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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0708설교 / 마태복음24장37-51절 / 이러므로너희도준비하고있으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8.07.08|조회수1,00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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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37-51

이르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화가 있다, 저주가 있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죄악이 심각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악 된 상태는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역사 속에서 항상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안을 세세히 보자면 회개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가? 돌이키지 않는 역사로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23:37) 이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 성전의 파괴를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23:38) 마태복음 24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은 주께서 임하시는 때와 세상 끝에 있을 징조에 대하여 질문하였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지난주까지 살핀 마태복음 24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단지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마지막 때, 실제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어떤 일들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마지막 때 일어날 현상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모든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현상들은 항상 있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어떤 현상 자체만을 주목하여 종말을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런 현상들이 있을 때, 예를 들어 전쟁이 있고, 기근이 있고, 지진이 있을 때, 심지어 거짓 선지자들,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 믿는 자들을 미혹하려고 할 때,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환난이라고 할 만한 일들이 일어날 때 너희는 끝까지 견디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는 견딜 수 있는 자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무엇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하는가? 주께서 재림하실 때 주의 백성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기 때문에 주의 오심을 고대하며 소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맥락 속에서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되고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과 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있지만, 그 날과 그 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마지막 수가 다 차는 그때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무엇이냐?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있고, 기근이 있고, 지진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미혹하는 일이 있고, 환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잃어버리시는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의 백성들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느냐? 아무런 준비 없이, 나태하게 살아도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주의 백성들은 깨어서 준비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과 이후 보게 될 본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여러분, 노아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홍수 심판을 맞이한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셨는가? 창세기 6 5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5-7) 한 마디로 사람의 죄악이 극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사람의 죄악이 극에 달하지 않은 때가 있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3:10-12).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도 예외 없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무능력할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 자로 있을 뿐입니다(3:13-15).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는 언제든지 그분의 공의를 드러내셔도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언제든지 심판하셔도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계시는 것은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9:22). 그리고 우리가 살핀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내용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불러 모으시되, 창세로부터 마지막 때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불러 모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하나님의 공의를 보이기도 하시는데, 노아 시대 때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심판을 행사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 대상이 당시로는 노아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노아의 예를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임하실 때도 노아의 때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38절과 39절입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얼핏 보면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이러한 내용들은 소위 일상생활로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죄냐? 그렇지 않습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죄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먹고 마시는 것이 죄요,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죄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금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위해 먹고 마실 것을, 그리고 인류 보존을 위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혼자 살아가도록 한 것이 아니라 가정을 이루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먹고 마신다고, 장가들고 시집간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 이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베드로후서 2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2:5) 창세기를 통해 증거 하듯이 분명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습니다(6:5).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의를 증거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홍수 심판 전에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방주를 짓게 하셨다는 것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를 전파했다는 것은 그들의 죄악을 분명히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말했으며, 하나님이 심판이 임박했으니 회개하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방주를 예비하셨다는 것도 알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 사람들의 자세는 어떠했는가? 의를 전하는 노아에 대해서, 그리고 노아가 짓고 있는 방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일상적인 일에만 몰두할 뿐이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늘에 대한 관심은 없고 땅에 대한 관심만 가질 뿐이었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본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육욕적이었고, 세속적이었다... 그들은 노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세상에 도취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였으며, 이것이 그들을 멸망케 하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 일에 있어서 무분별하였으며, 육욕적인 즐거움과 세상의 유익을 좇아 지나치게 몰두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마치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것처럼 이러한 것들을 자신들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에 무분별하였는데, 그들은 분명히 경고를 받았던 그 멸망의 문 앞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육신에만 몰두하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회개하고 기도해야만 할 때, 그들은 먹고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통곡하고 애곡할 것을 촉구했지만, 그들은 쾌락을 즐겼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고를 무시하였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노아의 때 외에도 롯의 때에 대한 예도 말씀하고 있는데, 내용 자체는 다르지 않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볼 부분이 있어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7 2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17:26-33) 26절과 27절은 오늘 본문과 같습니다. 28절과 29절의 경우는 롯의 때를 예로 들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다르지 않습니다. 롯의 때에도 보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일상적인 일을 합니다. 그러나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은 그들의 죄악에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8 20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19으로 넘어가면 어떤 일까지 있느냐? 롯의 집으로 들어간 천사들, 그러나 그 지역 사람들은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롯의 집 주위에 모여 들어서 롯 집에 들어간 사람을 내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집에 손님이 오셨는데, 근방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집에 온 손님을 내 놓으라고, 그것도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 내 놓으라고 요구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지역은 이런 일까지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거기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아이까지 있었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누가복음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다고 할 때 단순히 일상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한 것은 분명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일상생활을 하지만 그들의 모든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갔던 삶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의와는 상관없는 삶이었던 겁니다. 오로지 이 세상의 쾌락을 쫓아 사는 삶, 하늘에 대한 소망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삶, 이것이 저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롯의 때와 관련해 말씀하신 후에 우리가 지지난주에 살폈던 내용을 말씀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31절을 다시 보시면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그리고 32절에서 롯의 아내의 예를 듭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여러분, 롯의 아내가 어떤 일을 당했습니까? 창세기 1924절부터 읽어 드리면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19:24-26) 지난번에 지붕에서 집 안으로 무엇을 가지러 가지 말라고 말씀을 드릴 때 재앙이 급하게 오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을 가지러 간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었는가? 뒤로 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뒤로 돌아보았다는 것은 지금 진노가 임하고 있는 그곳에 남겨 둔 것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명령이 있지만, 그리고 그 명령은 생명을 위한 것이지만, 거기에 마음을 쏟기보다는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쏟고 있기 때문에 뒤로 돌아보는 것이고, 롯의 아내의 경우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집 안에 물건을 가지러 가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고, 밭에 있는 자가 뒤로 돌아보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을 쏟아야 할 곳은 세상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 일에 몰두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 자신의 영적인 삶을 돌아보지 않는 그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로지 땅에 대한 관심만 가득한 것에 문제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다는 것은 주님께서 오실 때도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민감함으로 영적인 것들에 대한 무감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징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선지자를 통하여 그 시대를 향한 외침이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산 위에 방주를 지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방주를 왜 산 위에 짓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했지만 코웃음 쳤을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외칠 때 사람들의 반응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아니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까울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감각한지 모릅니다. 자기 안에 영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아니 죽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온통 육신의 생각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온통 이런 생각 뿐입니다. 특히 요즘 성형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오지만 영혼보다 자신의 육신을 더 가꾸는 것은 그만큼 영혼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낸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39절에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얼마나 세상에 빠져 살았는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면 홍수가 나고 있는 가운데서도 설마 이것으로 모든 인류가 다 죽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런 경고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때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와 같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와 같았던 겁니다.

분명한 것은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다고 할 때 하나님 편에서는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말씀하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심판의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실 것이고, 심판의 때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고 속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 땅에 머물 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영혼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로지 자기 육체에만 관심이 있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만 모든 관심을 쏟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위하여 재림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40절과 41절을 보시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한편으로는 심판을 위하여 재림하시지만,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들도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럼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가? 이후 내용을 통해 보자면 깨어 있는 자입니다. 준비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지만 인간 스스로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그 날들을 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감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버려둠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데려감을 당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첫 번째 비유인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깨어 있을 수 있느냐? 준비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깨어 있게 하시고, 준비하게 하십니다. 지금 이 말씀을 주고 계시는 것도 바로 그런 측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이유가 뭐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태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나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너희도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켜 한다는 것입니다(4:2).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42절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누가복음 21에 보시면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는데, 34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21:34-36) 그러니까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데살로니가전서 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절 이하를 보겠는데, 약간 길지만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시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5:1-2) 마태복음 24장의 경우 때와 시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제자들이 질문을 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더 이상 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 너희가 자세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만, 일단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5:3-6) 분명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르지만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에게는 도둑 같이 임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느냐? 쉽게 말하면 너희는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기 때문에 깨어 있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깨어 정신을 차리라는 권면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7-18)

결국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한 마디로 열매 있는 자가 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동일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영혼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할 때 항상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하되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항상 선을 따르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쪽에서 볼 때 좀 좋으면 그렇게 하는데, 반대로 내 쪽에서 볼 때 좋지 않으면 멈춰버리는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항상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43절에서 도둑에 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도둑이 몇 시 몇 분에 가서 도둑질할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집 주인은 결코 잠을 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법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시금 재림하실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날과 그 때에 대해서 알려주신 바가 없습니다. 마지막 때 일어날 징조를 말씀하셨지만 그런 일들은 항상 있어 왔던 일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느냐?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있는 말씀처럼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입니다. 때문에 잠들 수 없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 하고, 사랑에 사랑을 더해야 하며, 구원의 소망을 날마다 커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것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왜 죽으셨는가? 우리를 그 안에서 함께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은 자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살아났다면 산 자로서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것이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귀히 여기며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가 있다면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이 있다면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은 옆에서 붙들어주면서 주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항상 선을 따르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깨어 있는 것이요, 이것이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내용으로서 자신을 살펴보면 준비하고 있습니까?

 

45절 이하 47절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누가복음 12장에서 동일한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12:41) 문맥을 따라 볼 때 일차적으로 복음의 일꾼에게 하신 말씀이 분명하지만 모든 사람 역시 제외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일꾼들이 깨어 있어 주의 뜻을 전한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 역시 동일한 길을 걸아가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경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들로부터 배우는 이스라엘도 동일한 길을 걸어갔던 겁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지금 깨어 있으라,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조금 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48절 이하 51절도 보시면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이 부분 역시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조금 더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 주님께서는 깨어 있으라,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충성된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더디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방탕한 삶을 살게 된다면 갑작스레 주님께서 오실 때 진노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 할지라도 게으르면 버리겠다는 뜻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면 결코 게으를 수 없다는 것을 알리시는 말씀입니다. 충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런 충성으로서 마지막 때 있을 심판의 때,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원의 날이기 때문에 그 구원을 고대하면서 준비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너희의 마땅한 바가 이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입니다. 죽어서 잠자는 자들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자로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육신의 잠도 자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쉼 없이 기도를 계속해서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 주님만을 의지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도 동일합니다. 육신의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아니 자야 합니다. 잠을 자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주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삶, 그리고 그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사는 삶, 이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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