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8장 5-13절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지난주에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했다면, 오늘 본문은 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경우 육체적인 병 자체가 유대인으로부터 배척을 받아야 했다면, 오늘 본문의 경우는 백부장이 이방인이라는 자체로 배척을 받아야 한 대상으로 있습니다. 특히 이 사람은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나라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터라 외적으로만 보자면 이스라엘 나라의 원수와도 같은 부류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그에게도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0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11절에 의하면 주께서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란 말까지 하게 되는데, 여기서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란 이스라엘 밖에 있는 모든 이방인을 지칭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즉 이방인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백부장의 믿음 역시 거짓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관계된 믿음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내용 자체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는 사건으로 있지만 실상 치유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그런 내용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5절과 6을 보시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한 백부장이 나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 종의 상태를 고하고 있는데, 결국 고쳐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기록하고 있지 않는 내용이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7장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 보면 이 하인에 대하여 ‘사랑하는 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눅7:2). 당시 분위기를 생각해 보자면 참으로 인격적인 주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한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지만, 사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뒤 다시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오늘 본문과 누가복음을 조금 더 비교해 보자면 마태복음에서는 백부장이 바로 예수님을 대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보내어 오시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7:3). 그리고 예수님께서 백부장이 있는 곳 가까이 오셨을 때 백부장이 직접 나와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벗을 통해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눅7:6). 그러니까 지금 마태복음 은 이런 일련의 과정들, 즉 유대인 장로들을 보낸 것이나 이후 자신의 벗을 보내어 한 말들을 마치 백부장 스스로가 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방식인 겁니다. 마치 대리자를 통해 한 일이 다름 아닌 백부장이 한 일인 양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록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설명이 다른 것 때문에 오류가 있다고 본다면 성경에 대한 태도로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할 때 누가복음에 의하면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보내었다고 할 때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께 어떤 말을 하느냐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7장 4절과 5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외적으로 보자면 유대인과 로마인이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의 경우 유대 장로들로부터 매우 존중 받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주는 일을 했는가? 대부분의 주석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그의 신앙 때문에 그를 칭찬하고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과 하나님 경배에 대한 열성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전반적으로 미워하고 있었던 백성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회당을 건축함으로써 그는 자기 율법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증거 해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로마인이라면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원수와도 같았지만 유대 민족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이유로 유대인으로부터 존중을 받았으며, 특히 백부장의 경우 회당까지 지어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선물이 분명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인 백부장은 영적인 의미에서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칼빈). 어떻게 해서 그가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참된 믿음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의 말씀을 접했을 것이고, 그 말씀을 통하여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을 사랑했던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했기 때문에 회당을 짓는 일까지 감당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백부장이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나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는 것은 어느 정도 좋지 못한 평판과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칼빈). 왜냐하면 로마인으로서 유대인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은 어떻게 보면 자신이 자라온 다신교적 배경을 철저히 버리는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다신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과는 정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도 충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인으로서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줬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민족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종교적 관념을 버리는 일과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지 않고는 감히 행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에게 참된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하인에 대하여 ‘사랑하는 종’으로 표현한 것 역시 단순히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그런 측면에서 소개되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참된 믿음이 주어졌다면 그 믿음에 합당한 열매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이웃 사랑인 것이고, 성경은 그런 부분을 지금 종이라 할지라도 그를 아까는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으로 하자면 유대인 장로 몇을 보내어 자신의 종에 관해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7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물론 누가복음에 있는 말씀에 근거하자면 고쳐주시기 위해서 백부장이 있는 곳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가까이 왔을 때 백부장이 자기 벗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하여 누가복음에서는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7장 7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왜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고, 또 주님께서 자기 집 가까이 오셨을 때 자기 벗을 보내는 일이 있는가? 지금 백부장은 자기 자신이 주님께 나아가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서 매우 비천한 자임을 고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하자면 분명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이고, 로마인 가운데서도 백부장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백부장의 마음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서는 또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주여’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고, 누가복음과 함께 생각해 볼 때는 유대인 장로들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 마태복음의 기록은 백부장을 주체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백부장 마음도 다르지 않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마음이 분명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들었고(눅7:3) 그가 구약의 말씀을 어느 정도 아는 자로 있다고 할 때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인식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백부장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이렇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고, 참된 믿음으로서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있다고 할 때,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당시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지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일단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특출하고 분명한 신적인 행동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도 약속된 구속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들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제시된 하나님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계시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많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주는 사명을 맡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백부장이 그를 찾아온 예수님에 대하여 주께 나아가기가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나, 주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한 말을 보면 단순히 사람,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후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마8:10)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어쩌면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백부장의 자세를 통해 그의 겸비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서 인식한다 하더라도 지금 백부장의 자세는 그런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앞에도 나아가기가 부족하다고 여길 정도로 비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할 때도 이런 겸비함, 그리고 비천함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부족한 자로, 아니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도 과분하다고 할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자가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받는다고 할 때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그 지식 안에서 인간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지식에 있어 정당한 내용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단순히 어떤 부분에 있어서만 죄인이 아니라 철저한 죄인, 전적으로 타락한 자, 지식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의지에 있어서도 타락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죄와는 철저히 분리되신 분, 가장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 자체이신 분, 가장 순결하실 뿐만 아니라 순결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간은 비천해질 수밖에 없고, 겸비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겸손을 미덕으로 돌리는 일이 있지만 사실 하나님 앞에서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 지식에 대한 가장 정당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기 시작한 때만이 아니라,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오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신앙 안에 들어와 있는 자로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염두 해 두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뭐냐?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자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눅18:9). 이때 바리새인은 분명 그 기도 속에서 경건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그리고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실상은 자기 자신의 공로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눅18:11-12).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결국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받으셨는가? 바리새인의 기도는 배척하시고, 세리의 기도는 받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를 의롭다 해 주셨던 겁니다(눅18:14a).
일반적으로라면 의롭다고 할 때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의롭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죄인 취급을 받게 될 뿐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의란 무엇인가? 자기 공로를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 공로가 될 만한 것도 실제로는 없기 때문에 나열할 것도 없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밀하게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그런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인정하는 자, 내놓고 있는 것이 있다면 죄밖에 내놓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죄인으로서 인식하는 자, 그리고 그런 자로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자, 그를 의롭다 하십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이런 내용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b)고 말씀하시니까 마치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저는 거기에도 겸손을 가장한 인간의 공로가 자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리는 자기 자신을 낮춘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아닌데 죄인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세리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죄인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을 어떤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누가복음 18장은 세리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비천할 수밖에 없으며, 비천하기 때문에 겸비함을 갖출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자를 겸손한 자로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려고 하지만 그런 공로를 철저히 버리는 자, 자기 의를 하나님 앞에서는 가지고 올 수 없다고 인정하는 자, 그런 자를 낮춘다는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을 뿐이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는 분,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서 인식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 이방인 백부장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야일자도 모른다는 믿음을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인식이 그로 하여금 어떤 자세를 취하도록 하느냐? 자신은 비천한 자로, 그리고 그런 비천한 자로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모습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시면 그가 어떤 말까지 하느냐? 다시 8절을 보시면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즉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말씀만 하시면 능히 하인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고백까지 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만드신 것처럼, 있으라 하매 있게 된 것처럼, 지금 예수님께도 명하시면 순종케 되는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9절도 보시면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여기 보면 자기 자신을 예로 들고 있지만 예수님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높으시며 권세가 있으신 분으로서의 고백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한낱 백부장인 자기 자신도 상관의 말에 복종해야 하고, 또 자기 수하들 역시 자기 자신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 참된 선지자요,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당신은 더더욱 말씀으로만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1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물론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고백에 대하여 놀랍게 여기신 것은 인성으로서의 반응입니다. 신성으로는 모르실 수 없으며, 오히려 백부장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놀라움은 어떤 의미냐 했을 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놀랍게 여기셨다’는 단어(ejqauvmasen[에다우만센])가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되는 단어라고 하는데,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서도 여기 외에 마가복음 6장 6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라고 합니다(눅7:9은 본문과 같은 사건). 그런데 마가복음 6장 6절은 어떤 말씀이냐 하면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입니다. 즉 마가복음 6장 1절에 의하면 고향으로 가셔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가르친 일이 있었는데, 그런 가르침 아래 분명 놀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지혜와 권능에 대하여 어떻게 된 일이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되었는데, 이때 말씀하신 것이 뭐냐 하면 ‘이상히 여기셨더라’, 즉 오늘 본문과 같은 단어인 ‘놀랍게 여기셨더라’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라온 고향에서조차 믿지 않는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으로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도 가지지 못하고 있는 믿음을 가진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본래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 사람에게서 이런 믿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인성으로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오늘 본문 11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구원의 은총이 주어진 자로 있고, 또 이것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가 분명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지만, 본래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고 도리어 이방인에게서 그 믿음을 찾게 된 것으로 놀랍게 여겼다는 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참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의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듯 그런 모습이 오늘날 신자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살펴본 말씀이지만 마태복음 6장 25절 이하에 보면 먹고 마시는 문제, 그리고 입는 문제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친히 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어떤 자들이냐? 그것들보다 훨씬 더 귀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표현으로 하자면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놓으실 정도로(롬8:32)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신다면 그것보다 귀한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특히 마태복음 6장 30절과 31절,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문제만으로 염려하여 그것만 구한다면 그것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아니 이방인보다 못하다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보자면 하나님을 믿는 자로 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염려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염려하고 있고 염려해야 할 이방인들은 염려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 하자면)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이라고 할 때 단지 구원을 받을 때만 믿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갈 때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어떤 면에서 마태복음 6장을 통해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분으로 계시다.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와서 이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11절과 12절입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즉 지금 이방인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겠지만, 유대인들 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아브라함의 후손을 육체적인 의미에서만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것처럼 동서로부터,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결국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자손이 아니라 그저 외형만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브라함과 이식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되는 일은 결코 혈통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결코 혈통도 아니요, 육정도 아니요, 사람의 뜻도 아니라는 것입니다(요1: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요1:12), 지금 이 이방인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믿음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요한복음 1장 13절은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해 왔던 것처럼 혈통이나 육정, 사람의 뜻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시되 유대인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에 믿음을 주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역으로 이방인의 경우 믿음을 가질 수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때가 되어 부르실 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 예정론에 근거한 것이라면 예정론이라는 시각까지 가지 않더라도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의 방식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드러내고 계신다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상속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왔지만,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는 모습으로 있었던 겁니다(요1:11). 물론 이러한 사실이 마태복음의 순서로서 보자면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이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이미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을 통해서도 증거 했던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3장 8절과 9절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 때문에 회개해야 될 일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란 것입니다. 진정한 천국 백성은 누구냐?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하여 회개해야 하며, 나아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때 이런 내용으로서 채우시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부모가 믿음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녀인 나는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이지만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일도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조차 버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적으로 선택한 것이 실제로 영원한 작정을 통해 선택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믿음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참된 믿음인가? 특히 믿음의 내용으로서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함이 있는가? 내 것으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오히려 죄 외에는 내 놓을 것이 없기 때문에 죄인으로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 나아가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고서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그런 믿음의 내용이 있는가를 다시금 살펴보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백부장의 요청에 대하여 응답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 때문에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하인에 대해서는 병이 들었다는 것과 병이 나았다는 것만 말할 뿐, 그 외에는 아무런 언급조차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 초점은 종에게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부장에게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음은 병든 자도 낫게 한다는 식의 내용도 중심된 내용은 분명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지난주 살폈던 말씀처럼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로 있기 때문에 낫느냐, 낫지 않느냐는 언제나 이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믿음에 대하여 놀랐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드러내신 11절과 12절이 더 중요한 내용으로 있습니다. 맨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이라는 자체로 배척 받아야 할 대상으로 있지만, 그런 그에게도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자가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 달리 말하면 혈통과 육정, 사람의 뜻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좀 가깝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