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5장 17-20절
율법의 일점일획도 다 이루리라
지난 시간 우리는 성도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하신 말씀을 살폈습니다. 팔복을 통해서는 세상과는 철저히 구별된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다면, 소금과 빛으로 비유된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하여 성도는 어떤 자들인가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향하여 주는 존재라는 것이고, 무엇을 주느냐에 대해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좋은 것, 마태복음 5장 16절에 있는 것처럼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착한 행실을 주는 자가 바로 성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만 우리가 준다고 할 때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 어떤 외적인 행함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말씀을 드렸는데,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바로 그런 의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20절에 보시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외적인 행함으로만 착한 행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의와 같다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으로서 착한 행실이란 그런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착한 행실인가? 지난주 대략적으로 살펴봤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마음을 지키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살인하지 않았다, 간음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 마음이 음란한 생각을 하지 않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요,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시고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의인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5장 마지막 절에서는 어떻게 말하는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한 마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은 온전함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 때 이것을 마치 행위 구원의 논리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팔복 자체를 원인과 결과 식으로만 해석하면 안 되는 것처럼 이후에 나오는 모든 의와 관련된 내용, 즉 율법의 내용을 행위에 대한 구원으로 이해하게 되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사실과 멀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실제적인 율법의 해설에 앞서 서론 격이라 할 수 있는 오늘 본문이 갖는 중요성은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보면 ‘율법이나 선지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구약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약 하면 율법으로 대표가 되지만 그 율법을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선지자들의 글을 보면 율법과 전혀 다른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근거한 말씀, 율법을 해석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오신 것이 구약의 말씀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달리 말하면 구약은 율법으로도 대변할 수 있는데, 그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16절에서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도록 하라고 하실 때 “착한 행실이란 무엇이냐?”와 관련하여 율법이 등장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20절에서 비교가 되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의식한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자들인가 하면 그들 스스로 율법의 수호자라고 말하는 그런 부류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진의(眞義), 즉 참되고 바른 뜻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래서 거저 외식적인 면만 강조하는 그런 부류들이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치 율법을 파괴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철저히 예수님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그룹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아니 방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 모함을 아끼지 않는 자들이 바로 저들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장으로 가시면 안식일 논쟁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시다가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게 되는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으로 시비를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2) 또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이 있어 이렇게 질문합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10) 특히 이 질문의 의도에 대해서 성경은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박해의 한 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들의 의도대로 다 되지는 않습니다. 시비를 걸고 고발하기 위해서 따지고 묻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율법의 진의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악한 마음을 품게 되는데,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의논까지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2장 14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볼 때 예수님은 율법의 파괴자인 셈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복음을 전하며, 진정한 복이란 천국 백성이 되며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리고 산상수훈을 통해 그의 말씀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결코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는 말씀을 듣게 되지만(마7:29), 적어도 서기관과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그런 예수에 대하여 적대적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과는 다른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이 가르치고 있던 율법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실제로 율법과 복음,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다르게 혹은 대조적으로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 루터의 경우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여 보는 시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마치 지푸라기와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야고보서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다른 서신서들, 특별히 복음을 강조하는 서신서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열등한 서신서로 생각을 했습니다. 소위 종교개혁을 시작한 인물이지만 율법과 복음을 대조적으로 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사를 보면 좀 더 심각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유대교에 대한 반감, 그리고 물질세계에 대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당시 영적 지식이 최고요 물질적인 것은 악하다고 생각한 영지주의가 교회를 많이 어지럽혔는데, 그런 영지주의에 대한 영향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반물질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창조 자체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반유대교적인 사상이 그에게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유대교가 소중히 여기는 율법에 대하여, 그리고 구약 자체에 대하여 거부를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분으로 생각했는데,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만드신 분이시고, 모든 인류들 가운데 유대인들만 택하신 독선적인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구약의 하나님은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 마는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에 의해 피조 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신 하나님, 그렇게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철저히 구약과 신약을 나누고, 대조적으로 본 인물이 바로 마르시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보면서 구약과 다른 가르침, 율법과는 다른 가르침으로 본 자들이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보면 유대인들은 구약은 받아들이지만 신약은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믿고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서는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아셔야 하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유대교는 초대교회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마르시온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런 부류인 것입니다. 기독교하면 유대교로부터 나온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기독교 입장에서 보자면 유대교는 이단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영생과도 전혀 무관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17:3).
오늘날도 보면 알게 모르게 구약과 신약에 대한 이해,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 대조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꼭 대조적으로 보지 않더라도 구약과 신약이라고 할 때 마치 구약은 구원에 있어 뭔가 모자란 것 같고, 부족한 것 같은 인상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중교회 측의 사보이 선언서가 그러한데,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과는 달리 사보이 선언을 내 놓을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기본 틀로 하되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표출하고자 몇 군데를 변경하거나 첨가하거나 삭제하였다고 합니다(정지수, 성경과 하나님 지식). 특히 19장이 율법에 대한 것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9장 이전에 구원의 서정의 내용들을 다룸으로 율법의 제 3사용을 강조하여 성화와 삶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내용으로 말하고 있다면, 사보이 선언은 율법 다음에 제20장의 내용을 복음이라는 제목을 제시함으로 율법과 복음이라는 대조적인 구도를 의식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칼빈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은 구약과 신약을 결코 대조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 언약이기 때문에 뭔가 차이가 있거나 다르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형식에 있어서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나 본질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냐? 없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칼빈의 예레미야 31장 주석을 보면 ‘새 언약’과 관련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새롭다고 했는데, 틀림없이 그 모형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본체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 교훈의 본체에 대해서는 조금도 변경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여러분, 예레미야 31장 3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말씀하시지만, 옛 언약과 전혀 다른 새로운 언약이 아닙니다.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구원을 말할 수 있는가? 성령 없이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야 하는 율법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럼 실제로 짐승을 잡아 죽이는 그 일 자체가 저들의 죄를 사하는 것인가? 짐승의 피가 구약 백성의 죄를 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용을 담는 형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짐승의 피가 죄를 사한다는 것이 본질의 내용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입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럼 어떻게 해서 저들의 죄가 사해지는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지는 않았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지는 않았지만 이런 제사 제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방식으로 죄가 사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형식에 있어서는 분명 다르지만 그 형식 안에 있는 내용은 같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죄 사함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인 것입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되, 구약은 짐승을 잡아 죽이는 것을 통하여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봄으로, 또한 믿음으로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신약 백성들의 경우는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약의 죄 사함이나 신약의 죄 사함은 결코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라고 해서 구약의 백성들의 죄 사함이 신약보다 덜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신약의 백성들이 구약의 백성들보다 더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비록 형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고, 외형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기에 구약의 백성들의 죄 용서와 신약의 백성들의 죄 용서는 결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죄 용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리가 동일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옛 언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언약을 맺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분명 외형적인 면이 바뀔 것입니다. 율법이라고 할 때 의식법, 재판법, 도덕법이 있는데, 적어도 의식법이나 재판법의 형식은 분명 폐하는 성격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죄를 사하기 위해 제사 제도를 드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그런 재판법을 우리에게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체, 본질,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즉 구약이나 신약이나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형식적 원인이 필요한데,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음 또한 같고, 그 내용 역시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나아가 믿음을 가지기 위해 성령이 일하셔야 하듯 구약이나 신약이나 한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교회라는 말을 할 때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리스도를 한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 즉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여 부르신 모든 백성들, 이미 구약의 백성 뿐 아니라 신약의 백성들, 물론 여기에는 장차 믿게 될 모든 자들도 포함이 되는데, 바로 그들이 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약의 교회, 신약의 교회 다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까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복음을 증거 하실 때 그 복음은 결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과 하등 상관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오히려 저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여러분, 율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율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의식법과 재판법, 그리고 도덕법입니다. 의식법이라 함은 유아 교회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법인데, 이것은 모두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제사법이나 절기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재판법은 이스라엘 국가를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도록 한시적으로 주신 법인데, 이 법 역시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와 함께 만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의식법과 재판법은 분명 폐해지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왔다고 할 때는 의식법과 재판법의 형식은 분명 폐하셨지만, 여전히 그 정신이 도덕법 안에서 살아 있도록 하셨습니다(합신 총회 공과-소요리문답2 27과). 그래서 하나님은 의식법은 폐하셨지만, 제1계명에서 4계명에서 여전히 ‘예배와 경건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법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또한 재판법은 폐하셨지만, 제5계명에서 10계명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질서와 사랑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법으로서 가르치시는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의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법을 통하여 알리시고자 한 내용도, 그리고 재판법을 통하여 알리시고자 한 내용도 다 도덕법을 통해 유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만 형식적인 것만 폐하셨을 뿐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더욱 완전하게 하시며 더욱 분명히 하고자 하셨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을 보시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결국 율법은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요, 모든 율법을 다 이루어야 할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을 말한다고 해서 율법의 가르침과 상관없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율법과 대조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 안에는 율법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라고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 또한 사랑할 것을 명하십니다. 단순히 나와 가까운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일지라도 사랑할 것을 명하는 것이 율법이요, 바로 복음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이후에 보시면 율법에 대하여 당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밝히시면서 율법의 진의(眞義)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참되고 바른 뜻을 알지 못한 채 거저 형식적으로만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0절에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까지도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율법에 대해 형식적인 면으로만 해석을 했지만, 본래 구약의 율법은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매우 위선적임을 드러내십니다. 율법을 가르치긴 하는데 모양뿐이라는 것입니다. 겉만 치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전혀 복음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기 때문에 율법을 주실 때도 복음을 향하도록 주시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전혀 그런 방향으로 율법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의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며, 이후 본문을 보면 율법을 해석하시면서 미워해도 살인, 마음으로 음란한 생각을 품어도 간음이라고 하시는데, 과연 우리는 그 말씀 그대로를 지키고 있는가? 21절에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노하지도 말아야 하고, 욕하지도 말아야 하고, 업신여기지도 말아야 하는데, 여러분은 이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 있느냐는 겁니다. 27절에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음욕을 한 번도 품지 않았던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장담하건대 여기 계신 성도님들 중 율법의 의도대로 지켜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어떤 사람도 율법의 의도대로 지켜낸 사람이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들어가는데, 그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율법의 참된 뜻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시는데, 실제로 그 말씀 그대로를 지켜내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본성 상 조금만 건들어도 뚜껑이 열립니다. 심하면 좋지 못한 말도 내뱉습니다. 깔보는 건 얼마나 잘 하는지요! 완전히 우리 생활입니다. 음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 자체가 음란한 시대입니다. 보이는 것마다 음욕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TV 광고, 포스터 할 것 없이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둬야 될지 모를 정도입니다. 온통 우리의 눈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게 만드는 것 투성입니다. 음란한 것을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정당화하기 일쑤요, 처자들의 경우 왜 그렇게도 치마가 짧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른 모습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데, 과연 얼마나 여러분의 마음을 지켜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십계명 중 두 가지만 짧게 생각해서 그렇지 어느 계명 하나 제대로 지켜내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우리는 죄악에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지키려고 해도 잘 지켜지지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라는 말이 우리의 삶 가운데 뼈저리게 경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20절 말씀대로 하자면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단 말인가? 본문은 그런 뜻으로 말씀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두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21절부터 시작되는 말씀을 그대로 지키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의 또 다른 구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할 때 “율법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킴으로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의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먼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16절 말씀을 통해 알리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착한 행실이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뜻에서 율법이 해석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본문을 살필 때 좀 더 그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고, 오늘은 “천국에 들어가는 의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인가?”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들어가는 의란 율법이 가르치는바 바로 복음 안에 그 의가 제시되어 있다고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기능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분명 율법으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의 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드러낼 뿐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온전히 살아가기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더욱 드러낼 뿐입니다. 바로 죄를 죄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주요한 기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임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율법 자체가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디냐 하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복음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고, 나 스스로 이룰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율법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으로 향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개역한글에서 ‘몽학선생’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갈3:24 ‘초등교사’), 율법이 바로 그러한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라는 것을 가르치며, 그 의는 우리 스스로는 결코 율법을 다 완성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의를 이루시는 것을 믿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다시 보시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을 누가 이루십니까? 여러분이 이루십니까?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아니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19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비교적인 의미에서 작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작은 것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룰 수 없지만, 예수님은 이루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시는 겁니다.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흠이 있고,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불완전하며,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오류투성이인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백성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백성이 된다고 할 때 그 내용은 바로 이러한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보자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우리 편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도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듣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죽으심과 동시에 그분은 우리가 완성해야 할 모든 것을 친히 다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만 이때 주의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은 필요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율법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완성은 미래적인 일로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지만, 그래서 반드시 우리를 완성하시고야 말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땅에서는 완성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혹을 받기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하며, 죄를 짓기도 하는 등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율법은 우리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서의 기능을 믿음 안에서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율법의 제3사용). 즉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위하여 더욱 세워야 할 내용으로 있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할 때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비록 우리가 완전히 그 모든 율법을 다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죽음 이후에야 완전 성화가 이루어지겠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 지기 위해서는 이 율법이 우리의 나침반이요, 자요, 푯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이하에서 여러 가지 율법의 참된 뜻을 밝히시면서 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온전할 수 있어서 온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결코 온전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방향은 바로 이런 방향이라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치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택하신 이유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말씀입니다(엡1:4).
때문에 우리는 이 율법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의식법, 재판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도덕법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올바르게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 율법은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나아가 이웃은 사랑하고 있는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율법은 어디까지 말씀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살피시고 돌아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방향이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그 자리로 부르시는 우리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는 복음의 의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특히 복음은 믿음도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도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동시에 율법도 말한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율법과 복음, 대조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조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율법 안에 복음으로 향하게끔 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며, 우리 스스로는 결코 이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느 하나 율법을 제대로 지켜낼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신약 시대 때 오셨지만 이미 구약 시대부터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예표로서 나타나셨습니다. 때문에 구약의 백성이나 신약의 백성이나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으며, 천국 백성이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저들과 다르지 않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와가 저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다 폐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구약의 방식이 신약 시대까지 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덕법 안에서 그러한 의식법, 재판법들이 실행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완성된 모습이 보장되어 있지만, 그 완성을 위해 지금도 율법을 통해 교훈하고 또 교훈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신약 시대에 살기 때문에 복음, 예수 그리스도, 믿음, 의, 하나님의 선택,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니라 율법 또한 복음 안에서 정당하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비록 부족하지만, 또한 연약하지만, 점과 흠이 사라질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고자 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일점일획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실제로 다 이루셨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실수, 우리의 죄악 된 모습이 우리 삶에 분명 있을 것이지만, 때문에 회개하며 살아가야겠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을 결코 빼앗을 수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특히 다음 주부터 살피게 될 율법의 해석과 관련하여 우리는 실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이 말씀과 먼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좌절을 넘어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며, 또한 실제로 그런 삶으로서 더욱 진력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복음 안에서 더욱 담대히 주의 율법을 이루는 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