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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0517설교 / 마태복음5장1-12절 / 팔복서론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05.17|조회수94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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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2

팔복 서론

 

오늘부터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7장에 이르는 소위 산상수훈 또는 산상설교라고 하는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산상수훈, 산상설교라고 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 1절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고 되어 있어 이 전체를 산상수훈 혹은 산상설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다루는 누가복음에 보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말씀하신 것으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6:17). 또 마태복음에서는 한 묶음으로서 마치 산에서 이 모든 설교를 다 하신 것처럼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고 산발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 5, 6, 7장에 있는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는 6, 11, 13장 등 이런 식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의 경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물음을 가지고 접근하기도 하지만, 칼빈의 경우 두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복음서를 기록할 때 경건하고 성결한 생활 법칙과 관계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요점을 간단히 말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여러 다양한 기회에 말씀하신 내용을 한데 묶어 정리한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그것을 5, 6, 7장애 할애한 것이고, 누가복음의 경우 연속적으로 묶어놓은 것이 아니라 6, 11, 13장 등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 모든 내용이 다 산에서 행해진 설교인가? 또 평지에서 행해진 설교인가? 아니면 시간대가 어느 특정한 하루에 다 이루어진 설교인가?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장소는 다를 수 있지만 반복되는 내용이 없었을까? 이것도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쨌든 마태복음의 경우 마태가 기록할 때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말함으로 인해 마태복음 5, 6, 7장을 산상수훈 혹은 산상설교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쳤다는 것과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가르친 것을 좀 비교를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내용은 천국 복음의 전파로서 말씀하시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은 율법의 가르침이었고 그 율법을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경우 산에서 가르친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율법의 가르침이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마태복음 4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23). 그러나 지난번에 세 가지 사역으로 요약되는 이 말씀 속에서 핵심 된 내용은 천국 복음 전파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으로 넘어와 소위 산상수훈이라는 말씀을 증거 하시는데, 결국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결코 천국 복음과 전혀 무관한 말씀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가르쳤다면 지금 예수님은 그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복음을 어떤 산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대조냐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 자체만 하더라도 율법의 가르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17절을 보시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복음을 대조적으로 본다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율법은 물러나고, 복음이 오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때문에 율법과 복음이 대조적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율법을 폐기하는 성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모세의 율법은 천국에 들어가는 의를 줄 수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의를 준다는 차원에서 대조적입니다. 로마서 320절에 있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기능 가운데 한 가지는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으로서 죄를 깨달을 뿐 그것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음은 뭐냐? 율법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으로 알려주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면에서의 대조를 말하는 것이지, 복음이 왔기 때문에 율법은 물러나야 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 안에서의 율법은 물러나야 할 것이 아니라 더욱 세워는 쪽으로 있습니다. 이것을 율법의 제3사용,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이라고 합니다. 지금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지는 율법이 바로 그런 방향입니다. 천국 복음에 관한 것이되, 율법을 세우는 방향으로 모든 것이 초점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율법 자체만 하더라도 복음과 완벽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복음으로 향하게끔 하는 기능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복음으로 눈을 돌리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율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율법은 복음의 다른 형식이요, 복음 역시 율법의 다른 형식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부터 보게 될 이 산상수훈은 천국 복음과 관련된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분명 율법과 대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을 더욱 세우는 것이란 겁니다. 대조적이라 할 때는 율법으로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고, 세운다고 할 때는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의 삶의 방향과 관련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산상수훈의 첫 번째 부분으로 흔히 팔복이라고 일컬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그 서론으로서 크게는 세 가지 사항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의 의도대로 하자면 이때 무리들은 마태복음 4장 마지막에 언급된 무리들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태복음 423절 이하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24절에 보면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지면서 사람들이 나아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고침을 받을까 하여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욱 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25절 마지막에 보면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신 것은 바로 그 무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좀 의아해 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는데, 제자들이 나아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가? 분명 무리와 제자들을 구분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듯한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 구분을 짓고 계신가?

여러분, 무리들이 나아왔고 바로 그 무리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무리들이 다 이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3장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3:11). 이것은 단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허락된다, 혹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전 인생을 비춰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유기자)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천국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비밀을 밝히 드러내시며, 택자들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때에 그리고 주고자 하시는 만큼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나 유기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리와 제자들을 구분하여 말씀하시고 있다면, 분명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이지만 그 비밀을 아는 자들은 제자들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따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 깨닫도록 하시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누가 깨닫는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들만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그런 자들을 지금 제자로서 부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여기 제자란 말은 단순히 열 두 제자로서의 제자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로서의 제자가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제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의 제자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로서의 제자, 근원적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로서의 제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산상수훈을 통해 실질적인 교훈을 받고 있는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지만, 몰려왔다고 해서 듣고 있는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신 자, 주고자 하신다 할지라도 주고자 하신만큼만 유익을 얻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 대상은 유기자가 아닌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자들, 오늘 본문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제자들이 그 대상인 겁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만이 아니라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이 산상수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씀이라고 하며, 이렇게 살면 매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고 해도 불신자의 경우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일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의를 이룰 수 있는가?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잘 아는 간디는 어떤 계기로 인하여 성경을 읽게 되었는데, 구약보다는 신약이 그의 마음 가운데 남았고, 또 신약 가운데서도 산상수훈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럼 산상수훈만 좋아했느냐?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좋아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간디는 사랑과 평화와 같은 내용들을 좋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간디는 그의 나라 안에 있던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대해 한 형제이기 때문에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간디 하면 말할 수 있는 비폭력주의, 어떤 면에서 사랑의 열매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가 산상수훈을 좋아했다고 해서 그 말씀이 그에게 유익이 되었는가? 외적으로는 유익을 주었는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종교관은 종교적 혼합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가 마치 신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방향에 서 있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아니면 아무리 산상수훈을 좋아해도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뭔가 유익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로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실질적인 그런 유익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천국 복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상 어떤 면에서는 전혀 유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유익을 누가 받을 수 있는가? 오직 제자들만이 이 말씀을 통해 유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팔복 전체에 대한 해석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보통 팔복하면 여덟까지 복으로 생각하고 어떤 방법론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일반적인 이해로 하자면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믿어야지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논리로서 말하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 말 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도 이런 표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믿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로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믿음은 원인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은 우리가 볼 때 가까운 원인으로서만 말 하는 것이 아니라, 먼 원인으로서 말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팔복의 대한 이해도 단순히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그런 의미로서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아닌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역순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천국을 소유한 자들은, 다시 말해 천국을 소유하게 된 복을 받은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 더 근원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표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미 큰 위로를 받은 자들이 우리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에 대한 답으로 하자면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기 때문에 이미 위로함이 넘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보존해 주시기 때문에 위로함이 넘치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시기 때문에 위로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리를 애통하는 자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백성답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입니다. 이미 하나님 안에서 큰 위로함이 넘치지만, 이 땅에서 우리의 모습은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5절도 보시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구약으로 이해하자면 약속의 땅이 가나안을 통하여 무엇을 바라보도록 하셨느냐? 영원한 안식처를 바라보게 하셨기 때문에 그 땅을 약속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자들이냐? 온유한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것 때문에 물, 불 안 가리는 자가 아니라 온유함을 잃지 않는 자인 겁니다.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성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다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자들입니다. 그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만으로 배부른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는 자들, 왜냐하면 이 땅에는 불의가 횡행하기 때문입니다.

7절 이하 12절은 더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보는 자들이기 때문에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화평케 하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겁니다. 그리고 이미 하늘의 상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아니 이미 하나님이라는 최고 상급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우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거스른다 할지라도, 그리고 악한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성경의 기록 형식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며, 그들이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어떤 면에서는 성경의 많은 기록의 형식이 이와 같습니다. 명령의 형식도 이와 같고, 약속의 형식도 이와 같습니다. 무엇 무엇을 하면 무엇 무엇을 주겠다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좀 더 선한 열심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든 위로든 이미 받은 것이지만, 그것을 조건화해서 말씀하심으로 마땅히 내야 할 열심을 더욱 내도록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생을 보면 그 인생길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장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시험은 단지 예수님이 받으신 성격에서의 시험이 아니라,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 욕심 때문에 받는 시험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실망을 하게 됩니다. 또한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하고, 혹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면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뭔가를 약속하시는 바가 있다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열심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마음을 쏟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자극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산상수훈을 통해 교훈을 받고 또한 유익을 얻기 원한다면 이런 형식의 말씀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팔복만 하더라도 분명 이 말씀은 우리의 존재성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앞서 무리를 보시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만이 그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럼 그 제자들이란 어떤 자들인가?” 바로 이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복된 자인가?” 그 존재성을 말씀하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느냐? 더욱 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고,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긍휼히 여겨야 하며, 마음이 청결해야 하며,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것을 마땅히 여기는 자, 주님을 위하여 어려움과 곤란한 일을 당해도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 바로 그러한 자가 되도록 선한 열심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됨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로 이 땅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복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복은 어떤 것인가?”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에도 잠시 살핀 바 있지만 전도서 2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5절과 26입니다. “,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솔로몬하면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먹고 즐기는 일, 그리고 모아 쌓게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5 1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이전 성경인 개역한글 성경을 보면 제 몫으로 번역하지 않고 분복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물과 부요를 주시는데, 그것이 뭐냐? 복이란 겁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통해 알리시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이 헛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의식주는 일시적이면서도 헛된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것은 다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12:19) 바로 여기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어리석은 부자처럼 모으고 또 모으고, 모을 생각만 합니다. 물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하여 거기에만 빠져 있습니다. 무엇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물질이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비단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월급은 좀 적지만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과 주일은 가끔씩 지키지 못해도 월급을 많이 주는 곳이 있다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후자를 택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현실로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5:10)

 

특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영원과 관계가 없는 것, 즉 일시적인 것은 결코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것은 대부분 무엇이냐?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이 세상의 것이 복이 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물질도 복이 아니요, 명예도 복이 아닙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혈통을 자랑하지만 그런 혈통이 복이 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바울의 자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3:4-6) 그러나 그는 이것을 복으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비교해 이런 것들은 다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복은 무엇인가? 일단 계시로서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면, 분명 말씀은 일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에는 죄에 대한 기록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죄가 더 이상 없고 생각도 나지 않는 곳인데, 죄를 기록한 말씀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4:35) 즉 영원한 말씀인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기 때문에 유익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먹고 마시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1-2) 나아가 그 말씀을 지키는 것도 복인 것입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119:1)

나아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불리는 천국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복입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천국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간섭하시는가? 천국 백성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천국도 피조세계여서 시작이 있지만,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곳, 때문에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비록 이 땅에서 고된 인생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일시적인 이 땅과 영원한 천국을 비교해 볼 때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때로는 이 땅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천국을 바라보면서는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여기서는 전혀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면서 장차 주실 복을 사모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가장 복되다고 알릴 때 그 복의 내용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으로 알리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시편 144 15입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이렇게 알리셨던 겁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뭐냐? 하나님 자신과 더불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1:3) 그리고 그 안에서 다뤄지는 모든 것이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진정한 복의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 팔복이라고 일컬어지는 내용의 경우 하나님 자신이 최고 상급이라는 사실, 그리고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원한 작정과 선택에 대한 내용도 어떤 면에서는 언급 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우리가 팔복의 해석에 있어 역순으로 해석하는 것이 좀 더 근원적인 성격으로서의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리고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박해조차 받을 수 있는 모든 이유는 무엇인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복이라 할 수 있는 최고선이신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결과라는 사실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팔복은 근원적인 복의 내용을 다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도는 어떤 자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복을 통하여, 그리고 나아가 산상수훈의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살펴나가셔야 합니다. 가장 큰 복인 하나님을 거저 받은 자는 어떤 자인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 백성으로 삼아주셨는데, 그런 찬국 백성으로서 우리는 어떤 자로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얼마나 주님께서 알려 주시는 바 합당한 모습으로 사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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