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4장 18-22절[눅5:1-11]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늘은 마태복음 4장과 함께 누가복음 5장에 있는 내용을 같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7절 말씀을 보시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앞서 외쳤던 복음의 내용을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전파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세례 요한의 경우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전파했다면, 예수님의 경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이방 땅에서부터 복음을 전파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다른 장소에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단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방 땅까지를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오신 것이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하는데, 자기 백성 된 자가 누구냐 했을 때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자, 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말씀처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데(요1:12),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1:13),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방인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확인되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바로 그 일을 위하여, 다시 말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누구를 부르시느냐 하면 특별한 의미에서의 제자들을 부르고 계신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신 것은 여느 제자들과 달리 사도직과 관련하여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로서의 제자가 아닌, 열 두 사도로 제한된 의미에서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열 두 사도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통해서 분명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열 두 사도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열 두 명 가운데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네 명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왜 하필 열 두 명인가? 이것은 어느 정도 구약과의 연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통상적으로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 열 두 지파로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정확하게는 레위 지파까지 열 세 지파이지만,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로서 열 두 지파를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으로 넘어와 사도의 경우도 열 둘입니다. 나중에 가룟 유다가 제외되면서 맛디아가 뽑히게 되고, 또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뽑은 것은 아니지만 주께서 직접 부르신 바울을 포함하면 신약 시대에도 열 세 사도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로서 성경은 열 둘로서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구약의 열 두 지파(계21:12)와 신약의 열 두 사도(계21:14)라는 말이 나오고, 또 때로는 ‘이십 사 장로’라는 말도 나오는데(계4:4,10, 5:8, 11:16, 19:4) 이것 역시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숫자로서 언급이 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최근 들어 한참 문제시 되고 있는 ‘십사만 사천’에 대한 표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숫자일 뿐입니다(계7:4, 14:1,3). 구약의 대표로서 12와 신약의 대표로서 12를 곱하고, 또 거기에 많다는 의미에서 1,000을 곱한 것이 ‘십사만 사천’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열 두 명의 사도를 세우고자 하심으로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고자 하시는 것이고, 또한 그 사도들을 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시기 때문에(행1:8)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가르쳐 지키도록 명하시기 때문에(마28:20) 어떤 면에서는 사도라는 직분이 교회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직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중요성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에서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20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본래 교회의 유일한 터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서에서는 누구를 터라고 말하느냐? 사도들과 선지자들입니다.
그럼 그리스도라는 터가 있고, 사도와 선지자라는 터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에베소서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그분만이 터이십니다. 그러나 사도와 선지자들을 터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와 동일한 가르침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으로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완벽할 수 없고 또한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데 있어서는 결코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도들을 세워 가르치게 하셨던 것이고, 나아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주실 목적으로 세운 직분이 바로 사도직인 겁니다.
따라서 사도직이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서 비상시대, 즉 교회의 기초가 성립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세운 직분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역으로 교회의 기초가 세워지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사도라는 직분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도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경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런 사도직이 있는가 했을 때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과 12절에 보면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기 위하여 사도와 선지자 및 복음 전하는 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외에 선지자,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는 다 비상시대의 직분입니다. 한시적이요, 한시적이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가 세워진 지금에서는 더 이상 없는 직분인 겁니다.
그럼 오늘날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그것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해 누구를 세우셨는가? 목사와 목사로서의 교사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목사가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사도권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 결단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목사를 사도권을 계승한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또 가톨릭의 경우 교황을 사도권의 계승자로 보기도 하는데, 매우 주의해야 될 내용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사도직이란 교회의 기초를 위해서 한시적으로, 그리고 제한적으로 있게 한 직분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뭐냐? 지금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특별히 열 두 사도를 불러 세우려고 하시는 것 역시 교회를 위함이요, 또한 성도를 위함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앞서 우리가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신 내용도 살폈지만 그때도 무엇을 위해서 시험을 받으셨는가? 자기 백성들을 위함이요, 교회를 위함이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보가 다 무엇을 위함이냐? 자기 백성들을 위함이요, 그의 교회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사역을 시작하시고, 또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실 때 오늘 본문에서는 네 명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인데, 특히 안드레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마치 예수님의 수제자(?)로 생각될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그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사람 자체를 너무 주목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사람에게 어떤 초점을 두고 주목하도록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보다는 그들의 직업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이들을 부르셔서 세우고자 하는 것은 오늘 말씀에도 나와 있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초점을 두고자 하시는가 하면 무엇을 낚는다는 데 초점을 두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어부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들 네 명을 부르셨는가? 그들이 특별해서인가? 아니면 그들이 다른 사도들보다 좀 더 특출할 것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들의 사역의 성격을 드러내고자 함이요, 그런 의미에서 이전에는 고기를 낚는 어부였다면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을 알리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18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그리고는 그들을 부르십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시면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21절과 22절을 보시면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아무런 계산도 없이 곧바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금 돌아오겠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는 내용을 누가복음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복음으로 가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누가복음 5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이 나 있었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전후 맥락을 볼 때 시간적인 순서가 마태복음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부터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과, 또한 기적의 역사도 펼치셨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여기 1절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의 기적 때문에 몰려왔다는 것을 누가복음 4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권위 있는 말씀으로 들려졌고, 또한 육체적인 질병이나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요한복음 6장을 기억한다면 저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다는 사실은 단지 그분의 말씀 때문만 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는 일이 있었지만 하나 같이 다 지상왕국을 꿈꾸는 자로서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의 임금으로 삼고자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요6:15). 문제는 무리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 두 제자 역시 이런 시각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즉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리고 특별히 제자들을 40일 동안 가르치신 후에도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사도행전 1장 6절 말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제한된 나라에 그들의 모든 초점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인 것이고, 그런 나라는 결코 지상 왕국과 동떨어져 있는 그런 나라로서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적지 않은 무리가 몰려왔다는 것은 단지 천국 복음을 듣기 위해서만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초점이 되고 있느냐? 기적의 역사가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천국 복음을 듣는 일이 분명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 말씀에서 권위가 있다는 것도 안다 할 수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 지상에 초점을 둔 그런 모습으로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붙잡아서 어떻게 하고자 하느냐? 이 땅의 임금을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누가복음 4장 43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보내심을 받은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복음이요, 하늘나라의 복음인 것입니다. 결코 지상왕국을 위한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 마음속에 있는 욕구를 다 해결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그것을 행하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말씀에 대한 가르침부터 시작하시는데, 3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물론 가르침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분명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한 배에 오르시는데, 그 배가 누구의 배냐 하면 시몬 베드로의 배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가르쳤다고 할 때 베드로 역시 그 말씀을 들은 자로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절을 보시면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사실 베드로는 이미 모든 일을 마치고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들어갈 준비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수고를 한 상태인 것입니다. 5절에서 밤이 새도록 수고했다는 표현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수고와는 상관없이 소위 세상적인 말로 하자면 일진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탕만 친 것입니다. 그런 그의 배에 올라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 자체도 어떤 면에서는 당황스러울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말씀을 마치시고는 어부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 어부의 일에 간섭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일반적으로라면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5절에 보시면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지금 베드로의 경우 무리들이 예수님께 보인 관심을 보았고, 또한 이미 그 소문에 대해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에 타셔서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했을 때 그대로 행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존경심을 가졌을 수도 있고, 또한 “이분은 과연 어떤 분인가?”하는 그런 마음도 가졌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예수님 곁에서 들은 자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자기 배에 올라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부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뭔가 그 마음에 말씀에 대한 권위를 분명 느꼈던 것 같습니다. 본래 물고기를 잡는 지식적인 면에서는 베드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은...” 즉 베드로 입장에서는 더 이상 수고해도 경험상으로 볼 때 헛된 수고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가능성이 아니라 어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거의 확신에 찬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권위가 그런 그의 마음을 낮추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뭐냐?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비록 힘은 들지만, 어쩌면 또 다시 헛수고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권위 있는 그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순종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베드로의 순종 이면에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가르치고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말씀대로 행하겠다고 말할 수도 또한 그렇게 행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오랜 세월 동안 어부의 일을 한 사람입니다. 어부로서 많은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부의 일과는 무관한 분이십니다. 베드로가 존경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또한 뭔가 심상치 않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선생님’으로 부를 뿐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으로서는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존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요 또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의 결과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범상치 않았지만 그리고 그 소문에 대한 베드로의 관심도 분명 있었을 것이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로 하여금 순종케 하는 역사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간략한 그 기록을 통해 마치 베드로의 결단, 혹은 안드레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결단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또한 끌어올리고자 하는 바와는 멀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대할 때 우리는 이런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지난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즉 지금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이 명백한 주체로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시고,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을 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시면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어떻게 보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오랜 세월 어부로서 일했지만,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은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앞서 베드로가 말한 의미 안에서 보자면 이 시간에는 더 이상 그물을 내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물을 씻고 돌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한 배도 아니고, 다른 배가 와서 도와주면서 두 배에 가득 찼다는 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냐?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건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기적 사건은 분명 목적하는 바가 있고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도 목적하는 바가 있고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뭔가? 적어도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신성을 베드로와 및 거기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시고자 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칼빈). 특별히 베드로를 비롯하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4명의 제자를 부르시는데, 바로 그런 부름에 응답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고 또한 예수님 곁에 머물게 하고자 하는 목적,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케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을 보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8절 이하 10절 상반부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먼저 베드로의 경우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리게 됩니다. 왜 엎드렸는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즉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베드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앞에 계신 분이 자신보다는 훨씬 깨끗하신 분, 아니 자기 앞에 계신 분은 전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어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신성이 비춰진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사야 6장 5절에 보면 이사야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소명을 주실 때 실체로서는 아니지만 그 영광의 광채를 어느 정도 비춰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광채 앞에서 이사야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어떤 심각한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서면, 그것도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의 죄악 됨을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인이라는 고백, 죄인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실 때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느냐 하면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9절만 읽어드리면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서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지금 베드로가 바로 그런 경험을 하였던 겁니다. 비록 인성을 입고 오셨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던 것이고, 그런 경험은 단지 기적 가운데 하나로만 여겨졌던 것이 아니라 작으나마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신하게 되는 그런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느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럼 베드로만 그런 경험을 한 것인가? 9절에 보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은 단순히 놀랐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 단어로 하자면 마비가 될 정도로 놀라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 놀랐다는 말을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내용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해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뭔가 두려움 혹은 경외심 이런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 앞에 자신의 미약함을 느끼게 되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하반부와 1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분의 신성 앞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 모든 두려움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특수한 직분으로서 부르시는데, 마태복음에서 살핀 것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으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여기 보면 ‘그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처럼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이렇게 해서 부르신 겁니다.
앞서도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본문, 특히 마태복음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떤 결단력에 대한 강조를 두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명의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으로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욱 더 기억해야 되는 사실은 지금 이 일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들 스스로가 결정해서 주님을 따른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이 계신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병폐 가운데 한 가지는 주체를 의식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본문에 대해서도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만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지금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보이신 사건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경우 세상적인 말로 일진이 좋지 않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 놀라운 일을 경험했을 때 그가 자신에 대하여 죄인으로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임 됨을 고백했다는 것은 베드로 앞에 있는 예수님이 자신의 죄임 됨을 드러낼 정도로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인데, 물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잡은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도 납득하기가 쉽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물고기 많이 잡은 것과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실제로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오병이어 사건을 이것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여자들 포함 그리고 아이들 포함하자면 오천 명이 아니라 만 명도 넘는다 할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하셨느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그런데 이후 말씀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았는가? 그렇지 못 했습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먹고 배 부른 까닭에 주님을 따르고, 또 세상 임금 삼기 위해서 주님을 따라다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죄인 됨을 깨닫느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그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예수님 자신에 대한 정당한 인식, 그리고 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그런 역사가 선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따르게 되고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자신의 죄인 됨, 즉 자신의 부패함, 자신의 무능함을 반드시 고백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역사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마태복음으로 오시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19절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주체가 누구냐? 따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순종의 주체가 베드로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스로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하게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과도 같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이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힘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렇게 될 것이고, 또한 성령이 임할 때 증인이 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수동형인 것입니다. 때문에 순종을 요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주체는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고, 분리하지 않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주체이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도들을 세워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고 할 때 여전히 그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 복음을 듣게 되고 또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복음을 전한 그가 실제적인 주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나 역시 실제적인 주체는 아닌 것입니다. 누가 주체냐? 하나님이십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의 경우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실 때 그들로 하여금 어떤 일도 있게 하시느냐 하면 생계를 위한 일까지도 포기하도록 하십니다. 심지어 부친까지도 버려두도록 하시는 일도 있습니다. 그들의 결단력 이전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여전히 앞선다는 것을 이런 부분에서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들로 하여금 자기 일도 버리고, 또 부친까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하시는가? 자기들의 모든 관심사를 끊고 주께서 임명하신 바로 그 일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칼빈). 그만큼 사도들에게 주어진 그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씀 때문에 주를 따른다고 할 때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것들을 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위해 살아도 좋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우리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때로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어떤 것에 대해서는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나님이냐? 아니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냐? 하나님 때문에 버릴 수 있는 그런 자세가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유익한 것조차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 그런 신앙이 있도록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하는가? 바로 주님 때문에 그러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의 직분으로서 열 두 명 가운데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왜 부르시는가? 복음 전파를 위해서요,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일의 주체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 앞에서 순종한 그들 자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주체이십니다. 이 부분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의해서입니다.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고,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이고, 결국에는 영화롭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명하신다고 해서 명령을 받는 자가 주체가 아니라, 명하시는 그분이 친히 이루시는 주체로 계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