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 자
우리는 앞서 팔복 가운데 두 가지 내용을 살폈는데, 그 부분을 약간 정리하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팔복 내용 가운데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되 그런 은혜를 구하는 것조차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 동시에 그런 은혜 가운데서도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것을 아는 자, 그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반드시 애통하는 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의 삶이란 영적인 전쟁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진 것은 사실이나,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진 것은 사실이나,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로 있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애통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을 싸워 나가면서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죄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애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애통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애통은 반드시 의에 대한 열매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로서 지상의 삶이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성화의 삶으로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보게 되는 온유함이나 다음 주에 보게 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등의 내용은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에게 있어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는 반드시 온유함과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구조를 통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이 온유함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팔복 서론에서 간디에 대해 언급을 잠깐 한 적이 있습니다. 온유함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만약 사전적 의미로만 보자면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아닌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도 온유한 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간디도 그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팔복의 말씀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 하늘로부터 난 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 바로 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팔복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무리들이 나아왔지만 그 말씀의 실질적인 유익은 바로 제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혹 무리들이 외적으로 그 말씀의 유익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천국 백성의 표로서 나타나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 이 온유함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거나 혹은 세상의 이해 방식에 따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성격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어떤 태도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온화하고 부드럽다고 말하기만 하면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온유한 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로서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내용은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삶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모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됩니다. 왜냐하면 민수기 12장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조차 실제로 주고자 하는 땅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팔복에서 약속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는 바는 좀 더 높은 성격을 드러내고자 하신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이런 부분을 염두해 두시고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온유함이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해보자면, 성경에서 ‘온유하다’(prau?")라고 번역한 말은 본래 히브리말에서 ‘가난하다’(ynI[;)는 말과 같은 말이거나 적어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hn:[;)이라고 합니다(김성수). 따라서 ‘온유하다’는 말 자체가 ‘가난’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서, 가난한 자가 갖는 자세, 영적으로 가난한 처지에 있는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런 은총 가운데서도 죄로 말미암아 고통하며, 슬퍼 통곡하는 자로 있다는 것을 안다면, 바로 그런 자가 취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자세가 바로 온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온유함이란 것이 일차적으로 누구 앞에서의 자세라 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라는데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하게 된 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볼 때 애통할 수밖에 없게 된 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바로 온유함이란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시편 37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을 먼저 보시면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기까지 어떤 말씀이 있느냐?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할 때 무엇을 염두 해 두고 있느냐 하면 악인의 번영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혹은 악인과 의인을 비교하면서 “의인의 삶은 왜 이런가?”하고 불평하는 것, 그러면서 악인에 대하여 시기하는 것을 염두 해 두고서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악인과 의인을 비교하기도 하고, 때로는 믿음 안에서조차 믿음의 차이를 생각하면서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생각하는 것이 악인보다는 의인이 이 땅에서 더 잘 살아야 하고, 또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비교할 때도 믿음이 더 좋은 사람, 하나님께 대하여 선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은근히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좋으면 좋을수록 그런 유혹이 더 강할 때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박국 선지자의 논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이 세상은 악인이 의인을 괴롭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하여 잠잠히 계시는가?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런 논리를 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또 선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세상은 악이 만연해 있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가? 과연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시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뭐냐? 2절을 보시면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지금은 악인이 득세하고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 더 좋은 것 같아 보이지만, ‘속히’ 풀과 같이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속히’라는 것은 단순히 가까운 시간의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속히’라고 말하니까 우리 쪽에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시간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이르면 그들은 급히 멸망할 것이란 겁니다.
그러하기에 다윗은 무엇을 권면하느냐? 3절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비록 악인이 잘 되는 모양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의뢰하는 것으로만 있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악인과 의인을 비교하면서 부러워하거나 불평하고 시기하면서 풀이 죽어 있지만 말고,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우리가 다른 데로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세상에 있는 악인의 잘됨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보다 더 큰 상급은 없으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클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7절과 8절로 넘어가시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특별히 여기서 권면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참고 기다릴 것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불평한다는 것은 다 뭐냐? 악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말씀이 11절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9절도 보시면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비록 현실은 악인이 형통한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바로 그 악인이 의인을 괴롭게 하는 일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자,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 그를 바로 온유한 자로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악인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즉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거나, 혹은 최후 심판을 통하여 그렇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는 마땅히 가질 수밖에 없는 자세요, 성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 때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시며 또한 선한 방향으로만 이끄시기 때문에 그 일 앞에서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자, 또한 그러하기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 그가 바로 온유한 자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오히려 나로부터 나오는 것은 끊임없이 원치 않는 죄악된 것들이 나와서 애통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참고 기다리는 자, 그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 그가 바로 온유한 자인 겁니다.
그럼 이런 온유함의 자세가 왜 중요한가? 왜 온유한 자를 복되다고 말씀하시는가? 굳이 구분해서 말씀드리자면 두 가지로서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방금 읽은 시편의 내용을 통해 말씀을 드리자면 온유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악을 멀리하는 길로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 8절을 다시 보시면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여러분, 왜 분을 내고 노를 발합니까? 시편의 말씀을 통해 보자면 악을 행하는 자들이 더 잘되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더 잘 사는 외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외형과 또 그들을 보면서 답답해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정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선징악이라는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에 대해서는 권하고 악에 대해서는 징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보편적인 법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을 하나도 행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어느 정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어떤 경계선을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너무 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경계선을 정하셨고, 또 국가를 통해 그것을 법으로 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자면 반드시 권선징악의 내용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이 득세하다고 할 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굳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예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만 봐도 이 사실은 분명합니다. 특히 사사기 2장에서 악순환의 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뿐 아니라 그 죄에 대하여 점점 더 무뎌지는 형태로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단지 사사기의 구조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 역사가 그러한 모습이라도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마디로 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앗수르에 의해서, 그리고 남유다의 경우는 바벨론에 의해서 징계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럼 악이 득세한다고 해서 우리는 원망하거나 불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현실 가운데 있더라도 원망 불평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다면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얼핏 들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린다고 하니까 죄의 문제, 악의 문제가 마치 하나님을 원인자로 두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창조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았다는 말은 그 안에 죄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말이고, 또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상 죄를 창조할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최소한의 법, 소위 행위언약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 법을 어긴 것이 인류에게는 죄의 시초였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법을 인간 스스로가 어긴 것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조차 다스리시는데, 창조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섭리 안에서 죄 조차 다르시는 분, 그분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죄의 경계를 정하셔서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모습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죄의 경계만 정하시고 그 죄에 대하여 내버려두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죄로 벌하시는 것으로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해져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죄를 죄로서 벌하시는 성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악인이 득세한다고 할 때 악인이 더욱 악해지는 것, 자신의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성격은 다 하나님의 진노의 한 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이 더 잘된다는 것은 단지 외적인 것일 뿐,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이 부분입니다.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한 면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잘 되는 것만으로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불평하거나 불만을 표할 일도 아닙니다. 만약 원망하거나 불평한다면 그것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불평, 불만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하여 원망,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유한 자가 복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악을 멀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온유한 자가 복되다 하시는 이유는 악을 멀리할 뿐만 아니라 시편 37편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즉 악이 횡행할 때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그 명령을 따라 선을 행하는 자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악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도리어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게 됩니다. 세상은 세상에 발마추어 살아야 한다고 하고 그렇게 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지만. 온유한 자는 세상적인 방식 그리고 그것이 죄로 나타나는 방식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거짓에 대하여 거짓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거짓을 이기려는 태도를 가진 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자, 그가 바로 온유한 자인 겁니다. 시편 37편의 내용으로 하자면 하나님이 아무리 죄에 대하여 그리고 악에 대하여 침묵하시는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분의 공의를 드러내실 것을 알고 믿는 자,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묵묵히 살아가는 자,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말씀이 명하시는 그 길만을 걸어가는 자, 그가 바로 온유한 자인 겁니다.
이런 온유함과 관련하여 실제적인 본을 우리는 좀 생각할 수 있는데,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 모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모세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느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그런데 이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느냐?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게 됨으로 아론과 미리암이 비방을 하게 됩니다(민12:1). 그리고 그 일이 발단이 되어 어떤 말까지 하게 되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론과 미리암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모세의 친 형과 친 누나입니다. 아론의 경우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세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어떤 감정이냐 하면 시기와 질투로 얼룩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강하게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모세도 선지자이지만, 일반적인 선지자와는 다르다고 알리십니다. 단순히 꿈과 환상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시는 그런 사람이라고 알리십니다. 그래서 아론과 미리암의 비방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잘못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미리암에게 징계도 내리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론과 미리암의 불평을 생각할 수도 있고, 또 그들의 시기와 질투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모세는 저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고쳐 주십사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와 같은 모습은 여기에 한번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출애굽 역사를 통해 볼 때 자주 그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수르 광야로 나아갈 때 사흘 동안 물을 얻지 못하여 힘들어 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는지 모릅니다(출15:24). 뿐만 아니라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원망 불평을 쏟아 내었습니다. 그것도 무엇을 비교해 가며 불평하느냐 하면 애굽에 있을 때와 비교해 가면서 불평, 불만을 쏟아 냈습니다(출16:3). 르비딤에서는 또 다시 먹을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투게 되면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습니다(출17:3). 그때마다 모세는 무엇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닥쳐진 상황을 해결해 주십사 간구했습니다. 저들이 원망한다고 해서 원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불평한다고 해서 똑같이 불평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원망과 불평을 하기 때문에 저들을 저주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가서는 반석을 두 번 친 사건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도 듣게 되지만(민20:12), 성경은 이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설교로서 말씀드린 바 있지만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사울의 친족 중 한 사람인 시므이가 도망가는 다윗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때 다윗을 따르는 아비새란 사람이 이런 시므이의 저주에 대하여 머리를 베겠다고 말하자, 다윗은 이런 말을 합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0-11)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군가 나를 저주하면 이미 저주하는 것 자체로 기분이 나쁩니다. 기분이 나쁜 것만이 아니라 동일한 저주가 나올 마음의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 아비새가 취하고자 했던 행동처럼 칼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일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했던 겁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자신이 앞서 지은 죄, 즉 밧세바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압살롬의 반역이나 반역으로 인하여 도망가자가 시므이가 저주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내용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좋은 본은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심령이 가난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연스럽게 가지는 자세, 또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자세로서의 온유함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하지도 않으며, 자신을 위해서 애통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가난을 그의 부요함으로 채우십니다. 또한 애통하는 자들을 위하여 애통할 뿐만 아니라 위로함도 더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가 온유하다면 심령의 가난으로 말미암은 온유, 애통으로 말미암은 온유가 아니라 그 스스로 낮추신 온유함이요, 위격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성부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신 온유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을 보면 본래는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서 자기를 낮추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6-8). 십자가에서 죽으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드리기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단지 한번만 드린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한 잡히시던 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26:53-54) 베드로전서에서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이처럼 온유함이란 죄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악이 넘쳐날 때도 하나님만을 의뢰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을 행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애통하기 때문에 죄를 멀리하는 자,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을 행하되 그것이 의로서 나타나는 자, 그가 바로 온유한 자인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유함이 단지 존재성만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의 한 부분으로서 맺어가야 할 내용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하시느냐?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행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분리할 수 없는 위격이시기 때문에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맺을 수 있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부 중에 바질이라는 사람은 온유라는 말을 은혜로운 영혼의 지울 수 없는 성격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격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은혜다. 그래서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이다(갈5:23). 그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토마스 왓슨)
그리고 그런 은혜는 명령의 형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십니다. 칼빈에 해석에 의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것은 죄의 짐을 진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5장으로 하자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애통하는 자로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가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참된 안식을 맛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참된 안식을 맛본다고 해서 이 땅에서의 삶이 천국에서의 삶과 동일한 삶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천국 백성으로서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맛보며 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여전히 져야 할 짐이 있는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짐이 뭐냐? 예수님께서 메고 가신 멍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그의 생을 보내신 바로 그 모습을 본받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 비록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마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이 우리를 욕하고 핍박한다 할지라도 원수에 대하여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온유한 자로서 맺어야 할 열매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주고자 하시고, 또 주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에게 약속하고 계신 것이 뭐냐 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란 겁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땅을 단지 지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는 그렇게 보기가 어렵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할 때 그 시제가 미래형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로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미래형으로만 있다고 해서 이 땅에서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그런 삶으로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있는데, 오늘 본문이 인용된 시편 37편 1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전자를 통해 후자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즉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을 통해 땅만 차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이 더 초점으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며 살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이상 그 땅은 화평이 아니라 전쟁의 역사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땅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화평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화평은 언제냐? 오직 죄를 멀리하고 주의 율법을 따라 살 때만 화평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땅에서 어떠한 것을 누리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땅이 많아도 마음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땅이 하나도 없어도 그 마음에 화평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는 무엇을 약속받고 있느냐? 땅 자체가 아니라 이 땅의 삶에서 화평을 약속 받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우리를 어떤 자로서 묘사하느냐? 이 땅에서는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히11:13).
그러므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화평과 같은 하나님의 은총의 끊임이 없다는 의미에서 말씀되고 있는 약속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로 하자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온유하다고 해서 부동산이 많아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화평을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땅을 주심으로 더 이상 떠돌아다니며 살지 않을 수 있는,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통해 마음의 안정감을 주신다는 것이 이 말씀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받았지만 오직 한 지파 즉 레위 지파만 땅을 분배받지 않았는데, 그들의 기업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12지파가 살던 땅 곳곳에 살도록 그 장소가 마련이 되었는데, 그런 레위 지파를 보면서 땅을 분배 받은 자들도 그들의 진정한 기업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땅을 분배받았다는 것이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라 더 큰 기업이 있다는 것을 레위 지파를 통해 보여주셨듯이 이 땅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은 혹 이 땅에서 그런 약속이 성취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 높은 것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지상의 땅을 언제가 빼앗길 것이지만, 영원토록 빼앗기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그곳입니다. 아니 땅 혹은 장소만이 아니라 레위 지파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자신이 바로 우리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땅을 기업으로 보장받은 자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주어질 자들입니다. 영원한 안식이 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그것을 누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유함을 잃어버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우리에게 이 땅에 있는 것을 아무리 가져간다 할지라도 영원한 하늘 처소를 빼앗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신 하나님만큼은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는 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그 온유함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온유할 수밖에 없는 자요, 또한 더욱 온유해져야 할 자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런 온유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부단히 살피셔야 합니다. 애통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죄를 멀리해야 하며, 오히려 주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친히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며, 그러면서도 원수에 대하여 선을 베풀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롬12:19-21). 그러나 이 일이 나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더욱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