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7장 1-10절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지난 시간 그리스도에 대하여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 관해 살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부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긍휼, 용서하심에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에 사단의 시험이 있으면 자주 넘어지는 자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연약함보다, 우리의 죄악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용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나는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바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용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가룟 유다를 중심으로 종교지도자들까지 관련하여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베드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말했다면, 가룟 유다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데, 우선 1절과 2절을 보시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심문하고 난 뒤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 26장을 통해 저들이 심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죽일 것을 결정한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마26:65-66). 그러나 그들에게는 공식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1절에 보면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을 때 이런 말을 주고받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재판은 할 수 있었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스데반의 경우 돌로 쳐 죽인 일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사형을 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스데반 사건의 경우 소위 폭동에 의한 우발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성경의 기록을 따르자면 당시 저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을 때 그들은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마26:5). 그래서 예수님을 심문할 때도 낮이 아닌 밤중에 진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들은 백성의 폭동 없이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의논했던 것 같은데, 그 결과 로마 위정자들의 손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로마 총독의 경우 혹 폭동이 일어나더라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로마 총독으로 있던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안에서는 이미 모든 심문 과정을 통해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취급하고서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없고, 동시에 백성들의 폭동에 대해서는 두려우니까 세상 위정자를 통하여 그 일을 실행하고자 새벽에 빌라도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 18장 28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가야바란 인물은 그 해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을 심문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가야바에게서 심문을 받고 난 뒤 이제는 죽이기로 결정하고서 그 일을 실행할 수 있도록 관정, 즉 로마 총독의 관정에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찾아가서는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느냐? 율법의 명령을 따라서 정결하게 유월절 잔치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불결에 대하여 멀리하려고 했는데, 그런 이유로 로마 총독의 관정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부정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물론 율법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아니하면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장로들의 전통을 통해 이런 내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모습이 저들의 외식에 불과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저들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15:3)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6-9)
실제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폐하는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자세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은 분명 종교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자세는 그리스도로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분명 그의 말씀이나 그의 행하시는 일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임을 나타내셨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듣고 보면서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자요,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자인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잡아 심문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죄 없으신 분을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 편인 양 예수님에 대하여 신성모독을 행한다고 말하면서 사형이라는 부당한 판결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외식의 극치는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서 결박하여 빌라도 앞에 끌고 갔지만, 그들의 의논 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논이 앞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이 의논하여 진행하고자 하는 일보다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 표현 자체로만 보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주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내주셨을 뿐입니다. 저들이 잡으러 왔을 때 잡히신 것이고, 잡히시고 난 뒤 얼마든지 거기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하게는 의논]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내준바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의논과 미리 아신 바 대로입니다. 저들의 힘, 저들의 책략 등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주체가 저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겁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하고 난 뒤 죽일 기회를 엿보면서 이제 드디어 죽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위한 일을 실행하고 계시는 겁니다. 즉 저들의 악을 선으로 나타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누가복음 22장 22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그 길을 가지만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뿐입니다. 즉 작정대로 된다고 해서 저들의 죄에 대하여 작정을 핑계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경우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몰아붙여 죽이고자 한 죄,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탓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작정대로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유다의 죄는 그 스스로가 지은 죄일 뿐입니다. 작정대로 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의 저자인 것처럼 오해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저자일 수 없습니다. 승인자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 죄의 승인자가 아닌 방식으로 모든 일에 대하여 작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역사하시는 겁니다. 저들의 죄에 대하여, 저들의 악에 대하여 하나님은 선으로 역사하시는 겁니다.
이제 3절 이하의 말씀은 가룟 유다에 대한 사건인데, 이 부분은 다른 복음서를 통해서는 소개되지 않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지난 시간 베드로가 예수님의 심문과정을 지켜본 인물로 있었는데, 베드로만이 아니라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의 심문 과정을 살펴보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혹은 차마 심문 과정을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거기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3절에서 5절을 보시면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아마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재판 과정을 통해 그가 정죄되자 그는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마음에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뉘우쳤다는 말은 회개했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가 저지른 죄를 두고 마음이 안 좋았다, 불쾌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회개란 분명 하나님 쪽으로 방향이 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진정한 회개가 나오는 것이고, 그것은 죄악에 대한 증오와 공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참된 회개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경우는 근심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그를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하지는 못했습니다. 뉘우쳤다고 되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뉘우친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맺은 열매는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살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주시는데,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살하도록 만드실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자살의 경우는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오늘날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들이 있는데, 성경 어디에도 택자의 예로 자살을 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룟 유다와 사울 왕, 그들이 자살하여 죽은 자들인데, 그들은 누구냐? 유기자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가실 때 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결코 자살로 생을 마감하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혹 우리의 연약함을 따라 자살을 시도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 지식의 부족함, 그리고 심적인 어려움 등으로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런 시도가 성공하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자살을 시도했는데 그가 죽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입니다. 즉 자살은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유기의 열매일 뿐입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과연 택자인지, 아니면 유기자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런 시도를 하려고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들었는데도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살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주의 뜻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가룟 유다가 마음에 찔림이 있어 뉘우쳤다는 것은 결코 참된 회개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근심한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의미에서 근심할 뿐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잠깐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비교해 볼 수 있는데, 한편은 택자인 반면 다른 한편은 유기자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병이어 사건과 관련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6:70) 베드로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그에게는 참된 회개의 선물이 주어졌던 겁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경우는 그런 은총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나 예수님을 부인하되 맹세하기까지 하고 또한 저주까지 한 베드로의 부인,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는 한없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회개의 선물을 주시고, 넘어졌지만 다시금 일어날 수 있도록 견인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유기자들에게는 그런 은총을 결코 베푸시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의미에서 근심하게 할 수는 있으나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의 저자일 수 있는가? 죄의 승인자일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죄의 저자요, 승인자라면 하나님의 공의에 결코 합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에 충돌이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죄의 저자, 죄의 승인자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죄는 그들 스스로 짓는 죄일 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들에게 형벌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가룟 유다가 예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 삼십은 예수님을 판 값으로 가룟 유다가 저들로부터 받은 금액인데,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은 삼십은 가장 미천하고 가난한 자의 목숨 값에 해당합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었는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 수 있었는가?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오늘 본문 9절과 10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가장 헐값에 팔아 넘겼지만 예수가 정죄됨을 보자 그 마음에 찔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받았던 돈을 다시금 저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다방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심문하는 곳에서도 거짓 증인이 많이 왔지만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입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죄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는데, 빌라도도 어떤 말을 하느냐?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눅23:4)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모든 심문들은 죄가 있어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데,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심문이나 그 이후 죽음이라는 형벌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받으시는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누구의 입을 통해 알려주고 있느냐? 오늘 본문에서는 가룟 유다의 입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스스로는 예수님을 판 자로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판 자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이런 가룟 유다의 말에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는 말로 반응합니다.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발뺌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이용해 예수를 잡았고, 또한 예수를 죽이기 위해 거짓과 불법을 자행하였지만 그들 스스로는 가룟 유다가 말한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제외되는 것인 양 그렇게 구별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 스스로는 가룟 유다와는 구별된 자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저들은 가룟 유다를 이용해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잡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거짓과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준비했던지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밤에 예수님을 잡았고, 또한 그 밤에 심문을 했고, 새벽에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런 행보에 대하여 어떻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가룟 유다의 경우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였지만, 대제사장과 및 백성의 장로들은 그런 죄조차 인정하지 않는, 마치 양심이 화인을 맞은 것처럼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입니다.
이렇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룟 유다에 대하여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하자 가룟 유다는 자기가 받은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됩니다. 왜 그가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가 한 말,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는 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은 분명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 자신은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의롭지만 자신은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의 뉘우침이 참된 회개가 아닌 것처럼, 여기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 또한 참된 회개와 관련된 내용은 분명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그의 결과입니다. 그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열매가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언어 자체로는 뉘우쳤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회개의 성격은 아니란 것입니다.
한 예로 히브리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얼핏 보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중생자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시는 내용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외적으로 볼 때 중생자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뉘우쳤다는 말이나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만 그런 모습을 갖춘 자들에게는 견인의 은총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히브리서 6장의 말씀처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말하는 것들을 가지고도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자인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결말을 맞았는가? 그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결말을 맞았습니다. 그가 뉘우친 것, 그가 죄를 지었다고 말한 것이 참된 회개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런 내용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 가룟 유다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무죄를 말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가 죄를 지었다는 것도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죄의 결과가 무엇이냐? 죽음으로 끝맺도록 하셨습니다. 그것도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그의 죽음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18절과 19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오늘 본문에서는 가룟 유다의 자살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지만 가룟 유다와 상관없다고 말하는 대제사장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 역시 시기만 다를 뿐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행사될 것입니다. 물론 죽음의 형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는데, 높은 곳에 매달았는지 떨어져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고 말할 정도로 끔직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럼 저들도 이런 죽음을 죽을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이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죽음에 대하여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7장 59절과 60절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분명 죽음이지만 성도에게 죽음은 다시금 부활을 내다보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116:15) 저들에게는 공의로 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 보시기에 죽음조차 귀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가룟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나갔을 때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6절 이하 8절을 보시면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데 앞장 선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그들의 죄는 누구보다 심각한 죄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표현으로 하자면 그들은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롬3:2). 말씀을 통하여 알려 주시는 바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이 아니라 가렸습니다. 가리다 못해 죽이는 데 앞장서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반응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마치 그에게만 죄가 있는 것처럼 반응하고 있고, 예수를 팔면서 얻게 된 은에 대해서도 핏 값이라 하여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대신 그 일을 시킵니다. 그럼 고용된 사람만 죄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간음 사건으로 충신이 우리아를 죽이기로 마음 먹고 그 일을 실행할 때 요압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그럼 다윗은 아무런 죄가 없는가? 요압의 경우는 다윗의 명령을 따라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장 세우고 뒤로 물러났을 뿐인데, 직접 죽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는가? 우리아를 죽인 자만 죄가 있는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대제사장들, 백성의 장로들은 자기가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말씀을 맡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외식하는 자들이라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저들의 외식은 가룟 유다가 던져 놓은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은 것으로 드러나는데, 외적으로 보면 나그네의 묘지로 삼기 위해서 밭을 샀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뭔가 이웃 사랑의 정신을 드러낸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찜찜한 것이 있었는지 이웃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밭을 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악을 드러내셨는데, 이웃 사랑을 위해 밭을 샀지만 그 땅에 대해 오늘날까지 뭐라고 불리게 되었느냐? 피밭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즉 가룟 유다의 죽음을 염두 해 둔 것이고, 가룟 유다의 죽음은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를 판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서 겉으로는 온갖 화려한 장식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래서 그 화려함에 속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런 화려함에 속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겉으로 좋은 것을 치장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도 알지 못하는 숨은 죄악에 대하여 드러내시며, 결국 공의로써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 옆에 아내를 속일 수 있습니다. 내 옆에 남편을 속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경우 부모를 속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죄를 짓지 않고 있는 것처럼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지난주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악용하여 마치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어떠한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의 경우 유기자를 향한 말씀입니다. 유기자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택자를 향하여서는 유기자와 같은 공의는 아닐지라도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시는 일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때문에 죄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의 죄악보다 크다는 이유로 죄를 가볍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내용으로 자리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은 피밭이라 일컫는 땅에 대하여 이미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바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한 가지 수정할 것은, 여기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내용은 스가랴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사본 상의 오류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본 상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성경 원본의 무오류성은 하나님의 속성상 분명히 고백되어야 할 내용이라는 데 있습니다.
어쨌든 가룟 유다와 관련된 이 내용은 스가랴서를 통해 예언된 것인데, 스가랴 11장 12절과 13절에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런데 이 구절이 어떤 배경 속에서 나오느냐? 6절로 올라가시면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10절도 보시면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꺾었으니 이는 모든 백성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시는 내용 속에서 나오는 본문입니다. 심판하시되 선지자를 통해 먹이신 하나님께서 그동안 너희를 먹인 품삯을 달라고 하자 은 삼십 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많은 수고를 했지만 그런 수고에 합당한 값을 쳐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싸구려 일한 것처럼 취급하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만 못한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로마서에서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은(롬8:32) 은혜의 극치인 자신의 아들까지 주셨다면 다른 것은 못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들, 백성의 장로들은 받아 들였는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할 때 가룟 유다를 통해 얼마를 쳐 줬느냐 하면 은 삼십밖에 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아무런 가치가 없는 분으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저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될 일만 남은 것입니다. 스가랴서에서 말한 것처럼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꺾으시면서 마치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내용을 폐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내용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작정된 자가 구원의 은총에서 제외되거나 폐하거나 하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유대인들을 자기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라는 측면에서 선택을 말하기보다는 여러 민족 가운데 한 민족을 선택하신 것일 뿐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실제로 선택하신 백성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민족을 선택하셨다고 할 때 그 말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지, 유대 민족을 선택했다고 해서 영원한 작정과 예정의 의미로 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은총의 막대기를 꺾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다가 그것이 취소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적으로 볼 때 유대 민족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거부한 결과 은혜 언약이 취소되는 형태로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런 부분은 가룟 유다를 통해서는 더욱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도 역시 사도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님께서는 그가 처음부터 마귀라고 단정하셨습니다(요6:70 참조). 열둘을 택하였지만 한 사람은 마귀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택함 받았는데 택함 받은 것이 취소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귀의 자식으로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스가랴서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왔지만 그들조차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종교지도자들, 그들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척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하잖게 본 것입니다. 그분의 높으심을 생각한다면 그만큼 낮은 자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죄 없는데도 죄인 취급하여 죽여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그렇게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의 묘지로 삼은 곳을 피밭이라 하여 그 사실을 드러내신 것처럼 저들의 모든 행위들, 그리고 그들 안에 있는 숨은 생각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저들만이 아니라 오고가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들, 그리고 생각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겸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저들처럼 그리스도를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찮은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찬송과 경배를 올려 드려야 할 분이십니다. 다른 것은 다 버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은 버려서는 안 되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게 유익하던 것조차 해로 여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고백만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어야만 합니다. 고백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으로 족한 인생입니다. 때문에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는 사실 앞에 항복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항복하는 자로서 우리는 주 앞에 서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