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4장 15-28절
택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리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성전 파괴가 곧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묻기를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속이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것인데, 특별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고, 기근과 지진 또한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종말을 알리는 것보다는 재난의 시작일 뿐이라고 하시면서, 무엇이 진정한 종말이냐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는 그때, 다시 말해 영원 전에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자들이 있는데, 그 수의 마지막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때가 세상의 종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흔히 종말이라고 하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전쟁과 기근과 지진 등 어떤 현상에 초점을 두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많이 일어나거나 기근과 지진 등이 많을 때 마치 종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정한 종말은 언제냐? 어떤 특정한 시기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택자의 마지막 수가 몸 된 교회 안으로 들어와 한 지체가 되는 그때, 그래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될 때, 그때가 바로 종말의 때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15절 이하로 이어지고 있는데, 우선 15절 이하 20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여기 보면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내용을 인용하시는데, 이 내용과 관련된 부분이 세 구절이나 됩니다. 다니엘 9장 27절과 11장 31절 그리고 12장 11절입니다. 칼빈의 경우는 다니엘 12장을 인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다니엘 9장 혹은 11장을 인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의 해석을 보면 대부분 9장 그리고 11장을 인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다니엘서의 내용은 놔두더라도 오늘 본문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고 할 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20절입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누가복음에 근거하자면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멸망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자들, 즉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어떤 군대를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어떤 군대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치게 되는 사건을 말합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 살폈던 본문에 대하여 가깝게는 성전 파괴 혹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내용이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성에 대하여 매튜 풀 주석이나 매튜 헨리 주석 등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로마 군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인용하고 있는 다니엘서의 예언에 대해서는 로마 군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 주전 168(7?)년, 셀류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모독한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안티오쿠스 4세는 헬라화 정책을 추진하다가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세력을 짓밟기 위해서 성전 안에 있는 번제단 위에 그리스의 제우스 신을 위한 작은 제단을 쌓았고, 그 위에 유대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바쳤다고 합니다(채영삼).
그러나 예언이 담겨 있는 말씀이 어떤 특정한 사건 하나만을 염두 해 두고서 기록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다니엘서를 통해서도 안티오쿠스 4세로 해석하는 바가 많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로마 군대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이 예언을 말하는 부분이 있지만 언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반드시 한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대해서도 어떤 역사적 사실을 대입하여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거기에만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곳 혹은 거룩한 자들이 가증한 자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여 마치 멸망하게 되는 것처럼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과 함께 설명하자면 교회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9). 미움만 받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어떤 일들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라고 하느냐? 15절 하반부에 보면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다시 말해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것입니다. 주의하여 들으라는 것이요, 듣고서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그 대상이 아니라, 귀가 있어서 들을 수 있는 자,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바로 그들이 읽고서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16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합니다. 도망하지 않으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왔을 때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증한 자들이 오는 것은 거룩한 자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신속히 그 자리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지를 넌지시 알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17절 지붕 위 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고 하며, 18절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합니다. 그만큼 이 재앙이 빨리 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날쌘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붕에 있는 자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 올만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붕에 있는 자가 집 안에 들어갔다고 다시금 올라온다고 할 때 그 시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조차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밭에 있는 자가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는 말씀도 동일합니다. 일하기 위해서 겉옷을 벗어 놨다면 그것을 가져가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일이 갑작스레 일어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집 안으로 들어가는 즉시, 뒤로 돌아보는 즉시 재앙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것은 빨리 피해야 하는데, 아이를 밴 것으로 인하여, 그리고 젖 먹는 아이로 인하여 피하지 못하는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망해야 하는데 겨울이나 안식일이면 날씨 때문에 그리고 안식일 규례로 인하여 도망하는 데 지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예수님께서 15절 이하 20절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환난의 때가 있다는 것이고, 그 때가 갑작스럽게 온다는 것이고, 또한 그만큼 두려운 날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피하라는 것입니다. 여유 있게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속히 오는 만큼 신속히 피하라는 것입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체함 없이 피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20절에서 이 일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혹은 어떤 날에 대해 변경할 수 있다는 측면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너무 어려우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표현으로 하자면 감당할 시험만 주시도록(고전10:13)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우리가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에 조금의 어려움도 감당하기 힘든 자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험이 올 때 넘어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요구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전적인 도움이 필요하지만 때로 성경은 동일한 내용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나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것 때문에 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극심한 고통의 때가 찾아올 때 피하라는 것이고, 피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피하는 자로 하여금 잘 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시험을 달라는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만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시면 이런 환난의 때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렇게 알리십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역사적인 이해를 따르자면 유대인들을 향한 가장 큰 박해의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있는가?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21장 22절입니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이 파괴가 되는 것은 유대인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말미암아 징벌을 받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7-38)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24절에서는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징벌로서 죽임을 당하고 잡혀가게 되는 일이 있는데, 언제까지냐?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라고까지 하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와서 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얼마나 극심한 환난인지 그 날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징벌의 날이지만 징벌의 날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멸하시는 것으로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달리 말하면 징벌의 날이지만 그 날은 구원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죄악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바로 그런 징벌을 통해서 죄악을 버리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 그 날들을 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20절에서 기도하라고 하실 때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그렇지, 마치 변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속성상 변화가 없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날들을 감해주시는 것처럼 말씀하신다고 할 때 실제로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1에서 10까지인데, 너무 어려우니까 1에서 7까지만 하겠다는 그런 식의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으로서 그의 뜻도 변화가 없습니다. 영원 전에 작정하셨다면 하나님은 작정하신 바대로 이루십니다. 작정했는데 작정하신 바를 변경하는 일은 없습니다. 작정하신 바대로 이루시되 언제나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달리 말하면 속성과 위배되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 날들을 감한다고 말하시는 만큼 하나님 편에서 일하시겠다는 겁니다. 좀 쉬운 설명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시겠다는 겁니다. 아무리 환난의 극심함이 심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 대해서만큼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예전에 TULIP(튜울립)이라고 해서 도르트의 결정된 내용을 설교한 적이 있지만, 성도의 견인이란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견인(堅忍)이라는 한자 자체는 인내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입해서 말씀드리면 환난이 있다고 할 때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내한다고 할 때 주체가 누구냐? 내가 인내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인내케 해 주셔야 합니다.
지금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신다는 것이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큰 환난이 있기 때문에, 그것도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또 이런 환난이 없을 정도의 큰 환난이 있기 때문에 도망하라, 피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도망하고 피해야 하겠지만, 피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해주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는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을 감해주시는 자들, 달리 말하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대로 실행이 될 것이지만, 환난이 있다고 할 때 그런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시는 자들,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비슷하게 언급한 바가 있지만 환난이 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시는 성격을 단지 죽지 않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환난을 통하여 죽을 수도 있습니다.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순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시는 성격은 어떤 것이냐? 환난 속에서도 참된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환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들은 없을지 모릅니다. 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모든 민족이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에 대하여 미워하는 것이 있지만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볼 때 물리적인 어떤 환난과 박해의 일들은 이전에 비해 분명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수는 환난의 때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그것을 분명히 말하는데(이하 정지수, 요한계시록 이해 참조),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천 년’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가지고 지상에 천년 왕국이 임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천년왕국설은 종교개혁자들뿐만 아니라 교부들에게도 정죄된 오래된 이단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한 예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천 년을 문자적인 실제 역사로 이해하면, 그것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천 년으로 제한하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이 유한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들의 복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나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3권 25장 5항).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천 년이란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 겪을 여러 곤란’을 말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천 년’은 실제적인 연대가 아니라 비유로서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창세로부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가 당하는 각종 어려움과 환난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천 년’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20장에 앞서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과 관련된 모든 것도 교회가 당할 환난과 재앙의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흔 두 달’(계11:2, 13:5)이라는 숫자나, ‘일천 이백 육십 일’(계11:3, 12:6),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2:14), ‘사흘 반’(계11:9), ‘삼일 반’(계11:11)과 같은 숫자 역시 천 년과 같은 맥락의 비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약 다니엘서에도 보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7:25, 12:7)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겪을 고난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6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칼빈은 이 말씀 가운데 ‘이틀’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다니엘 7장 25절과 비교하면서 주의 백성의 오랜 고통의 시간이라고 풀고 있습니다. 즉 다니엘이 그 백성의 고통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고 했는데, 이 때 한 때는 숫자적으로 1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 기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때는 숫자적으로 2년이 아니라 여러 때 혹은 많은 연수로 이해했으며, 반 때는 마지막이 다가오면 하나님께서 기간을 단축시키고 예기치 못할 때 구원하시는 시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의 이틀은 이런 측면에서 두 때에 해당한다고 했으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루(한 때)만 고통 중에 두시지 않고 오히려 점차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혹은 점진적인 징계를 통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이틀(두 때)을 보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이틀만 지나면 주께서 우리를 살리실 것이라는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시기 위해 제 삼일에는 일으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하여 알려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인생의 거울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졌을 때에도 즉각 살리지 않으시고 3일 동안 무덤 속에 있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연약해지도록 뜻하셨을 때에 우리는 설령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즉각 뻗어주시지 않고 잠시 구속의 은혜를 미루실지라도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본을 알고 구원의 소망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 어려울 수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천 년’ 그리고 ‘마흔 두 달’, ‘일천 이백 육십 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사흔 반’, ‘삼일 반’ 등은 다 같은 뜻을 나타내는데, 그것이 뭐냐?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에게 임했거나 임할 핍박과 고난의 내용들입니다. 다니엘서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세아서의 ‘이틀’이라는 말도 동일합니다. 즉 우리 인생의 모든 역사는 환난의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한 때와 같은 환난도 있을 수 있고 두 때와 같은 환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때보다는 더 극심한 환난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두 때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 때, 즉 이제 그 환난의 끝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소망을 두고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어떻게 소망을 가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있는 표현처럼 그 날들을 감해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이런 표현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12:14) 분명 고통의 날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통하여 양육을 받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사는 역사 속에서 양육을 받아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주 살펴본 본문을 통해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겠지만 끝이 아니며(마24:6), 하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끝까지 견디게 하시는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 날들을 감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본문으로 오시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이미 지난주에도 언급했던 부분입니다.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고, 그때 사람들이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할 것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무슨 일을 하면서 미혹하느냐?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면서 미혹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이런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자들이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해서 어떻게 진짜 그리스도임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런 일들을 통해서 누구를 미혹하고자 하느냐? 여러 사람들을 미혹하지만 그 가운데는 택하신 자들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말라, 주의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경고는 이미 신명기를 통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거기서는 이런 말씀도 덧붙여져 있습니다. 신명기 13장 1절에서 5절입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미래를 예언한다고 하는 사람이 실제로 미래를 예언하고 그대로 된다고 할 때 사람들은 거기에 미혹되기 쉽습니다. 자신의 미래는 하나님 외에 누구도 알 수 없는데 알려주니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들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험하시는데, 너희가 과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경외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이런 일들도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결과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다시 말해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아가야 할 길은 말씀이 명하는 길입니다. 주의 뜻에만 순종하는 길입니다. 그런 길을 가다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순교를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환난을 좋아하겠습니까? 이적과 기적이 있어서 그런 모든 것을 한방에 뛰어 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몸이 아프면 기적의 방식으로 낳았으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요, 물질이 없어 고생하고 있으면 하늘에서 돈벼락이라도 맞았으면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일하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하실 수 있지만, 주로 그렇게 일하지 않더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서 요한계시록 12장의 말씀으로 하자면 양육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가운데서 수고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는 말씀과 관련해서 실제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미혹을 받을 수 있는가? 이중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잠시 잠깐은 미혹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혹되어 최종적인 자리에까지 가는 그런 미혹을 받느냐 하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는 분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만큼 주의해야 할 것을 알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조차 미혹할 것이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이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25절의 말씀도 하고 계시는 겁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미리 말하였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요, 더욱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이 있는데도 깨어 있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넘어지는 일이 있다면 결국 너희 스스로가 넘어지는 자로 있을 뿐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너희가 나태하다는 것을 알리실 수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내가 보호하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성도는 결코 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 넘어지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어라. 준비하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준비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나태하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만드는 요인인 것입니다. 하나님 탓이 아니라 넘어지는 것은 우리 탓인 겁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26절 이하 2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혹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해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고 해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자가 임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임하느냐?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갑작스럽고 돌발적이란 겁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러나 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자신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순식간에 오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오시면 마치 주검, 시체라는 말인데, 죽은 시체가 있을 때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참된 그리스도가 오시면 실제로 성도들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않아도 그렇게 모여들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 성도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머리가 계신 곳에 몸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 때 일어날 일이지만 사실 지금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있어야 할 일입니다. 머리가 계신 곳에 몸이 있지 못하다면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금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몸도 하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이 있는 곳에 우리의 기쁨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밝혀놓은 이 말씀에 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주님께서 언제 어떻게 오실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한 때에, 갑작스럽게 오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처럼 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택자가 구원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을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준비하라. 오늘 본문에서 도망하라, 피하라는 말도 이런 측면에서 준비하라는 말씀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준비하라는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 그리고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만큼 급박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두에 말씀을 드렸지만 종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현상에 있지 않습니다. 과거보다 종말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더욱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더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택자의 수가 차기까지는 결코 종말이 올 수 없습니다. 바로 그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엇까지 말씀하시느냐?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실제로 날수가 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더러 피하라, 도망하라고 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 거짓 그리스도들이 일어나 택하신 자들조차 미혹하는 일이 있겠지만, 마치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겠지만 이런 하나님의 보호는 결코 그들에게 완전히 내어준 바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감사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러나 우리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런 일들이 있다고 할 때 더더욱 근시하고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후 말씀을 통해서도 언급하지만 무엇보다 열매 없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되고, 주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로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나타내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