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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1111설교 / 마태복음27장11-26절 / 저옳은사람에게아무상관도하지마소서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8.11.12|조회수84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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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11-26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소서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셔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죄 짐을 짊어지고서 죽어야 했는데, 그가 자신을 잡으러 오는 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은 바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심문을 받으실 때 분명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취급을 당하실 때 예수님은 자신의 무죄를 위해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해야 할 말만 하시고는 침묵하셨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여 죽이기를 결정하고서 로마 총독 앞에 세운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말, 드러내야 할 말만 하시고서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정확하게 이사야 537절의 말씀을 이루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죄가 없으시지만 죄인 취급하여 죽이려고 하는 자들 앞에서 마치 죄인처럼 그렇게 계셨던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예수님에 대하여 계속해서 예수님의 죄 없음을 강조합니다. 지난주 가룟 유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이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빌라도도 죄 없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빌라도의 아내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무죄성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누가복음에 의하면 헤롯에 대한 부분도 나오는데, 헤롯 역시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계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 없음을 변호하기보다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죄한 분으로써 죄 있는 자들, 그러나 모든 죄인이 아니라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지시기 위하여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그 길을 걸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잠시 살펴보았지만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가서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간청하였는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1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여기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하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데, 이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죄가 이런 내용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 1절 이하 3에 보면 그 내용을 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그러니까 저들이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세우면서 고발한 것이 무엇이냐? 백성을 미혹하는데, 미혹하는 내용이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있고, 또 그 스스로 왕이라 그리스도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일단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명하셨습니다(22:21 참조). 결코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저들은 거짓으로 예수님을 고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심문을 하는 과정 속에서 이런 내용을 말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예수를 죽일 죄목만 찾다보니 이것에 대하여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유대인의 왕이란 말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빌라도가 직접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게 되는데, 아무래도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때여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더 이목을 끌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도 복음서들이 간략하게만 기록하고 있지만, 동일한 내용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좀 더 상세히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8 33절 이하 38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우선 종교지도자들 편에서 예수님을 고발한 것은 자칭 왕 그리스도라는 데 있습니다. 스스로를 왕이라고 한다면 마치 로마에 반기를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사형을 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금 문제도 동일한 측면에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던 것은 이런 측면에서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빌라도는 답변 겸 다시금 질문을 하게 되는데,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의 너를 고소하였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그러니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유대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그런 왕으로 오셨다는 의미에서 대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반드시 종들이 싸워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네 말이 옳도다란 말은 결코 이 세상 나라의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온 것은 유대인들의 왕이 되어 정치적으로 로마로부터 해방하고 독립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스스로 밝히신 것처럼 왕이지만 자신의 왕 됨은 이 세상이 아니라 진리와 관련되어 있고, 진리에 속한 자들의 왕으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모른 채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빌라도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질문으로 더 이상의 심문이 없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 편에서 확신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잡아 온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이런 세세한 내용을 다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빌라도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셨을 때 그 의미는 결코 세상의 왕으로 오셨다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할 때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 왕으로 오셨습니다. 어떤 왕이냐? 요한복음의 기록대로 진리로 자기 백성을 모으며, 진리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한다는 표현이나,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왕의 직분과 선지자 직분을 수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12절 이하 14절을 보겠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서두에 말씀을 드렸지만 자신의 죄 없음을 변호하기 위해서 이런 말, 저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해야 할 말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이유는 분명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지만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런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곧 그는 그의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예정한 그분으로 하여금 본인 자신은 순결하지만, 우리 때문에 죄책을 담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침묵을 지키신 것은 지금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그의 변호로 우리를 우리의 죄책에서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침묵을 지키신 것은 우리가 그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점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대신하여 친히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입을 열어 자신을 변호했다면,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입을 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악이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러나 있는 죄, 그리고 숨겨진 죄까지 낱낱이 밝혀질 것입니다.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그 입을 열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심판에 우리의 입을 열게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만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자랑해야 하는 것이고, 그분만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높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빌라도의 심문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만 누가복음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내는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겠습니다. 다만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헤롯 앞에서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23:9 참조), 헤롯 역시 예수님을 돌려보내면서 죄가 없는 것으로 빌라도에게 말했다는 것을 언급합니다(23:15 참조). 그리스도의 침묵, 그리고 그리스도의 무죄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심문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알려지고 있는가? 그분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서 세상 법정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없지만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자기 백성이 죄의 짐을 짊어지고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죄가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이 침묵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죄가 없다고 판단한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놓아줄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15절 이하 18절을 보시면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유월절 명절이 되면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광복절 특사처럼 죄수 한 사람을 무리의 청원대로 놓아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해 봐도 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고, 또 이런 심문의 과정 속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넘겨준 줄 알고서 처음에는 풀어주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냥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려서 풀어주겠다고 말합니다(23:16). 그러나 무리들이 그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 대신 바라바라 하는 사람을 놓아주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를 유명한 죄수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그를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로 표현합니다(23:25). 민란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유대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민란을 일으킨 자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유대인들이 환영할 만한 사람들이고, 굳이 빌라도가 그런 사람을 세워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의미에서 민란을 일으킨 자라 할 수 있는데, 아마도 빌라도 생각에는 이 사람을 세우면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주도록 권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죄수인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죄한 자보다 죄 있는 자를 놓아주고자 하는 저들의 완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무리들이 바라바를 놓아주도록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의 경우는 그 일이 대제사장들이 선동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7:20, 15:11). 즉 누구보다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를 맞아야 할 자들이 그를 반대하고 그를 죽이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무지하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동일한 일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그분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분명 저들은 저들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대제사장들과 및 백성의 장로들, 다시 말해 종교지도자들의 무지와 어두움에 대하여는 죄 없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로 있습니다. 구원이 아니라 심판 외에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들의 죄악 된 모습까지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들의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당시로 하자면 가장 유명한 죄수보다 못한 분으로 여겨졌던 것이고, 끝내 십자가라는 형벌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드러내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빌라도란 인물을 통해서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의 본문을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거기에서는 헤롯을 통해서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빌라도의 아내를 통해서도 드러내고 있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보통 꿈은 꿈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꿈 자체를 믿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할 때 이 꿈은 단순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꾸는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듯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고 재판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한 여인에게 그가 무죄한 자임을 꿈꾸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빌라도의 아내를 통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에 대해 성경은 다방면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면 안 되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그가 당하시는 모든 고난과 십자가 형벌이 자기 백성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더더욱 부각시키는 것으로 있습니다.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빌라도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냥 놓아주려고 했지만 분위기 상 때려서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싫어할만한 죄수 한 명을 세워 둘 중 누구를 놓아 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선동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시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일의 주동자는 다름 아닌 종교지도자들인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면 구약의 모든 의식법들은 폐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폐지가 되지 못하고 있는 요소들이 있는데, 다름 아닌 종교지도자들이 앞서서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면에서 목회자를 따라갈 뿐입니다. 물론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지 또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르치는 자의 죄를 더 심각한 것으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통해서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3:1)는 권고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지는 어떤 면에서 그들을 위해 세워진 가르치는 자들의 무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의 무지와 어두움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지와 어두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기를 기도하되, 무엇보다 주의 종 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유익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가르침 받게 되는 주의 백성들의 유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21절 이하 23절을 보시면 끝끝내 바나바는 놓아주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것을 관철합니다.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세 번이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는 말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22). 그러나 무리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였다고 기록합니다(23:23). 지금 그런 과정 속에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9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12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19:12-16)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얼마나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했는지, 분위기로 보자면 광분한 모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예수를 저들의 뜻대로 내어준 계기가 있었는데,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죄목으로 가지고 온 자기 스스로 왕이라고 한다고 할 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따리고 묻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예수를 죽여야겠다고 말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이사는 유대인들의 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이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광분했던지 자기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재판하는 과정 속에서 본래 빌라도와 헤롯은 원수지간이었으나 예수로 인하여 당일에는 친구가 되었다는 말씀이 있는데(23:12), 마치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원수나 다름없는 가이사조차 자기들의 왕으로 인식할 정도로 그들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를 죽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경우는 바로 이런 저들의 말로 인하여 예수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는데,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24절 이하 2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민란이 나려는 것을 봤다는 것은 지금 백성들이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에 대해 안타까운 것은 아무리 백성이 흥분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협박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을지라도, 그는 민란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그래서 이 일이 가이사 귀에 들어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저들의 요구대로 내어주게 되는데, 내어주기 앞서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는 행동을 합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는 것이고, 비록 내가 너희에게 예수를 내어준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하여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표로서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손을 씻는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회피할 수 있는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는 자로 있는데, 그런 잘못에 대해서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매튜 풀 주석을 조금 읽어드리면 하지만 빌라도가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는 우리 구주를 죽인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구주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고, 그 죄는 우리 구주의 피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속함을 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어떤 죄라도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물로 씻는다고 해서 그 죄가 씻겨 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은 자기 스스로 자기 양심을 위해 행하고 있는 일일 뿐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결정을 마치 다른 사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인 양 그렇게 만들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빌라도의 행동에 대해 백성들의 반응은 놀랍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려도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에 대하여 자신과 자기 자손들에게까지 돌려도 된다는 것은 굉장히 끔직한 저주와도 같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의 자손 중에 라멕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어떤 말을 했느냐?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즉 내가 상처를 받고 상함을 받자 복수심에 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데 지금 이들의 행동은 라멕의 행동보다 더 끔찍합니다. 왜냐하면 라멕이 죽인 인물은 하나님 앞에서 죄 없는 자가 아니었지만, 저들이 죽이고자 하는 이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에 대하여 자신과 자기 자손에게 돌려도 된다고 말하니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분명 저들은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에 심각성, 그리고 무서움을 전혀 알지 못하고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심각성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죄의 무서움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우리 죄 때문에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죽음에까지 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들이지만 우리 대신 그분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는 죽음 외에 결과 되지 않습니다. 죄는 영원한 지옥 형벌이라는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우리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그분이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더 이상 죄에 거할 수 없는 자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은 바로 이런 측면인 것입니다(12:4 참조).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겠느냐는 말씀도 그것입니다(6:2).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결국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하기 위해서 넘겨주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칼빈의 주석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무죄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죽음은 속죄의 근원이 될 수 없었으며 그가 우리의 구속에 대한 보증이 되어 우리가 받을 벌을 받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죄악에 대한 죄책에 묶여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형식을 통해 그의 아들이 정죄 받게 하신 것은 그를 보고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다. 그 처벌의 잔인성 또한 우리의 신앙에 대한 강력한 확증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악을 깨닫고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으려면 바로 이 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곧 그가 담당하신 처벌의 가혹성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징그러운 것으로 알아 피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을 역겹고, 수치스럽게 여기며 진지하게 슬퍼할 수 있으며 이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을 간구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한 상처로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찔림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속죄하려고 당하신 그런 벌을 받으신 우리의 죄악을 철천지원수처럼 증오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마음은 돌덩어리보다 더 굳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무서운 처벌이 우리 눈앞에 보이기 시작할 때만이 우리의 확신의 기초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져진다. 곧 우리의 죄악이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비싼 값을 치르고 우리를 그 죄악에서 풀어 놓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 당하신 죽음은 보통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가 자기 몸에 저주를 받으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서 불결을 찾아 볼 수 없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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