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3장 25-28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 ③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주 예수님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저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비판하시면서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마태복음 23장입니다. 물론 마태복음 23장 이전에는 전혀 비판하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집중적으로 비판하시는 것은 그만큼 저들의 죄가 심각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저들에 대하여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분명 그들은 가르치는 자로 있었고, 가르친다고 할 때 천국 문을 열어 들어가도록 하는 가르침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구약 율법을 통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했고, 그런 점에서 모든 의식법을 통하여 중보자를 내다볼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열매가 없을 수 없다는 것도 강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보게 되는데 저들은 저들 스스로도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기독교만이 아니라 일반 종교 속에도 보면 내세 신앙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부활이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내세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집중한 것은 무엇인가? 내세가 아니라 땅의 것이 온 마음이 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기에 그들은 종교적인 열심을 내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열심은 아니었던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길을 전혀 걸어가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문제는 저들의 문제가 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로 있기 때문에 가르침 받는 자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판하셨던 것이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면서 전도하지만 교인 한 사람을 얻으면 결국 자기들과 같은 자로, 아니 자기들보다 더한 자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물론 야고보서 3장 1절에 의하면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기 때문에 전도를 받은 교인보다는 그들을 바르게 이끌지 못한 선생의 잘못이 더 큰 것은 분명합니다.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였다고 해서 야고보서 3장 1절의 말씀이 거짓되기라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그만큼 전도 받아 온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도를 받지 않았다면 엉뚱한 열심이라도 내지 않았을 것이지만, 전도를 받아 하나님의 의는 모른 채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전도를 받지 않았다면 그 자리 그대로 있었겠지만 전도를 받고 난 뒤 오히려 자기 의를 위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는 더욱 멀어져 버렸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향하여 눈 먼 인도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한다면 어디로 인도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했지만 어디로 인도해야 할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맹인과도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겁니다. 특히 그들의 어리석음을 더욱 드러낸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 덜 중요한 것이 있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말씀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이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이익 되는 것만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그 외에 것은 덜 중요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지경에까지 갔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저들의 무지함, 저들의 어두움이었던 겁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먼저 25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의 경우 어떤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였으나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서 이상히 여길 때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설명합니다(눅11:37-38). 그리고 그런 배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이 전통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마태복음 15장에서 살핀 바가 있었는데, 거기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따지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15:2) 마태복음 15장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 7장인데, 거기서는 몇 가지 사실을 덧붙여서 설명합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7:3-4)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한다고 할 때 저들의 전통을 빗대어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통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전통을 통하여 당시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알리고자 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전통 자체가 겉을 깨끗하게 하는 일은 많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릇을 씻을 때 그릇의 겉만 씻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릇의 주된 역할이 그릇 안에 무엇을 담기 위한 것으로 있기 때문에 그 안을 더 잘 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그릇의 겉만 씻고 안은 전혀 씻지 않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외적인 면만 신경을 쓸 뿐 내면을 들어다 보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태복음 1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10절과 11절을 보시면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16절 이하에서 이것을 설명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6-20)
물론 오늘날 위생 문제 때문에 청결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손을 씻고 먹도록 하는 것이 있고, 그런 측면에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더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고 안 씻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더러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더러운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악한 것들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악한 것이 더러운가? 그것은 그 마음 상태가 이미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성경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누구도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지만,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는 자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치 모르는 자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사람의 내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들은 전통을 따르기만 하면 깨끗한 자인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으면 더러운 것이 내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잘 씻기만 하면 더러운 것이 일체 우리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위생적인 면에서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그들 속에 있는 것은 탐욕과 방탕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탐욕과 방탕함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26절을 보시면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저들에 대하여 외식하는 자라는 표현 외에도 눈이 멀었다는 것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전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성경을 통해 가르치고 계시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성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전적 타락, 전적 부패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의를 위하여 열심을 내도록 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가르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그것을 가르칩니다. 맨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모습으로 만드셨지만(창1장),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창3장). 전도서 7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이것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7:29)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다는 것은 거짓이 없도록, 선하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은 꾀들은 냈다는 것은 정직과는 멀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된 것이 무엇인가? 죄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가장 끔찍한 살인이 창세기 초반부부터 나오게 됩니다. 그것도 형이 동생을 죽이는 사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창4장). 창세기 6장에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창6:5). 즉 맨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죄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저들은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보는 자로 있었으면서도 마치 보지 못하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가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던 겁니다. 이런 저들에게 알리시는 것이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을 먼저 깨끗이 해야 거기서부터 나오는 것도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고 할 때 무엇을 살펴야 하는가 하면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말씀이라는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조명도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다고 해서, 또한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면에서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지 않는 것에 대해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듣는 자로 있을 때 그 말씀이 마음을 비추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 없다는 측면보다는 그들 스스로가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실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아담의 타락을 보면서, 그리고 가인아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보면서 단지 “그런 사실이 있었구나!” 하면서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있어서는 안 되고 아담 안에 내가 있어서 함께 타락한 자가 되었고, 타락의 결과 우리 역시 죄의 결과를 내놓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리는 그들만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자리이기도 하며, 우리의 자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그 사실이 바로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버릴 수 있도록 말씀이라는 방편, 그리고 기도라는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하셔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묵상, 그리고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 강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마음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깨끗하게 되기까지는 결코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죄는 마치 누룩과 같아서 너무나도 쉽게 부풀기 때문입니다. 한번 화를 내면 쉽게 그 화가 가시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분에 못 이겨서 화를 낸다고 말하지만 죄가 바로 그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가 아니라 거룩이 나오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과 동시에 날마다 기도하는 자로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 속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저들이 가르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가르치기 위해서 항상 말씀을 대면하는 일이 있었을 텐데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자로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지식적인 면에서는 구약 어디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탁월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식만 가지고 있었을 뿐, 그런 지식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 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역시 그럴 수 있다는 데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개혁주의라는 말을 지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교리, 저런 교리를 들을 수 있는 곳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리를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의 가르침은 곧 교리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디모데후서의 말씀처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이 있는 것입니다. 딱딱한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라는 말은 결코 생활과 상관없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한 예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고 할 때 개혁주의는 그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고 홀로 모든 것을 다 행하시는 주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한다고 해서 너희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을 가르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가르침이 있을 수 있지만 더 중요하다는 것 때문에 전체적인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고 한편만 강조하는 가르침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배우셔야 합니다. 말씀의 한편만이 아니라 전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한번 배웠다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배우셔야 합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의 마음이 주의 말씀으로 변화되기까지, 그것도 완전히 변화되기까지 계속해서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은 결코 거룩은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란 우리로부터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패성이 그만큼 뿌리 깊게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27절과 28절도 동일한 뜻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27절을 보시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여기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무덤에 석회를 발라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회를 칠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있을 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그래서 경건의 모습을 갖춘 것처럼 보여주고 있지만 그 속은 더럽고 냄새나는 것, 다시 말해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가꾸어야 하는가? 외면이 아니라 내면입니다. 그리고 내면을 가꾸기 위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그들이 겉만 신경 쓰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 그들은 외적으로만 괜찮게 보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참된 경건인 줄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외식이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것이 경건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를 보시느냐? 마음을 보십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결국 주께서 25절과 27절, 28절을 말씀하시는 것은 26절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물론 저들은 눈 먼 자로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 앞에서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주님께서는 교회를 향하여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안을 살피면 우리의 겉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겉은 그럴싸하게 하는데 안은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이 곧 외식인 겁니다.
문제는 많은 부분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한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마음속에 있는 은밀한 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은밀한 죄를 부추기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엇보다 7계명과 관련된 죄악이 넘쳐나고 있고, 익명성 아래에서 그런 죄악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심하게는 익명이 아니라 7계명과 관련된 죄를 짓도록 조장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를 수 있고 일부 사람들만 아는 그런 은밀한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저들은 그런 하나님에 대하여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의식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생각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마음 안에서의 싸움입니다.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유혹하기를 사람만 모르면 된다는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그런 죄를 지으면서 마치 그런 죄와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만 하면 괜찮은 것처럼 몰고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말씀을 통하여 양심을 치십니다. 그때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속히 돌이켜 죄가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죄를 죽이고, 주께서 주시는 의를 열매들을 맺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을 통해 외치게 하셨던 바가 그것이고, 예수님 역시 복음을 통해 외쳤던 것이 그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자들에 대해서도 경계를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부터 보시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참된 경건의 능력은 외적인 어떤 화려함이 아닙니다. 외적인 어떤 대단함도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 얼마나 멋있습니까? 오늘날도 보면 여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도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종교적 명분도 분명한 것을 말합니다. 다른 종교의 이름이 아니라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기에 칭찬 받을 것 같지만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20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즉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이 열매로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을 통해서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4절부터 보시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여기 보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고 해석하지만 본문은 그런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서 해석하자면 실제로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을지라도 그것이 열매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외적으로는 종교적 명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처럼 말씀을 듣는 자리에 와 있을 수 있고, 또한 말씀을 들으면서 기쁨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히브리서 6장의 말씀처럼 이런 저런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경건이냐?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표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외적으로 어떤 경험을 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열매로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럼 무엇이 열매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약간 비교해서 보자면 성령의 열매와 반대되는 것이 육체의 일인데, 19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무엇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내용인가?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마23:23), 다르지 않습니다. 저들에게는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도 없고 희락도 없고 오래 참음도 없고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도 없습니다. 종교적인 행사들은 하지만 이웃 사랑의 열매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마지막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 무엇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느냐 하면 이웃 사랑의 열매로서 천국과 지옥을 판단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한 부분만 확인하자면, 마태복음 25장 34절 이하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34-40) 어떻게 보면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행위 구원을 말하는 자들은 이 본문을 통해 자기들의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는 내용입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 그것이 열매로 나타나는 자입니다.
그럼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참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 없이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결과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의 증거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아들도 아까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것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 믿음은 결코 열매가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결코 외식일 수 없습니다. 외적으로 그런 척하는 것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안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돌아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사악한 것을 죽이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부패성을 알고 그 부패성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더욱 주의 말씀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가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와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그런 척 하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는 모습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과 외적으로 나타나는 바가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마음을 살피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 외적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새 마음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저들의 경우 율법을 알기는 알지만 열매로서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놔두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선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들이 가진 자기 의를 위한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로서 정당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성령의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