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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0930설교 / 마태복음26장36-56절 / 이렇게된것은선지자들의글을이루려함니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8.09.30|조회수60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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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47-56

이렇게 된 것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함이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라 하는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을 때 고난의 잔을 마시는 내용과 관련해서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죄가 아니라 택하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다고 할 때, 그 형벌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사실이 예수님에게는 가장 고민이고 슬픔의 내용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얼핏 보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는 좀 당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기도의 내용으로 보자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 편에서는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당하시는 것이 그만큼 무겁고도 힘들다는 것을 이런 내용을 통해 드러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죄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코 죄와 관련해서 내놓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분이 죄인으로 계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지겠습니까?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다고 기도하신 것은 인성의 연약함이 드러날 뿐 그것이 죄와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시면서 곧바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했는데, 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인성의 연약함마저 극복하시고 주의 뜻을 따르고자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경우 주님께서 힘들게 기도하시는 동안 함께 기도하면서 주님과 함께 했던 자들은 전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기도하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으로 하여금 함께 깨어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육신의 약함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주님께서 기도하시면서 육신의 연약함마저 이겨내시는 동안 저들은 한결같이 육신의 연약함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저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은 때가 가까이 왔다, 즉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잡히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우선 47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도중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상으로 볼 때 마리아의 향유사건 이후 예수님을 팔 계획을 가졌고, 이런 계획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아시고서 그 일을 행하도록 말씀하셨을 때 그는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서 기도하고 나신 이후인데, 그가 예수님 계시던 곳을 알았던 것은 이곳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끔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18:2). 그런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큰 무리와 함께 왔습니다. 그것도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었다고 할 때 본래는 율법의 정신을 반영하도록 할 목적으로 보내어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들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열매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 나아올 때 그들은 그런 율법의 정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정신에 반하는 모습으로 나아왔습니다. 칼과 몽치를 들고 나아왔으며, 여차하면 무력이라고 행사할 목적으로 칼과 몽치를 들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18:3). 등과 횃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날이 밝기 전입니다. 밤중에 기도하셨고, 따라서 밤중이거나 새벽에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입니다. 낮이 아니란 소리입니다. 달리 말하면 공개적이기보다는 비공개적으로, 다시 말해 사람들이 모르게 예수님을 잡아갈 목적으로 날이 밝기도 전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이 결코 정당한 모습으로 나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떳떳하기보다는 떳떳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아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모습이라고는 전혀 없고 오로지 거짓과 술수와 악행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입니다.

 

48절에서는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미 예수님께로 오기 전에 미리 약속한 어떤 신호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께로 왔을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입을 맞추었는데, 49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랍비라는 말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그에게 입을 맞춘다는 것은 선생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외적으로는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고, 또 선생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나타낸다는 뜻에서 입을 맞추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가식이요 위선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우리는 그의 마음이 사탄에게 넘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 더더욱 외적으로 존경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지금 가룟 유다가 무엇을 행하고자 하는지 아셨습니다. 5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여기서 친구여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 편에서는 친구처럼 대하였지만 친구로 대한 그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말이 어디에 사용되었느냐 하면 마태복음 20 13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이미 살핀 바 있는 것처럼 이 내용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하루 일한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서 품꾼들을 보내시는데, 지금 읽어드린 13절은 가장 먼저 온 자의 원망과 불평에 대한 주인의 답변입니다. 분명 주인과 약속한 것은 하루 일한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늦게 온 자가 자기와 동일하게 받는 것에 대하여 원망, 불평하고 있는 겁니다. 약속한 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일한 양으로 비교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니 좀 더 나아가 품꾼으로 불러준 주인의 은혜는 처음부터 일한 자도 동일하게 받은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일한 양으로만 비교하니 주인에 대하여 원망, 불평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에게 주인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친구라고 부르고 계시지만 실상 친구라고 부른 그 대상은 주인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자로 있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자로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서 따라던 12제자에 속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들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놀라운 일들을 직접 본 자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전도를 위하여 파송하실 때 주께서 행하시던 놀라운 일들을 직접 행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비유로 하자면 가장 먼저 일터로 보냄을 받은 자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 불평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이 맞지 않음으로 인하여 원망, 불평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원망, 불평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바로 그를 향하여 지금 예수님께서는 친구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22 12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이 비유는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하여 사람들을 청하지만 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악한 자, 선한 자 만나는 대로 다시금 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청하였다고 할 때 그냥 오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이 부분입니다. 적어도 임금의 잔치 자리라면 갖추어야 할 예복이 있는데, 그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를 향하여 어떻게 부르느냐? ‘친구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가룟 유다가 바로 이와 같은 자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가룟 유다는 12제자에 속하는 자입니다. 누구보다도 더 예수님 가까이서 따르던 자였습니다. 말씀도 들었고, 놀라운 기적도 보았습니다. 직접 볼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일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자인가? 청함을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 않은 자였습니다. 친구라고 부르시지만 실제로는 친구가 아닌 자, 아니 주님 편에서는 친구처럼 대했지만 본인은 전혀 친구처럼 대하지 않은 자로 있었던 겁니다. 예복을 입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할 때 노골적으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22:48)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친구라고 부르시지만 실제로는 가룟 유다의 배반을 더욱 드러내고자 하시는 목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시편 419절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는 척한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입을 맞추고 있지만, 마치 존경하고 사랑을 나타내는 것처럼 나아올 수 있지만 주님은 그런 위장술에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가 되면 반드시 그들의 외식을, 그리고 그들 안에 있는 숨은 죄악들을 다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는 언제나 전투하는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분명 성도들의 모임으로 모입니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 안에는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곡식과 더불어 가라지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곡식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드러날 때까지는 그것을 모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참된 신앙으로써 그 내용을 갖춰가고 있는가? 혹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은 자는 아닌가? 주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주님의 백성답지 못하고, 또한 성도라고 불리면서도 성도 백성답지 못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탄은 밖으로부터는 우리와 교회를 공공연하게 공격하지만 안으로부터는 위선자들을 통한 은밀한 파멸을 시도하기도 합니다(칼빈). 그런데 그 위선자가 나 자신은 아닌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겉으로만 그런척하고 있고, 겉으로만 종교적 모습을 하고 있고, 그러나 속은 전혀 그렇지 못한 자가 아닌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을 때 제자들은 칼로 대항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2249절에 보면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제자 중 한 사람이 나서게 되는데, 오늘 본문 51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요한복음에 보면 칼을 빼어 든 자가 베드로임을, 그리고 대제사장의 종이 말고라 이름한 자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810절을 읽어드리면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성경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의 성정이 매우 급하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주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을 벤 것은 한편으로는 분명 주님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이 칼로 치리이까?”라고 말한 내용 속에서도 우리는 그들이 주를 위한 마음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진심어린 마음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이 베드로의 고백이요 다른 제자들의 다짐이었는데(26:31,35), 오늘 본문에서는 이 시점에까지만 보자면 그러한 고백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을 빼어 든다는 것은 저들과 싸우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죽음까지도 각오한 것이기 때문에 분명 주를 위한 열심으로 이렇게 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한 열심이 진리 위에 있지 않다면 굉장히 조심해야 할 것임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 부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16:16). 그러나 곧바로 책망을 듣게 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예고하셨을 때 그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16:22).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16:23)

그런데 오늘 본문이 동일한 실수를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분명 자신이 잡히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보인 반응처럼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못하겠다는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즉 주를 위한 열심이긴 하지만 진심어린 마음일 뿐, 진리 위에서 열심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열심은 있으나 진리의 지식을 따른 열심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고서 행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봉사와 섬김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도록 하려면 반드시 그의 명령에 의존하도록 해야 합니다. 명령하시기 전에 내 판단, 내 생각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명령 없이 내 판단, 내 생각이 앞설 때 결국 어떤 말을 듣게 될 위험이 있느냐?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한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에 대하여 칭찬보다는 오히려 책망조의 말씀을 하십니다. 52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사실 칼을 들어 사람을 치는 행위는 율법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국가에 대한 칼의 권세까지 부정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어하기 위해서 국가에 칼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칼빈의 주석에 보면 방어적 목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허락되는 것이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이런 전제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올바르고 거리낌 없이 방어하려면 먼저 격한 분노, 증오, 털끝만한 복수욕, 그리고 모든 감정의 격발을 제거하고서 자신의 방어 행위에 전혀 무리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어가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가? 굉장히 드물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개인에게 칼의 권세를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방어적 목적을 위한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인 원칙으로 칼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이런 차원에서 개인적인 복수심,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하자면 이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53절을 보시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간단히 말하면 힘과 권세가 없어서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권세로 치자면 예수님은 신성으로서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하 만물을 다 만드신 분이시고, 또한 친히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큰 물결이 일어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주님은 자신이 바람과 바다조차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8:26-27). 그런 분이 지금 당장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보내게 할 수 없느냐는 겁니다. 말씀 한 마디면 하실 수 있다는 것이요, 그만큼 하고자 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들을 물리칠 수 있으신 분이 예수님이시란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54절입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지만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작정하신 바로 그 길만을 걸어가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구약을 통해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으며, 그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권세를 부릴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 희생 제물이 되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이것은 성경의 여러 가지 예언의 증거를 받고 있는 만큼 저들을 대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마다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 225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저들 편에서는 예수를 잡고자 하여 왔지만 바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 즉 베드로가 칼을 들어 상처를 입힌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원수로 여기고 있지만 바로 그런 자들에 대하여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셨던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기적의 역사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장소에서도 펼쳐졌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펼쳐졌지만 거기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마음이 감동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들의 영적 완악함이 극에 달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고치신 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55절과 56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 대하여 너희는 나를 마치 강도를 잡으러 온 것처럼 왔다.”고 비판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며, 그렇게 가르칠 때 와서 이런 저런 문제를 제기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혹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면 잡아갈 수도 있었을 것인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강도를 잡는 것처럼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편에서 어떤 무력을 행사하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여 그렇게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한번도 무력을 행사하여 뭔가를 하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 전에 읽어드린 산상수훈의 교훈처럼 살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살인을 부추기는 마음의 분노까지도 다스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5:38-39) 뿐만 아니라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3-44)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이런 예수님 앞에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는 것 자체가 저들의 순수하지 못함을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말씀처럼 열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게 하셨는데, 무엇을 못 하시겠습니까? 혹 그런 기적의 역사가 두려워 칼과 몽치를 들고 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았다면 더더욱 칼과 몽치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했는데,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저들의 완악함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 함이요,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너희가 나를 잡으러 왔지만, 그것도 칼과 몽치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지만, 지금 잡히는 것은 너희가 칼과 몽치를 들고 왔기 때문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할 때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영원 전에 작정한 바를 실행할 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이 그때가 아니라면 너희가 아무리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올지라도, 그리고 지금 예수님께로 나아온 많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에워싼다 할지라도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30절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같은 장 43, 4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왜 손을 대는 자가 없는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넘어가 요한복음 1039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잡고자 한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10:17-18a) 주님은 자신이 잡히시고자 하시면 잡히시는 것이고, 잡히시기를 원치 않으시면 잡히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잡히신다면 예수님 스스로 그들에게 자신을 주신 것이지, 결코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저들을 피해 숨으시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859절에 보면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그러나 이 숨는 행위를 통해서도 근원적으로는 주의 때가 되기 전까지 그들에게 잡히실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오늘 본문으로 와서, 결국 이런 과정 속에서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마태복음 26 31에서 말씀하셨던 바가 사실로 드러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즉 구약 성경을 통해 예언한 바가 성취되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를 치게 되면 양떼가 흩어지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잡히시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이 있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에 대해 요한복음은 또 다른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요한복음 18 3절부터 보겠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3-9)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실 것을 아시고서 이 사람들즉 자신의 제자들에 대해서는 그냥 내버려 둘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도록 하시느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저들의 배반을 초점으로 하고 있다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사건이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것을 초점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배반하는 사건은 동일한데, 그 배반하는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도록 하는 역사가 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숨어서 성전에서 나가시는 내용에 대해 언급했지만, 다른 말씀들에 비해 숨어서 나간다는 것이 뭔가 비굴해 보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라면 숨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돌로 치려 할 때 저들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여 당당하게 성전을 빠져 나오는 그런 장면을 상상하기도 하고 또 그것이 예수님께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실 수도 있지만 비굴해 보이는 방식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사울을 피해 도망하다가 가드 왕 앞에서 미친 척하기도 했습니다(삼상21:12-13). 우리가 볼 때 얼마나 비굴해 보입니까?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미친 척까지 하다니 너무 비굴한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으로 지은 시편 34편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34:1-4)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34:19-22) 한 마디로 말해 자신은 미친 척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악인의 손에서 구원해 내시더란 겁니다.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을 배반하여 다 도망하였다고 할 때 그들의 배반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배반은 죄로 지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할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저들의 죄악 된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목적을 실행하십니다. 바로 배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비굴해 보이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를 배반했던 제자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모습을 내놓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는 주를 배반하는 것이 어쩌면 일상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늘 죄악 된 모습을 내 놓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 대하여 우리는 반드시 회개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이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자 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뜻밖에 하나님은 그런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를 지금도 실행하셔서 이루시고 계시다는 것 또한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핑계 댈 목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죄조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무뎌져도 좋다는 의도에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멀리 해야 합니다. 죄를 미워해야 하고, 증오해야 합니다.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죄와 싸우되 죽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뜻을 항상 이루신다는 겁니다. 죄가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으며, 죄가 하나님의 작정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할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내 놓는 것은 죄이지만, 그것도 항상 죄를 내 놓는 자로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죄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죄의 결과는 분명 사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하여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취한다는 것이요, 작정하신 바대로 실행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가 있고, 그 무리 앞에서 처음에는 주를 위하여 죽을 각오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제자들의 경우 다 도망하는 자로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으러 왔기 때문에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잡히시고자 했기 때문에 잡은 것이요, 제자들의 경우 주를 버리고 다 도망하였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보존하시려고 하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 우리의 열심을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바대로 실행하시는, 특별히 우리를 영원 전에 예정하시되 때가 되어 주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지금도 주의 백성으로 여겨 주셔서 끝까지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아마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실수들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죄악들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점과 흠이 있을 것입니다. 비굴해 보이는 일은 왜 없겠습니까? 부끄럽다고 할 만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주의 뜻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작정하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연이 결코 없습니다. 하늘의 뜻만이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 놓는 것은 죄인데, 내가 내놓는 것은 점과 흠인데, 그 사건 자체로만 본다면 굉장히 낙심거리일 수 있지만, 그 너머 일하시는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본다면 거기에 많은 위로함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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