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태복음

150222설교 / 마태복음2장13-23절 / 애굽으로부터내아들을불러내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5.02.22|조회수508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13-23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러내리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통하여 경배 받으셨다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이시지만 예수님의 이름에서 알려진 것처럼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때문에 자기 백성들로부터 경배를 받아 마땅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자기 백성으로 칭해지고 있던 유대인들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동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더 심각한 것은 종교지도자들조차 경배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태어나는지를 구약 성경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께 나아가 경배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여 경배하도록 하신 역사가 있었는데, 그만큼 영적인 심각성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지난주 헤롯의 숨은 의도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7절과 8절을 보시면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느냐 하면 경배가 아닌 살육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모를 리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는가? 먼저 13절을 보시면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여기 보면 그들이 떠난 후라고 되어 있는데, 앞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떠난 사건을 말합니다. 물론 그들이 떠난 직후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중에 헤롯이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모든 남자 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하기 때문에 지금 이 일이 두 살이 되기 전의 일임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동방 박사들이 떠나고 난 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이 뭐냐?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어떤 명령이 주어지기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으라는 내용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이미 주의 사자를 통해 마리아 데려 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는 지시를 들은 바 있었습니다(1:20). 그때도 그는 즉각적인 순종을 보여주었는데(1:24),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4절과 15절 상반부를 보시면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밤중에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고, 그 말씀을 듣자마자 그 밤에 애굽으로 떠나갔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한 권세를 가지십니다. 성부와 성령과 동일한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인성을 취하셨지만 인성을 취하셨다고 해서 성부와 성령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도지 않은 채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성부와 성령과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느냐?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되,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류를 구원해야 할 분이 헤롯의 위협 앞에 요셉과 마리아의 도움을 통해 그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 보자면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칼빈).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될 사실은 무엇인가 하면 이런 어울리지 않는 일이 그분에게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분의 신성이 약해져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성을 취하신 뒤에는 인성의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 15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동정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 안에는 동일한 감정을 가지는 동감의 뜻이 함께 있는 단어입니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시는가? 이어 나오는 말씀처럼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분은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다 느끼시는 것입니다. 다만 죄는 없으신 것이 우리와는 다른 점으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기 예수께서 유한한 사람에 의탁하여 피하시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 그만큼 모자라기 때문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인성을 연약함을 따라 그렇게 하시는 것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칼빈 주석을 보면 그리스도의 공적 활동의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우리는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 마음속에 있는 그 깊은 생각을 다 아시고, 물론 모르실 수 없는 분이지만 우리의 한계를 따라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에게 경고하셔서 피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그분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와도 같은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고도 말씀하시는데,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있음을 알리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주목해서 살펴야 할 부분은 15절 하반부에 있습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그러니까 지금 주의 사자를 통해 헤롯을 피하여 가도록 하는 곳이 어디냐 하면 애굽이라는 것이고, 왜 하필 애굽이냐 했을 때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말씀이 어디 있느냐? 호세아 11 1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여러분, 호세아 선지자가 이 말씀을 할 때 그 대상이 누구냐 하면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특히 내 아들이라고 말할 때도 마태복음에서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출애굽기 422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심지어 호세아 112만 봐도 내 아들로 불리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만약 1절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한다면 2절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라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방금 우리가 호세아 112절 말씀도 읽었지만 이스라엘 역사는 출애굽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한 배역과 배반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런 저런 말들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출애굽기 19으로 가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부터 6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왜 하나님께서 저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는가? 본래 하나님은 모든 세계의 주인이십니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 내가 너희의 주인이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출애굽 시키신 겁니다. 그리고는 어떤 명령을 하시는가? 내 언약을 지키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성경 표현대로 하자면 내 언약을 지켜야지만 내 소유가 되고, 심지어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언약을 지켜야지만 내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역순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내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한 그 언약을 지키게 하시는 그런 역사를 펼치십니다. 그리고 지금 출애굽기 19장은 그런 의미를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가 실패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깝게는 분명 저들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저들로 하여금 회개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무엇을 교훈하시는 역사인가?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의 언약을 결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 말씀대로 언약을 지켜야지만 내 백성이 되는데, 너희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언약을 지킬 수도, 율법을 다 행할 수도 없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자격을 갖출 수 없다. 누구만이 언약을 성취하고 율법을 다 행할 수 있는가?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언약을 성취하고 율법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구원에 관한 모든 조건의 성취가 다 들어 있는데,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0절로 하자면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서, 또한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함을 주시기 위해서 의가 되신 예수님을, 거룩 자치이신 예수님을, 구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의 모든 역사는 실패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실패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결코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저들의 불순종이 있는 것이고, 그런 불순종에 대해 경고하시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교훈하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바로 인간 스스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구약 전체를 통해 알려주시는 겁니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지만(18:5),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구약 백성들은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여러 가지 예표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내다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예표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고 해서 본질이나 내용에 있어 덜한 것이 아니라, 신약 백성들과 동일한 내용과 본질로서 전혀 차이가 없는 구원을 저들도 받은 것입니다.

좀 어려울 수 있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이것입니다. 분명 외형적으로는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은 한편으로는 실패한 역사를 성취하는 뜻도 있지만, 그 실패를 구약 백성의 경우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는 그런 의미로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예표의 방식으로서 드러나 있었고, 실제로 구약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난 자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1:13). 그리고 그 구원은 신약 백성들에 비해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구약의 실패를 성취하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도 하지만, 좀 더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구약의 역사는 출애굽 하고도 불순종으로 광야 길을 걸었지만, 또한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끊임없이 불순종함으로 앗수르나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 가운데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출애굽 한 백성임에는 틀림이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 그들이 출애굽할 때 그들만 출애굽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도 그들과 분리되지 않은 채로 출애굽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때 성경은 머리와 몸의 비유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이듯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택자의 대표라는 대표원리와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신약에서야 비로소 증거 된다고 해서 구약 백성들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 아닙니다. 비록 유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긴 하지만 구약 역시 교회였고, 교회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몸으로 그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누구 안에서 나왔느냐? 누구와 함께 나왔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온 것입니다. 그 적용이 구약의 경우 성취보다 앞선 것이고, 신약은 성취하신 뒤 적용이 되는 방식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애굽이 죽음과 사망의 자리라면 거기서 출애굽 했다는 것은 구원의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가신 것은 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구원이라는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으로 내려가신 이유는 무엇인가?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기 위해 친히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어린 아이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구약의 사건을 보여주시기라도 하는 듯 애굽으로 보내시고 그곳에서부터 나오게 만드는 그런 역사를 보여주셨던 겁니다.

 

이렇게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가 한 밤 중에 애굽으로 떠나고 난 뒤 헤롯은 매우 잔인한 명령을 시행하게 됩니다. 16절을 보시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본래는 그가 박사들을 속인 것인데, 그 스스로는 자기가 속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히 분노합니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즉 그 근방에 있는 모든 지역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 아래로 다 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헤롯의 사악함과 잔인함 그리고 주도면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일이 예수님 당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출애굽을 위하여 모세를 출생하게 하실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 22에 보면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이처럼 지금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느냐 하면 출애굽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니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역사적인 출애굽이 아니라 영적인 출애굽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이 죄와 그 비참의 장소요 죽음의 장소라면, 출애굽은 새 생명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고, 그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지금 마태복음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출애굽을 하게 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사탄이 그리스도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는 그런 시도가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되, 사탄의 역사보다 앞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세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살리시되, 누구의 품 안에서 자라게 하셨느냐? 바로 히브리 남자 아이를 모조리 죽일 것을 명한 그 원수의 품 안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인 겁니다.

 

그런데 16절에 나타난 이런 잔인한 일에 대해서도 이미 예언된 바가 있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된 바를 이루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일단 이 말씀이 인용된 예레미야 31 15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여기에 대해 어떤 주석에는 18절에 에브라임이라는 말이 있어서인지 북이스라엘과 관련된 사건으로 풀지만, 칼빈이나 박윤선 주석을 보면 이 사건이 남유다와 관련된 사건으로 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5절 말씀을 18절에 근거해서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지가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한다고 말한 것은 바벨론 포로와 관련된 사건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유다의 경우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라헬이 그 자식으로 인하여 애곡한다는 것은 남유다로 구성되어 있는 베냐민 지파의 슬픈 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간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요, 선지자의 경고 속에서도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도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형제와도 같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하나님의 경고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라헬이 애곡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이 인용된 다음 구절인, 예레미야 31 16에 보면 회복의 말씀을 더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비록 저들의 죄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그와 같은 슬픔과 통곡이 예수님 당시에도 벌어졌습니다. 슬픔과 통곡 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런 위로를 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학살 속에서도 모세를 지켜주셨듯이,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셨듯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소망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뭐냐? 우리의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는 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소망이냐? 그것이 어떻게 위로냐? 그러나 여러분, 비록 많은 유아들이 죽었지만 아기 예수가 죽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위로요, 소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악인들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몸 된 교회 역시 그런 은총을 받는다는 것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를 보십시오. 분명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흘리던 눈물을 멈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모세를 통해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 구원의 역사도 보여주셨던 겁니다. 때문에 지금 이 말씀이 예언의 성취라는 것은 단지 슬퍼했다는 것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될 구원의 서곡(칼빈)으로서 있는 겁니다. 슬픔과 탄식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인 것입니다.

혹 죽은 유아들 가운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헛되지 않는 것은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혹 죽음 가운데 놓여 진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의 소망으로 있는 겁니다. 그 일을 위해 누구를 살리시느냐? 아기 예수를 살리셨던 겁니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헤롯이 죽게 되고, 헤롯을 피해 도망했던 요셉 가족은 다시금 애굽에서 나와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19절부터 21절을 보시면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여기에는 이전의 방식처럼 주의 사자를 통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이미 13절에서 본 것처럼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라고 한 그 말씀대로 요셉이 순종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지시하실 때 그 지시 또한 그대로 순종하고 있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순종이 지금 다 무엇과 맞물러 있느냐 하면 말씀을 이루는 역사와 맞물러 있도록 하신다는 데 있습니다(JS 설교 참고). 우리는 요셉의 이런 순종을 보면서 순종을 강조하기 쉽지만, 그러나 그런 순종이 무엇과 연결이 되어 있느냐 하면 말씀을 이루는 것으로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이루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순종의 모든 역사 이면에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더불어 순종보다 앞선 것이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최근에 기독교강요를 통해서도 배웠지만(1559, 31414) 순종을 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누가복음 17장에 있는 말씀처럼 그때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해야 하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17:10)는 것도 반드기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쨌든 요셉은 주의 사자의 말씀대로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헤롯의 아들인 아켈라오가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 사자가 다시금 어디로 가도록 하느냐 하면 나사렛이란 동네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22절과 23절을 보시면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그런데 이것도 구약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결국 오늘 본문에서 구약의 말씀이 세 부분으로 나오는데, 그 모든 말씀을 이루기 위한 역사로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있어서는 정확하게 어떤 말씀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칼빈의 경우는 나사렛이라는 단어가 구약의 나실인과 동일어로 보면서 나실인을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해석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렛으로 갔다는 것은 그분이 나실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실인에 대해서는 민수기 6장에 그 내용이 언급이 되고 있는데, 한 마디로 자기 몸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6:2). 특히 사사기 13을 보면 삼손의 생애를 우리가 볼 수 있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무엇을 위해 태어났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태어났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134절과 5을 읽어드리면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따라서 지금 나사렛으로 이동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인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라 할 수 있고,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는 역사는 결국 삼손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별된 그런 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본 이 말씀들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가장 먼저는 예수님의 모든 이동 경로들이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으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이룰 때 무엇을 사용하시는가? 요셉의 순종을 사용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가실 때 순종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순종케 하는 역사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순종 자체가 우리의 공로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종의 주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7:10)

 

나아가 오늘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으로 있다고 할 때 그 내용이 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호세아서의 말씀 인용이나 예레미야의 말씀 인용의 경우 출애굽의 역사를 재현하는 듯 한 인상을 우리가 받을 수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그런 출애굽의 역사와 동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애굽은 죄와 비참함의 장소입니다. 죽음의 장소입니다. 사탄의 나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그런 우리를 건져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친히 애굽으로 내려가셨으며, 애굽에서 나와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 옮기셨느냐?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자리로 옮기셨던 겁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켜 보호하셨다는 사실은 동일하게 그의 몸 된 교회도 반드시 보호하신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이나 신약이나 영적인 실상은 다르지 않습니다. 출애굽 하고 난 뒤 광야 40년을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호세아가 말씀할 당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실상, 그리고 지난 시간 우리가 살폈던 예수님 태어날 당시의 영적인 상태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출애굽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광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계셨고, 호세아가 말씀을 전할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확고하셨는지 친히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 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오늘 우리 시대에는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리스도를 헤롯의 음모 속에서 지켜 주셨던 것처럼 몸 된 교회 역시 그렇게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지켜 보호하신 것처럼 몸 된 교회 역시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을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는 모세를 죽이고자 하는 대적의 손을 통해 키우기도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단지 모세에게만 한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명심하시고 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로마서의 말씀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1-32)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