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7장 7-11절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자비가 없는 비판, 단지 정죄를 위한 비판에 대해서는 금하셨지만, 모든 비판을 다 금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위협하되 진리의 자리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경계하셨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성도와 교회는 분명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 자비하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진리를 버려도 좋다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언제나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고전13:6). 이것을 놓치게 되면 인본주의적 세상 종교와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한편 진리에 대한 분별과 진리를 따르는 일, 그리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모든 삶의 내용들은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기도가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 보면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한 가지입니다. 기도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라는 이 권면의 말씀을 통해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것도 스스로 충족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지으신 날은 여섯 째 날입니다. 그 이전에는 어떤 면에서 만물의 으뜸인 인간을 위해 만드신 것들이라 할 수 있는데, 시편 104편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높은 산들과 바위는 셋째 날 만드신 것이라면 산양이나 너구리는 다 여섯째 날 만드신 것들입니다. 즉 앞서 만든 것들은 다 이후에 만드신 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모든 만물은 맨 마지막에 창조된 인간을 위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창조의 목적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러한 목적으로서 창조하셨고, 또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간 창조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난 뒤 그것을 마치 선물로 주시듯 그렇게 맨 나중에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창조의 순서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뭔가? 인간이란 맨 처음부터 그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어떤 것도 스스로 마련한 것이 없다. 오히려 처음 창조의 역사부터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선물의 성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만물의 으뜸으로 만드셨고, 또 만물의 으뜸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셔야만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이렇게 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조의 역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창조 이후는 그렇게 말할 수 없지 않는가? 왜냐하면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문제는 인간의 노력과 열심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알리고 있는 더 근원적인 사실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주체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충족시키며 사는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을 통해 드러내시는가? 성경의 역사를 통해 보자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만나로 증명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누가 채워주느냐? 하나님이 채워주셨습니다. 광야뿐만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만나가 그치고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고 수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고와 노력도 누가 주시는 것이냐?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8) 시편 136편 25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고 계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차원입니다. 너희는 너희 스스로가 충족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너희는 너희 스스로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 구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베풀지 않으면 너희는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다. 때문에 성도는 어떤 자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무엇 하나 내 놓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아는 존재입니다. 혹 내놓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죄 외에는 없다고 고백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5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고 로마서 11장 36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즉 모든 만물은 주님을 빼 놓고는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앞선 내용과 함께 생각해 볼 때 인간 스스로 죄악에 빠졌기 때문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죄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 그가 믿음으로서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의를 내 놓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다 주님께서 시작하시고 인도하시되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이 있기 때문이지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런 이유에서 로마서 11장 마지막 절은 어떻게 말하느냐?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그가 주체요, 모든 것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살고자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뱀을 수단으로 하여 사탄이 사람을 최종적으로 시험할 때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그러니까 마귀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너희가 비록 피조물이지만 피조물의 성격을 버리라는 유혹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채워라. 하나님을 떠나서도 살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시험의 결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해 분명히 보여 알려졌지만(롬1:20) 끊임없이 그것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히려 피조물을 조물주 위치에 올려놓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모습으로 있다고 증거 하기까지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걸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뭔가를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하되 적극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로서 반복하고 있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기도하는 자여야 합니다. 다만 오늘날 보면 기도에 대한 강조가 은밀한 공로주의적인 이해 속에서 언급될 때가 많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기도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 줄 알기에(고전4:7) 주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주께 의탁한다는 차원에서, 범사에 그를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우리는 항상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 좀 더 근원적인 것으로 끌어 올라가고자 하는 면이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근원적인 면에 대한 강조가 역으로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해서 소홀해지기도 하는 현상들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개혁교회라고 하면 어떤 인식이 있느냐? 기도가 약하고 전도가 약하다는 인식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 근원적인 면에 대한 강조가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강조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부분에 대해 소홀해도 괜찮은 것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을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다 하시니까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이끌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것에 대한 강조가 역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단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분명 더 중요한 것이 있고 그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모든 내용이 나타나면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부각되는 그런 방향이어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기도하라는 말씀뿐만 아니라 그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약속까지 우리에게 더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그렇게 의지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세상이 말하는 신들은 다 죽은 신이요,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시편 115편에서는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합니다(시115:4). 때문에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시115:5-7). 실제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싸울 때 바알 선지자들은 지극정성을 다해 그들의 신을 불렀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고, 그래도 안 되자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기까지 하면서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85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부르고 외쳤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응답해 주셨습니다.
물론 이런 기록에 근거해서 오늘날도 이런 동일한 역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동일한 기적의 역사가 오늘날도 있는가? 우리는 계시의 방식으로서의 기적은 더 이상 없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살아 있는 증거를 보여줘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내 입을 막아봐라.”고 할 때 그에게 어떤 형태로든 진노를 내리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뭐냐? 엘리야 시대 때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으로 계시다는 사실입입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느냐?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를 의지하는 마음을 아뢰어야 합니다. 너는 그를 범사에 인정하라는 말씀처럼(잠3:6) 그분을 인정하는 자세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께 의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혹 기도하지 못하고 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만 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구하기도 전에 주시는 겁니다. 다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다 하시지만 피조물인 인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더욱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 노력, 내 열심이 들어갔기 때문에 나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은 기도하라고 명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순히 기도하면 기도한대로 다 응답하시겠다는 의미로서만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백성을 위해 도우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도와 주시느냐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부분 오늘 본문을 통해 마치 공식이나 되는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받는다!”, 또는 “지극정성을 다해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물론 완전히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성경이 기도하라고 할 때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편에서 기도하라는 건 하나님만이 의뢰의 대상이라는 데 있지, 내가 기도하면, 그것도 간절히,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내가 소원하는 모든 기도대로 응당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뭘 말씀하시느냐? 9절 이하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그러니까 너희가 구하는 대상은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그 아버지를 누구와 비교하느냐 하면 이 땅의 아버지를 비교합니다.
우선 이 땅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 했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했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세상의 아버지 상입니다. 물론 오늘날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상실한 그런 아버지 상을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 아버지의 경우 자식을 해하기도 하는 그런 뉴스들을 접하기도 하고, 그런 소식을 통해 매우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자면 아무리 악할지라도 자식에게만큼은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세상에서의 아버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아버지와 비교할 수 없는 하늘 아버지는 어떠하겠느냐? 그것이 지금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실제로 세상의 아버지와 하늘 아버지를 비교해 보자면 능력의 면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떡을 달라 했을 때 떡을 못 줄 수도 있습니다. 생선을 달라 했을 때 못 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 인간이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존재요, 뭐든지 하고자 하는 대로 가능한 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큰 것을 바랄 때 큰 것을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을 해 줄 수 있지만, 그 능력을 넘어서면 해 줄 수 없는 게 세상의 부모입니다. 때문에 인간 부모는 자녀의 소원을 이룰만한 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며, 그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못할 것이 없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성도들의 아버지이십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간구와 소원에 대해 들어주실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실 때 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구하는 것 그대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간구와 소원에 대해 그대로 다 들어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는 바가 세상적인 말로 하자면 떡과 생선이 아니라 돌과 뱀을 달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키우거나 혹 키우신 분, 아니면 어린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 가 보면 아이들이 항상 조심스럽게 노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위험하게 놀기도 합니다. 혹 위험한데도 위험한 물건에 손을 대려고 하기도 합니다. 다리미질 하고 있으면 다리미에 손을 대려고 하고, 부엌칼을 사용하고 있으면 그것 잡아 보겠다고 손을 뻗힙니다. 그때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손을 못 대게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의 간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냥 기도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지 못한 것을 구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주시느냐? 우리의 기도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게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의 기도를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혹 돌을 달라, 뱀을 달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바울이 자신을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4절부터 보시면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4-6) 여러분이 구하는 것이 다 이런 것들 아닙니까?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지만 그 문제가 영적인 것보다는 세상적인 것에 치우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들에 대해 우리가 익숙한 형태로 풀어 설명하자면 돈 많고, 학식 있고, 가문도 좋은 그런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주님을 만난 뒤 이런 모든 것을 어떻게 여기냐 하면 해로 여겼습니다. 7절부터 보시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왜 그가 이런 것들을 다 해로 여겼느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적으로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 때문에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기도한다면 다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들을 구할 때가 많은 것 아닙니까? 바울이 해로 여기는 것들, 바울이 배설물로 여기는 것들을 구하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뭡니까? “공부 잘 하게 해 주세요. 좋은 대학 가게 해 주세요. 좋은 직장 가서, 좋은 사람 만나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주세요”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우리 아이 공부 잘 하게 해 주시고, 좋은 대학 가게 해 주시고, 좋은 직장 가서, 좋은 사람 만나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주세요”입니다. 심지어 성경의 근거를 들어가며 기도합니다.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를 주옵소서.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해 주옵소서. 머리가 되게 하시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해 주옵소서. 오늘 본문 식으로 하자면 돌을 달라, 뱀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고자 한다면 우리의 기도 역시 거기에 맞춰야 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하나님 지식 때문에 다른 것을 해로 여겼다면 우리가 구하고 또 구해야 할 것, 그리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바로 하나님 지식이라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지식이 없어서 문제인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호6:4 참조). 특히 호세아 6장 1절과 2절에 보면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결과가 바로 이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런 내용을 써 보냈는데, 우리의 기도가 이러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1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럼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기도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따라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양식을 위해서 구할 수 있습니다. 내 가정, 내 직장, 내 자녀의 미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필요한 매일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부합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 전에 어떤 기도를 먼저 하도록 하느냐 하면 이 기도를 먼저 하게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나의 필요를 구할 때 하나님의 영광 따로, 나의 필요 따로 이렇게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무엇이 전제 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 안에서는 우리의 필요를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한 기도나, 내 자녀를 위한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전제로 하셔야 합니다. “내 자녀가 이런 직업, 혹은 저런 직업을 가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한국교회 안에 이런 예화를 드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과 어떤 무신론자의 가문을 비교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에는 세상 복 받은 사람이 많다면 무신론자 가문에서는 그런 사람이 적다.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세상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열매들을 맺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때문에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어떤 위치, 어떤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서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로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가 아니라, 정직과 성실로서만 그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세상이 거짓되고, 또한 사회가 너무 부패하기 때문에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상의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핑계는 변명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혹 세상의 방식으로서 어떤 목표한 곳에 도달하고, 그때 그것을 위해 기도해서 기도 응답받았다고 한다면 감히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기도 응답 받은 자체가 저주의 성격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에 대해 칼빈은 이런 설명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신자들이 기도에 있어서 무작정, 쓸 데 없이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에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는 절제가 크게 아쉬우며 우리 육신의 뻔뻔스러움은 너무 당돌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오만 가지 기도를 드려놓고 그분께서 우리의 멍청한 생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 아래 두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것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히스기야란 인물은 개혁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으로 기록할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왕입니다. 특히 성경은 그가 기도함으로 인해 생명까지 연장받았다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죽게 되었다가 기도함으로 15년이나 연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것,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그 사건은 그것 자체로만 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5년이라는 세월을 연장 받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두 가지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병들었다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사신이 위문을 왔습니다. 그때 히스기야가 어떤 행동을 했느냐 하면 자신의 보물고, 군기고, 내탕고를 다 열어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여준 이면에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선지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뭔가 하면 바벨론 사신에게 보여줬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기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심지어 15년 동안 연장 받은 그 시기에 누굴 낳게 되느냐 하면 히스기야를 이어 왕이 되는 므낫세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어떤 인물이냐? 히스기야가 개혁했던 모든 개혁을 뒤집어엎은 인물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도의 응답, 그것도 내가 기도한 것대로 응답되는 것이 다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해서 응답을 받은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받은 바 그 은혜를 은혜로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 히스기야를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지만, 분명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기도 응답으로 결과 되는 것이 선이 아니라 악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호세아 13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13:11)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도해서 응답 받으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응답 자체가 분노함으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주기도의 틀은 기도 내용에 있어 바로 그런 분별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하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대하실 때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마음으로 대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과 동일한 본문을 말하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좋은 것이라 할 때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니까 성도에게 있어 좋은 것, 아니 가장 좋은 것은 뭐냐? 성령입니다. 이 성령을 통하여 진리에 대한 분별과 진리를 따르게 되며, 또한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 살피게 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황금률이라고 불리고 있는 말씀으로서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실천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행할 수 없으며, 나아가 좁은 문, 생명의 문,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그 길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복된 응답은 성령이요, 성령을 통한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보다 구해야 할 내용은 성령과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6장을 통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도 사실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앞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바로 그 영광을 위해서 성령을 열매를 찾으십니다. 혹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리 외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많이 받아 누릴지라도 가장 좋은 것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성령이요, 성령과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모든 것, 특별히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셨기 때문에 그런 열매들을 맺는 것, 이것이 성도에게 있어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기도로 구해야 할 것도 바로 이런 차원의 내용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나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기도에 대해 분명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그분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라는 것 확신해야 합니다. 다만 그 좋은 것이 세상적인 의미는 아닐 수 있다는 데 실망하지 마셔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것을 분명 주십니다. 비록 우리의 시각은 이 땅에 머물 때가 많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신 것을 놓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때를 따라 우리 인생 가운데 간섭하시며, 그 모든 역사를 통해 결국 성령의 열매로서 가득하게 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쏟아야 할 자리가 바로 그러한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