 이를 행할 것을 원하셨다. 그 계명들은 잘 준수되고 이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주위를 기울이고 신중하게 판단하여 준수되고 이행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당한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봉독하는 것, 읽는 것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느 한 본문을 통해 그 말씀을 해석한다고 할 때, 특별히 말씀을 맡은 자들이 말씀을 해석하여 설교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것에 인간의 것이 섞이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을 맡은 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로서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교훈의 내용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말이나 교훈보다는 행위와 모범에 의해서 더 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에게 서기관들의 악한 생활에 자신들의 생활을 맞추는 일은 삼가고 서기관들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율법의 결정에 집착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살펴 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온 백성이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많은 잘못을 꾸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잘못된 해석 또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부딪히기도 하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들 편에서 예수님을 싫어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싫어했던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렇다 보니 자칫 저들의 모든 것이 다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율법 교사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것 때문에 율법 자체에 대해 반대할 우려도 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반대하는 그런 분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악행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합당한 교훈들이 손상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말에 집착할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칼빈주석 참조).

 

여러분, 오늘날 목사로서 가르치는 것과 그 가르치는바 삶이 일치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은, 인간의 부패성과 연약함이란 가르치는 대로 100% 일치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정당한 이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상에서의 완전성화를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 탓을 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지 않았지만 우리의 부패성과 연약함으로 볼 때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실수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심각한 죄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혹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로 있다 할지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본래는 바른 말씀을 전할 때 바른 생활이 따라오는 것이 당연한 순서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서가 이 땅에서 언제나 적용되느냐의 문제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 비춰볼 때 성도는 목사의 행위가 아니라 그 목사의 입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 가르침이 어떤 가르침이냐?” 여기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 드린다고 해서 목회자의 생활이 말과 행동이 다른 삶이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5:48).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1:4). 때문에 우리는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 올바른 방향입니다. 그런 방향 속에 있을 때 부족함이 나타나고 연약함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때 그들의 행함 때문에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정당한 말씀까지 받지 못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왜 예수님께서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무엇이든지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는가?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는 것이 4절 이하 7절입니다. 먼저 4절을 보시면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여기서 무거운 짐이란 저들이 말하는 전통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전통에 대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다.”,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15:3,6). 만약 무거운 짐에 대해서 전통으로 생각한다면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는 것 자체에 대해서 비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판은 그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가르친 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조금의 노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매튜 풀 주석의 경우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들이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에 대해 말하는데(15:10) 그런 제의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 중 우리의 연약성을 생각해 볼 때 짐을 지기가 어렵고 힘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들은 여러 가지 의무를 부단히 부과하면서도 남들에게 부과한 그런 명령을 자신들은 전혀 관심도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그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하되, 남들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대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성도를 향하여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도 하시는 겁니다(2:3). 그런데 저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적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 것이 아니라 남보다 자기를 낫게 여겼습니다. 우리말에 보면 낫다낮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로 표현해 보자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율법의 잣대를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엄격하게 대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때 무거운 짐이란 하나님의 말씀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는 그 말씀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겁기 때문에, 어렵기 때문에 이 말씀은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순종의 열매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혹 우리 안에 부패성 때문에 자주 넘어지는 일이 있다면 그런 부패성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말씀과 기도로서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딤전4:5)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를 부지런히 사용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런 무거운 짐에 대해서 혹 다른 성도들이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대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는 엄격하게 잣대를 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생각하면서 긍휼로 대해야 합니다.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자세가 없었던 것입니다.

 

5절 이하 7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분명 저들은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엄격한 요구를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지키지 않는 자들로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들에 대하여 자신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고 할 때는 사람들이 볼 때 저들의 신앙이 마치 좋은 것인 양 그렇게 보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실상 말과 행동이 달랐지만 적어도 외적인 면에 있어서는 말과 행동이 똑같은 것처럼 위장하듯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저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한 마디로 말하면 외식하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종교적인 모습을 띄고 있기는 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구제도 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금식도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8:11-12) 그러나 저들의 모든 행위들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는데, 저들은 경문 띠를 넓게 하여 옷술을 길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이 민수기 15장과 신명기 22장에 나오는데, 민수기 15 37절 이하 40만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그러니까 지금 저들의 행위는 말씀을 따라 한 것인데, 이런 말씀이 왜 주어졌는가? 이 술을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말씀이 명하고 있는 외형만 흉내 낼 뿐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목적하신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라고 하니까 하는데, 사람들이 더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경문의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하더란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더 잘 띄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저들에 대하여 말만 하고 행함이 없다고 말씀하실 때 실제로 아무런 행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따라 행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따라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경문의 띠를 넓게 하기도 하고, 옷술을 길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이란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마태복음 6장에서 살핀 것처럼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결코 외형만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그런 마음을 인간 스스로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부패된 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하나님 자신을 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로소 바르게 알게 되는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우리 마음의 부패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들은 결코 자신의 외형만 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살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해석하시면서 말씀하셨던 것이 그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 실제적인 살인만 살인이 아니라 말로 하는 욕과 못된 말 등이 살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7-28) 실제적인 간음만이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외형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왜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처럼 겉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죄를 용납하실 수 있느냐? 없으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하나님을 의식한다고 할 때 자신의 겉만이 아니라 자신의 안까지 살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삶이 무뎌진다는 데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무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을 의식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저들이 모든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다고 할 때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높은 자리를 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에 대하여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칼빈은 이런 저들에 대하여 신앙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관심, 철저히 자아를 위한 헌신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들 앞에 보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코 못난 모습으로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왜 저들이 높은 자리에 관심이 있느냐? 왜 사람들에게 대접 받기를 원하느냐? 왜 선생으로서만 있기를 원하느냐?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지만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못난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잘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무엇으로 연결이 되느냐 하면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으로 연결이 됩니다. 율법의 정신으로 이해하자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자기 사랑만 남아 있는 모습인 겁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큰가로 다투었습니다(18:1). 왜 그런 다툼이 있는가? 높은 데 마음을 두기 때문이요, 그것은 철저히 자기 사랑에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는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20:20-21). 왜 이런 요청까지 있는가? 높은 데 마음을 두기 때문이요, 그것은 철저히 자기 사랑에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물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높은 자리에 앉게 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왜 그 자리에 앉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제자들이 높은 데 앉기를 원했던 것은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데 앉기를 원하는 것도 동일한 마음입니다. 편하기 위해서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결코 섬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2-4) 심지어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6-28)

특별히 하나님의 집에서 가르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가르치는 자 쪽에서 분명히 인식해야 될 것은 교회의 유일한 머리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결코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주의 뜻을 따라 꼴을 먹이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에 대하여 존경하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하라고 분명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딤전5:17). 그리고 우리는 이런 말씀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자는 교회가, 성도가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이 땅에서 잠시 동안 대신하여 주의 뜻만을 따라 가르치고 다스려서 주의 영광을 드러나게 할 수종자일 뿐입니다.

더불어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자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가르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것을 가르치는 자로서 하나님의 것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 가르치는 자의 입장이란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내어놓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 중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라고 할 때 그 도구가 다른 사람보다 잘나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우리는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일평생 저지르지 않는 실제적인 간음죄, 살인을 사주한 죄 등이 그에게는 있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그가 한 말은 굉장한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어린 나이에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음죄를 비롯하여 살인과 관련된 죄 등을 지었다는 것은 그도 역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 모두는 다 동일하게 부족하고, 동일하게 연약한 모습으로 있을 뿐입니다. 가르치는 자로 있다고 해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가 더 잘나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맡겨 주셨기 때문에 충성해야 할 자로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는 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학생으로만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라 할지라도 가르치는 자로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정신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더욱 사랑하는 모습만 가질 뿐이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의식, 그리고 그런 의식이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던 겁니다.

이런 저들을 경계하시면서 교훈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8절부터 10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이런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교회 안에 선생이 없는가?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는가?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고린도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거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고 말씀하는 내용이 있습니다(고전4:15).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는 자녀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4:19).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 스스로 이방인의 스승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딤전2:7). 따라서 말씀 사역자들에 대하여 선생이라,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교회의 유일한 스승이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많은 아버지가 있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요, 이 땅에 많은 지도자들이 있지만 그들을 세우고 폐하시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요, 따라서 궁극적인 의미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선생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아버지라 불릴 수 있습니다. 혹은 지도자로 세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될 것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하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 위에 계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그분에 의해서 세워질 뿐입니다. 때문에 목사든, 부모든, 사장으로 있든, 아니면 지도자로서 있든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세워진 자들이 행해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내가 가장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문제는 이 사실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 담임 목사라 할 때 공식적으로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상 주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거기에는 이미 그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고 있는 겁니다. 가정도 마찬가지고, 직장도, 그리고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세우셨는데 주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다면 거기에는 자신이 머리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그들 스스로가 높은 자리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요, 사람을 의식할 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자세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본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정의 주인도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라면 그리스도의 뜻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가르치는 목사의 의무요, 가정을 다스리는 가장의 의무요, 국가 위정자들의 실제적인 의무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본래는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분으로서 섬기러 오셨다면 우리의 자리는 그분을 따라 가는 자리여야 합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분명 우리 중에 큰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큰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세우셨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왜 세우셨는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았다고 할 때 그 직분을 어떤 위치, 자리라고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직분을 맡은 자들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하지만, 직분을 맡았다고 할 때 그것을 높은 자리라고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섬기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마셔야 합니다. 철저히 섬기기 위해서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은 백이면 백 자기 사랑이요, 자기 의요, 자기만을 위한 것으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 본성이 그러합니다. 혹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지 몰라도 어쩌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일반적으로는 모든 삶 속에서 말의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고, 또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말에 대한 교훈으로 적용될 수 있지만, 특별히 1절에서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염두 해 둔다면 어떤 가르침을 가르치는가의 문제까지도 지금 이 말에 대한 부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통해서도, 심지어 사탄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소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로 있다면 그 소명에 걸맞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바로 그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이라 연약한 부분이 있고, 연약함 때문에 실수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목사라 해봐야 낫다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총을 따라 조금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오십 보 백 보입니다. 때문에 삶이 말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고, 목사의 입을 통해 증거 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목사로서 할 수만 있다면 본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여러분 역시 동일한 길을 가야하겠지만 생활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목회자의 가족이 더 힘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 거기에 여러분의 마음을 두시고, 바로 그 말을 통해서 배우고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세워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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