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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0403설교 / 마태복음8장14-17절 / 우리의연약함을친히담당하셨도다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6.04.03|조회수1,02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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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14-17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도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난 뒤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으로 그 시작을 알리셨습니다(4:17). 다시 말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시면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4:23). 그 사실을 증거하기라도 하는 듯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는 가르침, 즉 천국 복음에 관한 말씀을 증거 하셨고, 8장과 9장은 많은 부분 고치심에 대한 내용으로 집약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고치신다고 할 때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특별한 방식, 즉 기적과 이적으로서 치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치유 사역에 있어 기적과 이적으로서 행하시다보니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에 초점을 두기 쉬우냐 하면 가르침이 아니라 고치심에 마음을 두기가 쉽고,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는 그런 이유 때문에 따르게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cf.6:26).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모든 치유 사역은 치유 사역 자체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치유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 복음 사역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가르침과 고치심, 둘 다 중요한 것이긴 하나 치유 사역의 모든 초점은 복음 사역을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무엇인가 하면 기적과 이적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예로 누가복음 17에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17:11-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서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나시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을 때 고쳐주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 명 중 한 사람만이 자기가 나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달리 말하면 동일하게 육체의 질병이 나았지만,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 사마리아인 한 사람에게만 있었습니다. 물론 육체적인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다시 말해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을 생각해 본다면 구원의 은총과 상관없는 고침, 단지 육체적인 질병에서만 고침을 받는 것, 그것도 잠시 잠깐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우리가 두 주에 걸쳐 두 사건에 대해서 살폈지만, 이런 의미에서 병 자체가 나았다는 것은 결코 초점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지난주 살핀 백부장 하인이 고침 받은 사건은 고침 받은 하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달리 말하면 고침을 받게 되는 하인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을 고치고자 하는 이방인 백부장, 그리고 그 믿음에 초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도 가깝게 말하는 방식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자면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한번 택하셨다면 그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는 분명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시지만, 그런 말이 없다고 해서 단지 병만 고침 받은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이방인과는 달리 유대인으로 있지만 구약의 법으로 하자면 진 밖에 있어야 할 자, 그가 나병환자였습니다. 거룩한 무리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했던 자가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일 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에 관한 참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그의 고백을 통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대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도구로하여 나병에서 깨끗케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치유 사역은 치유 사역 자체보다는 그런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이 아니라 인성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구약의 예언을 성취할 다윗의 자손,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며, 죽음조차 정복하실 수 있는 분, 이런 내용들을 치유 사건을 통해 드러내 보이십니다.

나아가 우리의 영적인 실상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는데, 비록 육체적인 질병으로 있지만 그것을 통해 구속의 은혜를 드러내신다면 역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통해서도 영적인 실상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을 통해 본래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철저히 분리된 자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기도 하시는데,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악한 영에 의해 사로잡힌 죄인의 비참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 듣지 못하는 자, 말하지 못하는 자 역시 영적으로 우리는 볼 수 없는 자, 듣지 못하는 자, 말할 수 없는 자로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며, 그 구원을 위해 믿음이라는 선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질병을 치료해 주신다는 것은 많은 부분 구원의 은총에 대한 외적인 표라 할 수 있습니다. 질병 치료 자체가 핵심 내용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 명의 나병환자 사건을 통해서 보자면 병 고침 받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내용은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 받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전 사건에 비해 매우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이 그 내용인데, 여기 보시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나병환자의 경우 그가 유대인이었지만 육체적인 병 때문에 배척을 받아야 했다면, 백부장의 경우는 이방인이라는 자체로 배척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베드로의 장모에 대해 유대 사회에서 소외의 대상이었던 여인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소위 믿음의 내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 그분 앞에서 어떤 자로서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은 사실 찾아볼 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열병, 그것도 누가복음에서는 중한 열병이라고 되어 있고 그런 열병에 대하여 꾸짖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4:38-39),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낫게 되는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손을 만지셨다고 되어 있고 마가복음에서는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고 되어 있는데(1:31), 말씀과 더불어 손을 대시며 일으켜 세우시는 행동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분의 자비하심과 능력을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처참한 중병을 단 한 번의 손길로 단숨에 제거한다는 것은 신성한 능력에 대한 보다 더 확실하고 특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매튜 풀 주석에서는 열병은 불치병이 아니며, 따라서 이 병을 고치는 것 자체가 이적이 아니라, 이 병을 치료한 치료의 방식을 통해 이적을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거나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우시는 방식으로 고치셨다는 것과 즉시 열병이 떠나갔다는 것이 이적이었다.”

이처럼 비록 간략하게 기록된 것일 할지라도, 또 내용에 있어서도 다른 사건에 비해 뭔가 특별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과 이적의 역사로서 낫게 하신 것만큼은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으신 분으로서 인간이 행할 수 없는 능력을 행하신다는 차원에서 적어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 아니 그 이상의 존재됨을 드러내 보이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이 여인의 행동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던 그녀가 즉시 일어나 수종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열병으로 앓아누웠을 때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셔도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자로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셨을 때 그리고 그의 몸을 일으켜 주셨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모습이 되었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행한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 자체를 논할 수 있는 성격은 14, 15절 자체를 통해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믿음에 대한 고백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후 본문을 통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자기 백성을 위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구속의 은혜와 상관없는 것처럼 말할 수는 분명 없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후에 다시금 언급하겠지만, 일단 비교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면 지금 이 여인은 육체의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육체의 회복보다 영혼의 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알립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0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사람은 결코 영혼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내용이 뭐냐? 육체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는 내용 속에서 우리는 무엇까지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육체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육체보다는 영혼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은 단지 영혼만의 문제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후 심판 때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할 것이고, 특히 택자들은 영광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육체보다는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나았다고 할 때 여인이 예수님께 수종들고, 섬기며, 감사한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면, 영혼의 회복을 맛본 자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주님께 수종들고, 섬기며, 감사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문에 보면 요리문답의 전체적인 구조를 잘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참고로 1문에서는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에 대해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로 답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존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가지며 그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문에서는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되게 살고 죽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알아야 합니까?” 묻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서 요리문답의 전체 구조를 설명합니다.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요, 둘째로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요, 셋째로 그 구원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알아야 하고, 그런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그리고 구원을 받았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 선행,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십계명 해설, 기도, 기도와 관련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해설이 있습니다. 좀 더 간략히 말하자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져 가는 삶으로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올려드려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딤전4:5). 물론 십계명의 모든 내용이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결코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5장과 6장을 통해 십계명의 일부 내용,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그 내용 그대로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는 반드시 감사로서 반응하게 되어 있고, 또한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이끌고자 하는 자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분량 면에서 매우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 내용 자체도 앞선 사건에 비해 다소 단순하게 언급되고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의 권위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로서는 분명 알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도 어느 정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회복도 수종드는 일이 있다면 영혼의 회복을 맛본 자들은 더더욱 감사의 열매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오늘 본문은 단지 육체적인 질병만 낫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후 본문과 함께 생각해 볼 때 구속의 은혜가 전제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시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그런데 이 말씀이 어디서 인용한 말씀이냐 하면 이사야 53장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에 대한 내용으로서 모든 자가 아닌,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53:12). 바로 택자입니다. 따라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셨을 때 나머지 아홉에 속한 자라기보다는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를 성취하신다는 의미에서 볼 때 단지 육체적으로만 나음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은혜가 전제된 사건으로서 분명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 본문은 구속의 은혜와 관련해 차별이 없다는 것을 더더욱 알린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사건과 관련해 유대인과 더불어 이방인조차 구속의 대상으로 있다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구속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새 생명의 은혜를 입고 그를 따르며 섬기는 일, 다시 말해 구원의 은혜를 받는 일에 있어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김성수).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하자면 남녀의 구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른 아이의 구별도 없고 지위에 있어서도 높은 자 낮은 자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난주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에 때가 되어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자, 그만이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며 감사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8장으로 가시면 예수님을 따라 다닌 자들 가운데 여인의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8:1-3)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누가복음 8장에 기록된 여인들 가운데 특별히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 다시금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그와 더불어 몇몇 여인들이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27:55-56) 나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부활을 맨 처음 목격한 자도 여인들이었고, 그 소식을 사도들에게 알린 것도 이들이었습니다(24:1-10).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섬겼다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매우 충성된 모습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장모가 이 여인들과 함께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믿음과 당시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섬겼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 사건을 간략하게라도 기록의 형태로 남겨 놓으신 것을 생각해 보자면, 다시 말해 성경은 분명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하지 않고 기록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두고 선별하여 기록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많은 사건들 가운데 특별히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사건을 기록의 형태로 남겨 놓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오늘 본문을 통해 수종들었다 혹은 섬겼다는 이 말은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의 여인과 다르지 않는 자세로 섬겼다고 분명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시 구속의 은혜를 받은 자로 있다고 할 때는 이런 섬김과 감사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각오로 되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무리들이 있을 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으로 알리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이 있다고 할 때도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는 것이 인생의 모습임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내버려 두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중에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고까지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속받은 자로 있다고 할 때 우리의 마땅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즉 베드로의 장모가 나음을 받고 수종들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만을 섬기며, 주님만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각오한다고 다 되는 일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이상 결코 버리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친히 지켜 보호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에 더더욱 감사함으로 주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16절로 오시면 나병환자 및 백부장 하인,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와서 고침을 받았다고 증거 합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그런데 이런 치유 사건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할 때 조금 전에 본 17절 말씀의 성취로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으로서 치유 사역을 행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은 그 주제가 고난의 종으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인용되고 있는 내용이 이사야 534절과 5절인데 거기 보면 이렇게 증거 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그리고 이사야 53장에 대하여 베드로가 인용할 때 정확하게 십자가 사건으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 22절부터 보시면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2:22-25)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에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 이사야 53장의 성취라고 할 수 있는가? 칼빈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이사야는 본문에서 기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일시적인 축복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축복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분명히 그(이사야)는 거기서 영혼의 병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마태는 이것을 몸의 병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병자에게 무엇을 베풀었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질병 치료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을 파악하게 되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눈 먼 자에게 빛을 주신 것은 자신을 이 세상의 빛으로서 그들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였으며 죽은 자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신 것은 자기 자신의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절음발이와 중풍병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우리 영혼을 치유하실 목적으로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러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한시적이긴 하지만, 그리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육체의 질병을 통해서도 영적인 것을 내다보게 하신다는 겁니다.

실제로 모든 고통의 원인은 결코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생애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에 합당한 형벌도 받게 되었는데, 고통 역시 그 가운데 한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모든 자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을 더욱 눈으로 확인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육체의 질병도 치유하신 일이 있으셨던 겁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떡을 먹이시지만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시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결코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치유 사역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택자가 다 병에서 치유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 당시라고 해서 모든 택자가 다 치유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열 명의 나병환자 사건을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지만, 육체가 치유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부분 그렇게 연결되는 것도 사실이나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그것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뜻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큰 틀에서 보자면 그 한 가지가 바로 오늘 본문 17절인 겁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여러분, 우리 모두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병을 짊어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육체적인 의미로서도 우리가 연약하다, 병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확인하게 됩니다. 가장 많이 걸리는 질병 가운데 하나가 감기이지만, 감기조차 정확하게 치료할 수 없는 것이 현대 의학이요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영혼의 문제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연약하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이 육적인 부분으로서 연약함을 말했다면 실상 영적인 부분은 우리가 전적으로 무능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병이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능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또한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친히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그리고 그 일에 앞서 그 일을 더욱 더 알리시기 위하여 한시적으로 그리고 제한적으로 육체의 질병 또한 고치신 일이 있으셨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앞에서도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영적인 문제보다는 육적인 문제로 더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오히려 무감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치유 사건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바는 영적인 문제로 있지만 그저 육적인 내용으로만 볼 뿐 그 너머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단에서는 육체의 질병이 낫는 것을 마치 진정한 복인 양 그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니 성경이 영혼의 문제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이 잘되는 것, 그리고 범사에 잘되는 것, 나아가 건강하게 되는 것이 성경이 알리고 있는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cf.요삼1:2).

그러나 여러분, 주께서 주고자 하는 진정한 복은 결코 육적인 복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8:20) 만약 육적인 복을 주고자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런 삶을 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적인 복을 주시고자, 에베소서에 기록된 것처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고자 공생애를 사셨고, 또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셨던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는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병든 것을 친히 짊어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전적으로 무능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능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다시금 살리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만 초점을 두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동안 모든 택한 자의 질병을 고치지 않았던 것처럼 육신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택자이지만 질병으로 죽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택자이기 때문에 질병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칼빈은 소위 종합병원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병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자 하신 이사야서의 내용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한시적이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문제조차 해결해 주시면서 그의 뜻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이미 성취하신 것을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이 확신한 것처럼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8:38-39).

아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것처럼(173) 사탄이나 세상의 유혹, 그들 속에 남아 있는 강한 부패성, 자신의 보존을 위한 방편들을 게을리 함 때문에 심각한 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26:70,72,74). 또 얼마동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음으로써(51:표제,14)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고(64:5,7,9, 삼하11:27), 성령을 탄식케 하고(4:30), 자기들의 은혜와 위로의 방편들 중에 얼마를 빼앗기고(51:8,10,12, 2:4, 5:2-4,6), 마음이 굳어지고(63:17, 6:52, 16:14), 양심이 상처를 입고(32:3,4, 51:8), 다른 사람들을 해치거나 욕되게 하고(삼하12:14), 자기들에게 일시적인 심판을 초래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89:31,32, 고전11:32).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택자를 위하여 이루신 모든 것을 무효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비록 구속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연약함이 있고, 또 그런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기도 쉽지만, 그리고 그것이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때로는 육적인 문제로서도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지만, 그런 우리를 위하여 일하셨고 또한 계속해서 일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이런 주님 앞에 우리는 어떤 자로 있어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목적하신 바와 상관없이 여전히 육적인 문제로만 걱정하고 근심한다면 결코 주의 영광을 위한 삶은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 그리고 그런 감사로서 주를 따르는 자,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것으로 감사하며 사는 자, 그리고 그런 인생이 힘들 수 있으나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서 인내하며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알고서 살아가는 자, 그가 바로 주의 백성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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