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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0524설교 / 마태복음5장3절 / 심령이가난한자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05.24|조회수1,32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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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부분은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부분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지만 팔복을 단순히 어떤 방법론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을 가난하게 해야 한다.”는 그런 식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믿으라.”는 논리와 같습니다. 한편으로 보자면 분명 성경도 이런 식의 순서로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분량에 있어서는 어쩌면 근원적인 성격보다 더 많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이 이런 순서로 말하고 있다면 이런 논리를 무조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이런 순서의 말씀을 오해하여 무엇을 강조하게 되었느냐 하면 믿음을 강조하게 되었고, 또 그 믿음에 대하여 인간의 어떤 결정에 대한 강조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주의를 해야 합니다.

팔복이 방법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심령의 가난을 스스로가 선택하기만 하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 천국을 보장해 주는 그런 인과론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팔복은 지난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 역순이 더 근원적인 성격으로서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들, 이미 천국 백성으로 있는 자들, 즉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지만 그 말씀에 있어 효력은 제자들만이 받는데, 바로 그 제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알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후 내용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들, 천국 백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애통하는 자요, 온유한 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요, 긍휼히 여기는 자요, 마음이 청결한 자요, 화평케 하는 자요, 그러면서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로서 팔복이 소개가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무엇 무엇이라고 말하기에 앞서 적어도 이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실제적인 가난이 심령이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심령’, 즉 영혼이라고 하는 수식어가 없이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6:20)라고 함으로 물질적인 측면에서 가난한 것이 복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톨릭의 해석인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스스로 가난을 맹세하면서 수도원으로 들어가 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과 상관없이 실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과 관계가 있느냐? 어떤 면에서는 어느 정도 영향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많으면 심령이 가난할 수 없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심지어 수도원에서는 자기 마음속의 죄악된 것들을 쫓아내기 위해 자기 육체를 학대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심령의 가난이 이런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를 제어하기 위해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 이것도 심령의 가난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의 해석 이면에는 물질과 상관없이 살고, 또 자신의 육체를 쳐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공로주의와 맞물러 있기 때문에 이미 그 출발부터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으로 가시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에 관해서 질문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이미 질문 자체 안에 그 스스로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어떤 조건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물음에 대응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 즉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실제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아니 이 물음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성경이 알리고 있는 사실과 관련해 과연 인간이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는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3:20 참조). 그리고 구약의 역사는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부자 청년의 대답은 무엇인가 하면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 , 그는 그 스스로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키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 겁니다. 율법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함, 어떤 면에서 자신감이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 청년의 모습인 겁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시면서(18:2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

여러분, 조금 전에도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께서 이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 한편으로는 사실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8 5에 보면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실제로 인간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한 사람도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20).

그럼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다 지키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스스로 영생을 얻어 보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가? 이 부자 청년은 그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의도 가운데는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이 부자 청년의 실상을 드러내길 원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 역으로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동일한 그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도록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3:20 참조).

나아가 이 부자 청년의 경우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근심하며 돌아갔지만(19:22), 만약 이 부자 청년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면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사랑은 이미 영생을 받은 자들의 열매이지, 그것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부자 청년에 관한 내용은 결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물질을 다 버리면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의 어떤 노력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아닙니다. 가톨릭의 경우 오늘 본문이나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을 물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기만 하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볼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 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을 더욱 확증하는 것이 계속되는 말씀 가운데 나오는데, 마태복음 19 23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3-26) 이 부분도 주의해야 하는데,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부자는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해야 한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부자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가난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자의 사고방식을 가진 자는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는 어떤 자들인가? 단순히 재물이 많다는 측면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세상 말로 재물이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는 자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의지하는 자들, 즉 그들의 것으로 그들 스스로는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들이 바로 부자인 겁니다.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성경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여보내시는 자, 바로 그들만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자.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게서는 어떤 원인과 공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인정하는 자,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 그가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겁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들 자신 안에 아무런 선함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져서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을 구하는 자’(토마스 왓슨), 자기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 주어야 하는 자, 자기 힘으로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 아니 구원은 받았지만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스스로는 구원을 유지할 수도 없기 때문에 끝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의 전적인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자, 그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겁니다.

때문에 이런 자들은 결코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물질을 다 버리면, 아니 그 물질로 가난한 자들을 돕기만 하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버리고, 또 그 물질로 많은 사람을 도와주더라도 그것이 그의 공로가 되어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라 부르는 것은 반드시 두 가지 내용을 충족시킨 자들을 향한 말인데, 그것이 뭐냐 하면 자신을 아는 자, 그런데 그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 ()와 같은 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자기에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바로 그런 자를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이라는 말 자체를 생각해 봐도 분명합니다. 헬라어로 된 가난이라는 말의 뜻 안에는 거지로 몰락한또는 구걸하는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한순간 거지로 몰락해서 구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가난이 가지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우리의 영적인 실상이 이와 같습니다. 본래는 어떤 자인가? 최초의 사람 아담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거룩 안에 있게 지으시고, 아울러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소요리문답 10). 그리고 그때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첫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 가운데 들어왔을 때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담만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던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담 이래로 자연적인 생육법을 따라 난 자들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어, 모든 인류는 죄악 중에 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죄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이것은 아담의 첫 범죄의 결과로서 아담 이래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입니다. 원죄의 구성요소로 죄책과 부패를 말하는데, 죄책이란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아담에게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대표이기 때문에 또한 우리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아담 탓을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패라는 것은 우리의 전 본성이 부패했다는 것인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그분의 뜻을 아는 지식에 있어 완전히 잃어버렸다, 의와 거룩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고 말하며(17:9), 나아가 의지조차 악으로 가득하여 모든 영적 선을 싫어할 뿐 아니라 행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6:5, 3:10-18) 그런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는 어떻게 말하느냐? 허물과 죄를 죽었다고 말합니다(2:1). 영적으로 죽은 상태, 죽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즉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이라는 말 자체가 이런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주님께서 심령이 가난하다고 할 때는 이런 의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내용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뭔가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구원의 시작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완성까지 어느 부분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야 하고, 또한 그렇게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것을 유지할 수도 없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만을 의지하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겁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의지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의지하지 않고 하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자(3:6), 그가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겁니다.

 

그럼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이런 내용으로 이해한다고 때, 특별히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 주의해야 할 주장 두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들어보셨을 텐데 하나는 펠라기안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반펠라기안주의입니다.

우선 펠라기안주의란 뭐냐? 쉽게 말하면 원죄를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즉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요,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담의 경우 거룩하지도 않고 또 죄악 되지도 않은 중립상태에서 그의 자유의지로 거룩을 택하거나 혹은 죄악을 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모든 인간이 그와 같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모두가 중립적인 상태이며, 그런 중립적인 상태에서 선을 택하거나 악을 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라고 보는 겁니다.

물론 교리에 있어 이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더라도 만약 인간의 존재성과 관련해 전적인 타락을 부정한다면, 그래서 인간 스스로 선을 택하거나 악을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뿌리는 펠라기안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반펠라기안주의란 무엇인가? 반펠라기안이라고 하니까 펠라기안의 반대로 생각하기 쉽지만, 반대라는 의미가 아니라 반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펠라기안과의 논쟁 중심에는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거스틴과 펠라기안의 중간 입장이 반펠라기안인 겁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말이 좋아서 중간 입장이지, 진리의 면에 있어서는 펠라기안보다는 반펠라기안이 더 위험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인간의 본성에 있어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중립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인 타락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타락에 의해 약화되었거나 병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긴 하지만 전적인 은혜로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뉘앙스도 있지만 그런 은혜는 인간의 의지와 대등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신인협력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도 일하고 나도 일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소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사고방식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비록 은혜를 말할지라도 결국 최종적인 자리에 있어서는 언제나 인간에게 공로를 돌리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펠라기안 입장이 누구의 입장인가? 가톨릭의 입장입니다. 은혜도 말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공로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그럼 이것이 가톨릭만의 입장인가?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 안에도 이런 식의 내용이 얼마나 보편화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인간에 대하여는 전적인 타락을 시인하는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전적인 은혜를 인정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전 성경의 가르침이 이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결코 심령이 가난한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영광을 그에게 비추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6:5) 최근에 살핀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면서 자신 앞에 있는 예수님이 단지 이스라엘의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자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8) 누가복음 18장에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8:13)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자,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아는 자는 구원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아는 자들입니다. 제가 종종 말씀을 드리는 구절이지만, 이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이 고린도전서 15 10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보십시오.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8절에 보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중생함을 받은 그 사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사도가 된 그 내용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9절에도 보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교회 입장에서는 원수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어떤 마음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있다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숫자로 하자면 제로’(0) 상태가 아니라 마이너스’(-) 상태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던 것이고, 숫자로 하자면 플러스’(+)로 만들어 주셨던 겁니다. 때문에 여기에 인간의 어떤 개입을 있었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 말미암아 바울은 선한 열심을 내었다고 말합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기 전 그의 모습을 볼 때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못난 모습을 깨닫게 되자 그런 가운데서도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여 더더욱 선한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빚을 진 두 사람이 빚진 자로부터 탕감을 받았을 때 더 많이 받은 자가 더욱 감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7:41-43 참조). 자신의 죄악됨을 알면 알수록 그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 데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은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그는 감사함으로 노력했습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노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뭐냐? 그런 노력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노력의 일부는 내가 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노력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게 하신 이가 누구냐?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그렇게 하도록 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처럼 전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는 자입니다. 내 것이 없다고 인정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자, 아니 그 스스로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있다는 것을 아는 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영적 선에 있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자,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그런 영적 선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자, 그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바울의 이 고백은 단순히 멋있는 고백, 듣기에 좋은 고백정도가 아니라 성도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사실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태어날 때부터 죄책과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내 힘으로서는 구원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할 수 없다는 전적인 무능을 인정하시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십니까? 혹 구원의 시작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서 인정하지만, 구원의 과정 가운데서는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를 들어 믿음이 공로가 되며, 기도가 공로가 되며, 그 외 선한 행위들이 공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겁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오직 은혜입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은혜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신앙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선한 것들은 결코 나를 자랑할 수 있는 것으로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도 사실 자랑일 수 없고, 또한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자랑일 수 없습니다. 혹 선한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지만, 그것이 나를 자랑하는 것으로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보통 신앙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우리는 어떤 만족함이 있는 줄 압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면도 분명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일단 신앙이 좋아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분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최종적인 자리가 완전함이라면 그 완전함에 비해 이 땅에서의 삶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니 신앙이 좋아지는 만큼 우리의 불완전함을 더욱 더 직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완전하심 앞에 우리의 부족함을 더욱 더 알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치 무한 앞에서 유한을 직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한계를 더욱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반드시 만족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 즉 하나님 나라를 이미 소유한 자들, 그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의 존재성과 관련된 말씀이긴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런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형식이 지금 우리가 해석으로 내놓고 있는 역순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산상수훈, 특히 팔복의 말씀을 통해 교훈을 받고 또 유익을 얻기 원한다면 이런 형식의 말씀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무리 전체가 아닌 그들 가운데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고, 또 그 제자들은 어떤 자들인지를 말씀하시는 내용이지만, 단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나 합당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가를 살피도록 하는 것이 팔복의 방향입니다. “! 나는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해! 그리고 무능함도 인정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교리적인 것으로만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한 가지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에 대하여 만족함만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고 말하는 건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결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거나 우리 신앙에 대하여 불평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심령이 가난한 자는 우리의 무능에 대하여, 우리의 불완전함에 대하여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결코 심령에 있어 부유한 자로 살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다는 것으로 살 수 없습니다. 언제나 가난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하나님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나아가는 것과 더불어 그분의 무한하심 앞에서 우리의 유한성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심령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완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완성에 미치지 못하는 이상 결코 만족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빙크가 말한 개혁주의에 대한 이해로서 말하자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물의 원인을 추적하며 미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성도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실제적으로 실천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들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특히 두 가지만 강조하여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살피는 일에 더욱 선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경우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도 알려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도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 바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이 말씀을 읽는 것, 그리고 듣는 것을 통하여 죄인을 깨닫게 하여 돌이키며, 믿음을 통하여 거룩과 위로 가운데 구원에 이르도록 그들을 세우는 효력 있는 수단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소요리문답 89 참조).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뢰할 수밖에 없다는 표로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란 무엇인가 할 때 나를 부정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감사는 하는데 내가 한 일에 대한 감사하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처럼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기도할 수밖에 없고, 그런 가운데 뭔가 선한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으로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은혜의 방편을 활용하는 자들,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은혜의 방편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런 자들에게 약속된 것이 뭐냐? 이미 천국을 소유했지만 그 천국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자입니다. 자신에게서는 어떤 원인과 공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인정하는 자,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 그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자들은 결코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열매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최대한 지키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2:12) 부단히 자신을 돌아보며 사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이웃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갈 수밖에 없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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