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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0228설교 / 마태복음7장13-14절 / 좁은문으로들어가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6.02.28|조회수63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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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우리가 계속해서 마태복음의 내용을 살펴보고 있고, 그 중에서도 지금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의 내용을 살펴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한마디로 자녀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는 구별된 삶으로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7장으로 들어와서는 이러한 삶의 한 면으로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물만 보면서 정죄하는 비판에 대하여 금하십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게 대하는 것, 그것을 금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비판에 대하여 금하시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리와 관련하여 거짓 증거를 일삼는 자,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잣대가 되어 분별하는 일이 분명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지난주 살핀 말씀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라고 명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럼 왜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하는가? 가장 가깝게 설명하자면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대접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판의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비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즉 본성적으로 대접 받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이이기 때문에 네가 대접 받고자 한다면 너도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것이 지난주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원인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네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뿐만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 가운데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도 분명히 있다. 세상과 비교해 볼 때 비교 자체가 불가한 것을 너희는 받고 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른 사람에게 주지 못할 것이 전혀 없다는 차원에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가르쳐졌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과는 구별된 이런 삶이 쉬운 삶이냐 할 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시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일단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될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형식은 명령조이고, 그런 명령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과 요구가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한 바가 있지만 율법의 요약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 실제로 우리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만큼, 하나님의 뜻에 걸맞은 내용으로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만이 아니라 믿는 자라 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지킬 수 없는데 왜 명령하시고 요구하십니까? 무엇보다도 너희가 율법의 어느 것 하나라도 지킬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너희 대신 이루실 수 있는 분, 그리고 실제로 이루신 분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 때 찾는다는 것도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찾아 낸 바 되는 성격으로 있다는 것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면 그 이루신 바를 완전히 다 받을 때까지 그러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되, 이때도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나아가도록 하시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명령만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내용이 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명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시며, 그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게 하신다, 때문에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이 완성될 때까지 성경이 명하고 있는 그것이 너희의 방향이 되도록 하라.

그러므로 오늘 본문 역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해서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선택해서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좁은 문, 그리고 협착한 길의 결과를 생명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생명의 문 그리고 생명의 길은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본성은 어느 쪽이냐? 좁은 문과는 대조적인 넓은 문으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협착한 길보다는 넓은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비록 믿음을 선물로 받았지만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성도의 모습 가운데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선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때 남을 대접하기보다는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심지어 하나님께 기도할 때조차 하나님의 뜻보다는 우리의 뜻이 앞서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다만 이런 모습 속에서도 다른 것이 있다면 불신자들의 경우 멸망으로 가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자리에서도 생명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하시되,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고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2주 전에 살핀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가장 좋은 것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별히 성령의 열매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바로 그런 구별된 삶을 위하여 더욱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하자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비록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을지라도 협착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조금 전에 기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우리의 뜻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혹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기도가 앞서고 또한 실제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 그리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온다면 그때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실 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2:13 참조). 기도한다고 할 때도 기도보다 앞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먼저요,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전제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본다 할 때 성경은 언제나 두 가지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멸망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과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문으로 들어가 가게 되는 길에 대해서는 넒은 문은 넓은 길로, 좁은 문은 협착한 길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다르지 않는 내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앞서 살핀 모든 내용들은 그 대상이 누구를 전제한 내용인가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전제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오늘 말씀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고 계신 말씀이지,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조차 두 가지 길이 있으니 너희가 선택하라고 제시되고 있는 본문은 아니란 것입니다. 아니 조금 전에 말씀드린 사실에 근거하자면 혹 너희가 선택하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결코 좁은 문, 협착한 길을 선택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염두 해 둔다면 단순히 두 길 가운데 한 편을 선택하는 것이 너희 몫이라는 소리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있기 때문에 너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알라는 차원에서 말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명의 보장을 받은 자다. 그런데 너희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 줄 아느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러한 길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은 어떤 길이냐? 본성적으로 살아가는 그 길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으로서의 이웃 사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그러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아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만 염려하면서 사는 삶이 넓은 문, 넓은 길의 삶인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하늘이 아닌 땅에 보물을 쌓아두고자 하는 삶, 하나님이 아닌 재물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이목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기 때문에 외식적으로만 살아가는 삶, 이것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국은 어떠한가?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멸망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협착한 길을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걸어가야 할 마땅한 길이 바로 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한 생명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미 살핀 바 있는 것처럼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길 수 없다고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섬겨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해야 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러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처럼 어떤 장소에 계시면 다른 장소에는 계실 수 없는 분이 아니라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 심지어 우리의 마음까지 감찰하시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마음의 구석구석까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한낱 피조물조차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필요를 모르시겠느냐?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고자 하시는 것은 마태복음 7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더 좋은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본성대로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더 좋은 것, 다시 말해 누가복음 11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성령이요, 성령의 열매를 주고자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좁은 문, 협착한 길은 무엇인가? 우리의 본성을 죽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에 기록된 것처럼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삶,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따라 사는 삶(1:1-2), 이것이 좁은 문이요 협착한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뭔가? 많은 사람들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넓은 길로 가다가보니, 또 그러한 삶의 편해 보이다 보니 거기를 부러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실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본성대로 살아가는 삶, 이것보다 편한 게 없습니다. 누가 시비를 걸 때 참는 것이 쉽습니까? 화를 내는 것이 쉽습니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화를 내는 것이 쉽습니다. 사람이 외향적이든 아니면 내향적이든 사람들을 의식만 하지 않는다면 화를 내는 것이 본성적으로는 훨씬 더 쉽습니다. 그러나 참고 참는 일이 있는 것은 사람들을 의식해서요, 그것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경우 어디서 화를 잘 내느냐? 집 밖에서보다는 집 안에서 화를 더 잘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집 안이라는 공간은 남이 아닌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를 치장하는 데 있어 집 밖보다는 의식하는 것이 좀 더 가볍기 때문입니다. 누가 시비를 거는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는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누가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려고 하겠습니까?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욕심 자체가 본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감추기 위해 우리는 목표라는 것도 만들어서 자기 치장을 할 때도 있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홀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교가 되고, 판단이 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삶이 매우 익숙하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것 보다는 보이는 것을 비교하면서 판단하고 부러워하고 하는 일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이 배제되고 있고, 하나님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원망 불평의 소리를 높인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너희의 삶이란 그러한 길이 아니란 것입니다. 본성대로 살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욕심, 특히 세상적인 욕심을 다 충족하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사실이 있는데,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오늘 본문이 명하고 있는 이 길,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어렵기 때문에 이 길을 걷는 자들이 매우 적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말씀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조차, 그리고 성도들 가운데서도 어렵다면 어려울 수 있는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 생활하는 것을 쉽게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 땅에 믿는 사람의 숫자가 4분의 1이 된다는 통계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많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자기의 본성을 죽이는 일이요, 그만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기 때문에, 또한 이 땅에서는 끊임없이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와 같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본성을 죽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를 따르는 사람은 그만큼 적기 때문에 외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울지라도, 혹은 홀로 그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주께서 생명의 길로 마련하신 길이라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인 줄 알고 묵묵히 걸어가고자 하는 각오를 가지셔야 합니다. 아니 그런 각오를 주시도록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으로 가시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34을 먼저 보시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의 왕이십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씀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막힌 담을 허시고(2:14),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기도 하십니다(벧전2:8).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는 원론적인 의미에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느냐? 35절과 36입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7-38) 어떤 면에서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가족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 멀리해야 할 대상으로 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를 따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합당치 못하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누가복음 9으로 가시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5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57-62)

먼저 첫 번째 사람의 경우 자기 자신이 먼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답변하신 것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이 사람은 주를 따르면 안락하고 존대 받을 수 있는 생활이 열리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다, 불편하다는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주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말씀을 통해 알리고 계신 겁니다.

두 번째 사람의 경우 주님께서 먼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만 부친에 대한 걱정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부친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도록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부모 공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마태복음 10장에 의하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분명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9장에서는 이런 반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물론 이 말씀이 죽은 자의 시체를 매장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무엇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를 생각하도록 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빠져 들어 가 사람들에게 관습을 지킨다는 구실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은 공연히 죽은 자들만 가지고 몰두하는, 죽어있는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마지막 사람에 대해서도 분명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부르심 앞에 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주를 따르겠지만 먼저 가족과 작별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사람에 대해 말로는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지상의 업무를 다 마치기 전에는 그분에게 등을 돌려대는 그런 사람이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주를 따른다고 하지만 세상을 향하여 계속해서 뒤를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상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다시금 기억해야 될 것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복된 길이지만, 세상의 복이나 세상의 안락을 위한 길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기복주의 신앙과는 분명 멀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 마음을 두고서 주를 따를 수 있느냐?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이 내 마음을 차지 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아니 따른다고 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 길을 갈수가 없겠지만, 믿는 자들 가운데서도 이 길을 가는 자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을 싸우지 않고 오히려 육적인 싸움만 할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본성을 죽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중생한 영적 생명을 오히려 죽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하자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신앙의 모든 것인 양 되어 있습니다. 천국만 보장받은 채 천국백성다운 열매는 안중에 없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의는 거룩함을 입는 성화와 맞물러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주셨다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은 사실이나, 의롭게 되었다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영화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하늘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를 덧입었다면 그분의 거룩을 덧입을 때까지, 그리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동일한 모습을 가질 때까지 이 땅에서 그분의 온전하심을 좇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룩의 방편으로서 말씀을 주신 것이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회개케 하시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는 겁니다. 나아가 죄악이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일까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해서냐?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한 길을 걸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인 겁니다.

 

특히 여러분의 거룩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다음 주에 다시금 살피겠지만 오늘 본문 이후 곧바로 나오는 말씀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7:15)는 말씀으로 연결이 됩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목사라고 해서 다 주의 종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한다고 해서 다 참된 선지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거짓된 교리를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주여, 주여라고 말하지만 주의 진리와 상관없이 전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신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바른 교리와 그 가르침 아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억나실는지 모르겠지만 개척하고 1년이 되었을 때 예레미야 6에 있는 말씀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그 부분만 살펴보고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6절부터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나라들아 들으라 무리들아 그들이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두리니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이웃과 그의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6:16-21)

여러분,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그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6:13). 그런데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선지자와 제사장이 백성들을 향하여 말한 것이 무엇인가 할 때 평강을 말했습니다(6:14). 분명 죄악 된 길로 가고 있는데도 그런 죄악 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평강만을 외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뻔뻔스럽게 거짓된 말씀을 전했던 겁니다(6:15).

이런 배경 속에서 말씀하셨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은 결코 선한 길이 아니란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평강을 말하지만 참된 평강의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옛적 길, 즉 주의 백성들이 실제로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 길을 가게 된다면 그때 너희 마음에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말씀 앞에 주의 백성들의 마땅한 반응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회개와 돌이켜 주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자들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한다 할 수 있습니다. 16절 끝에 보시면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세워 나팔을 불면 그 소리를 들으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소리조차 듣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예레미야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컫는 자들의 반응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이 기록한 말씀대로 따라 가지 않겠다는 것이요, 거짓된 말씀이지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달리 표현하자면 자기 본성에 맞는 대로 가고자 하는 것이 저들의 사고방식인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개혁주의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시대적인 산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에 맞춰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그 교회의 방향이요, 길로 있습니다. 성경과 상관없이 가면서도 성경적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라는 말은 고리타분하고 시대적인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때를 따라 선물로 주실 때 가장 풍성하게 주신 시대가 중세 이후 16세기, 17세기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 그리고 그 시대 속에서 거짓 교리와 싸웠던 개혁자들에 대하여 존중하며, 또 그들이 내 놓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혹은 개인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저작물과 같은 내용들을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교리와 싸우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 해석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등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적 고백으로 있는 것이 때로는 사적인 저작물보다 못한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높은 진리의 내용과 그렇지 못한 내용이 만날 때 공적 고백으로 나오는 것은 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중간 정도로 나오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인간의 저작물들은 성경 해석의 산물이라는 것이고, 성경 앞에서는 결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집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다른 해석을 내 놓았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성경해석의 산물인 내용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길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옛적 길은 무엇인가? 적어도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이 말하는 가장 합당한 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럼 교리만이냐?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된 교리로부터 나오는 열매는 반드시 거짓된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교리만이 참된 열매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길만을 걸어가야 합니다.

다만 교리로서 아는 것과 삶으로서 행하는 일에 있어서 항상 동일한 수준으로 있지 못한 경우들도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그만큼 성화의 길을 걸아 간다는 것이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어떤 말까지 할 정도냐?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까지 말했습니다(딤전1:15). 단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을 때 실제로 고백하도록 하신 사실입니다. 바울조차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주의 진리를 좇는 자들, 바른 교리 가운데 주의 말씀을 배우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진리에 합당하고 바른 교리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혹 더딜 수는 있지만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좁은 문이요 협착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그 길이 쉽지 않은 길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만큼은, 또한 하나님께서 진리의 내용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다면 그 진리 아래 있는 우리들은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갈 분명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시편 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1-2) 그리고 6에서는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모든 사람은 두 길 가운데 한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의인의 길이든, 아니면 악인의 길이든 두 길 중 한 길만 갈 수 있습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 아니면 멸망입니다. 그런데 누가 생명의 길을 가느냐?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 오히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요한계시록을 따라 해석하자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그리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 있는 자(1:3), 의인들의 길을 걸어가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진리 없이 거룩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힘들 수 있지만, 그리고 외로울 수 있지만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며 가신 길이요, 그 길을 우리 홀로 가도록 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힘든 것만은 아닌, 그리고 외로운 것만은 아닌 길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갈지라도 마지막에는 생명이 주어질 것이요, 이미 생명을 받은 자로서 그 길을 걸아가고 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며 걸어갈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금 우리 자신을 살펴보시고 주의 은혜를 따라 좁은 문 그리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 길이 생명이 길임을 확신하시면서 감사함으로 걸어갈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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