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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0920설교 / 마태복음5장43-48절 / 더나은의-너희원수를사랑하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09.20|조회수43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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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43-48

더 나은 의 :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지난 시간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잘못 해석하였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의 의미를 살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생명 존중의 원리가 거기에 있었고, 또한 공의 시행의 원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저들이 해석한 개인적인 보복과 복수의 원리가 거기에 있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공의에 대하여, 또한 모든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개인적인 보복과 복수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할 때 공적으로 세운 사람들을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시기도 하시고, 또한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보편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경우에 하나님의 기준인 율법에 따라 정당한 심판만 행해지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역사하시는 것은 맞지만 때로는 그런 역사 속에서 마치 숨어계시는 것처럼 자신을 숨기심으로 인간의 부패성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악한 자에 대하여 보복과 복수를 용납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대적하지 말라는 것이고, 단지 대적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선으로 그들의 악을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지난주 우리가 살폈던 내용입니다.

 

오늘은 지난주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내용인 동시에, 율법의 두 번째 돌판의 핵심을 알리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전체적인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도 밝히십니다. 우선 오늘 본문 43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율법 해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지난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에 대하여 저들은 눈에 대하여 눈만큼 보복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이만큼 복수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원수에 대하여 미워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이렇게 말할 때는 조금 더 구분을 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이웃의 범주와 원수의 범주가 구분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그 여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4:9)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는 상종하지 않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자면 사마리아인의 경우 이웃의 범주가 아니라 원수의 범주에 속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 19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도 듣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예수님의 경우 세리와도 가까이 하셨고 죄인들과도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입장에서는 세리와 죄인이 상종할 수 없는 자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웃의 범주에 속하는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유대인들은 철저히 이웃에 속하는 자와 이웃에 속하지 않는 자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속하지 않는 자는 다 원수가 같다고 여겼습니다. 가장 큰 틀로서는 유대인들을 제외한 사마리아인들, 그리고 모든 이방인들에 대하여 원수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럼 저들이 이렇게 구분해서 말했던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일단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율법의 두 번째 돌판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부분은 레위기 19 18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다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근거로 레위기 1918절을 말한다 할지라도 이미 그 말씀 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마치 없는 것처럼 당시 서기과과 바리새인이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 의아할 뿐입니다.

물론 레위기 1918절에서 말하는 원수란 이방인보다는 유대인에 속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정당할 것입니다. 즉 곧바로 나오는 동포에 대한 표현입니다. 동포이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원수와 여기서 말하는 원수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같은 동포로서 세리의 경우는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둘 뿐만 아니라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 세금을 과하게 거둠으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죄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 상종하지 못한 부류로 구분이 되는 그런 자들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동포이지만 원수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도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이웃의 범주, 원수의 범주라고 할 때 유대인은 무조건 이웃의 범주라고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해서도 원수의 범주 안에서 이해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네 이웃에 대하여 사랑하라는 말씀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말씀의 일부는 빼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의 근거는 어디 있는가? 이미 레위기 19장을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이 있을 뿐,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을 통해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때로 진멸하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저들과는 결코 섞일 수 없다는 등의 말씀을 통하여 저들은 우리의 원수요, 원수이기 때문에 미워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관주 성경의 구절을 보면 신명기 23장의 내용과 비교해 보도록 하고 있는데, 거기 보면 암몬과 모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23:6) 뿐만 아니라 시편의 기록들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 외에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마치 정당한 것처럼 비취지는 본문들이 더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을 통해서 의인과 악인의 분명한 대조가 드러나 있고, 악인이 의인을 대적할 때 의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악인을 벌하도록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을 벌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이웃 사랑과 만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편의 기록에서 악인을 벌해달라는 기도는 단순히 원수를 미워하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악인이 의인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 자신을 대적하는 것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편에서 악인이라 할 때는 하나님의 원수인 겁니다. 하나님의 의를 방해하고자 하는 자, 하나님의 거룩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 그들을 악인이라 칭합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유기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때문에 악인의 멸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지난주 말씀과 함께 생각하자면 결코 개인적인 보복이나 복수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미워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케 하신 말씀이요, 또한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편의 기록을 통해 그런 내용이 기록되었을 때 우리 역시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다른 성경의 구절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들을 진멸하라고 하실 때 어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구약 시대 때 그런 잔인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르시온이라는 이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죄에 대한 징계로서 이스라엘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에 대하여 이방인에 대한 진멸, 그리고 악인에 대한 심판과 같은 말씀으로 그 근거를 둔다면 그것은 이미 성경에 대한 정당한 지식에서 나온 해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들 스스로의 본성에 따라 자기 죄악에 대한 정당성을 위해서 이 말씀을 첨가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들의 해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4절을 보시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여기 보면 이웃 사랑에 대하여는 아무런 말씀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것 같아도 앞서 그들의 해석에 근거하자면 이웃의 범주 안에 원수는 제외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웃에 대한 정의도 실제로는 잘못 이해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한 말씀으로 이웃 사랑이라는 그들의 이해 범주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율법의 참 뜻은 이웃을 사랑하라, 즉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 이웃의 범주가 원수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실제로 조금 전에 살핀 레위기 19에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하면 저들이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이방인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합니다. 33절과 34입니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같은 레위기 19장에서 동포를 사랑하라고 하지만, 동포만이 이웃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같은 장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같은 동포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민족으로 볼 때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너희와 함께 살고자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누가복음 10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거기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게 되는데,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답변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대화가 오고갑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 듯 대화가 오고가지만 율법교사가 다시금 질문을 하게 되는데,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의 이면에서 자기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이 질문을 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는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시 저들로부터 어떤 말을 듣고 있었느냐 하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구분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1:19).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인과도 서슴없이 대화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도 이상히 여겼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4:27 참조).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어떠냐? 세리와도 상종할 수 없었고, 죄인이라고 불리는 자들과도 같이 할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해서는 짐승 취급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웃의 범주가 분명히 있었고, 원수의 범주가 분명히 있었던 겁니다. 바로 이런 저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고, 거의 죽음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 율법교사에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답변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니까 율법교사는 지금까지 이웃의 범주 안에 사마리아인은 제외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이웃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은 사마리아인도 이웃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제외시켜 놓고 있는 저들, 오히려 원수라고까지 할 수 있는 저들도 너희에게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약으로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말할 때 이웃에 대한 정당한 이해는 모든 인류가 그 대상으로 있다는 것이요,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본래 뜻으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 부분에 대하여 이웃의 범주를 제한해서 생각한다면 이웃 사랑의 실천이 그런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적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이웃의 범주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이 적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칫 이웃의 범주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가 가능할 위험도 있습니다. 이미 지난주 말씀을 통해서도 살핀 바 있지만 눈은 눈으로 갚을 수 있고, 이는 이로서 갚을 수 있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의미로서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을 주셨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인류에게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율법이 모세 시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모세 이전에는 율법이 없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모세 시대로부터라고 할 때는 기록된 율법으로서 말하는 것이지,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이 그 이전에는 없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창조로부터 도덕법이 인간의 마음 속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214절과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러므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이미 창조 때부터 아담과 하와 안에 있었고, 또한 그런 도덕법은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순종의 규범이었던 겁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아담 이후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저들 속에 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 죄요, 심지어 이웃 사랑의 정신과 상관없는 모든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더 없이 큰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도덕법과 상관없이 그 방향이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지적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44절을 보시면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사랑의 실천과 관련해서는 지난주 말씀으로서 적용해도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악한 자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에 대하여 선으로 대하는 것, 원수이기에 보복과 복수심이 나올 수 있지만 그런 마음을 가라앉히고 할 수만 있다면 친절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실천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지난주에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도 주고, 오 리를 가고자 하면 십 리를 가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이런 말씀을 오해해서 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무조건 따라 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에 관해 말할 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 그러니까 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불의가 아니라 진리가 그 방향이어야 합니다. 악한 방향이 아니라 선한 방향이어야 하고, 더럽고 추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거룩이 나타나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4절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너희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도 구체적인 실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팔복의 말씀 가운데 마지막 내용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악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우리의 본성은 분명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팔복은 그때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인간 안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웃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듯, 저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의 내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원수와 같은 자, 박해를 하면서 우리의 생명까지 빼앗으려고 하는 자들에 대하여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 앞에 그 영혼이 회개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그 본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23:34)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본을 따라 스데반이 처음으로 순교를 할 때 동일한 열매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60)

그러므로 성도는 원수라고 해서 미워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무엇보다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지금은 원수 같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그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게 되었을 때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지체로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 안에서 보자면 스데반이 죽을 당시 스데반 입장에서는 바울이 원수였습니다. 바울 역시 스데반에 대하여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스데반과 바울이 한 지체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였던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방식으로 하자면 원수로 여긴 그가 나중에 알고 보니 내 형제 자매요 부모였던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지금은 원수 같고, 그래서 미움의 감정이 일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가 내 형제요, 자매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런 미움의 감정을 가라앉혀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도리어 사랑의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 영혼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혹 그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모를뿐더러, 또한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본성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런 마음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사랑이 정확하게 오늘 본문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되, 그의 아들을 우리 대신하여 죽이시기까지 한 사랑을 실제로 우리가 받은 것 아닙니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5:10)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았다면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45절에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물론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 원수를 사랑해야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식으로서 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원인은 내가 원수를 사랑하는 거기에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1:12). 그리고 그런 믿음에 대하여 성경은 선물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2:8).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은혜이지, 공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로가 되는 것처럼, 그런 형식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역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라는 차원에서 말씀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48절로 가시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으로 연결이 되는 겁니다. 온전해야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로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설득하기 위해서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느냐? 45절 나머지 부분을 보시면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여러분, 하나님은 분명 마지막 때 사람들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의인에 대하여는 복을, 악인에 대하여는 저주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저들의 죄에 대해서도 거저 용납하시고 구원해주겠다는 그런 뜻은 여기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소위 일반은총이라는 그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비춰주십니다. 때로는 그것을 거둬 가심으로 하나님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또 부분적으로 심판을 행사하시기도 하시지만, 해와 비로 대표되는 그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베풀고 계시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의하면 네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고전4:7 참조) 지금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다만 여기서 죄악된 것은 제외가 되겠지만, 어쨌든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실력, 내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인간 스스로가 빼앗아 자기를 다 영화롭게 하는 있는 형태가 세상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심판만 하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 그렇게 관용하시면서 여전히 베풀고 또 베푸십니다. “하나님도 이렇게 하시는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너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46, 4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여기 보면 세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입장에서 세리는 죄인입니다. 함께 상종하지 못할 자입니다. 그런 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 역시 이웃의 범주 안에서만 사랑을 한다면, 즉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한다면 거기에 무슨 상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방인에 대한 언급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의 경우 이방인과는 상종하지 않지만, 그런 이방인조차 형제끼리는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너희도 그렇게만 한다면 이방인과는 구별된다고 생각하는 너희가 이방인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말씀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이고, 너희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마땅히 행하고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본래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로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시면서 우리를 아들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8:29).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한글 번역은 온전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완전함이 더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말하는 누가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데(6:36),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후서 14절에서는 신성한 성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전 번역에서는 신의 성품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과 같을 수 없고 세리와도 같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수준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를 어디까지 이끌고자 하시느냐?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이루기까지 우리를 이끌기 원하십니다. 때문에 우리 인생의 목표는 다른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존재냐 보다는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위치 속에 있느냐 여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 요셉을 쫓고, 또한 다니엘을 좇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생은 했지만 인생역전이라고 해서 결국에는 이방나라에서조차 높은 지위에 오른 그것이 마치 비전인 것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생각은 성공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길 원하시는 것이 자기 백성들을 향한 목적으로 있습니다. 왜 우리를 부르셨는가? 왜 우리를 영원 전부터 선택하셨는가? 바로 여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불러 주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1:6)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분, 성도라면 그들의 모든 인생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548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왜 율법을 주셨는가? 그리고 왜 율법을 해석하시면서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천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르침이라고 하셨는가? 그리고 그것을 주의하라 하셨는가?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는 데 있는데, 그들의 가르침은 그런 방향과는 너무도 멀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예 다른 길을 걷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경계하도록 하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율법의 목적인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방향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을 항상 우리 마음 가운데 새기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주의 은혜를 따라 열매 맺기를 구해야 하고, 또한 그렇게 살고자 하는 노력과 실천도 있어야 합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그런 열매가 조금이라도 맺힌다면 그 열매의 주체는 여전히 하나님이란 사실만큼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그 열매를 맺도록 친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0 말씀만 찾고 마치겠습니다. 7절과 8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여기 보면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거룩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너희가 내 백성이요, 내 자녀라면 거룩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하는데, 거룩의 방편이 하나님의 율법 ,좀 더 넓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라고 말씀하실 때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나인 줄 압니다.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것도 스스로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는 어떤 명령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전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것 하나라도 제대로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책이 제거되었지만 부패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 율법을 지키라고 해도 지킬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레위기 20장의 말씀으로 하자면 명령하신 자가 그 명령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온전함을 위하여 율법의 겉만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까지 지식으로 갖추어야 하고, 또한 그런 지식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 아래 우리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우리 속마음도 살펴야 합니다. 하늘 백성으로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3:5),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16:24). 거기에는 분명 인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207절과 8절 말씀을 대입해 본다면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전제되고 있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나는 너를 온전하게 하는 여호와니라는 이 말씀이 전제되어 명령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이 말씀이 부담이 되고, 또한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아는 자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러나 여전히 이 말씀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을 이루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이 아니라 소망을 가져야 하고, 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어진 명령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이런 이해 속에서 혹 악한 자가 있고 또한 원수 같은 자가 있을지라도 그들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대하시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래서 이웃 사랑이 조금 실천됨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더욱 가까워져 가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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