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9장 35-38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내용이 마태복음 4장에 나타나고 있는데(마4:12-17), 같은 장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런데 이런 요약은 오늘 본문에서도 등장합니다. 3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특히 마태복음 4장 23절과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9장 35절 사이에는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인 산상수훈의 교훈과 8장과 9장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기적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마태복음 4장에서는 이런 내용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알리고자 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제는 이런 기록을 요약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도에서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늘 본문 35절의 경우 이미 마태복음 4장을 통해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금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4장을 다룰 때 간략하게만 언급을 했고, 오늘 본문을 다루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고 했기 때문에 오늘은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서 전체적인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셨는데, 그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이냐 했을 때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 속한 것에 대한 가르침,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가르치시며 전파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천국 복음만 전파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온 것처럼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 보면 많은 병자들, 많은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는데,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구약의 말씀을 성취한다는 차원에서, 혹은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복음을 향하도록 하는 차원에서 기적, 이적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비록 마태가 이사야서를 인용할 때 육체로서 표현하는 바가 있지만, 실상 영적인 내용을 담고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육체가 낫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더 핵심으로 와 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구조를 생각해 보는 것도 유익함이 있을 줄 아는데, 먼저 마태복음 4장으로 가시면 17절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알립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리고 난 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첫 시작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해서 누구를 부르시느냐? 바로 제자들을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 오늘 본문과 같은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예수님의 사역을 먼저 요약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0장으로 넘어가시면 12제자를 세우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는 그들에게 권능을 주셨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바로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기 쉬우냐?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는 것처럼 말씀보다는 권능에 초점을 두기가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양식보다는 먹고 마시는 육체의 문제가 더 민감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런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할 때 거기에 초점을 더 둘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천국 복음 전파가 그들의 핵심 사역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도 어떻게 말하는가? 7절에 보시면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그리고 8절에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핵심 사역인가? 말씀 전파, 복음 전파, 천국에 대한 전파인 것입니다. 물론 말씀의 순서가 앞에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이 초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맥락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4장과 9장 사이에 있는 구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고, 또 그 이후 내용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방금 읽은 마태복음 4장 17절부터 시작된다고 할 때 5장에서 7장까지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그 가르침에 대하여 사람들은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마7:29). 그리고 그의 가르침이 참된 권위로부터 나왔다는 증거를 8장과 9장에서 치유사역을 통해 확증하십니다. 이후 10장에서는 그의 12제자들에 대해 언급하시고 제자들에게 복음 증거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가르치시는데, 11장으로 넘어가시면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로 표현했다면 이제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가르치며 전도하시고자 여러 동네로 가셨다고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구조들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생각할 때 그 치유사역은 그것 자체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복음 전파와 맞물러 있다는 걸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 사역 없는 치유 사역이란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더 핵심이냐 했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인 복음 전파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모든 치유 사역은 이 복음을 섬기는 도구지 치유 사역 자체가 핵심으로 와 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전에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은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자신을 증명해 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만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마4:1-10). 심지어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마24:35). 그만큼 말씀이요, 복음인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이렇게 길게 나열하면서 말씀드리느냐?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8장과 9장을 통해 기적에 관한 여러 가지 사건을 살펴보았지만 기적을 행하신다고 해서 기적 자체가 초점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기적과 관련된 사건을 다루면서도 계속해서 언급한 바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위기 가운데 일부가 기적과 이적을 너무 높이 생각하고 있고, 성도들 역시 거기에 많은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가 어떤 기적을 베푸시면 그것에 대한 성경의 분별은 생각하지 않고 기적이라는 것 자체에 너무 쉽게 매료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 그 방향이 아니란 걸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혹은 어떤 경험을 했다고 하면 그 경험이 마치 성경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도 한데, 이런 부분에 대해 주의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을 설교할 때 다시금 언급하겠지만 사실 기적과 이적은 성경 기록이 완성되지 않을 때만을 위해 주신 한시적인 은사입니다. 달리 말하면 항존직분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비상직분, 즉 선지자, 사도, 복음 전하는 자들을 위해 주신 은사입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매료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바른 신앙에 있어 매우 위험은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은 천국 복음 전파요, 그것에 대한 가르침이란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기적의 역사, 치유의 역사는 말씀을 섬기기 위해 있는 것이긴 하나, 성경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그것 자체가 예수를 믿게 만들거나 좀 더 나은 신앙으로 나아가는 핵심으로 와 있지는 않다는 것까지 말한다는 것도 주의해서 보셔야 합니다. 이것을 잘 증거 해 주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에 있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다시금 확인하자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6장 27절에서 31절입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보십시오. 부자가 지옥으로 갔을 때 아직 죽지 않은 형제들이 생각나서 그들에게 죽은 자가 살아나 복음을 증거 하면 반드시 믿을 것이라 말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기적도 결국 말씀을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의 말을 받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적을 체험하면 더 잘 믿을 것 같고, 또 우리 주위에서 그런 일을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더 신앙이 나아보이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혹 합니다. 그러나 성경 자체가 이미 그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분 중에 어떤 기적적인 일을 경험하면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속고 있는 일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히려 불신자에서 신자가 되는 것, 신자에서 좀 더 나은 신자가 되는 모든 방편은 오직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다시 오시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복음을 핵심으로서 가르쳤다는 것, 그리고 구약의 성취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향하도록 하는 이 치유 사역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을 증거 하시고 가르치시되 그들에게 기적까지도 동원해서 주목시키고자 했던 이유가 뭔가? 바로 참된 목자가 그 시대에는 너무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기적을 일으키신다고 해서 기적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동원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시대가 그만큼 부패했다는 증거요, 지금 예수님의 말처럼 참된 목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반증과도 같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을 가르치면서도 그 가르침에 있어 전혀 권위가 없는 가르침을 가르쳤습니다. 가르치기는 가르쳤는데 전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진리와 부합하는 그런 가르침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5장, 6장, 7장에서 천국 복음을 가르쳤을 때 그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7장 28절과 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다 형식과 외형만 갖췄을 뿐 그 안은 아무 것도 없는 자들과 방불한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즉 그들의 가르침을 주의하라 말씀하셨던 것이고(마16:11-12), 이후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마23:13, 15, 23, 25, 27, 29)라는 반복되는 말씀을 통해 저들의 실상을 더욱 드러내셨던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 저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실제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자들과 같았던 겁니다(딤후3:5). 이런 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이나 신약에 보면 특별히 말씀사역자들에 대해 목자라는 말을 돌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 사역자가 아닌 일반 성도에게 목자라는 말을 돌리는 경우는 성경에 있느냐 하면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그룹 모임에 있어 그 모임을 이끄는 사람에 대해 목자라는 말을 쓰는 것은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만 누구를 대상으로 그런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주의해서 보셔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말씀사역들과 관련해 목자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해야 될 사실은 말씀사역자들과 관련하여 목자라는 말을 돌리지만 참된 목자는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명을 받아 말씀으로 섬기는 자들은 자신이 참된 목자의 도구임을 알고 그분을 드러내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그대로를 양떼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말을 하거나 자기 뜻대로 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로 일컬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내용이 성경 몇몇 군데에서 나오지만 에스겔 34장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겔34:1-6) 정확하게 오늘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목자라 일컬어지는 자들은 다 이와 같았습니다.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고 포악으로만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연약한 자로 강하게 하며, 병든 자를 고쳐주며, 상한 자를 싸매어주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잃어버린 자를 찾고, 포악이 아닌 긍휼로 저들을 다스리시고자 함입니다. 당연히 주께서 세우신 목자들은 주님과 동일한 길을 가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배만을 채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데까지 앞장섰던 것이 바로 목자들이 하고 있던 일이었던 겁니다. 때문에 지금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고, 그것을 보시고는 불쌍히 여기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 시대만 그러느냐? 지금 보고 있는 에스겔이 사역을 하던 구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9절부터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4:9-15) 이런 말씀에 근거하면 지금 주께서 오신 것은 바로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보시면 분명 추수할 일꾼이 적어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에스겔 말씀과 함께 이해하자면 그럴지라도 그들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을 통해 지금 하나님의 양 떼를 부르시는 주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인 겁니다. 시각을 바꾸어 그리스도께서 기적과 이적을 베푸셔서 소문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됩니다. 그럼 몰려나온 그들이 주체로 있는가? 그들 스스로 몰려왔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외형은 그렇게 보일 수 있으나 주께서 자기 양을 자신에게로 불러 이끌고 계시는 역사가 그런 외형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짓 선지자들 안에서 횡포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그가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좋은 꼴과 살진 꼴을 먹이시고, 좋은 우리에 눕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양 떼를 향한 그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이나 9장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병든 자들, 그리고 귀신들린 자들의 외형 때문에만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저들의 영적인 실상, 그리고 당시 참 목자의 마음을 가진 목자가 없음으로 인해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런 일이 없는가? 구약 이스라엘 나라가 어떤 면에서는 교회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 안에도 거짓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 시대 역시 그럴 수 있다고 당연히 생각해야 됩니다. 소명을 받아 양 떼들을 먹이는 목자로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배만을 채우는 자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지만 복음만이 아니라 유사 복음 혹은 거짓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 그리고 그것 외에 다른 것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말씀만으로 그의 백성들을 먹이시고자 하시는데 그의 종들은 말씀만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양식을 삼아 가르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그리고 구약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 안에 참된 목자가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가슴을 쳐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 언제가 말씀을 드린 것처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몸은 어떤 존재로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케 하는 존재로 있습니다. 본래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을 충만케 하실 수 있는 분인데, 그런 분을 충만케 하는 존재가 누구냐?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의 충만이 곧 그리스도의 충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교회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가?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누구를 세우셨는가? 교회 안에 말씀 사역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비상시대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들을 세우셨고, 비상시대가 끝난 오늘날에는 목사와 교사, 즉 목사로서의 교사를 세워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해야 할 말씀 사역자들이 그 일은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불완전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불완전함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불완전함으로 마치 그리스도가 불완전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형태로 있기 때문에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목자를 보내 달라고 간청하라고 하십니다. 37절과 38절을 보시면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그분이 진정한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수할 일꾼은 정확하게는 말씀사역자들입니다. 양 떼를 가르치는 소명을 받은 자!
때문에 오늘날 모든 목사들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가르치며 복음을 증거하는 그 일에 그들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참된 목자가 없음으로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는데, 말씀 사역자들 과연 주님의 일꾼으로서 주님의 것만을 먹이고 있는가? 아니면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것을 먹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당연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참된 목자가 세워지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가시적 교회를 위해 목사를 두셨고, 목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대언케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여러분의 목자를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이후, 마태복음 10장으로 가시면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신 이가 직접 추수꾼들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십니다(마10:1).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권능이 주목될 수도 있지만, 누가복음 10장 20절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7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해서(마7:22)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의 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권능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아니라면 그런 권능으로 어떤 역사를 경험했다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의 표는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설교 초반부에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 복음이 핵심이지 권능을 행하는 것이 핵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이가 친히 그 일을 행하시는 주체로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추수하도록 보냄을 받지만 그가 주체도 아니며, 혹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자도 진정한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고백으로 하자면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닌 자들입니다(고전3: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일하심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동참하는 자들로 하여금 참된 복음을 듣게 된다면 복음을 듣게 된 자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지상에 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교회는 사탄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상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 칭하는 것은 이런 면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는 초대교회 당시 박해라는 방식보다는 오늘날 거짓된 복음의 방식으로 교회를 위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목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진리 위헤 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고, 진리 위에 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말씀 사역자들이 바른 신학 위에 서 있도록, 그리하여 바른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여러분은 그런 부분에 있어 더욱 분별력을 갖출 수 있도록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