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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0712설교 / 마태복음5장10-12절 / 의를위하여박해를받은자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07.12|조회수56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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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오늘은 팔복 가운데 마지막인 박해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 보면 앞선 본문과는 달리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10절과 11, 두 번에 걸쳐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팔복이 아니라 구복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한 가지이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3절 이하 10절까지는 3인칭으로서 말하고 있는 반면, 10절에서부터 박해에 대한 내용을 다룰 때 10절은 3인칭, 11절과 12절은 2인칭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일단 오늘 본문 10절을 먼저 보시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살핀 말씀, 즉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열매와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긍휼을 베풀되, 마음의 청결과 함께 자비를 베풀면서 화평의 관계를 가진다면 어떻게 해서 박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가 생각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열매를 맺음에도 불구하고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비슷한 말씀으로 베드로전서 3에서는 이렇게 말씀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8절과 9을 먼저 보면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어떤 면에서 팔복 내용 가운데 긍휼과 마음의 청결 그리고 화평과 관련된 열매들이 나열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열매들을 세상 앞에 내놓는 것은 지난주에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의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지금 베드로전서에서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13에 보면 어떤 말씀도 있느냐 하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선을 행하는데 해를 끼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상적으로 보자면 마땅한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로 다음절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벧전3:14) 선을 행하면 해를 받지 않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팔복의 말씀을 살피면서 어느 정도 확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화평의 문제만 하더라도 하나님을 떠난 화평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과 상관없는 화평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는 진정한 화평이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익을 따라 구하는 화평은 진정한 화평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화평을 말하고, 거룩과 상관없는 화평을 말하고, 그리스도 밖에서의 평화와 일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이 자기의 이익을 위한 화평을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화평이 아닌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는 것이요, 때문에 성도를 향한 저들의 박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금 성경의 진술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것이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받게 되는 주된 이유인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것이 삶의 원리가 다르다고 할 때,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다고 할 때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도의 경우 의를 구하며 사는 자라면, 세상과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의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바로 그런 구별이 박해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의란 이미 우리가 팔복의 내용 가운데 네 번째 부분에서 살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바로 그 의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자 하실 때 말씀하셨던 바로 그 의입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3:15) 성화와 관련된 의요,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는 바로 그 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말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라고도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면 이 의와 관련해 이렇게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그러니까 의를 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서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박해, 11절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들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전서 4 15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그러니까 박해를 받는 것, 또 고난을 당하는 일에 있어 의와 상관없이 받는 고난과 박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살인이나 도둑질,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죄가 여기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죄라는 것 자체 의와 상관없는 것, 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이런 일로 인해 박해를 받거나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코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느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cf.벧전3:14), 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자(벧전3:17), 죄가 있어서 매를 맞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자,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것을 참는 자(벧전2:19-20), 바로 그 사람이 복된 자인 것입니다.

 

그럼 왜 저들이 의를 위한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싫어하고 박해까지 하느냐? 그것은 세상 자체가 의와 상관없기 때문이요, 이미 그들 마음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으로 가시면 이런 저들의 불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18-23)

여기 보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덮어 감추거나 삭제시키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가 만드신 만물에 보여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어느 누구도 그것만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스스로를 계시하시되 자연만물을 통하여 그분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셨지만, 창조주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자,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또한 감사하지 않는 모든 자가 바로 의와 상관없는 자, 불의한 자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그들이 행하는 바가 뭐냐 할 때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만, 자기를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만물의 으뜸으로서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할 바로 그 피조물들을 섬기는 모습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로마서 1장에 보면 의와 상관없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묘사가 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이 아닌 것이 그들의 마음을 채우게 되고, 또한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것이 그것입니다. 시기와 살인, 분쟁, 사기와 악독이 가득하며, 수군수군하며, 비방하는 것 등 이런 열매 외에는 맺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미 팔복의 말씀이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공로를 받아 누리는 자로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분이 우리의 지혜요, 그분의 우리의 의요, 그분이 우리의 거룩이요, 그분이 우리의 구속함인 것입니다(고전1:30 참조). 심지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참된 성도라면 이 땅에서 성화의 길을 걷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성화의 완성을 이 땅에서는 경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섞일 수 있는가 하면 근본적으로는 섞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6:14-16)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받은 바 그 은혜를 따라 긍휼을 베풀되 마음의 청결함으로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또한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박해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복을 빌어 주어야 하는 자들입니다(벧전3:9). 그러나 저들은 어떠냐 하면 앞서 로마서의 말씀대로 하자면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와 살인, 분쟁, 사기와 악독이 가득하며, 수군수군하며, 비방하는 것이 저들의 열매입니다. 이런 열매들로 화평을 이룰 수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이런 우리를 향하여 때로 세상은 박해를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저들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요, 좀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으로부터 철저히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5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8절과 19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23에서는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결국 세상이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인데, 그럼 왜 우리를 미워하는가?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있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간다면 박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되, 마음의 청결함으로 자비를 나타내고, 또 화평을 이루고자 한다고 해서 세상이 우리를 반겨주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편 2편에서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처럼(2:2) 우리 모두는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적대적이라는 것을 분명 인식하고 계셔야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는 말씀이 사실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런 박해에 대해서도 성경은 복되다고 말씀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왜 이것이 복인가? 천국이 바로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할 때 시제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 그것은 곧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부터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이미 천국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를 받을 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박해가 어떤 면에서는 천국 백성임을 증거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있다면 이 약속의 말씀을 원인에 대한 결과로서 이해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만약 원인에 대한 결과로서 이해하게 되면 자칫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박해를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이 공로가 된다는 것으로서 착각할 수 있는데, 지금 팔복의 전체 내용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은 천국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에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하여 알리고 있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미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는 그의 구별됨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박해를 받지 않고서도 천국 백성이라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되다고 하시면서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는 말씀은 박해를 통하여 지금 너희가 천국 백성임을 증거 하는 것과 같다는 그런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박해를 받는 것에 대하여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박해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12절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는데,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는가? 박해 자체만 생각해 보면 분명 고난과 어려움이 주어질 것이고, 그런 고난과 어려움은 기쁨과 즐거움과 상관없는 듯 보이는데, 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는 하늘에서 큰 상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혁자들은 성경이 상을 이야기할 때 그 상을 공로에 대한 상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모든 상은 은혜의 상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말미암은 상이라고 해서 고난 없이 상을 받을 수 있는가? 성경에는 그런 진술 자체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끌고자 하시는 자리입니다(8:17). 영광을 주실 것인데 영광 이전에 먼저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상을 주실 것인데 상을 받기 위해서는 박해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 상급인 이상 그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또한 그분을 최고선으로 알고 있는 이상 천국에서 받게 되는 상도 사실 자랑이나 비교를 위해 주시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상에 대한 이해를 마치 천국에서조차 비교할 수 있고, 또 자랑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기도 하는데, 매우 주의해야 됩니다. 물론 성도로 하여금 선한 열심을 내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이 은밀한 공로주의를 양산할 수 있다는 데 주의를 해야 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상이라 할지라도 공로가 아닌 은혜의 상급이며, 또한 그런 상조차 하나님이 최고 상급인 이상 하나님 자신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는 낫다, 낫지 못하다가 없을 것인데, 굳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에서 사는 성도들의 연약함을 고려한 것입니다. 팔복에 나타난 모든 약속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연약함 속에서 박해를 받을 때 하늘에 대한 상을 통하여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박해를 받고 또 그런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들을 바라보면서 이겨내길 원하신다는 의미에서 이런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 이런 약속을 통하여 약속의 성취될 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상을 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것처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만 합니다(3: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박해 가운데서 잘 견디기만 하면 상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공로의 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상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상을 주시긴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이 우리의 공로에 대한 상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의 상급입니다.

나아가 상을 받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최고 상급인 이상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상급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 상조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주신 자가 더 크신 분으로 있는 것이지, 상이 더 크지는 않는 것입니다. 아니 크다, 적다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말고 상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박해라고 하면 일단 두렵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을 싫어하는 것처럼 성도 역시 고난은 싫은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심정이 공통된 마음으로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인성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26:39) 물론 곧바로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했지만, 예수님조차 인성으로서는 연약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특성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좀 더 높은 곳에 두도록 하기 위해서 하늘 상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말씀으로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주어질 상급을 생각하면서 성도가 받아야 할 박해에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지금 평안하니까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평안할 때 박해가 있을 것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박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도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박해는 분명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것이긴 하지만 그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는 박해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 내 머리털 하나라도 나게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역사인 겁니다. 그런데 박해가 일어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 그리고 이 박해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도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있는 기록대로 하자면 사도 외에 많은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흩어진 것을 통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느냐? 흩어진 예루살렘 성도들이 두루 다니면서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큰 박해와 대 분산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새로운 시작이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8절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어떤 면에서는 박해로 말미암아 이 말씀의 일부가 성취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박해는 분명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행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런 섭리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섭리에 대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박해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어느 정도 가볍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박해에 대해서 세상과는 구별되기 때문에 받을 수밖에 없지만, 좀 더 근원적인 면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다. 특별히 성도 개인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하시고 거룩하게 하는 내용으로서 박해 혹은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욥기 23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23:10) 욥기에 대해서 몇 번의 말씀을 드렸지만 욥의 고난은 죄로 말미암은 고난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의하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벧전2:19). 어떤 면에서는 교회의 원수인 사탄의 박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 속에서 자신의 의를 변호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할지라도 사람은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고전4:4 참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책할 것이 없으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책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해서 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시간 속에서 방금 읽어드린 이런 고백을 하게 되고, 실제로 그 고백에 걸맞은 내용을 욥기 마지막 부분에서는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욥기 45 5에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본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 지식에 있어 풍성해 진 것이고, 그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좀 더 거룩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고, 또한 박해를 주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연단하여 좀 더 하나님을 깨달아 알도록 하며, 그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시편 119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히브리서 12 10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박해나 고난, 그리고 징계와 같은 것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거룩하게 하는, 한 마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박해나 고난이 올 때 우리는 그것만 봐서는 안 되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 즉 우리를 연단하여 거룩하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박해가 올 때 그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좀 연약한 면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박해나 고난 이후에 있을 상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서 영광을 위하여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8:17).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서도 말합니다(8:18). 때문에 우리는 그런 상, 그런 영광을 생각하시면서 이 땅에서 주어지는 고난과 박해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다시 보시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야간 더 구체적입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6:22) 물론 박해의 모든 경우를 다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욕을 할 것입니다. 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짓으로 우리에게 대하여 악한 말을 할 것입니다. 이미 그 마음으로부터는 미워할 것이며 또한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황하지 마셔야 합니다. 이것은 빛이 비췰 때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자면 오늘날 이런 일들이 과연 있는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으로 인해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욕하거나 거짓으로 악한 말 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자면 사실 이런 일들을 경험했다고 할 만한 것이 오늘날에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의 죄 때문에 욕을 들을 때가 있고, 또 교회의 잘못으로 인하여 욕을 먹는 경우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세상과 성도 사이에 이런 긴장이 항상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세상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싫어하고, 또한 거기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싫어합니다. 오늘날 보면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면서도 막무가내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논리 중에 일부 목사들의 잘못에 대하여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토대로 기독교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분명 옳지 못한데도 과하게 욕을 하고 악한 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를 어떤 동물의 이름을 붙여서 말하기도 하고, 또한 목사라고 하면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생각 중에 헌금 전체를 목사가 아무렇게나 쓴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적대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물론 잘못에 대하여 욕을 들을 때는 우리는 그런 부분을 교훈 삼아 더욱 주의를 해야 하고, 좀 더 말씀 편에 서도록 질책을 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교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입을 통해 교훈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 편에 서서 의로워지면 그런 비난이 사라지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교훈적인 의미에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과연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있는가를 우리 편에서는 좀 더 고민해야 될 때라고 생각이 됩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가고 있는가? 정말 그리스도의 그 의를 쫓아가며 살아가고 있는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는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말씀하기도 하는데, 그런 싸움을 싸워 나가고 있는가?

존 맥아더 목사님의 팔복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교훈을 하는데, 어느 정도 공감이 되어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세상의 태도가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의의 기준을 낮추었으며,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삶을 살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보다 관대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세상이 참지 못할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인기를 원하며, 유명해지길 원하며,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을 산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분개하고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박해를 받을 정도로 의롭게 살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실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해야 할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거룩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만이 우리의 규범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사고방식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들어와 말씀이 아닌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의 규범으로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팔복 이후 율법과 관련하여 말씀하시는 내용만 하더라도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의 해석을 통해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살인, 실질적인 간음을 행하지 않지만 노하며, 언어적인 폭력을 사용하며, 업신여기며, 마음으로 음란한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것 자체가 살인과 방불하며 간음과 방불한데, 그런 마음과 생각을 가지면서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생활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에 대한 애통이 없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의의 기준이 바닥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고 있지만 얼마나 세속화되어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도덕적 수준이 전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박해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구별됨이 전혀 없는데, 무엇으로 미움을 받겠습니까? 분명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고 말씀하신 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하였느니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야고보서 5 10에 보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미 구약의 참된 선지자들도 동일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본을 삼고 교훈을 삼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도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미 구약에서부터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온다면 인내의 소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더더욱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신약의 사도들과 수많은 개혁자들이 바로 우리의 증거요, 본인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박해는 죄가 없으셨는데도 마치 죄인처럼 죽으시는 그런 모습으로까지 있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사도들의 경우도 교회사를 통해 증거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자면 사도 요한 외에는 다 순교의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사로서 초대교회 당시에는 네로로부터 시작해서 열 번에 걸친 대대적인 박해도 있었는데, 그런 역사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본다면 참으로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있는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아니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가?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10:38)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16: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16:25), 우리는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내 목숨까지라도 드릴 각오가 되어 있는가?

여러분, 구약의 선지자들 그리고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개혁자와 성도들은 다 우리와 분리할 수 없는 보편교회의 지체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 우리 역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아담으로 시작해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택자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보편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우리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아니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일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끌고자 하는 자리가 바로 여기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한다.

 

말씀을 정리하기에 앞서 박해와 관련해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면 박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교회와 교회 사이의 박해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경우 세상이 교회를 박해했다면, 개혁자들의 박해는 교회가 교회를 박해하는 그런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박해는 진리의 문제와 결부되어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엄밀하게는 거룩이라는 구별됨도 진리로부터 오기 때문에 이런 박해 역시 의를 위한 박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는 바로 이 진리의 문제, 즉 가톨릭의 거짓 교리를 거부하고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서 박해를 받았고, 또 그 박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거짓 신앙을 고백하기만 하면 목숨을 빼앗지 않으리라고 말하지만,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들에게 주어진 그 신앙의 고백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거짓 신앙을 고백함으로 목숨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참된 신앙을 고백하면서 자기 목숨도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2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했다고 말하는데, 사실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은 것은 이런 진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선지자들은 누구로부터 박해를 받았는가?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지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라는 것입니다. 소위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경우 평강을 말했다면(6:14, 8:11 참조), 참된 선지자들은 그런 평강에 대하여 거짓 평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누구의 말을 더 좋아했는가? 자기 귀를 즐겁게 하는 자들의 말을 더 좋아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6)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거짓 선지자들을 칭찬했는데, 왜냐하면 자기 귀에 좋은 말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긍정의 힘과 같은 메시지를 좋아하는 것이고, 그것을 말하는 목사를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위 세상이 말하는 복을 증거 해 줄 때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또 그런 목사에 대하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외적인 박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원리적인 면에서는 세상이 교회를 싫어하는 것과 같이, 진리 면에서도 이런 일은 여지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쪽은 어디냐? 의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교회라 할지라도 한쪽은 성경, 한쪽은 신문을 든 그런 교회를 좋아합니다. 말씀만 외치는 쪽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세상이 요구하는 일에 발맞춰 나가는 그런 교회를 좋아합니다. 설교에 대해서도 뭔가 재밌는 설교를 좋아하지, 교리적이고 그런 교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그런 설교들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미 이것 자체가 박해입니다. 참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진리만을 외치는 그런 교회를 싫어하는 것이 이미 박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런 모든 일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박해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무리 큰 박해를 가하더라도 최고의 수준이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 이상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0:28).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누구시냐?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몸만 죽일 수 있는 대상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고, 구약의 선지자 그리고 신약의 사도, 수많은 개혁자들과 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의 은혜를 따라 목숨도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겁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진리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로마서 8장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7-18)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분리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에 앞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고난 없이는 영광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의를 위한 것,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은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잠깐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긴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7080년을 산다고 할 때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난의 그 연속이 어떻게 짧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우리의 감각보다 더 정확합니다. 잠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즉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더욱 완성케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것을 기뻐하셔야 합니다. 즐거워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길이 성도가 가야 할 길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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