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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0306설교 / 마태복음7장15-20절 / 열매로그들을알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6.03.06|조회수51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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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5-20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의 궁극적인 목적은 분명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의하면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끌고자 하시는 자리는 어디인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리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해서 거저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으로 우리를 높이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같은 온전함을 이 지상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성경 전체 가르침은 지상에서의 완전 성화를 거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목적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할 때는 우리 인생을 통해 가야할 목표가 바로 이러한 방향이라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주 살핀 것처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넓은 문과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문과 협착한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자 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길이 어려울지라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아니 우리 홀로 걸어가라고 한다면 결코 걸어갈 수 없는 길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이끄시며, 또한 동행하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감사함으로 걸었다고 말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좁은 문, 협착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되는 말씀은 우리가 이 길을 걸으면서 경계해야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지난주에 잠시 언급을 했지만 하나님과 같이 온전함으로 나아간다고 할 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이라는 방편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7 17에 의하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성화의 주체도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처럼 그분의 거룩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셔야만 합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말씀과 분리되어 일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말씀으로 역사하시고 또한 말씀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성화의 길을 걷도록 하십니다. 때문에 말씀 없이 거룩을 생각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좁은 문, 협착한 길이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할 때 말씀 없이 생명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말씀에 대하여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진리로만 거룩하게 되는데, 그런 진리에서 떠나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좁은 문, 협착한 길만이 생명을 보장하고 있는데 넓은 문, 넓은 길조차 멸망이 아닌 생명을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오늘 본문에 보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온다고 말씀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경우 외적으로는 참된 선지자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로서 그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양으로 가장하여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겉으로는 매우 순결하고 흠이 없으며 겸손하고 온유하고 유용하고 모든 좋은 것을 다 겸비한 것처럼 드러내보일 수도 있습니다(매튜 헨리).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22절에 보면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이고, 또 어떤 기적의 일들도 행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 역시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사도들, 혹은 선지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사로서 주님의 권위로서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다시 말해 외적으로는 양이지만 그래서 주의 백성처럼 보이지만, 또 외적으로는 선지자이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실상은 이리와 같아서 양으로 하여금 위험에 빠뜨리는 그런 자들이라는 겁니다. “양이 아닐 뿐 아니라 가장 악한 양의 원수인 것이며, 그들이 오는 것은 양을 찢어 삼키고 흩어버리기위함이며(10:12), 또한 양들을 하나님과 서로들 사이에서 내쫓아 구부러진 길로 몰아넣기 위함인 것입니다.”(매튜 헨리)

고린도후서 11에 보면 저들에 대하여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고후11:13-15) 때문에 이런 자들에 대하여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예레미야 6장에 있는 내용을 살폈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방금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읽어드렸지만 신약 시대 때도 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런 자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예레미야 23 16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여기 보면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을 가르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참된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대하여서는 저들의 가르침이 거짓된 가르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평가하시는 실상은 무엇인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에 있는 것으로만 가르친다. 때문에 헛된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17도 보시면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여기 보면 예레미야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쳤던 한 가지 예를 보여주고 있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또 그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하여 책망을 하며 돌이킬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평안을 가르쳤습니다. 완악한 마음 그대로 있다면 재앙 외에는 없다는 것을 가르치며 돌이키도록 해야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의 죄악 된 본성을 죽어야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들이 좋아할만한 말을 거짓 선지자들은 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본성, 즉 죄악 된 본성이 좋아할만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하여 칼빈의 주석만 보더라도 이런 말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대체로 말하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 밑에서는 모든 일이 쉽게 진행되며 고통과 근심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소망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인내하려면 사탄의 덫을 막아낼 수 있도록 무장하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부단한 투쟁을 벌일 것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하는가? 칼빈의 이런 내용을 통해 보자면 구약의 거짓 선지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본성, 그들이 좋아할 만한 말들을 거짓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 시대부터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짓 선지자들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지상 왕국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 세상에서의 고난, 이 세상에서의 십자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 복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 길을 걸어간다 할지라도 책망보다는 평안을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거짓 선지자들은 그런 마음에 부합하여 그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날도 보면 이런 생각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좁고 협착한 길을 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7) 말씀하시지만, 이 땅에서의 삶이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성경이 이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도 장차 있을 영광이 아니라 언제나 이 땅에서의 영광과 함께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뿐입니다. 거기에 교리적인 내용까지 덧붙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말하면 그 여파가 어떻겠습니까?

물론 성경이 거짓 선지자라고 말할 때 단지 지상에서의 평안만을 말하는 자들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사고방식, 다시 말해 신인협력과 같은 내용들도 거짓된 가르침에 속하며 우리가 경계해야 할 내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16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양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럼 저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사실 거짓 선지자들조차 자기 마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비춰질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레미야의 말씀을 펼쳐놓고 있지만 예레미야 당시만 해도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율법서가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의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었지만, 동시에 그 내용을 보면 다 율법서에 근거하여 그들을 책망하고 그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율법을 잣대로 백성들을 가르쳤던 겁니다.

예를 들어 저들이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할 때 이미 율법을 통하여 그것을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 부분만 하더라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든가, 하나님을 형상화한다든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거짓되게 부르거나 형식적으로 부르거나 한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이었던 겁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 안식일에 행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분명한 판단 기준으로 있었습니다.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선지서들을 보면 이웃 사랑의 실천과 관련하여 책망하시는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책망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신 율법이 뚜렷한 판단 기준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 마음의 완악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들이 그 이웃에 대하여 행하는 모습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거짓 선지자들은 재앙이 아닌 평안을 말했기 때문에 이미 율법의 말씀 앞에서 그들 스스로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분별의 잣대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성경 66권 외에 또 다른 계시가 없다는 측면에서 계시의 종결성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판단 기준은 기록된 말씀, 66권으로 된 이 성경 외에는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참과 거짓에 대한 판단에 있어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교회 역사를 통해 보자면 같은 성경을 가지고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분별이 쉽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진리를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 위에 없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주의 진리 역시 항상 참된 교회를 통해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를 통해서는 성경 해석의 산물로서 여러 고백서들과 요리문답, 그리고 개인적인 저작들을 내놓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음성을 듣고 따라오도록 하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10:27) 달리 말하면 주님의 음성이 아닌데도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들 스스로가 주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는 마음의 상태임을 잘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주의 말씀을 통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 주의 진리가 무엇인지 바르게 깨닫게 해 주십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14:26 참조). 나아가 교회 역사를 통해 바른 진리의 내용을 주셨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거짓된 가르침에 대하여는 거절해야 하고, 참된 가르침만이 우리의 양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실 때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될 부분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분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절 이하 20절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여기 보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씀하시는데, 보통 열매라 하면 어떤 생활의 모습으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까지 포함하여 열매로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은 얼마든지 치장하고 가려서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앞선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주의해야 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열매를 단지 생활의 모습으로만 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의 경우 오늘 본문을 통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생활 모습을 통해 그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완전히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라면 거짓된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도 거짓의 열매가 분명 나타나게 날 것입니다. 혹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마지막 심판 때는 반드시 심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의 모습은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측면도 우리는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분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교리 아래 그들의 생활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도 살펴야 합니다. 매튜 풀 주석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참된 교사들이라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신실하게 드러내는 사역을 행할 것이고, 양 떼의 모범이 되는 거룩한 삶을 살 것이며, 참된 가르침과 거룩한 삶이라는 열매를 통해서 선한 양심으로 자신들의 사역을 수행할 것이다... 어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씨앗이 심어져서 뿌리를 내렸다면, 그 사람은 모든 관계 속에서 진리와 성결의 열매를 내게 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오류와 악의 열매를 낼 것이다.”

열매와 관련하여 칼빈의 해석을 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열매란 무슨 열매를 두고 하는 말씀인가 하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파악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의 생활 방식에 국한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더없이 악독한 협잡군들도 거룩을 흉내내며 엄격한 생활을 모방하는 온갖 종류의 옷을 입고 행세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이런 시험은 소용없다. 물론 덕()의 위장보다 더 힘든 것도 없으므로 결국에 가서는 그들의 위선이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생활에 따라 평가되는 선에서 멈추는 그런 부당하고 불확실한 판단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러므로 열매라는 말을 우리는 가르침의 도()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며 사실 이것이 제일가는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그러니까 칼빈은 생활로서 판단하는 것은 객관적일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열매란 무엇인가 할 때 그들의 가르침으로 그들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합적으로 이해하자면 그들의 가르침만이 객관적으로 그들을 판단할 수 있는 내용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에 대하여 판단할 때 우리는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가르침이 그들의 생활과 분리될 수 있느냐? 결코 없습니다. 외적으로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점 때문에 지상에서는 다 판단하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교리와 그들의 생활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열매라고 할 때 그들의 생활적인 면에 제외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묻고 있지만 그 대답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하고, 못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거짓된 선지자라면 거짓된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에 걸맞은 생활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혹 생활적인 면에 있어서는 좋은 열매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가르침에 있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만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예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르칠 때 신인협력의 내용으로서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르침 아래 있는 자들은 생활에 있어 언제나 공로주의에 근거한 열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열심입니다. 열심 자체를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10:2) 열심이 다가 아니라 진리의 지식을 따른 열심이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은혜에 대한 감사로 말미암은 열심이 중요하지, 공로에 근거한 열심이라면 그것은 거짓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엇보다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으로서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들의 말이 과연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말인가? 그들의 가르침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 혹 성경으로서 말한다 할지라도 전 성경을 통하여 지지 받을 수 있는 말씀인가? 왜 이런 부분까지 말씀드리느냐 하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말씀으로 시험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사탄이 시험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했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다고 해서 바른 해석의 이해없이 무조건 다 받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말할지라도 전 성경의 이해 속에서 받을 수 있는가?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는 좀 더 끌어 올라가야 할 바가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성경이 말하고 있고 또 지지한다고 해서 어떤 한 부분만 말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바로 그런 내용을 성경이 어디까지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서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알리고자 하는 모든 사실에 대하여, 또한 더 중요하게 알리는 내용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가톨릭이 구원을 말할 때 믿음 + 행위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된 가르침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거짓이 아니라 참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경이 그것만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럼 그 믿음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신다. 바로 여기까지 끌어올려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만 말하게 될 때, 즉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만큼의 부유함을 가지지 못하게 될 때 또 다른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어디까지인가를 추적하고 성경이 알리고자 하는 내용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분별의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이 일을 위하여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더 많은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주의 진리가 훼방을 받지 않도록,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진리 안에서만 든든히 세워지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4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9-16) 목사로서의 사명을 받았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말씀을 읽고 권하고 착념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에 이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혹 목사가 구원을 주는 것처럼 오해하시는 분은 없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확실함을 말씀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 목사로서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들도 분별할 수 있도록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목사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분별없이 받으면 안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합당한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사도행전 17 11에 의하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런 정신 아래 여러분들이 있어야 합니다. 매튜 풀 주석에서는 오늘 본문에 대한 교훈으로서 이런 말까지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교사들을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독재자들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신앙을 돕는 자들로 활용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교사들이 어떤 것들을 가르쳤다고 해서 그것들을 그대로 무턱대로 하나님의 진리로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그들의 생활로서 그들의 거짓됨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인류는 아담 이후 나쁜 나무에 걸려 있는 가지와 같습니다. 나쁜 나무에 걸려 있기 때문에 나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의 좋은 열매가 나쁜 나무의 가지에게 맺힐 수 있는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를 좋은 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영원 전에 택하신 백성들만큼은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때문에 좋은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원리상으로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쁜 나무의 가지는 결국 나쁜 열매만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치장하고 위장한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마지막 때는 어떻게 되느냐? 다 밝혀지고 말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마태복음 25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31절부터 보겠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25:31-33) 여기 보면 마지막 때 양과 염소의 구분을 짓고 있는데, 무엇으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가? 이후 내용을 보면 열매로서 구분 짓고 있습니다. 34절부터 보시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4-36) 염소의 경우는 41절 이하에서 그 반대로서 기록하고 있는데, 얼핏 보면 자기 행위에 대한 결과처럼 보이며, 실제로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선한 열매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소위 믿음 + 행위라는 공식을 이런 본문을 통해 나타내었던 겁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5장의 이 본문은 열매로서 그들이 붙어 있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확인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34절에 보시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하면서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을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 대상에 대하여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었던 겁니다. 그들이 어떤 열매를 맺기 전에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그는 그들을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라고 부르는 가운데 그들의 축복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신 은총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틀림없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사랑을 내세우면서 경건한 자들의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곧 이 세상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의로운 생활을 열망하는 자들이 영생을 받기로 예정되는 것은 이 사랑에 의해서다. 그들이 마지막 날에 가서야 소유하는 이 나라가 창세 때부터 마련된 것이라는 말씀 역시 같은 내용이다.” 물론 이 말씀에 대해 대상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든 장래의 공로가 있는 자들을 위해 예비 된 나라일 뿐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신들의 공로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소유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마태복음 25장 역시 공로로 풀어선 안 됩니다.

따라서 지금 열매로서 확인한다고 할 때 저들의 공로 때문에 영원한 복과 영원한 저주가 주어지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만약 이 본문을 그렇게 푼다면 적어도 이 본문에 대해서만큼은 거짓 선지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 구분하자면 영원한 저주는 그들 스스로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바 이웃 사랑의 열매가 없는 것, 그리고 그런 열매가 없는 것은 하나님 사랑도 없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기 때문에 영원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영원한 복은 열매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이 열매가 그들 스스로의 열매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유로 하자면 가지 때문이 아니라 좋은 나무에 그 가지가 접붙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영원한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하실 때 그 열매를 그들의 생활로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생활만이 아니라 그 생활의 출처를 함께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을 말할지라도 하나님 사랑에 근거한 이웃 사랑의 실천을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의 열매로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의 열매란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주시는 열매로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생활이라는 열매로서 확인하는 것은 저들 쪽에서 치장만 잘한다면 다소 분별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아니 역으로 우리의 모습만 봐도 분별이 어렵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볼 때 생활로서의 열매가 충분히 증거 되고 있는가 할 때 그렇지 못한 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 열매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멸망을 받게 되는가? 양이 아니라 염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공로로서 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때도 우리의 열매가 그리스도께 근거한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요, 그리스도의 거룩의 우리의 거룩인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 지시고, 또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열매의 근거가 되시는 겁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우리로 하여금 넓은 길로 가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양의 탈을 쓰고자 양 무리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고린도후서에 있는 말씀처럼 거짓 사도이지만 마치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처럼 가장하여 주의 백성들에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것처럼 그렇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으로 통하여, 그리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하여 경계해야 합니다. 물론 분명히 드러날 때까지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친다면 분별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도 있습니다. 아니 자기 스스로도 자기 자신의 정체를 모른 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15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즉 열매가 없다면 영원한 저주를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다시금 우리의 열매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참된 가르침 아래 있는가? 그리고 그 가르침 아래서 가르침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 가르침에 합당한 열매는 좀 부족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모습은 거룩해져 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없을 수는 없으나 이 땅에서는 결코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매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있는가?

열매로 그들을 알라는 것은 역으로 우리 자신 또한 그런 열매로서 확인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리 아래 참된 것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일을 위하여 함께 주의 말씀에 착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에 합당한 열매들을 주께서 주시되, 특별히 성령의 열매가 우리 삶을 통해 더욱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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