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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0610설교 / 마태복음23장29-39절 / 화있을진저외식하는자여④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8.06.10|조회수87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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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29-3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가 있다고 말씀하실 때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외식하는 자요, 눈 먼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이고, 영적으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종교지도자로서 가르치는 자들이었다는 데 더 심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자들까지도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즉 구약의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면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29절과 30절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은 자주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곤 했습니다. 참된 선지자의 말을 좋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짓된 선지자들의 거짓된 말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선지자들에 대해 배척하거나 괴롭히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의 경우 이런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11:36-3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남기게 하셨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으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을 거짓된 선지자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오늘날 로마 가톨릭처럼 성인숭배사상으로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톨릭의 경우 기념 정도가 아니라 참된 선지자, 그리고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 그리고 교회 역사 속에서 성인들이라고 할 만한 자들을 숭배하는 일들이 있는데,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미는 것이 그런 의도에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이 기념의 의미로 행한 일에 대해서는 굳이 문제 삼을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기념을 넘어 그것을 숭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그것은 매우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저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화가 있다고 하시는 것은 그렇게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긴 하지만, 정작 그들이 전했던 말씀에 대해서는 전혀 듣는 자로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그 존중이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느냐 하면 그들이 전한 말씀, 그것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받아 말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라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용으로써 열매를 가지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조상들의 경우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수많은 어려움을 주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조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미는 것으로 나타냈던 겁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을 보시면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즉 너희는 우리가 조상 때 있었더라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너희의 마음과 자세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가 증명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외적으로는 선지자들을 존중하는 듯 한 모습으로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미고 있지만, 너희도 너희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며, 말씀으로 말미암아 맺히는 열매들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자면 겉으로는 존중하는 것 같지만 존중하는 자세가 열매로서 나타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 말처럼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너희의 모습은 선지자의 피를 흘렸던 너희 조상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이미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에 보면 포도원 농부 비유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를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고 말씀합니다(33). 그리고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었는데(34), 농부들이 어떻게 하느냐?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다고 말씀합니다(35). 그래서 주인은 다시금 더 많은 종을 보내었는데 동일한 자세를 가지자(36), 후에 아들을 보내었지만(37) 아들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는 자세를 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38-39).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들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열매를 보여주기보다는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까지 보내셨지만 그에게도 똑같이 하더란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너희가 너희 조상들과는 달리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 같으면 선지자들이 예언한 아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할 것이고, 그에 대해 받아들여야 하는데, 너희는 그렇지 않은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거두러 오셨지만 구약 백성과 동일하게 아무런 열매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아무런 열매도 없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온 나조차 끊임없이 박해를 하는데, 이러한 자세가 곧 선지자를 죽인 너희 조상들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이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2143절인데,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그리고 이때 열매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원의 표로서 열매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외적으로만 선지자들을 존중하는 것처럼 있을 뿐이지, 구원의 표로서 열매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자세가 없느냐? 주일에 교회는 나옵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에는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앉아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 보면 예배 시간인데도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육체는 예배드리는 곳에 앉아 있지만 그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주의 말씀을 따르고자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스마트폰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스마트폰으로 성경과 찬송을 대신하는 일들이 있는데, 과연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있는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본다고 할 때 거기에 아무런 유혹이 없느냐? 무음으로 해 놨다고 해도 문자가 올 수도 있고, 어떤 메시지가 뜰 수도 있습니다. 그럼 거기에 마음을 전혀 빼앗기지 않습니까? 성경책을 들고 나와서 앉아 있어도 다른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평상시 스마트폰을 들고 살면서 성경보다는 다른 일들을 더 많이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런 유혹이 없겠습니까? 약간 초점과는 동떨어진 말일 수 있지만 개인이 개인의 성경책을 사서 보셔야 합니다.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는 용도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보고 읽을 수 있는 용도 하나만을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구별된 용도로써 성경책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에 올 때 그 성경책을 챙겨서 오셔야 합니다.

이것 외에도 우리는 이런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소위 주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이름 있는 교회에 다닌다, 이름 있는 목사 교회의 성도라는 것으로 뭔가 대단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과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자세와 다르지 않은가? 달리 말하면 신앙을 열매로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으로 증명하려고 한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자세와 다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런 열매 없이 종교적인 외형만 갖추고 있다면 감히 말씀드리지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때문에 너희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때문에 우리는 열매로서 우리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열매라는 표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아니면 아무런 열매 없이 그저 종교적인 명분만을 가지고 떠들어대는 사람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을 통해 전해준 말씀과 상관없는 자들, 그리고 아무런 열매를 찾아볼 수 없는 저들에게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무슨 말인가 하면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가던 그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탄식 가운데 하나가 수많은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만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것이었는데(1:11-12), 그 말씀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외적으로는 예배하러 나아오지만 마당만 밟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사사기 말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과 네 눈이 보기 좋은 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의 분량을 쌓아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33절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지옥의 판결 외에는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매우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예수님 당시로 하자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진리 앞에서 어떤 자들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저들은 천국 문을 열어 보여주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자신들보다 더욱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들이 만든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입니다. 진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요, 구원의 교리를 전혀 가르치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저주 외에 무엇이 돌아가겠습니까? 무엇보다 이런 자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한 어조로 드러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11:49)라는 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마태복음에서는 내가’,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말하기를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선지자들, 지혜 있는 자들, 서기관들을 보낸다고 되어 있는데,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종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약간 구별하자면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보내셨고, 신약에서는 사도들을 대표적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너희가 그들 가운데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또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면서 박해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주님께서 계속해서 그들에게 주의 종들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까지 확장되지만 이방인에게 확장된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경우 복음 전파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는 적어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에 대해서는 복음을 전파한다 할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핑계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저들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하느냐?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심지어는 이 동네 저 동네 따라 다니면서 박해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37절에서 더욱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편에서는 너희를 모으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스스로가 원치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근원적으로 보자면 분명 하나님께서 그들을 유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죄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유기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자주 들려주시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뜻에서가 아니라 여전히 고집불통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아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이것을 선포함으로써 그것이 그들에게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향기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와 본질에 있어서는 유익한 것이요 모두를 구별하지 않고 다 영생에의 소망으로 초청하지만 모두가 속으로 전향하는 것은 아니요 또 하나님께서는-모두가 새롭게 회개하거나 순종하지는 않으므로-모든 사람의 귀를 다 꿰뚫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자들은 그것을-그들의 불신에 따라-치명적으로 해독스런 도구로 만들고 만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자세하게 밝히듯이(6:10)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면서 일부러 그들에게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시는 것은 버림 받은 자들을 더 흉측한 죄의 구덩이에 쓸어 넣으려는 뜻에서이다.” 물론 칼빈은 이후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육신의 비위에 맞을 리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악의적인 조롱자들이 이 점을 잡고 늘어지면서, 하나님은 마치 야비한 독재자와 같다는 식으로 짖어대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가망이 없는 자들에게 벌을 가중시키는 것을 즐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알면서 고의적으로 그들의 눈먼 상태와 고집을 가중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것을 통해 누가 유익 받도록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이런 증거를 사용하시는 것은 신실한 자들의 겸손을 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을 반면교사로 삼아 복음이 들려질 때, 주의 종을 통해 거짓된 가르침이 아니라 참된 가르침이 가르쳐질 때 말씀을 듣지도 않고,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도 않는, 그래서 아무런 열매가 없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신다고 하는데,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께서 주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도록, 그리고 그 씨가 우리 마음 밭에 뿌려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35절과 3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스가랴서를 쓴 스가랴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스가랴 11절에 보면 스가랴에 대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베레갸라는 이름과 바라갸라는 이름이 사실 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된 것이고 하나는 헬라어로 된 것입니다. 스가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가랴라는 이름은 사가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가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은 일에 대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인물이 스가랴 선지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가장 유력한 해석은 역대하 24장에서 유대인들이 요아스 왕의 명령으로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로 쳐죽인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된 말씀을 잠깐 살펴보고 오자면 역대하 24 17절 이하에서 이렇게 알리고 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대하24:17-22) 그러니까 왜 돌로 쳐 죽이는 일이 있었는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너희를 버리실 것이라는 경고를 하자 그 소리가 듣기 싫다고 죽인 것입니다.

물론 마태복음과 역대하를 비교해 볼 때 사가랴, 즉 스가랴라는 이름은 같지만 아버지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난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여호야다도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매튜 풀 주석).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아벨로부터 시작해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주의 뜻을 따르다가 순교한 순교자의 피, 마태복음에서는 의로운 피라고 말하는데, 그 의로운 피가 너희, 다시 말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돌아갈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이 가능한데, “이전 세대의 피 흘린 죄에 대한 책임을 다른 세대에게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에스겔 18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전체를 다 읽을 수는 없고 초반부만 보자면 1절 이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18:1-4) 2절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하는 속담은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미친다는 것인데, 그런 속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19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14:19-22) 한 마디로 자기 죄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지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인가? 비록 그들이 아벨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사악함이 가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사가랴의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치 사라갸를 죽은 당시 유대인들, 그리고 요아스 왕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많은 순교자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의인을 죽이는 그 일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악함이 저들과 다른가 했을 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런 말씀으로 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실제로 그들이 어떤 일을 행하는가 하면 의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아니라 실제로 의인이요, 의 자체이신, 다시 말해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데 앞장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 마음이 상할 뿐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비교하느냐고 따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들 역시 의인이요, 의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앞장서는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실까지 내다보시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37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회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는 길이 옳지 못하다. 때문에 돌아오라.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 가야할 길이 아니다. 그 길을 간다면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의 말을 듣고 돌아오라. 한번 말씀하시고 그만 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선지자, 저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돌로 쳤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자녀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구약 역사를 보자면 계속해서 그 일을 해 왔지만 결국 너희 스스로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저들을 향하여 화가 있다, 저주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정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가 그 말씀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정죄의 원인이 바로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루셀렘을 향하여서도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지금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대상은 단지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고 있는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 역시 다르지 않은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 가르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가르치는 자들이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가르침 받는 자들보다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서 31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 받는 자들 편에서는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함께 그 말씀이 과여 그러한 말씀인가 날마다 상고하는 일이 있다면(17:11) 거짓된 가르침에 대하여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14:26).

 

더불어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 말씀을 하신다고 할 때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상징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리는 외적인 표로 주신 것이 성전입니다. 그런 성전이 있는 곳을 거룩한 성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저주를 선포하시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습니까? 비록 성전이 있다 할지라도 성전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에서 주의 말씀이 올바르게 전해지고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다시 말해 열매 있는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 성전의 올바른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능을 상실한 곳에 하나님께 함께 계실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서도 저주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8절입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칼빈은 이곳을 너희 집이라는 말을 통해 그곳이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는 간접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집으로서 역할을 전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런 열매가 없는 곳,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처럼 있는 곳,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닌 것입니다. 39절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이제부터 언제까지 나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할 때까지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은혜를 베푸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곧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들의 인간 수준에서 살아 왔으며 교사의 임무를 수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 나의 소명의 과정이 다 이루어졌으므로 나는 갈 것이다. 더 이상 너희들은 나와 같이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요, 앞으로는 너희들이 너희 구속주와 구원의 시행자로서 싫다고 무시하는 나를 심판관으로써 대하게 될 것이다고 하는 식인 겁니다.

 

여러분,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오늘날 교회는 이 말씀과 상관없는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완성하시고 난 뒤 더 이상 성전이라고 불리는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하여 알리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요, 그의 몸 된 교회가 성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계신다는 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처럼 있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저주가 아니라 회개의 기회로서 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회개하여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분명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종교적인 명분만 가지고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바뀌고 그 마음의 변화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의 자세가 변하는, 열매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건전한 신학과 정통성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경우는 그들도 분명 교부들을 존중하였지만 교부들로부터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칼빈의 표현에 의하면 쓰레기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은 교부들로부터 쓰레기가 아니라 황금을 가지고 왔고, 그런 내용의 보화가 가득한 것을 소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개혁주의의 내용을 접하는 것으로만 그것이 곧 신앙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를 들어도 개혁주의의 내용으로 살지 않는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전 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기까지 우리는 쉼 없이 주의 뜻만을 고집하며 그 뜻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열매 없다는 것 때문에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들의 길이 아니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그 말씀의 열매를 맺는 자리까지 우리는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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