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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0124설교 / 마태복음6장31-34절 / 먼저그의나라와의를구하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6.01.24|조회수674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631-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인생의 책임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녀 된 자들의 주인이지,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주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시기 위해서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들풀과 같은 것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조차 먹이시고 입히신다면 모든 피조물보다 사랑을 받고 있는 너희는 더더욱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도 섭리하신다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너희는 더더욱 하나님의 다스림과 보호하심이 있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시고 또한 구속하신 자들에 대하여 특별한 섭리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은 없다. 비록 세상 가운데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의 뜻은 항상 선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무엇까지 고백하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지난주와 연관해서 재차 말씀하시고 교훈을 주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31절과 3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1절의 경우는 지난주 살핀 25절의 전반부 말씀과 동일합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32절의 경우는 지난주 살핀 내용과는 달리 또 다른 교훈을 주고 계시는데, 지난주에는 인격적인 피조물이 아닌 것으로 교훈했다면 오늘 본문은 인격적 피조물로 끌어올리셔서 교훈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난주에는 공중의 새, 그리고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라는 것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너희는 이방인과는 분명 다른 존재다. 구별된 자다.” 이런 식의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소위 일반은총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마태복음 545절에 기록된 것처럼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비록 그들 스스로 노동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 노동에 대한 대가로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의 노력과 애씀의 결과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한다고 생각합니다. 해가 비치는 것, 그리고 비가 내리는 것,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하늘의 뜻이라고 하면서 어느 정도 그들 안에 있는 종교성이 표현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종교성조차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숨은 것처럼 부정이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종교성이 표현되었던 과거가 더 낫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교성이라 해 봐야 미신적인 것으로만 있고, 또한 그런 종교성이 있다고 해서 참되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날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신이란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유감으로서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뭐냐? 이방인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 가운데 있고 또 그 가운데서 살지만,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은총의 내용을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인 줄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은 자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은총뿐만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까지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할 때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신다는 것도 아는 자들입니다. “아들조차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는데, 무엇을 더 아까워 하시겠느냐?”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32절에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저들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심지어 들풀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매일 먹고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와 걱정, 근심에 붙들려 살 수밖에 없는 자로서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문제로 있고, 그 문제 때문에 그것만을 주목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아니 좀 먹고 살만하면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로 여전히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든 피조 세계를 하나님 홀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며, 특히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는 세상의 아버지와는 수준 자체가 다른 분으로서, 로마서 표현대로 하자면 아들도 아까지 아니하고 내어 주신 이가 다른 것 아까워할 이유가 없는 분으로서 우리를 대하신다는 것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때문에 너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32절에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는 말씀까지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만드실 때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으로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요, 그런 자로 하여금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옷을 입고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죄로 인하여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것이 처음 옷을 만들었을 때의 용도였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입히심으로 그분의 은총을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너희에게 옷이 있어야 할 것을 모르시겠느냐는 겁니다.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그런데도 염려하느냐?

 

결국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는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귀하다는 것이요, 특별히 이방인과는 구별된 존재로 불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왜 이방인과 다른 존재로 부르셨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이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나 이런 말씀 앞에서도 우리의 불평, 불만은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는 하나님께서 왜 이것밖에 주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의도와 뜻을 알기보다는 끝까지 자기 입장, 자기 형편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자기 소원이 더 우선시되더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일 때가 많습니다. 세상적으로 잘 되어야지 하나님께 영광이지, 그렇지 못한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그분의 뜻, 그분의 의지대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뜻을 정하시고 그분의 의지에 따라 행하실 뿐입니다. 우리의 소원대로, 우리의 욕심대로 그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은 분명 없지만 그분의 뜻, 그분의 의지가 앞선다는 것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로 있습니다.

실제로 시편 115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115:3)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어떻게 행하시는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요, 그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드시는 데 있지, 이 세상 복의 유무에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으로 잘 되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입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팽배해 있는 모습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예로 직분자를 세울 때 성경은 그 기준과 관련하여 성령의 열매와 관련해서 말씀하고 있지, 재물이 얼마나 많은가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내적인 모습과 또 가정생활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성령의 열매가 있는가를 외적으로 확인하도록 제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세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외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확인하고, 그런 자를 세우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적지 않은 부분이 교회 재정에 보탬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장로로 세우길 원합니다. 그래서 한때 어떤 말까지 들은 적이 있느냐 하면 돈이 없어서 장로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굳이 이런 예가 아니더라도 가난한 것보다는 부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깔려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잘 되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는 인간 스스로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요, 자족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종교들처럼 신을 통해 세상적으로 내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한번도 그런 것이 목적이 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그런 내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구약의 방식이 외적인 복으로서 확인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순종하도록 만드시기 위해 그런 방식을 취하셨을 뿐입니다. 구약의 교회는 마치 유아 교회와 같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취하셔서 설득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외적인 복이 궁극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그 순종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목적이었던 겁니다. 반면 신약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순종한다고 해서 외적인 복을 주시고, 불순종한다고 해서 외적인 복을 다 빼앗아 가는 방식이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외적인 복으로 우리의 신앙을 확인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외적인 복이 있어야지만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도 멈추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땅의 것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것을 위해 사는 자요, 세상의 것을 얻어 하나님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세상의 것을 잃더라도 하나님의 것을 얻기를 즐겨해야 하는 자들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을 향하여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느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11:13)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증거되고 있는데,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백성들을 예로 들고 있기 때문에 이미 구약 백성들조차 그러한 삶을 살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한다는 것,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와 같이 이 세상의 것으로 인해 걱정, 근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는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33절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고 말씀하시는데, 한 마디로 성령의 열매를 구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우리의 방향이어야 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영광에 속하는 모든 것을 그의 나라와 의로 표현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것을 구하고 목표로 삼는 것이 우리의 방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매튜 풀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주석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너희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고 애를 써야 하는 주된 것은, 어떻게 하면 하늘에 닿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며, 너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할 것인가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요,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요,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것이란 것입니다.

 

신명기 8으로 가시겠습니다. 7절부터 보시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8:7-10) 여기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곳에서는 먹고 마실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알리십니다. 광야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로 많은 걱정을 했고, 또 그런 걱정이 불평, 불만으로 나왔다면 장차 들어가게 될 가나안은 전혀 그렇지 않은 곳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요,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알고 계신다. 그러니 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는 바로 그것 때문에 교만하게 될까 자신을 잘 살펴야 한다는 의미로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11절부터 다시 보시면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8:11-16)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적인 축복으로만 인도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먹고 마실 것이 넘쳐나면서 그것으로 인해 교만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은 광야와는 달리 그들의 노동이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광야에서는 노동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을 통해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그런 기적의 역사가 그쳤습니다. 일을 해야 했고, 수고로 말미암아 거둬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노동, 자신의 수고가 부각될 수밖에 없고, 결국 그런 노동과 수고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만이란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만은 무엇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이 복은 분명 가나안 땅에 대한 복입니다. 어떻게 보면 광야에서의 걱정꺼리를 뒤로 할 수 있는 복, 좀 더 쉽게 말하면 노동한 만큼 얻고 노력한 만큼 누릴 수 있는 그런 복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해진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진정한 복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복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긴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복인가? 이미 신명기 82절과 3에서 이렇게 밝히신 바가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분명 가나안 땅이 복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인지 이미 광야에서부터 가르쳐주고 계셨던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의 내용인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유효한데,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17절과 18입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제시하는 복은 세상의 복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이미 구약을 통해서도 알려주셨습니다. 이 축복을 빼앗길 것 같으면 세상의 복은 안줘도 그만인 것이 하나님 입장인 겁니다. 왜 세상적인 축복을 주느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세상적인 축복을 앗아가시는가? 그것 역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욥의 고백이 정확하게 그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주시든, 주신 것을 거두시든 하나님이 주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만이 찬송을 받으셔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세상적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란 겁니다.

 

여호수아 24으로 가시면 거기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13절부터 보시면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24:13-15) 지금 여호수아가 하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아무런 노동 없이, 아무런 애씀 없이 얻을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할지라도 정착하며 살 동안에는 심어야 하고,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맨 처음 정복과 정착을 할 때는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심고 거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말하는 성격이 정확하게 모든 인생 속에서 증거 되고 있는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방금 신명기 말씀을 통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말하느냐? 14절에서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절에서는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마태복음 6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때문에 너희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편을 택하는 것이고, 진리가 아닌 거짓에 대하여는 멀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분만을 섬기는 것, 그리고 그분이 명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 순종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있는 것처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유리문답 제1문에서는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만을 즐거워하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줘서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분 자체만으로 즐거워하는 것, 그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살핀 바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최고 상급이시기 때문입니다(15:1 참조).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인 이상, 하나님의 우리의 아버지인 이상 다른 것이 없더라고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고백까지 가능했던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오늘 본문 33절 후반부에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무엇이 주된 것인가를 알라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후자를 위해 전자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후자는 너희가 생각해야 할 내용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그러니 그것에 대한 생각, 그것에 대한 마음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때문에 염려꺼리가 전혀 없을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한 날의 괴로움이 우리에게는 분명 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건강상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인 어려움만이 아니라 마음의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염려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맺으란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염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내일을 위한 염려로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염려가 많다는 것입니다. 한 날의 괴로움이 분명 있지만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내일에 대한 염려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는 일용할 양식만 구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말씀하시니까 내 욕심대로, 내가 소원하는 대로 다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사는 자임을 알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욕심은 내려놓으라는 의미에서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을 마지막으로 찾아보겠습니다. 31절과 32입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마태복음에는 없는 표현이 있는데, 32절입니다. 여기 보면 적은 무리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사는 자가 그만큼 적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비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그만큼 적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는 좁은 문, 좁은 길을 말하면서 그 길을 찾는 자들이 적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칼빈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는 부분에 대해 이렇게 주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적은 무리라는 말을 여기서 일부러 사용하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는 소수라 해서 하찮은 것으로 취급을 받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들을 그렇게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이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는 자가 적을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조차 그러한 길에 대하여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길 수 있고, 재물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대하여 소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수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소위 대세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따라 가야 하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의 것,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것, 하늘에 속한 것, 그것을 주기시를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구해햐 할 것은 세상의 것,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바로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도 구할 수 있지만, 거기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가난하다 할지라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고, 혹 하나님께서 풍족함을 주신다면 그런 풍족함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자신을 살피고 또 살피셔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악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먹고 마시는 문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8장을 통해 증거 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탁월함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피조물과는 전적으로 차별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를 위해 사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식, , 거룩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인생의 기초와 틀이 되도록 지으셨습니다(3:10, 4:24 참조).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에 대하여 다스릴 수 있는 권한도 주셨습니다(1:27-28 참조). 물론 죄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도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택자들 만큼은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지식, , 거룩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인생이 기초와 틀이 되어야 하고, 나아가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역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니 믿는다고 말하는 신자들 가운데서도 물질이 그 마음을 차지하고, 세상의 것들이 그 마음을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목표요, 목적이요, 추구하는 삶의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것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주인으로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에 합당한 열매들만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추구해야 할 삶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잘 되고 못 되고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삶에 대하여 소홀해도 좋은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에 대하여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삶에 대하여 이 세상만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것만 추구하면서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 삶의 목적이어야 하는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분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구하며 사는 것, 그분의 영광 때문에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도록 우리를 살피며 사는 것, 비록 세상 삶 속에서 염려되는 것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그 모든 것에 대해서도 책임져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사는 삶,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 부족한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족하면서 사는 삶,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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