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6장 69-75절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하니라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난 뒤 대제사장과 서기관 및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분명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시지만 저들은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부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신성모독을 행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사형시키고자 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사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부인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건은 대략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칼빈). 하나는 베드로의 부인을 통하여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록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 긍휼이 그의 백성에게는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 외에 또 다른 제자 한 명이 더 언급되고 있는데(요18:15), 그들은 도망하였다가 다시금 예수님이 잡혀 심문을 받으시는 곳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왜 따라 들어갔느냐? 마태복음 26장 58절을 보시면 이렇게 증거 합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어떤 결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따라 간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난 것은 갈릴리 해변에서입니다.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오셔서 예수님 자신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이상 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으로 그를 부르셨습니다(마4:19). 그때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두고(마4:20), 다시 말해 그가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직업으로 삼고 있던 일을 다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이것에 대해 베드로 자신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19:27)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것은 쉬운 일만을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할 때 그 이면에는 성령의 역사가 분명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기 때문에 그의 순종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순종케 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 “그러면 무엇을 얻겠습니까?”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해당 본문을 말씀드릴 때 이 부분에 대해 나눈 바가 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할 때 베드로는 무엇인가 얻을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하늘 영광보다는 이 땅에서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나머지 제자들과 다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놀라운 고백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과 관련하여 굉장히 깊은 뜻을 말씀하시자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6:66).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 속에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는데,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8-69)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알게 한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동일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참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고백을 했다고 해서 세상적인 시각을 다 벗겨 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참된 신앙고백 이후 곧바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 때문에 그런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6장의 고백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아닌 영적인 것만을 바란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을 살피면서 제자들의 모습을 확인한 것처럼 저들은 주님을 따를 때 주어질 어떤 보상을 염두 해 두었는데, 그것이 하늘에 속한 것이기보다는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도망하였다가 다시금 주님이 잡혀 가신 곳으로 몰래 들어간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과 맞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고, 또 그렇게 따를 때는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큰가로 다투었던 이유, 그들이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좌우편에 앉겠다고 했을 때 시기했던 이유와 동일한 것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잡히신 것입니다. 과연 주님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잡혀 심문 받으시는 곳까지 따라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들어가 앉아 있을 때 한 여종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69절에 보시면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그러자 베드로는 순간 당황하기라도 했는지 거짓을 말하게 되는데, 70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같은 마태복음 26장 31절 이하에 보면 그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성찬을 제정하시고 난 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베드로의 부인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했다면 깨어 기도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부인을 말씀하시고 난 뒤 겟세마네라는 곳에 가셔서 기도하실 때, 특별히 베드로와 및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올라가셔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잠자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폈던 것처럼 그들은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육신의 피곤함으로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께 일어날 일에 대하여 무감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그렇게 무지했고 무감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그리고 그렇게 잡히실 때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다면 이제는 깨어 기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한 것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도 동일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장담하였지만 장담한 것을 이루어 낼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깨어 기도해야 했습니다.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 어떤 결말이 일어날까 궁금하여 숨어서 은밀하게 예수님의 심문을 바라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사탄의 시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소위 경건의 훈련을 잘 하고 있을 때 시험한 것이 아니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탄의 공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탄의 시험은 예수님을 잡을 때처럼 많은 사람들, 다시 말해 어떤 군대를 이끌고 와서 협박하는 것으로 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한 마디 말이면 족합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것도 여종 한 사람의 말입니다. 힘 있는 자의 말이 아니라 아무런 힘도 가지지 않은 자의 말일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한 마디 말에 넘어지고 맙니다. 이 한마디로 미치게 될 어떤 일에 대하여 미리 염려하였는지 곧바로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그것도 여종 한 사람의 말에 대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여종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부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상황이 베드로와 같은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고 말 한마디에 넘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지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면 이런저런 일에 대하여 좀 의연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큰 일 만이 아니라 작은 일에 대하여도 쉽게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처럼 깨어 기도해야 하는 자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어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 순간도 올바르게 설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임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칼빈은 본문을 해석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바람 소리만 들어도, 아니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곧 넘어지고 만다.” 그렇게 연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성도는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종말과 관련된 마태복음 24장, 25장의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오늘 시대는 예수님 시대보다는 분명 마지막 때가 더 가까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깨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주 앞에서 깨어 있는 삶, 기도하면서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왜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하는가? 육체의 연단으로도 우리가 약간의 유익을 얻지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연단이 금생에서의 약간의 유익이라면, 경건은 금생뿐만 아니라 내생에 대한 약속을 주기 때문에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인 줄 알아야 합니다(삼상12:23 참조). 달리 말하면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잠3:6).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다 해서 시간적인 측면에서 쉼 없이 기도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는 이유, 바로 하나님을 항상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고자 하는 자세로 주 앞에 서야만 합니다. 내가 자주 넘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 경건으로 붙들어 매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살피고 또 살펴야 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이렇게 베드로가 첫 번째로 부인하고 난 뒤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69절에서는 바깥뜰에 앉아있었는데, 71절에 보면 앞문까지 나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71절과 72절을 보시면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두 번째 부인 역시 첫 번째 부인과 다르지 않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맹세까지 덧붙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분명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잡혀 해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가리기 위해서 더욱 죄를 향하여 가는 쪽으로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확증해 주는 것이 세 번째 부인인데, 73절과 74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마태복음에서는 ‘조금 후에’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한 시간쯤 있다가’(눅22:59) 이 일이 있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에서는 ‘곁에 섰던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은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기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고 하면서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할 때 갈릴리 사람들의 경우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는 어떤 말투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비교해 본다면 부산 사람과 대구 사람의 말투를 보면 같은 경상도권이라고 하지만 말투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런 말투를 통해 분명히 갈릴리에서 온 사람이고,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확신하여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처럼 한 번 부인하고, 두 번째 부인하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날 법도 합니다. 특히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부인하는 과정에서는 한 시간이라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주님을 따르던 제자로서 주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찔림이 될 법도 할 텐데, 성경은 전혀 그런 것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찔림이 되기보다는 그것을 숨기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죄에 죄를 더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범죄도 동일합니다. 자신의 간음죄를 가리기 위해서 살인을 계획했습니다. 그것도 자기 부하로 하여금 그 일에 동참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이 죄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를 통하여 비유로써 지적하실 때 그것이 자신인지 전혀 몰랐을 정도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죄에 죄를 더하여 양심이 무뎌져 있었던 겁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죄에 죄를 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말이 거짓임이 드러날까 하여 거짓에 또 다른 거짓을 더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양심은 무뎌져 가는 겁니다. 아니 때로는 강퍅해져 갈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성도가 강퍅할 수 있는가? 그러나 성도일지라도 강퍅할 수 있습니다. 성도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아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딤전4:2 참조)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어쨌든 세 번째 부인 장면에서는 맹세에 이어 저주까지 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자기가 주님을 부인한 말이 거짓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닭이 울었는데, 오늘 본문 75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여러분, 인간의 연약함이란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를 통하여 이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모습이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처럼 한번 넘어지면 두 번째 넘어지고, 두 번째 넘어지면 세 번째 넘어지기가 일쑤입니다. 꼭 베드로처럼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번 넘어졌다 좀 회복하면 또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일상처럼 있습니다. 성도들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한지 때로는 한두 번, 혹은 세 번만이 아니라 네 번, 다섯 번도 넘어집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몰아붙이는 비탈길은 얼마나 미끄럽고 가파른지... 주님께서 그의 손을 뻗쳐 우리를 붙잡아 주기 전에는 우리의 나뒹굼에 끝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칼빈).
그러나 우리는 넘어지지만 하나님은 넘어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말씀하셨는가?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과 32절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께서 친히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명하시기를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돌이키다는 것은 넘어진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만, 그러나 주께서는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것이고, 주님의 기도가 헛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베드로는 돌이켜 형제를 굳게 하는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75절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돌이키는 역사가 있는 겁니다. 특히 그가 돌이킬 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되어 있는데,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이런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5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59-62) 닭이 울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분명 예수님은 죄인 취급을 받는 곳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상에는 베드로의 부인을 기록하고 난 뒤 예수님의 심문 과정을 기록하고 있어 베드로가 부인할 때는 아직 심문을 당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죄인 취급을 받는다고 할 때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고, 닭이 울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의도적으로 보셨던 겁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때를 베드로가 세 번째로 부인하고 있는 과정 속에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셨다고 할 때 어떤 눈빛으로 보셨겠습니까? 결코 정죄하는 눈빛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결코 업신여기시듯 하는 눈빛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던 그 마음을 담은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돌이켜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칼빈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눈길이 아니라... 그의 은혜의 광채와 함께 베드로의 마음을 꿰뚫는 성령의 은밀한 능력을 동반하는 눈길이었다...”
베드로의 돌이킴은 결코 그 자신 스스로 깨우쳐서 된 일이 아닙니다. 닭이 울 때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에 앞서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스스로 깨우쳐서 된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겁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몇몇 주고받는 말이 있었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보지 않았겠습니까? 분명 보셨습니다. 그럼 보셨다고 할 때 미움의 눈으로 보셨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사도로 세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가룟 유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런 눈빛으로 보았다고 해서 가룟 유다가 돌이켰는가? 회개하였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말미암아 돌이키는 역사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히브리서 6장에 기록된 것처럼 일시적으로 돌이키는 역사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 참된 뉘우침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선물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런 은혜와 긍휼을 받았던 겁니다.
이 은혜와 용서와 관련해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과 22절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여기서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는데, 형제를 죄를 범하면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일곱 번 정도면 많이 해 주는 것 아닙니까?”라는 식의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에 있어 한계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답변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숫자상으로는 490번이지만 주님의 의도는 한계를 정하지 말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 오늘 본문을 적용하자면 베드로의 경우 몇 시간 만에 세 번이나 주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부인한 것이 아니라 맹세까지 했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도 하셨느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때문에 베드로 기준이라면 이미 베드로는 용서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본문에 앞서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그런 맹세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니 맹세 자체에 대해서도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만 베드로는 헛된 맹세를 할 뿐만 아니라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볼 때 베드로 기준으로라면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기준은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하여, 자기 백성의 허물에 대하여, 자기 백성의 연약함에 대하여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십니다. 한번 용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그리고 490번까지, 아니 그 이상 회개하는 자들에게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런 뉘우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부인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하여,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울었던 겁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런 설명을 합니다.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 보는 데서 우는 것이 두려워 밖으로 나갔던 것 같다. 다시 한 번 그는 그의 약점을 드러냈다.” 매튜 풀 주석도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관정을 나갔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염려해서 나간 것이거나... 대제사장의 관정에서는 마음 놓고 울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실컷 통곡해도 괜찮을 만한 장소를 찾아 나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베드로가 통곡한 것이 거짓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곡 속에서도 분명 우리의 연약함이 녹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만 회개하면서도 점과 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다시 말해 그가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셔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에 근거하여 온전히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요, 긍휼인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죄를 회개한 것만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용서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용서를 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용서를 구하지 못하는 죄가 더 많습니다. 우리의 인식 가운데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죄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죄까지 용서해 주십니다.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있는 겁니다. 용서 없이 어떻게 구원의 완성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하신다는 것을 악용하여 죄에 대한 인식이 있는데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고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하실 때마다 통곡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우리의 죄악 됨에 대하여, 그리고 그런 죄들을 반복적으로 짓는 것에 대하여 통곡해야 합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연약성과 그런 연약성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끊임없는 사랑과 긍휼, 은혜, 용서를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연약함보다, 우리의 죄악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용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주를 부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는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에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하십니다.
남유다의 므낫세 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인 히스기야가 개혁했던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 심한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그가 걸어갔던 길은 다윗의 길이 아니라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길이었습니다. 특히 므낫세의 범죄와 관련해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는 것은 그의 범죄의 심각성을 분명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3장 26절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남유다를 향한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가? 므낫세의 범죄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만큼 므낫세의 범죄는 심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적대적으로 대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조차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남유다 전체를 범죄의 도가니로 빠뜨린 자요, 예루살렘 전체를 무죄한자의 피로 가득 채웠지만(왕하21:16), 하나님은 악에 악을 더하는 데 앞장 선 므낫세의 그 악을 선으로 갚으셨습니다. 역대하 33장 12절, 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그의 생을 모면 거의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인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마치 유기자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은 마지막 때라도 돌이키게 하십니다. 회개의 은총을 주시고,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한편의 강도도 바로 그런 은혜를 받았던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은혜의 결과 때문입니다. 일주일 가운데 6일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의 유혹이 있습니까? 아니 유혹하지 않더라도 작은 일에도 죄를 내 놓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은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인 줄 알지도 못하고 짓는 죄에 대해서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출34:6). 그러나 그 대상은 택자에게 만입니다. 택자라 할지라도 주를 부인하는 듯 한 모습으로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와 연약함 등으로 넘어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장담하건데 영광의 몸을 입기까지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죄의 반복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죄에 대해여 안일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는데, 어떻게 죄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연약한 모습 속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연약함이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용서가 크다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더더욱 회개하고 용서해 주실 것을 믿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나아가 죄악 가운데 넘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하고, 깨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