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3장 5-10절
회개의 세례와 열매
지난 시간 우리는 세례 요한과 관련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을 살폈습니다. 그는 주님보다 앞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마3:3) 마치 엘리야를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외형을 갖추었습니다(마3:4). 그러나 단지 외형만이 아니라 성경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또 자식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이 세움 받았다고 말합니다(눅1:17, 말4:6).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세움 받은 자,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들을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 받은 자, 그가 세례 요한인 겁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을 보시면 그런 세례 요한의 전도,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외침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러니까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들을 자복했던 것이고, 그러한 일이 세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관련해서는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지만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다시금 말씀드리면, 회개란 말은 마음 또는 의도를 바꾼다는 뜻에서부터 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그 마음이 가 있던 것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이전의 마음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을 입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요청이 있다고 할 때 회개하는 것, 오늘 본문에서처럼 죄에 대하여 자복하는 일이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깨달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성령의 내적 역사가 없이는 회개할 수도 없고, 죄에 대하여 자복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 사람들이 자기 죄에 대하여 자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지, 회개한 사람이 남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란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스스로 회개하거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다 무엇의 결과냐?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그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이지, 거기에 인간이 뭔가 더한 일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 두셔야 합니다.
그럼 이런 회개와 관련하여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마가복음 1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여기 보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회개하라고만 전한 것이 아니라, 세례까지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례를 베풀었다고도 볼 수 있고, 혹은 회개하라는 말과 함께 세례가 갖는 의미도 전하면서 세례를 베풀었다고도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세례를 받는 자 입장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모른 채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말씀과 함께 세례를 받기 위하여 그 세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세례란 어떤 의미인가? 세례와 관련해 성경은 몇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첫 번째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세례는 구원의 표이지, 구원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톨릭의 경우 세례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봅니다.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례 자체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말합니다.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구원의 표로서 세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6장 3절과 4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는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데, 한마디로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금 살아나는 중생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그런 연합으로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금 살아나는,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다는 의미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준다고 할 때 이런 의미로서 세례를 주고 있는 겁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아니지만 회개하라는 권면으로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라고 알리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제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한다는 분명한 교훈이 증거 되었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정리해 둘 필요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지금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서 세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죄를 자복하지 않고서는 세례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시대의 재세례파는 자기 입술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유아세례를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통상적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로마서 말씀에서처럼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새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고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세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가 반드시 죄를 자백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종교개혁시대의 재세례파처럼 오직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성인들, 자신의 입술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들만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로교는 유아들에게도 세례를 베푸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언약은 단지 성인들과만 맺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까지 포함하여 맺으신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얼핏 생각하면 죄인 됨을 깨닫지도 못할 때, 어떤 신앙고백도 할 수 없을 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심각하게 보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회개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보다 앞선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조건을 보시지 않고 영원 전에 하나님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택하신 성격을 무엇보다 잘 드러내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럼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들의 경우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보다 앞선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고, 믿음도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로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면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을 따라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의 경우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유아가 아닌 성인들을 염두해 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역으로 성인이라면 아무렇게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난 뒤 세례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는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도록 하는 뜻에서 죄의 고백이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되고 있다... 물론 여기서는 성인들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교회로 끌어 들이거나 먼저 시험해 보지 않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여오는 것은 잘못이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자기 죄를 자복한다고 할 때 가톨릭은 이런 구절로서 고해성사를 말할 수 있는 본문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강요를 통해 배운 것처럼 가톨릭은 회개를 위해서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심령으로 하는 통회, 입으로 하는 고백, 행위로 하는 보속이 그것입니다. 고해성사라는 것은 두 번째 내용인 입으로 하는 고백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없으면 참된 회개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가복음 1장 4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즉 회개하는 표로서 물로 세례를 주었던 것이지, 아무런 표도 없는데 그냥 세례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의미를 가집니다. 때문에 세례는 죄의 용서에 대한 상징입니다. 달리 말하면 죄를 고백하지 않고 세례를 준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인 겁니다(기독교강요, 1559, 3권 4장 6 참조).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설령 로마 가톨릭 교도들의 이론을 빌어 이야기한다 해도 고해성사는 오직 세례 지원자에게만 해당되고 세례 이후에는 설 자리가 없다.” 쉽게 말해 지금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저들이 말하는 고해성사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6절과 관련해 우리는 제세례파의 주장도, 그리고 가톨릭의 주장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오히려 본문은 세례를 받으러 나온 모든 자들이 자신의 죄를 자백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는 연령대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전도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어 회개케 하시는 역사를 보이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 자기 마음에 찔림이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고, 세례를 받기 위해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 무엇보다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을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제 오늘 본문 7절에서 9절로 오시면 좀 더 특정한 부류에 대해서도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장 19절 이하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면서 요한의 정체에 대해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네가 누구냐?” 그리고 24절에 보면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고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요1:25)
오늘 본문의 경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당시 사두개파에는 제사장과 레위인 출신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 베푸는 장소에 왔다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밝히고 있듯이 세례요한의 정체와 그가 베푸는 세례에 대해 따지고 묻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많다는 말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예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된 이들 외에도 다수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로 왔다고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류들을 향하여 지금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뭐냐?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여러분,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어떤 면에서 종교지도자들이고, 유대인들의 대표격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본이 될 만한 그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존경을 받는 것처럼 되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실상은 존경을 받을만한 그런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마태복음 2장만해도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왔을 때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영적인 실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바리새인들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상들의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지키는 자들(막7:3-4 참고), 그러나 외식만 있고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린 자들(마23:23 참고), 그만큼 겉과 속이 다른 자들(마23:25 참고), 심지어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며(눅11:43) 돈에 눈 먼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눅16:14).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눅18:9). 물론 모든 바리새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대체로 그러했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사두개인의 경우 그들은 독특하게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도 없다고 하며, 영도 없다고 하는 자들(행23:8), 때문에 이 세상의 삶만을 바라보는 가장 불쌍한 자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고전15:19 참고). 물론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어떠했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말하자면 주의해야 할 가르침밖에 되지 않았습니다(마16:6). 이것은 바리새인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종교지도자들로서, 그리고 유대인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그렇게 본이 될 만한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그들이 자신에게로 나아올 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저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강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탄을 뱀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세례 요한은 저들에게 사탄의 자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9절에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이 뱀의 후손(창3:15), 즉 그들의 조상 마귀의 후손(요8:44)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겁니다(매튜 헨리).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저들이 다 참된 회개가 없는 유기자란 뜻은 아닙니다.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에 보면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모든 무리에게 이 말을 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3:7) 그리고 이후에 보면 회개하면서 실질적인 삶의 변화를 위해, 즉 의의 열매를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16:23)
따라서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유기자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그들의 현 상태가 마치 사탄의 자식처럼 행하고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에서 무리가 아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이 말을 했다는 것은 저들이 유대인의 대표격이고, 종교지도자이기 때문에 그 죄가 더 심각하다는 차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있다는 것이고, 아무도 그러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제가 있다면 이런 말씀 가운데서도 돌이키지 아니하면 진노와 저주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말4:6 참고). 너희의 가르침, 너희의 마음과 행위는 독사의 자식으로서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지만, 이제는 돌이키라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뭐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바로 이 말씀인 겁니다. “지금까지는 혈통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자랑했지만, 혈통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랑할 수 없다. 무엇이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한다.” 지금 세례 요한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단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러 나아온 모든 무리들, 이미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거기에 있는 모든 무리들을 향하여 교훈하고 있는 말씀인 겁니다.
그래서 칼빈은 오늘 본문 7절을 누가복음 3장 7절과 함께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이 이들을 공중 앞에서 욕하고 꾸짖는 것은 이 무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는 ‘무리에게’라는 말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몇 사람을 지적해서 꾸짖고 있지만 그의 속셈은 무리 전체가 이것을 보고 두려워하게끔 하는 데 있다...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특별히 상대함으로 거짓 회개의 흉내로 진정한 감정의 덮개를 삼지 말라는 경고를 모든 사람에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면 우리의 회개가 참된 회개인지, 아니면 거짓된 회개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를 분명히 살피셔야 합니다. 말로는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열매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면서 세례를 받았지만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본래 우리의 모습이지만 죄에 대한 탄식과 의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해 스스로는 회개했다고 말하고 또 세례도 받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인 열매를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과연 참된 회개를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없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과 관련해 열매 차원에서 말할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시되 무엇을 목적으로 택하셨는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말 성경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 합당하게 번역하자면 ‘그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고, 또 이것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과 4절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 보면 신성한 성품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전 개역한글 번역은 신의 성품입니다. 그리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속성과 동일한 속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는 겁니다.
결국 예정의 목적,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열매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겁니다. 물론 에베소서 1장은 좀 더 궁극적인 목적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입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 소요리문답 1문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인생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열매까지도 주신다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지금 인용한 세 구절은 다 그 주체가 하나님으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셨다. 그리고 택하실 때 무엇을 목적으로 택하셨는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택하셨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목적으로 정하셨다면 반드시 그 열매를 주신다는 겁니다.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신다는 것이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열매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갈라디아서에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무엇으로 말하고 있느냐?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갈5:22-23).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주체가 되어 맺도록 하시는 열매인 겁니다.
때문에 참된 회개는 그 마음의 변화와 함께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시편 1편에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습니다(시1:3).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불러주신 자,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 자, 그들은 결단코 열매가 없을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입니다. 열매를 맺으라고 하니까 너희 스스로 열매를 맺어 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도록 자신을 돌아보고 또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서도 분명 말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을 오해해서 내 노력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앞서 가톨릭의 경우 회개의 요소로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마지막 내용인 행위로 하는 보속의 주의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들은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자면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매가 있어야지만 죄가 용서된다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선행이 보속인 겁니다. 선행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씀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은 너희가 회개했다면, 그래서 어떤 사람의 경우 세례를 받았다면 그것이 참된 회개인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미로서 알리고 있는 말인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반드시 열매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열매는 용서받은 자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매를 찾아볼 수 없다면 과연 너희의 회개가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있느냐? 지금 세례 요한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로 회개의 마음을 주셨다면 너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 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의 열매가 아니라 의의 열매가 마땅하지 않는가? 바로 이런 의미인 겁니다.
그러므로 혹 우리에게서 어떤 선한 열매가 있다면 가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을 보속으로도 볼 수 없고, 심지어 그것을 내 노력의 결과물로도 보시면 안 됩니다. 물론 열매를 위해 노력할 수 있고, 또 노력도 해야 합니다. 혹 노력조차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노력이 있도록, 선한 열심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지를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력을 했다고 할 때 그 노력이 마치 내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 공로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열매조차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요, 회개로 말미암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몸 된 교회는 그의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농부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5장 5절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분을 떠나서는, 그분으로부터 뭔가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 그것이 바로 성도의 정체성인 겁니다.
10절도 보시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얼핏 보면 열매가 없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니까, 역으로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톨릭의 경우 구원의 교리로서도 믿음과 선행을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사실이지만, 원죄를 가진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답변입니다. 열매를 맺는다고 해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가? 만약 율법이 명하고 있는 모든 열매를 맺는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전한 열매를 다 맺을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 세례 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열매가 있어야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때가 이르렀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면 그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자신을 더욱 돌아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가 아닌 자, 유기된 자, 그리고 그들 스스로 악행을 일삼는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좀 더 구분해서 말하자면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만, 그들이 정죄를 받는 것, 형벌을 받는 것은 다 너희 스스로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열매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죄의 열매만 있기 때문에 정죄를 받고 형벌을 받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유기하셨다고 해서 정죄를 받고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리해 두셔야 할 것은 열매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열매가 없으면, 즉 죄의 열매만 있으면 분명 형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만 근거를 둡니다. 즉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 전에 우리가 선택을 받았고, 또 때가 되어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것도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의 죄인 됨도 확인하게 될 것이고, 회개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자기를 돌아보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길을 걷게 하시고, 또한 열매도 맺게 하십니다. 물론 그 열매가 적을 수 있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맺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받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지만, 돌아본다는 것이 하나님 없이 내가 할 수 있다고 가시면 안 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런 열매를 맺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그것을 맺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혹 도우심이라고 말해서 하나님과 협력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처럼 그분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맺을 수 없다가 사실입니다. 때문에 열매가 있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고, 혹 열매가 없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면서 주의 은혜를 더욱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