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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0628설교 / 마태복음5장8절 / 마음이청결한자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06.28|조회수82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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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

 

지난 시간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어떤 도적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그 출처가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것이라면, 성도에게 있어 긍휼의 출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그렇게 긍휼히 여길 때 그것까지도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비유를 말씀드렸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마땅한 바가 이 땅에서는 성화라는 과정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런 긍휼도 계속해서 베풀어야 할 내용으로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마음의 청결에 대한 부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지난주 말씀을 드렸지만 처음 네 가지 내용은 주로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자세라고 한다면, 나머지 네 가지는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열매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 살핀 긍휼이나 다음 주 살피게 될 화평의 경우는 구체적인 열매라고 할 수 있다면, 마음의 청결은 그것이 열매라 할 수 있는가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내용이 좀 더 앞부분에 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로서 마음의 청결을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이런 순서로서 말씀하셨다면 분명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마태복음 18의 내용을 다시금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먼저 왜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드셨는가? 바로 이런 질문 때문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1-22) 베드로의 경우 일곱 번 용서하면 많이 용서한 것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죄인이 용서를 구할 때마다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용서라고 할 때 우리가 좀 더 엄밀한 의미에서 이해해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끼쳤을 때 그 피해에 대하여 보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용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유처럼 누군가 나에게 얼마의 금액을 빚졌는데, 갚을 것이 없어 그냥 탕감해 주면 긍휼을 베풀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용서, 그런 긍휼일지라도 그 일에 대하여 여전히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게 된다면 과연 그것을 진정한 용서, 진정한 긍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든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외적으로 용서하거나 긍휼을 베푸는 것, 그것을 진정한 용서 혹은 긍휼이라 할 수 있는가?

여러분, 세상의 경우는 그 마음의 생각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외형적인 것만으로도 용서다, 긍휼이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신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하시면서 지난주 언급한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고, 이후 결론으로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용서를 하되, 외형적으로만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용서 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용서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본문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지만, 그렇게 베풀면서도 마음이 따라가지 않을 때 그것을 긍휼이라 할 수 있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비라 할 수 있는가? 성경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만 긍휼을 베풀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적인 것이 따라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본래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팔복의 순서로서 긍휼 다음에 마음을 돌아보도록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외적으로 긍휼을 베풀 때 내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고, 성경은 이것을 외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부류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마가복음 7에 보면 저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7:2-3) 그런데 이러한 전통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시비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 일부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저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7:6-8) 바래새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 말씀하셨는데, 왜냐하면 입술로는 공경하는 표를 내지만 실제 마음이 하나님을 가까이 했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던 겁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말씀과 계명은 버리고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느냐?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전통, 바로 그것을 더 가까이 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에 가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3:27)

결국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인가? 종교적인 외형만 갖추고 있었던 사람이지, 실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 사랑에 힘입어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바리새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적지 않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라고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마음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한편은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20)고 말씀하시면서 참된 믿음의 열매, 즉 외적인 행위들이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런 열매가 있는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열매가 외식적인 것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마음을 살필 것도 말씀하시는데, 이런 면에서 보자면 마음의 청결 역시 열매로 볼 수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삼상16:7) 더더욱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하며, 나아가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기 때문에라도(4:23)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그럼 마음이란 무엇인가? 사실 마음을 간단히 정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인의 정서상 마음하면 어떤 감정적인 것을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 보면 마음이 영혼과 관련하여 말할 때가 많기 때문에 영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욥기 7 11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욥기10:1도 참고) 시편 13 2에서는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84:2도 참고) 잠언 2 10도 마찬가지입니다. “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따라서 마음은 영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때로는 마음과 영혼을 병행하여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혼의 기능과 관련하여 부카누스라는 개혁자는 인간의 영혼이 인격적 영이기 때문에, 그 본질적 기능들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아는 능력과 의지하는 능력이다고 말합니다. 즉 영혼의 기능을 지성과 의지로서 구별하고 있는데(개혁파 정통 교의학 제118, 칼빈의 기독교강요 1559, 1157-8항도 참조), 이런 면에서 마음은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어떤 감정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지성과 의지와 관련하여 말한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마음과 관련해 오늘 본문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청결이라는 말은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더러운 것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토마스 왓슨). 특히 하나님은 청결의 원형이신데,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청결의 원형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릴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학자들에 의하면 창조된 청결이 있다고는 말합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바로 그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아담이 타락하기 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라는 의미에서 청결을 말하고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타락한 상태로부터 시작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의 경우 마음의 청결은 마음이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그런 마음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마음에 전혀 흠이 없는 사람들, 신학적인 용어로 하자면 완전 성화의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팔복의 앞선 내용과 연결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마음의 청결 또한 성화의 한 부분으로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전혀 흠이 없는 그런 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한다면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완전 성화를 이룬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합당한 성경 해석이 아니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땅에서 완전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2의 내용인데, “이 성화는 전인격 속에서 이루어진다(살전5:23). 그러나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여, 모든 부분에서 여전히 부패의 잔재들이 다소나마 남아 있다(요일1:10, 7:18,23, 3:12). 이 때문에 계속적이고도 화해가 불가능한 싸움이 일어나고, 육체의 정욕이 영을 거스리고, 영이 육체를 거스리게 된다(5:17, 벧전2:11).” 특히 이 땅에서 불완전하여, 모든 부분에서 여전히 부패의 잔재들이 다소나마 남아 있다고 할 때 인용하는 성경구절을 보면, 요한일서 1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로마서 7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먼저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23에서는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빌립보서 3 12 말씀도 인용하는데, 얼마 전에 확인한 바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대표적으로 세 구절을 인용했지만, 사실 성경을 보면 훨씬 많은 내용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완전성화를 지지하는 듯 보이는 구절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요한일서 3 9의 말씀인데, 거기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외적으로도 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오늘 본문에 근거하면 내적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청결한 마음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럼 조금 전에 언급한 요한일서 1장과 요한일서 3장은 모순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결코 모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결코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이 이 말씀의 저자이기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장은 결코 요한일서 1장과 반대되는 의미로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쉽게 설명하자면 그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 땅에서 완전히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할 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럼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성화의 길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끊임없이 성화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이것이 내적인 역사라면, 외적인 역사로서는 유형교회를 통해 말씀으로서도 역사하십니다. 때문에 결코 성화의 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기까지 죄와 싸우는 자,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자(12:4 참조), 그가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일서 3장은 이런 전체 맥락 속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이지, 완전성화를 지지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도 긍휼과 마찬가지로 점진적인 성화와 관련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즉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비록 완성된 성화의 자리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점도 있고 흠도 있지만, 바로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자, 그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만을 그 대상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고서는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러면서도 긍휼을 베푸는 자만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마음 수련과 같은 방법, 혹은 명상과 같은 내용이 유행처럼 있고, 시대가 점점 강퍅해 감으로 그런 마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할지라도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자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이 말하는 마음의 수련은 사람들 앞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외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근본적인 죄책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거되지 않았는데, 마치 마음 수련을 통해 깨끗이 하는 것처럼 있다면, 그리고 그런 마음의 수련이 외적으로 선한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미 그 사상 자체가 인간의 자기 공로적인 면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마음 수련과 같은 것은 매우 주의해야 할 내용입니다.

나아가 오늘 본문의 경우 조금 전에 말씀드린 요한일서 3장의 의미처럼 성도라면 마음이 청결한 자로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는 측면에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펴본 팔복의 모든 말씀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말씀으로 하자면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결하시고 순결하시기 때문에, 아니 거룩 그 자체요 점과 흠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로서 정결하고 순결하고, 또한 거룩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로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마땅한 바가 우리에게 없는 이유는 이 땅에서는 여전히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요, 좀 더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사는 성도들에게 그런 완전 성화의 내용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부패성에 대하여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 부패하기 전의 마음과 부패하고 난 뒤의 마음을 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생한 자의 마음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먼저 타락 이전,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의 그 마음이란 분명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1:27), 그런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 거룩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인생의 기초와 틀이 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3:10, 4:24). 따라서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의 마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이웃을 아는 지식이 있었고,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는 점을 염두해 둔다면 이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밖에 없지만, 제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이므로 그런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칼빈의 기독교 강요 1559, 1158항 참조).

 

그러나 그런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어떤 부분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전인이 타락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란 로마서 1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되었던 겁니다(1:2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 그대로,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상실한 마음 그대로를 내버려 두셨는데,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죄악 된 행동을 일삼게 되었던 겁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29-32) 앞서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으로 나타나야 정상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까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매만 맺더란 것입니다.

마가복음 7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15-16, 21-23) 마음으로부터 외적 행동이 나오는데, 이미 그 마음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다 이런 종류의 죄악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 9에서는 타락한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도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 가장 어리석은 것 중 하나가 그 마음이 죄로 말미암아 물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는 이상 인간은 어느 누구라도 그 마음의 부패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마음의 강퍅함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나 어떤 사상가들과 같은 경우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살펴야 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부패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철저히 부패되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고, 또 그렇게 선을 행하면 그것이 곧 자기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합니다. 특히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심히 부패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많이 부패했다고 봐서도 안 됩니다. 많이 부패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부패했습니다. 철저히 부패했고, 하나님 앞에서 선이라는 것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부패했습니다(13:23 참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보면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이런 전적인 부패성을 인정하지 않게 됨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있지만, 이것만큼 위험한 생각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악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요, 무엇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죄의 뿌리가 그 안에 있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인간의 전적인 부패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가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 환경을 개선시켜 주면 죄와 악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죄악만을 억제시키고 선하게 교육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합신 총회 공과 칼빈주의 5대 교리 1과 참조). 그러나 부패된 마음의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결단코 선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자만이 그 마음의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듭난 자의 선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분명 점과 흠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는 점과 흠이 있는 선조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으시는 역사가 있다고 알려주십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선으로 여겨 주셔서 받으신다는 겁니다.

특히 성경은 우리를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 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3 8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이 부분을 설교할 때 말씀을 드렸지만 성령의 자유로우신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 다시 말해 인간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거듭남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신비로운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성령으로 난다고 할 때 에스겔 3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6절과 27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가장 먼저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으로 들어와 우리 마음을 먼저 변화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변화가 말씀을 따르게 되는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한 자의 마음입니다.

그럼 중생한 자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만을 향한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이 이웃을 향하여 선을 행하는 그런 마음으로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에서 자기 마음 안에서 두 개의 법이 싸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7:21-23) 그래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쉽게 말하면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죄를 짓도록 만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거듭나기 전의 부패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분명 타락한 후의 마음 상태는 아니지만,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기에 굳은 마음은 아지만, 중생하였다고 해서 타락 이전의 마음 상태로 되돌아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지만, 중생 이후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고전3:16 참조) 마음의 청결이 마땅하지만, 이 땅에서 성도는 어떤 존재로 있느냐? 모든 부패성이 다 사라진 상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책은 제거되었으나 여전히 부패성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어떤 자이어야 하는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자들로서 그 마음을 더욱 청결하도록 하기 위하여 부단히 살피고 또 살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부패성만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성화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성화를 허락하지 않았는가? 에베소서 1장에 있는 내용으로 하자면 바로 그런 방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시되, 택하신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목적인 것이고(1:4),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1:6) 이 땅에서는 완전성화를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넘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단일한 의지로서 죄조차 그분의 지혜로서 작정하신 것입니다(5:20 참조). 죄에 대한 작정은 하시되 하나님이 죄의 저자가 되지 않도록 하신 지혜로운 역사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럼 죄로 인하여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면 굳이 죄 문제로 애통하거나 성화의 삶을 살 필요가 있는가?” 물을 수 있지만, 이미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완전성화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런 방식이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인 줄 알고 거기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족한다는 것이 성화를 위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살지 않기 위한 발버둥을 쳐야만 합니다. 단지 외적이 모습만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하고, 또 그런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야만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겸비함이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완전성화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부분적이긴 하나 성화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일부분이라도 성화의 내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특별히 그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교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의 경험이 증거 하는 봐와 같이 우리는 우리 마음조차 다스릴 수 없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청결한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는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유일한 답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잠언 20 9을 보시면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인간 스스로는 그 마음을 정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게 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분께서 마련하신 방편을 통해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은혜의 방편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대표적인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를 우리는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잠언 423절에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말씀을 하실 때 무엇으로 마음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잠언 4 20절과 21입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종종 이런 권면을 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신명기 6 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6:4-9) 먼저는 부모 자신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며, 나아가 자기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정당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나아가 이웃을 향해서도 정당하게 사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모습을 하면서도 그 속은 그렇지 않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겉과 속이 같은 그런 모습으로 이웃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마음과 상관없이 외식적으로 웃거나 잘 하거나 하는 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은 겉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다 포함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신명기 13에서는 이런 경고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13:1-3)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이 어떤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고, 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쏟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지 시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그런 분이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 하면서도 오늘의 운세 혹은 점을 치는 등의 일들이 기독교인들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일이 있는데, 이것은 이미 그 마음이 나누어진 상태입니다. 결코 청결한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단지 이것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것에라도 나누어진 마음이라면 그것은 결코 청결한 마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긴다고 말씀하기도 하는 겁니다(6:24).

지금 성경이 우리더러 마음의 청결을 요구할 때는 결코 두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한 마음일지라도 마음과 뜻을 다하는 전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없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바로 이런 마음의 상태가 되는 데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그것이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물리쳐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만 물리쳤던 것처럼 그런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귀는 무엇으로도 유혹했는가? 말씀으로도 유혹을 했습니다. 단지 다른 종교, 다른 세상의 사상만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정당한 말씀의 해석이 아닌 것들, 교회 안에 말씀과 상관 없이 들어온 것들을 다 정당한 말씀으로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뿐만 아니라 기도 역시 마음의 청결을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은혜의 방편인데, 바울을 통해 고백한 로마서 7장의 사람이 우리라는 것을 안다면, 다윗의 기도가 우리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죄가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휘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한 심령으로서 하나님께 정한 마음을 주십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34:18).

 

오늘 본문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시제로서는 미래형입니다. 즉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을 살피는 자들, 엄밀하게 말하면 그런 은혜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보게 될 것입니다(고전13:12). 다만 하나님이 영이신데,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2:9). 물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이것 이상의 또 다른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을 볼 수 있을 만큼 우리도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기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3:2) 우리가 누구와 같게 되느냐 하면 주님과 같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볼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완전성화를 넘어 영화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무엇을 권면하는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본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희미하다고 해서 희미한 것으로만 있느냐? 희미하기 때문에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성경은 희미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보이는 것보다 더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선진들이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더욱 사모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11:16). 보이는 것은 이 땅이지만, 그들의 사모함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나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자신 때문에 어떤 이들은 순교까지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보이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신앙,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인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리신 하나님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분의 존재를 본다고 할 수 있고, 또한 그분의 속성을 본다고 할 수 있고, 또한 그분의 일하심을 본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직접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확신을 가지기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성화의 열매가 없으면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신앙을 의심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게 됩니다. 물론 그런 의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은총의 내용을 의심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성화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매가 외식(外飾)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겉치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사람 앞에서만 행하는 그런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외적 열매가 없는 것도 주의해야 되지만, 외적 열매 때문에 내적 열매가 없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과연 마음이 청결한가? 혹 외식적인 모습은 아닌가? 아니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결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있는가?

무엇보다 신앙의 가장 기본인 말씀과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현재 교회의 형편상,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로 주일 오전과 오후에만 모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주일 여러분의 가정생활 속에서 말씀과 기도 생활이 소홀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6장에 있는 것처럼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또한 그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주일에 증거 된 말씀을 가지고 주일 저녁에 다시금 반복해서 알려주어야 하고, 또한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일을 하셔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동안 우리의 마음을 다른 데 다 쏟다가 주일에만 와서 잠시 하나님의 말씀에 그 마음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주일의 정신이 나머지 6일에도 미칠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 나아가 우리 신앙에 유익이 될 만한 책들을 통해 선한 열심을 쏟으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부탁드리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을 잘 사용하셔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바로 우리 마음, 우리 영혼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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