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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0909설교 / 마태복음26장20-30절 / 받아먹으라너희가다이것을마시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8.09.09|조회수54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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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20-30

받아 먹으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태복음 26장으로 들어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다시금 알리셨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팔리게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가 바로 가룟 유다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그가 예수를 팔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근원적으로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작정으로 말미암아 진행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게 되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열쇠를 쥐고 계시는 분으로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하여 지으시고 그렇게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게 된 것도 살폈지만 악인만이 아니라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위해서 악인도 사용하시고 사탄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그렇게 사용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죄의 저자나 죄의 승인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으로, 그리고 죄의 승인자가 아닌 방식으로 스스로 타락한 사탄이나 스스로 타락한 악인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을 사용하시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목적과는 달리 선한 목적만을 위해서 그들조차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더불어 우리는 지난 시간에 무교절 첫날 저녁이 되기 전 유월절 의식을 행하시기 위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준비하도록 하시는 내용도 살펴보았는데, 마태복음 상에서는 제자들이 먼저 준비하려는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준비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명하심에 따라 제자들이 준비하였고 그 날 저녁 유월절을 지키게 되는데, 일단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누가복음에 있는 내용을 먼저 확인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과 성찬에 대한 중요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 14절 이하 17입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여기 보면 때가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고난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지금까지 계속해서 알리고 계시는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다시 말해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유월절 식사를 함께 하시길 원하셨는가? 곧바로 말씀하시는 것이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할 것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기 원하셨는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는 유월절 식사를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의식법의 폐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지켜오던 유월절 예식이 이제는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될 것으로 있다는 것을 알리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내다보도록 하는 모형이요, 그림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자가 아닌 실체로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처럼 그분도 죽으실 것인데, 그림자로서 예표 하던 방식이 이제 실체로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림자는 필요치 않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기도 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유월절 예식을 행하고자 하셨던 것은 이 유월절이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의 경우는 이 말씀에서 곧바로 성찬과 관련된 말씀으로 넘어가는데, 유월절 예식의 폐지와 더불어 동일한 뜻이 성찬을 통해 성례로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알리시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유월절이나 성찬이나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으로 있습니다. 다만 유월절을 지키시지만 그것은 마지막으로 지키는 것으로 있고, 이제 이후로는 성찬을 통하여 동일한 내용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떡과 포도주를 통해 가르치고 알리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물론 유월절이나 성찬의 궁극적인 완성은 하나님 나라에서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형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진정한 유월절의 시작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구약의 모형은 폐지하지만 신약의 성례를 통해서는 그 뜻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으로 오시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준비하라고 하시고 난 뒤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물 쯤 모여서 유월절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시면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이미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누군가가 나를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17:22, 20:18). 그리고 어쩌면 이때 제자들 마음속에는 우리들 안에 그런 자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승인 예수님께 충성스러운 자들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결코 주를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합니다. 35절에 보시면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누가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까?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경험되기 전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굉장히 높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열두 제자와 함께 앉아 먹을 때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열두을 세워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 곁을 지켰던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님을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22절을 보시면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여기서 몹시 근심하였다는 것은 두려움에 근거를 둔 것보다는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의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칼빈은 이렇게 주석합니다. “나는 제자들이 마치 공포에 시달리는 가운데 이유 없이 초조해 하는 사람들처럼 두려워한 것이 아니고 그런 죄악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인 만큼 그러한 혐의를 아예 벗으려고 애썼던 것으로 보고 싶다.”

사실 누군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배반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들은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만약 누군가 예수님을 팔게 되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가 큰가로 다투던 것도 헛된 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 가운데 누군가 배신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다소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자신은 그런 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증명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대한 부분에서 마가복음은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14:19)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아마도 한명씩 나는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런 답변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23절을 보시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여기서 그릇은 그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도중이기 때문에 그 앞에 놓인 어떤 그릇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 곧바로 가룟 유다의 손이 예수님께서 넣으셨던 그릇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노골적으로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 보면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이런 내용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 21절 이하 30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여기 보면 제자 중에 나를 파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 서로가 의심하였다는 것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더욱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같은 내용을 말하지만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기록이 다르다고 할 때, 아마도 오늘 본문에서처럼 말씀하시고 난 뒤 가룟 유다를 향하여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시면서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도 말씀하셨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노골적으로 가룟 유다가 배신자임을 드러내고 계시는 겁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셨고, 또한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시면서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바로 그라고 말씀하시면서 노골적으로 가룟 유다가 배신자임을 드러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가룟 유다를 지적하고 계시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실 때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는 줄로 생각하거나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시는 줄로 알았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편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런 사실을 다른 제자들에게는 숨기는 방식으로 이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만약 다른 제자들이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알았다면 그를 가만 두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방식에 있어서 때로는 이렇게 분명히 알리시는 그 자리에서도 마치 듣지 못하는 자로 있을 수 있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을 수 있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 스스로는 자신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떡을 주실 때 가룟 유다의 마음 가운데는 사탄이 들어가게 되고, 여기서 나가 곧바로 대제사장들에게로 가서 예수를 넘겨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이런 가룟 유다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24절을 보시면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이 내용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게 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되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부터 기록된 내용으로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는 것으로 말씀하시는데(22:22)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따라 실행되는 역사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우연의 일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탄도, 가룟 유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두고 볼 때 그 일을 위하여 수단으로 사용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누구는 선택하기로 하셨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셨을 때 처음 창조하신 상태는 결코 죄와 관련 있지 않도록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까지 작정하셨는데, 바로 타락한 자들 가운데 일부, 다시 말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저들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택자들의 죄를 짊어지도록 정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없이는 어느 누구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도록 하셨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서 지금 그 걸음을 걸어가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다고 해서 유다의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 우리를 위한 구속의 대가를 다름 아닌 하나님이 아들의 죽음으로 못 박으셨지만 유다로서는, 배신과 탐욕으로 가득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배반함으로써 정당한 저주를 자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인자는 기록된 대로, 혹은 작정된 대로 가지만 그를 파는 가룟 유다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의 죄책을 면할 수는 없다는 점을분명히 하고 있는 겁니다(칼빈). 바로 그런 뜻에서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향하여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가룟 유다 역시 자신이 주님을 팔 자인지 묻습니다. 25절을 보시면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앞서 살핀 요한복음 13장과 비교해 보자면 분명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결국에는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도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말씀하시고, 또한 요한복음에 의하면 떡 한 조각을 주시면서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지만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에 사탄이 역사하여 더욱 강퍅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나갈 뿐입니다.
여러분, 옳은 말을 하고 있지만, 마치 우리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분명한 사실을 말하지만, 그런 사실 앞에 회개하는 심령보다는 더욱 강퍅해 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것이 사탄의 역사일 줄 알아야 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진실 앞에 회개할 줄 모르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유기자의 열매와는 달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열매는 결국에는 거기에만 있지 않고 회개하여 돌이키는 자들로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끝까지 강퍅해지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말씀하시고 난 뒤 소위 성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이때 가룟 유다가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이해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3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가룟 유다의 경우 떡 조각을 받아 먹고는 나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가룟 유다가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성찬 참여와 관련해서 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여러분, 성찬은 세례와는 달리 믿음이 확인되지 않고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세례 때도 믿음의 확인이 있어야 하지만 유아들의 경우는 유아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 부모의 믿음을 보고서 세례를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당사자의 믿음은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천을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을 확인한다고 할 때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냐의 문제도 남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하여 참여하지만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결코 죄와 함께 먹고 마실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으로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 흘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성찬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7-29)

실제로 성찬과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는 유월절의 경우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과 관련해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43). 혹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의 경우는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을 말씀하십니다(44). 또한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5). 그러나 이스라엘과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유월절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 지킬 것을 말씀하시고, 또한 본토인도 동일하게 적용하도록 하십니다(48).

이런 측면에서 비록 가룟 유다의 경우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예수님 곁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믿음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성찬의 궁극적인 혜택은 결국 주께서 택한 백성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 가룟 유다의 경우 성찬에서 제외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혹 가룟 유다가 성찬에 참여하였을지라도 그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그리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 이상 성찬을 통해 주시는 유익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자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 26절 이하는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 이후 성찬을 행하시는데, 26절에 보시면 먼저 떡과 관련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여기서 떡은 당시로 하자면 무교병입니다. 누룩이 없는 떡입니다. 왜냐하면 무교절 첫날밤이었고,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은 7일 동안 무교절을 지키게 되는데 그때는 누룩을 넣지 않은 떡만 구워 먹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찬 때는 반드시 무교병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지키던 유월절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폐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교병을 먹었던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급히 나와야 했던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있는데, 지금 성찬을 베푸시는 것은 그런 구약의 예식을 그대로 본받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떡을 사용할 때 반드시 무교병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만 사용해야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실을 드러내셨을 것입니다.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은 감사 기도를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역시 잔에 대해서는 감사 기도를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축복하셨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표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감사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이 예식이 가지는 의미와 이 예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게 될 복에 대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비록 떡이지만 이 떡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라고 하시면서 주실 때 결국 그 모든 유익을 자기 백성들이 얻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성찬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참된 믿음으로 참여하게 하시고 또한 성찬에 참여함으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때만 해도 이루실 것으로 있는데, 바로 그 복을 주십사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지금 행하고 있는 이 예식은 일반적으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고 할 때와는 좀 더 구별된 의미를 가지는데, 디모데전서 45절 말씀에 근거하자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는 의미에서 구별시키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식사를 하기 전 기도하는 것이 있고 기도를 통하여 먹고 마시는 것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구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찬의 경우는 이런 일반적인 구별이라기보다는 좀 더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감사 기도한다고 할 때는 식사를 하기에 앞서 한번 하고 말지만, 예수님께서는 떡을 떼실 때도 잔을 나누실 때도 감사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 26절에 보면 그들이 먹을 때에라고 말하고 있는데, 식사를 하고 있는 도중에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구별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계속해서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에서 떼어라는 말은(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620 참조) 떡을 나눠 주시기 위해서 떼어 내신 것으로 하나의 떡을 가지고 나눠주시고자 떼어 내셨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먹는 주의 백성들 역시 여럿이지만 그들은 다 한 몸이라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떡을 떼셨다고 할 때, 그리고 그 떡이 의미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이 떼시는 행위를 통해 주님께서는 그의 고난을 상기시키고자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게 이해해야 할 내용으로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주먹과 손바닥으로 맞으셨습니다. 또한 채찍으로 맞기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는 가시관을 쓰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바로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렇게 많은 고초를 겪으셨던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당하신 목적이 있는데, 바로 그분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이 성찬을 통해 그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받아서 먹으라고 말씀하시는데, 떡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주시는 떡을 받는 자는 그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떡만이 아니라 떡을 통하여 교훈하고자 하시는 의미 또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고, 주님께서 주실 때 우리는 받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께서 주시는데도 받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유익도 없다는 것 또한 깊이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소위 불가항력적 은혜를 말하는 개혁주의가 주께서 주시는데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근원적으로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대상에게 자신이 주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계실 때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받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라 교훈적인 측면에서 외적으로 떡을 주신다고 할 때 그것을 받지 않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으로는 분명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주십니다. 목사를 통하여 말씀을 주고 있는데, 그 말씀을 듣는 당사자는 들려지는 말씀에 대하여 듣지 않는 자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 되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떡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표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떡으로 부르시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그것이 그의 몸의 표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떡에 대하여 마치 그리스도의 몸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화체설이 말하는 것처럼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든지, 아니면 공재설이 말하는 것처럼 떡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떡 어디에 있다든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튜 풀 주석의 내용을 조금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사제에 의해서 축성된 떡은 그 즉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고, 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은 이 살과 피를 먹는 것이라고 하는 화체설을 주장한다. 그들은 이렇게 성찬 때의 떡과 포도주를 성체로 모시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룰 때에 온갖 화려한 의식들을 동원하여 지극정성을 다한다. 루터파는 교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화체설을 터무니없다고 보면서도, 성례를 행하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참된 살과 피가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하여, 모든 참여자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라고 하는 공재설을 주장한다. 이 두 견해는 그리스도의 몸이 지금 인간의 진짜 몸이라는 터무니없는 전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진짜 몸은 우리의 지각에 종속되는 까닭에,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이나 루터파는 그러한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그 어떤 결론들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오직 우리 구주의 말씀이 아닌 축자적인 의미에만 매달린다.

 

이런 저들의 주장과는 달리 개혁파의 입장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합당하게만 받으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그의 복되신 죽으심과 수난의 모든 유익들에 진정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만, 칼빈은 성만찬 소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전에도 한번 인용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잘 들어보십시오. “주님의 상징들이 실재 또는 실체와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또 분리될 수도 없다... 두 가지가 혼동되지 않도록 구분하는 것은 선하고 합당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둘로 나누되 하나 없이 다른 하나만 존재하는 식의 분리는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떡을 통하여 그의 몸을, 잔 즉 포도주를 통하여 그의 피를 기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떡과 포도주는 실재 및 실체, 즉 그의 몸과 그의 피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칼빈은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가 아니라 실제로 임재하신다고 표현합니다. 다만 실제로 임재하신다고 해서 육신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임재하신다고 말합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시되 우리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찬과 관련해 자주 말씀드리지만 성찬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는 분명 신성과 인성이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는 전 그리스도가 임하십니다. 그러나 인성은 하늘에 계시며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이 땅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전 그리스도가 임하시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럼 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성찬을 통해 주고자 하시는가? 요한복음 648절 이하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6:48-51) 바로 자신의 몸을 주심으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놓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떡을 주시고 난 뒤 예수님께서는 잔도 주셨는데, 오늘 본문 27절과 28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잔에 대해서도 감사 기도를 하시고 난 뒤 그들에게 주시면서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시는데, 과거 가톨릭의 경우는 잔에 대해서 평신도들에게는 분배하기를 거부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떡의 경우는 모든 자들이 먹을 수 있지만 잔에 대해서는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잔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할 때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단 모든 사람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할 때 모든 자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잔, 그 안에 담긴 포도주가 의미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고 할 때, 피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것으로 있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922절에서도 그것을 말합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피는 죄 사함을 위해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언약의 피라고 하시는데, 언약이란 쉽게 말해서 내가 너희의 하나님의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은혜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겁니다. 특히 은혜언약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이 모든 일을 실행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때문에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에 앞서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는 이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알리고자 하는 사실은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구약의 어린 양처럼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고자 한다는 것과, 나아가 이 일에 있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뭔가 보탬이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들이냐?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신 일에 대하여 값없이, 거저 받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모든 공로를 우리는 받아 누리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소위 언약이라고 할 때 일방적이 아닌 쌍방이라고 해서 우리 편에서는 복음 앞에서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회개도, 믿음도 다 하나님께서 주셔야지 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일방적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든 것에 대하여 받아 누리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29절로 오시면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서두에서 누가복음 22장을 살펴 볼 때도 이런 말씀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얼마 있지 않으면 죽으실 것이고, 이후 부활하시고 난 뒤에는 승천하실 것이기 때문에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너희와는 더 이상 함께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구약의 그림자는 폐지되는 것으로 있다는 것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 30절에 보시면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고 말씀하는데, 성찬을 통하여 알리시고자 하시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송외에는 올려드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은 자로서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땅한 바는 이처럼 주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아는 것과, 그리고 아는 자로서 믿음으로 참여하고, 또한 주께서 주시는 은택을 받아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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