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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1101설교 / 마태복음6장9-10절 / 주님께서가르쳐주신기도①-서문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11.01|조회수69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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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9-10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 서문

 

오늘부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마태복음 6 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실례로 구제와 기도,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특히 기도와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보면 이런 맥락이 아니라 다른 맥락에서 주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신 것으로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1 1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그러니까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어느 한 제자가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에 의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주기도와 관련해 예수님께서 여러 번 가르치셨다고 한다면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즉 다른 배경에서 가르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가르치신 것이라면 한 번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 배경으로서 소개가 될 수 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인 순서로서만 배열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또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이미 마태복음 5장을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바가 있는 것처럼 두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복음서를 기록할 때 경건하고 성결한 생활 법칙과 관계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요점을 간단히 말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 다양한 기회에 말씀하신 내용을 한데 묶어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배경을 분명히 말하기도 하는가 하면,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것으로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앞뒤 문맥은 다를 수 있고, 또 배경도 다를 수 있고, 기록자도 다를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주 기도에 대한 내용을 우리가 살폈지만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것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하기도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면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쪽으로 우리의 논리를 펴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분명 구하기 전에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은 것도 주십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구하는 것보다 구하지 않는 것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얼핏 생각해 보면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또 구하지 않는 것도 주신다면 굳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있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라는 명령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특히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명하신 목적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더더욱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일하심에는 어떤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까지 역사하시는데, 그 과정 가운데 무엇을 두셨느냐? 기도라는 방편을 두셨습니다. 지난 시간 에스겔의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시면서도 기도 없이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주된 역할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기도가 방편이 되게 하셔서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하셔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본문은 기도하라고 하시면서도 기도의 내용까지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을 역으로 하나님은 아시지만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이고, 바로 그 뜻을 알려주시는 것이 주기도의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무엇이든지 다 기도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란 단순히 기도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위 주기도의 간구의 내용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고 할 때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해서, 다음 세 가지는 우리의 구원에 유익이 되는 것과 관련해서라고 말하는데, 그 모든 것이 내 소견에 옳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내용으로서의 기도란 것입니다.

  

간혹 보면 기도에 대하여 기도하는 자 쪽에 초점을 두고 무게를 싣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기도하기만 하면 괜찮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방언이라고 해서 성령의 언어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오랜 시간동안 기도하는 것이 마치 신령한 것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기도하는 자가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미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다시피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받는 자이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열쇠를 누가 쥐고 계시느냐?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주시되, 기도 여하에 따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는 하지만 기도에 대한 응답은 주실 수도 있고, 혹은 안 주실 수도 있고, 때로는 기다리도록 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내용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할 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없는 나란 아무리 많은 말로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기도의 내용이 헛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기도란 기도하는 자 쪽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반드시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의 뜻에 합당한 기도여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기도해도 괜찮다가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만 주께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은 어디까지를 말씀하시느냐? 빌립보서 2 13을 통해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1 2을 통해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시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에서는 반드시 빼야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 여기서 들어라는 단어는 빼야 합니다. 마음에 소원을 먼저 주시고 그 마음의 소원이 입술을 통해 나올 때 그것을 거절하지 아니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전 성경이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 (셀라)” 즉 입술의 구함보다 마음의 소원을 먼저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받아야지만 참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역대상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으로 하자면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는 고백이 사실이요, 진실이요, 진리의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내용조차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 아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앞서 기도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아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여야 하고, 지금 주님은 그 기도의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다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내용을 이 형식대로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도가 취해야 할 방향으로서 가르쳐주고 계시다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형식이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과 다르지 않는 방향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가 자신께서 불러주신 형식을 이탈할 수 없다는 식으로 우리가 꼭 사용해야 할 단어들을 여기에 기록하신 것은 아니고 자신께서 우리의 모든 서원을 지도하고 통제하는 가운데 모든 서원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지 않기를 바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정확한 기도의 규례를 주신 것은 낱말에 있어서가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주기도를 마치 주문식으로 많이 그리고 반복적으로 암송하기만 하는 것 자체는 거절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9절의 중간 부분을 보시면 소위 주기도의 서문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확인할 수 있고, 나아가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지체들과의 관계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의 대상은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자녀라는 것을 뜻합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도행전 17 28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이 말씀은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라는 도시에 가서 전도할 때 말했던 내용인데, 후반부에 인용한 내용이 바울 당시 아라투스(Aratus)라는 시인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아테네 사람들에게도 이 말은 꽤 유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보편적인 이해로 있었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아라투스라는 시인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할 때 라는 대상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해 가운데 시인은 분명 신의 소생으로서 이해하는 면이 있었고, 이것은 아테네 사람들에게도 생소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에 대한 이해 가운데 신의 소생이라는 이해가 있느냐 할 때 외면적으로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신다는 측면에서 모든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데 대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를 통해 가르치고 있는 아버지라는 말은 단순히 모든 피조물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시고 양자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칭호라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창조와 섭리를 통해서도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인류 가운데 죄가 들어오고 난 뒤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지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보이셨지만,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아 그분의 목적대로 살아가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1:13).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자들, 즉 영원 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되 유효적으로 불러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만한 가치가 우리 안에는 전혀 없는데, 오히려 아담의 타락 이후 본성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셔서 본질상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하여 죽이심으로 우리를 양자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 안에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한 살아갈 수 있는 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지금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에 성자가 아닌 성부에 대하여 아버지란 표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라는 칭호가 삼위일체 전체인지, 아니면 성부라는 한 위격만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주기도 해설과 관련해서는 항상 나오는데, 일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쓴 우르시누스라는 개혁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해설하면서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p.975). 먼저 어떤 이들이 아버지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성부께 아뢴다. 그러므로 성자와 성령께 아뢰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결론을 인정할 수 없다. 특정한 속성들이 삼위 중 어느 한 분(위격)에게 돌려질 때에 그 나머지 분들(위격)에게는 그 속성들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추정하는 것은 올바른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피조물과 대비하여 사용될 때에는, 그 이름을 본질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삼위 중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될 때에는 위격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라는 이름은 여기서 본질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1. 아버지라는 이름이 여기서 삼위 중 다른 위격과 대비하여 사용되지 않고, 그를 부르는 피조물들과 대비하여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9:6). 2. 삼위 중 어느 한 위격이 지칭될 때에라도 외형적인 활동과 역사하심을 언급할 경우는 다른 위격들이 제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만 기억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부만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자 또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96절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외적 사역에 있어 삼위일체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인데, 창조와 섭리 그리고 구속에 있어 성부 성자 성령이 분리되지 않고 일하셨다면 기도를 들으시는 일에 있어서도 분리되지 않은 한 분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피조물과의 관계 속애서 성부도 아버지시며, 성자도 아버지시며, 성령도 아버지이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0문이 이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고 명하셨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어린 아이 같은 공경심과 신뢰가 우리 기도의 근거이어야 마땅한데, 기도의 처음 시작부터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각성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되셨으므로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그에게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부모가 땅의 것들을 우리에게 주기를 거절하지 않는 것보다도 훨씬 더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각성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네바 요리문답(260)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주기도의 해석으로 넘어가 보자. 먼저 하나님께서는 왜 여기서 다른 이름이 아닌 우리 아버지라 불리우고 계신가?”

 

기도시 우리의 양심이 굳은 확신을 가져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한 마디 말로 불리워지실 때, 이 말은 다정함과 사랑스러움을 내포하고 있어서 우리의 모든 의심과 곤혹스러움을 제거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친숙한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해 줍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에서 이렇게도 말합니다. “이 한없이 다정한 이름으로 그는 우리 마음에서 모든 불신감을 없애려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사람의 선함과 자비를 초월하는 것과 같이, 그의 사랑도 육신의 부모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며 훌륭하다.”(32036)

 

여러분,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요, 본성적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로마서 8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4-15)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기에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다정함과 사랑스러움을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모든 의심과 곤혹스러움은 없는 것이고, 오히려 참된 믿음으로 구하되 마치 땅의 부모가 자녀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더더욱 자기 자녀들의 기도를 거절치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만 이때도 주의해야 될 것은 우리의 모든 요구에 대하여 거절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7으로 가시면 기도와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9절부터 보시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9-11) 세상 부모도 자식에게는 좋을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보편적이라면 하늘 아버지는 세상 부모보다 더한 사랑을 주셨는데, 어떻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는데(8:32) 무엇을 더 주지 못하겠느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더 좋은 것이 뭐냐?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11:13). 그러니까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되 우리 쪽에서 볼 때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좋은 것, 그것도 가장 좋은 것으로 성령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 본성대로 살지 못하도록, 오히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죽이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역사하겠다는 것이고, 이것이 성도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이요, 그분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상 부모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버지란 한없이 다정한 이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선을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죄와 상관없이 살 수는 없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기시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여전히 아버지라는 칭호에 대하여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대하여 자비와 친절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선하다고 여기시는 것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상 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도 보면 세상의 필요를 따라 구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를 찾았던 무리들처럼 우리의 기도가 그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만 봐도 세상을 것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는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거의라고 한 것은 네 번째 간구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 때문인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육적인 양식을 구할 수 있다고 해석하더라도 그 전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맞물러 있기 때문에 단순히 먹고 배부르기 위한 것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 그리고 가장 선한 것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다시 주기도의 서문으로 오시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자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한 몸이요 한 형제임을 의식하게 하는 말입니다. 비록 다른 시대에 산다고 할지라도, 또한 다른 장소에 거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지교회가 다를 수도 있고, 사람마다 지위고하, 빈부귀천, 남녀노소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다 한 몸이요 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하에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976), 첫째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살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라면 골방에서(6:6) 홀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온 교회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것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사적 기도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기도 역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의 방향과 관련하여 주기도를 말씀하실 때 사적인 기도든, 아니면 공적인 기도든 그 방향은 주기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주기도는 교회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즉 지위가 높든 아니면 지위가 낮든,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부자든 가난하든, 그리고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상관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과 방향이 우리 모두의 기도와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둘째 이유는 상호 간의 사랑을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은 한 몸을 이룬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또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5:44). 원수조차 그렇게 해야 한다면 한 몸인 각 지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 10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특히 우리는 두 번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 다른 형제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구하는 것처럼 다른 형제에 대하여서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구해야 하고, 또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자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형제의 어려움을 안다면 저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도 같이 기도해야 하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우리가 도구가 되어 응답을 받도록 하는 일에 동참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얻는 좋은 것이 모두 그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를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필요한 때에는 얼마든지 기꺼이 또 진심으로 서로 나누지 못할 것이 없어야 한다.”(32038) 다만 그때 주의해야 할 것은 주기도에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6:3).

참고로 칼빈은 구제와 기도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구제의 경우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도의 경우 아무리 먼 곳에 있다 할지라도 또한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32039 참조). 그렇기 때문에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가장 훌륭하신 아버지의 보호가 그들 위에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란 것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32038 참조).

 

이제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는데, 이것은 장소적인 의미라기보다는 땅과는 대조적인 의미, 특히 인간과 및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한다고 말씀하는 내용이 있는데(왕상8:27, 대하2:6), 하나님은 영이신 분으로서 어느 한 장소에 매여 있지 않으며 매여 있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무엇보다 높다는 의미와 더불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무한히 크고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또한 그분은 전능하시며 엄위하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것으로 말하는 것은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으며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손바닥 안에 있으며, 온 누리에 그분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으며, 그분의 섭리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특히 시편 115 3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하늘에 계시다고 할 때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이요, 그런 전능하심을 그분의 의지대로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너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시는데, 시편 115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을 보시면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0도 보시면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1도 동일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한마디로 하나님 외에는 의지의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4절 이하 8절을 보면 우상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우상은 뭐냐?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요,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마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은 무()와 같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를 때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에 매우 친근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근함이 무례함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우리는 땅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언제나 경외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이상 그 일을 이루시길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이루실 능력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들으시는데 듣기만 하고 실제로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런 분을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십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것에 대하여 제네바 요리문답(265)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 부가어가 필요한가?”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우리의 생각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을 배움으로써 그분을 육적이거나 지상적인 것으로 상상하지 아니하고, 그분을 우리의 이해력에 따라 측정하지 아니하며, 또 그분을 우리의 뜻에 예속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겸손하게 그분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보다 분명한 신뢰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만물의 통치자이시며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분보다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결코 육적이거나 지상적인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의 이해력에 따라 측정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분을 우리의 뜻에 제한시켜서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종합적인 의미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1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왜 덧붙여졌습니까?”

 

하나님의 천상의 위엄을 땅의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 또한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여 기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도 동일하게 말합니다(기독교 교리 강론, p280). “‘하늘에 계시다는 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기도 가운데서, 그 분의 위대하심에 대한 경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분은 가장 높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단지 이 땅 위에 기어가는 벌레와 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경배 가운데서 경건한 행위를 해야 하며, 이런 저런 생각들로 우리의 마음이 갈피를 못 잡아서는 안 된다.(4:16, 5:1, 1:5)

둘째로, 우리의 기도의 시간에, 마음과 바램을 땅에서부터 하늘로 들어 올려야 한다는 것과 하늘의 것들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은사들을 특별히 갈망하며, 하늘의 것들에 대한 수단이 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땅의 것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마치 그 분이 우리를 기꺼이 도우려고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에서 능히 그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115:3, 대하20:6, 103:19)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비록 땅에 속한 자로 살지만 하늘에 속한 자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 이상, 그리고 그분이 하늘에 계신 이상 세상 사람들 때문에 또한 세상의 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낙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경건의 형태가 바로 기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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