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9장 9-13절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람과 바다조차 잔잔케 하신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까지도 사해주실 수 있는 권세를 지니셨습니다. 비록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의 모습으로 그들 앞에 계셨지만, 그분은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러 면에서 드러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특히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셨다고 알리신 사건은 굉장히 중요하다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바로 그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시면서 육신을 고치고 있으니까 마치 그 일을 위해 오신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리고 실제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것은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그림자와 같은 성격으로 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육신을 고치시는 일은 계속해서 그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잠깐 한시적으로, 그리고 대상에 있어서도 제한적으로 행하실 것으로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육신의 질병을 고치시면서도 믿음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씀해 주셨던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본문은 마태라는 제자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단지 마태를 부르시는 것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지니고 계시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와 관련 있다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9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복음에서는 마태라는 이름으로 소개를 하고 있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레위’라는 이름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막2:14, 눅5:27).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에서는 그를 ‘알패오의 아들’로도 부르고 있습니다(막2:14). 마태복음 10장에서는 그를 사도 중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데(마10:3), 그는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이 마태복음의 기록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라고 기록하고 있고, 특별히 열 두 사도를 소개하는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세리 마태’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마10:3). 이 세리라는 직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불명예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직업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일정량의 세금을 로마에 받쳐야했는데, 그들은 일정량만을 거둬들인 것이 아니라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줄 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세리에 대해서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는 권면을 할 정도였습니다(눅3:13). 그만큼 부과된 것 이상으로 거둬들이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세리라는 직업은 매우 부정적인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세리와 동급으로 어떤 말이 따라 나오느냐 하면 ‘죄인들’이라는 말이 따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또 다른 곳에서는 세리와 더불어 어떤 표현까지 사용하느냐? 마태복음 18장 17절에서는 ‘이방인과 세리’,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는 ‘세리들과 창녀들’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세리를 누구와 동급으로 취급하느냐 하면 이방인과 창녀들과 동급으로 취급합니다. 죄인의 대표적인 사람들로 누구, 누구를 꼽을 수 있느냐 하면 이방인, 창녀들, 그리고 세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그를 부르셨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소위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부르심으로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알린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할 때 그런 죄인을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큰지를 알린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에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것에 대해, 특별히 그를 사도로서 부르고 계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좋은 본보기’라고 말합니다. 세리라고 할 때 여러 가지 타락한 행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는데, 그런 그를 불러 사도로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에 대한 본보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르심이 은혜라고 할 때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부르심과 관련하여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여기 보면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많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가 있을 수 있고, 또 능한 자가 있을 수 있고, 문벌 좋은 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많지 않다고 말하는 자들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들, 즉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할 때 그런 자들은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를 부르신다는 것과 같습니다. 역으로 지혜로운 자를 말할지라도, 능한 자, 그리고 문벌 좋은 자를 말할지라도 실제로는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를 부르신다는 의미는 그래도 남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자랑할 수 없게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어느 누구도 부르기에 합당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를 부르셨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고 할 때 인간이 자랑할 만한 게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말한다는 것은 뭐냐? 인간이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은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역으로 은혜를 말하면서도 인간을 자랑하는 형태로 있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혜와 거리고 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실 때 오늘 본문은 즉각적으로 그 부르심에 대하여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자랑꺼리가 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특히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눅5:28). 마태복음 4장에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던 것처럼 마태 역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순종보다 부르심이 앞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보면 예수님께서 부르신다고 할 때 그 부르심에 대한 결단에 초점을 두는 일들이 있습니다. 물론 즉각적인 순종을 강조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부르신다면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명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하고, 금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 금하시는 것에 대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순종에 대한 교훈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종보다 앞서는 것이 부르심이라는 것, 그리고 그 부르심은 유효적이라는 것을 놓치고서 순종만 강조한다면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자리에서 상당히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정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 1항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항.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에로 예정하신 모든 자들, 곧 그들만을, 그가 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때에,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살후2:13,14, 고후3:3,6) 그들이 본성적으로 처해 있던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구원에로(롬8:2, 엡2:1-5, 딤후1:9,10) 유효적으로 부르십니다(롬8:30, 11:7, 엡1:10,11).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또는 구원적으로 조명하여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깨닫게 하시고(행26:18, 고전2:10,12, 엡1:17,18),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겔36:26),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여,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선한 것을 따르게 하시며(겔11:19, 빌2:13, 신30:6, 겔36:27), 유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끌리도록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엡1:19, 요6:44,45).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자원을 하게 되었음으로, 가장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입니다(아1:4, 시110:3, 요6:37, 롬6:16-18).
여기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 자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자유롭게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순종하는 자에게 원인으로 있는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고백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자원을 하게 되었음으로, 가장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자원할 수가 없는데, 자원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나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나아간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할 때 앞선 내용들을 말한다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의 마음을 조명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하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의지를 새롭게 함으로 선한 것을 따르게 하시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순종을 위하여 마음의 변화와 의지까지도 주께서 일으키신다는 겁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들려지는 말씀으로 역사하시지만 듣는 자가 주체가 아니라 그 말씀을 그들 속에서 역사하도록 하시는 성령이 주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을 성경을 따라 우리가 고백한다고 할 때 순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행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빼거나 전제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순종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고린도전서의 말씀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정확하게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신다고 할 때 중요한 내용은 부르심에 대한 순종보다 부르심과 그 부르심을 유효적으로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순종도 중요하지만 그 순종의 참된 주체가 누군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성경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스스로, 그리고 먼저 찾는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14편 2절과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그럼 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자 앞에서 무엇을 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반응하는 일이 있는가? 그러니까 죽었다는 것은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처럼 모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주셔도,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셔도 반응할 수 없는 것이 죽은 자의 모습인 겁니다. 심지어 성경은 무엇까지 말하는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인간 기준에 의한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선한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부르신다고 할 때 부르심에 대하여 순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살려주신 바가 아니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순종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요, 긍휼과 자비의 역사가 선행하여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순종은 우리의 결단력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일차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역사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순종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순종케 하시는 은밀한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더욱 드러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대하여 칼빈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순종하려는 진지한 열성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의 신령한 효과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의 노력 속에서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를 본다는 것입니다. 순종을 보지만 순종을 통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그 부름의 유효성까지 본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신앙고백서를 통해 알려 주고 있는 것처럼 순종이 주의 은혜의 결과이지만 마치 자원하게 된 것으로, 가장 자유롭게 순종한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는 것도 굉장히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앞서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에 따른 뒤따르는 은혜를 더하십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은혜의 역사를 하나님 자신이 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순종하면 상급까지 허락하시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이런 내용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주께서 친히 그 일을 행하신다고 할 때 주께서 숨기시는 형태로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으로 내 자랑을 삼아도 되는 것처럼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히려 성경의 정당한 이해는 순종하면 상급을 주겠다고 말씀하시고 실제로 순종하는 일이 있을 때 그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인 줄 알고 주께 다시금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요, 마땅한 바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을 모른 채 내 공로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제 10절로 오시면 부르심을 받아 따르게 된 마태가 예수님과 함께 식탁 교제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누가복음에서는 마태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눅5:29), 주께서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자신을 부르신 것에 대하여 감사한 나머지 그의 동료들, 그리고 그와 같은 부류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잔치를 통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내용은 잔치를 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그 잔치에 앉아 있는 자들이 누군가 하면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물론 세리라는 직업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동료들, 그리고 그와 같은 부류들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서 그들을 초대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은 동료, 혹은 친구라는 표현으로 저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즉 오늘 본문 13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만 모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할 때 이 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굉장히 못 마땅해 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서기관들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비방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눅5:30). 그러니까 비방의 직접적인 대상은 제자들로 있지만, 제자들을 통하여 누구까지 비방하고자 하는가 하면 예수님까지 비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그들이 그렇게 비방하는가? 당시 그들의 율법에 따르면 여러 가지 조목들로 죄인들을 구분하는 것이 있었는데, 죄인들로 구분되는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느냐 하면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결 규례를 어긴 그릇된 행동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그런 행동을 하자 비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분명 악인과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시편 1편만 보더라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가르칩니다(시1:1). 고린도후서에서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고후6:14). 그러나 저들의 율법과 정결 규례가 이런 말씀의 의미를 드러내는 성격으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이 정한 규례를 따라 ‘죄인들’을 피하는 데는 매우 엄격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죄’를 피하는 데는 전혀 엄격하지 않았습니다(매튜 헨리). 달리 말하면 그들 스스로 율법을 해석하면서 죄인으로 구분 짓는 자들이 있었고, 그러게 구분 지었을 때 그들을 피하는 데는 엄격했습니다. 이방인도 피하고, 창녀들도 피하고, 심지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리들도 피하는 데는 엄격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나오지만 강도 만난 자가 죽게 되었을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은 그를 피해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분이 마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자기 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죄를 피하는 데는 전혀 엄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심각한 병폐 가운데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그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드시는데,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이런 전제를 두고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8:9)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비유가 나오게 되는데, 기도를 하면서도 그 기도의 내용이 뭐냐 하면 자기가 잘한 것, 다시 말해 자기 자랑만 나열하고 있음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기도라는 외형을 갖추고 있고 기도가 가지는 의미처럼 주께로부터 받아야 한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만, 실상 그 모든 것은 내가 행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말하면서도 은밀한 혹은 노골적인 공로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리새인의 모습이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은혜라는 말은 결코 우리의 공로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라는 말이 우리의 공로와 함께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랑이라는 말도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자랑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멸시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그것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은혜도 말하지만 공로도 말합니다. 공로로 인한 자랑도 말하며, 자랑으로 인한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과 비난도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말하는 은혜, 저들이 어떤 종교적인 내용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실상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시는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고, 어떤 종교적인 내용으로서 행하는 바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였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모른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도 보면 저들의 전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7:3-4) 그리고 이것 때문에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또 시비를 걸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눅7:6-8) 결국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명분만 가지고 있을 뿐, 주께서 말씀하시고 뜻하시는 내용은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한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도 보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는 내용이 있는데,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여러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가르치는 자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 배움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저들은 전혀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 호세아서의 말씀인데, 호세아 선지자 당시 온통 종교적인 의식만 화려할 뿐, 아무런 열매가 없는 것에 대하여 내가 긍휼을 원하지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는 열심히 드리지만,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 전혀 실천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주께서 긍휼을 먼저 베푸신 것처럼 그의 백성들도 그런 긍휼을 베풀어야 하지만, 예배를 드리면서도 긍휼이 아니라 자기 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일만 있더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지금 누구에게 하고 계시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에게 하고 계신 겁니다. 특히 호세아 6장 3절에 의하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의식만 화려하다는 것은 결국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연결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과 관련해 바리새인만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는 서기관도 바리새인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서기관들은 누군가 하면 율법을 기록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저들은 어느 지역에서 탄생하는지 알 정도로 성경에 대하여 박식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의 그런 박식함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 성경 어디에 어떤 말씀이 있고, 또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 지식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상관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는 드리고 있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 다시 말해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며,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며, 그 긍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온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저들의 무지는 저들 스스로가 의롭다고 하는 데서,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를 거부하고 있다는 데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무엇인가? 성경은 어느 누구도 의롭다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앞서 시편 14편을 언급했지만, 로마서 3장에서는 시편 14편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그들 스스로는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론이란 하나님의 뜻, 그리고 기록된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저들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들의 인간론에 근거하자면 메시야의 필요성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구원과 상관없는, 거저 정치적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참되게 필요로 하는 자들은 죄인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 누가 와 있느냐 하면 죄인들이 와 있는 겁니다. 그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 나올 수 없고, 오히려 그것에 대하여 비방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천국 잔치와도 연결된다 할 수 있습니다. 즉 천국 잔치에 초대 받는 사람들은 누구냐? 죄인들 외에는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자들,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자들, 그들만이 초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사로서 소개하고 계십니다. 의사는 누구에게 필요한가?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한데, 바로 그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4편이나 로마서 3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의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는 자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상대적인 의미에서는 선과 악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죄인으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육신의 병과는 달리 영적인 병은 병든 자가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병든 자를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병든 자인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병을 알고 의사이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혹 우리가 의사이신 예수님을 찾은 외형을 띤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가 선행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먼저 찾은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가 항상 앞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로서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내용으로 하자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그는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의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사라고 해서 이 의사, 저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의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바리새인의 모습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은 내가 병들지 않았다는 것을 착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필요한 병자라는 사실을 아는 데 있습니다. 나 스스로 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 있고, 나 스스로 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유일한 의사,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아니 병들었지만 병든 사실을 모르는 우리에게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며,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결코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 참된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분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부르시기 때문에 그 부름에 순종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바리새인의 의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순종도 값진 것이지만 부르심, 명령이 앞선다는 것, 그리고 그 부르심과 명령에 대하여 반드시 효력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