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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0731설교 / 마태복음10장9-15절 / 평안하기를빌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6.07.31|조회수611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09-15

평안하기를 빌라

 

예수님께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열 두 사도를 세워 보내시는데, 그렇게 보내실 때 그들의 모든 사역의 초점은 예수님의 사역처럼 천국 복음 전파에 있었습니다. 물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긴 했지만(10:1), 그것이 주된 사역이 아니라 천국 복음 전파가 그들의 주된 사역이었습니다. 그럼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은 뭔가? 천국 복음 전파를 위한 보조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주된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일 뿐, 그것 자체가 구원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본 8절 말씀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7절 말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더욱 드러내주는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영적으로 병든 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은 자와 방불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한 자요, 귀신의 종으로 있던 자인데,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그리고 마태복음 10장에서 사도들을 보내고 계신 것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사도들이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거저 받은 것처럼 사도들 역시 그런 권능을 거저 베풀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아가서는 보조적인 것만이 아니라 복음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복음도 우리에게 실력이 있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주셨듯이 거저, 공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 계속 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선 9절과 10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지금 사도들이 천국 복음의 전파를 위해 나아가는 대상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나아갑니다. 누가 잃어버렸는지는 그들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할 수만 있다면 유대인들 모두에게 나아가지만, 그러나 천국 복음 전파의 효과는 오직 주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보내실 때 그것은 한시적인 사역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시간 살폈던 것처럼 넓게는 결국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할 때 유대인 안에서만 이해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확장될 내용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유대인들에게 보냄을 받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될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 유대인을 향한 사역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22:35-36)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오늘 본문의 경우 유대인들에게만 한시적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며칠 동안 유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돌아올 것을 두고 예수님은 저들을 보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뭘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느냐? , , 동도 가지지 말라고 하시고, 배낭이나 두 벌 옷,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이 일은 한시적이기 때문에 너무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쓸데없이 무겁게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부름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의미도 여기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도 될 것으로 말씀하시는데(6:8), 이것은 마태복음과 충돌되는 말씀이 아니라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짐이 될 만한 것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마가복음에서는 가볍게 가지고 갈 수 있는 지팡이의 경우 가져가도 좋다고 말하기 때문에 의미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도들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이 땅에서는 한시적으로 살게 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저들에게 말씀하신 원리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저들이 한시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하여 복음 사역을 위하여 나아갈 때 금, , 동을 가지고 가지 말고, 또한 배낭이나 두 벌 옷,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아야 했다면 우리 역시 동일한 원리로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금, , 동으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의식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짐으로 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 25절 이하를 보시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6:25-26) 그리고 넘어가서 3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1-32) 그리고 나오는 게 우리가 잘 아는 말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원리 속에서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염려가 많고, 그것이 곧 짐으로 와 있을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것이 짐으로 있다 보니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당연히 먹고 마시는 의식주가 목적이 되다보니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는 등한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의식주가 부딪히면 우리는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의식주에 가 있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는 일이 좀처럼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한시적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에 있어 우리의 발걸음을 더디게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그것이 우리의 짐인 것처럼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와 의에 있는데, 그것을 들고 가게 되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기보다는 그것을 더욱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무엇을 교훈 받을 수 있느냐? , , 동 그리고 의식주와 관련된 것이 우리의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의지의 대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 금, , 동 그리고 의식주와 관련된 것들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 마땅한 바를 채우실 분으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게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러한 자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거저 받은 자로 있다고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은 거저 받았지만 거저 받은 그 복음은 값싼 것이 결코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돈의 가치로 비교할 수 있습니까?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경도 생명과 관련하여 천하보다 귀하다고까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16:26). 가끔 보면 생명을 물질보다 하찮게 여기는 사건 사고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참으로 성경의 정신과 멀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생명이든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어떻겠습니까? 피조물인 우리의 생명조차 세상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다면, 창조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어떻겠습니까?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인생을 통틀어서도 비교할 수 없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분으로 계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누굴 위해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놓으셨느냐? 바로 자기 백성들만을 위해 그렇게 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거저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값싼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여러분 스스로가 값싼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장 값비싼 것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값으로는 환산할 수가 없는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의 것을 우리의 짐으로, 세상의 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세상의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런 모습으로 있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도 아니요, 구별된 삶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세상 앞에서 본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분명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빛이라고 할 때 너희 착한 행실을 사람 앞에 보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5:16). 그럼 착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라 말씀하시고, 그 의란 율법의 완성이라고도 말씀하고 있는 그런 삶입니다. 그저 말만 하고 행실이 없는 자가 아니라, 말로서 복음을 전하는 자면 행실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여전히 부족한 자, 점과 흠이 있는 자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성은 죽음 이후,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때서야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하여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 누구시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아 주시고, 지금도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의 방향과 목적은 바로 율법을 완성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럼 율법의 완성이 우리의 방향과 목적이라 할 때 그 안에 의식주에 대한 염려, 먹고 마시는 문제를 위한 삶의 방향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그 사랑에 힘입어 이웃도 사랑하라고 가르칠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이 부족한가를 볼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이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복음을 거저 받았지만 그 거저 받은 은혜를 너무 하찮게 여기는 삶을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종노릇하며, 세상이라는 짐을 여전히 지고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유대인들에게 보내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시 복음 사역을 위하여 가기 때문에 쓸데없는 짐을 지고 가지 말라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로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고 염려하지 말라. 먹지 못할까봐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너희를 세우신 분이 누구시냐? 바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만물을 주관하나님이시다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걸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여기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어디에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하는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 8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여우보다 못하고, 새보다도 못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뭘 드러내고자 하시는가? 예수님의 거처가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걸 이런 식으로 친히 모범을 보이시면서 알리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목적을 두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것을 탐하지도 않았고, 거기에 목숨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몸 된 교회 역시 그러해야 함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 성실히 행하는 것, 그것 자체를 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주께서 주시는 만큼을 받는 것,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것을 뭐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모든 목적이 세상에 있고, 세상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주의 말씀 앞에도,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셨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찔림이 없고 둔감한 채로 살아간다면, 그리고 손해조차 보고자 하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방향에서 분명 돌이키셔야 합니다.

 

어쨌든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사도들이 나아갈 때 이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11절에 보시면 우선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게 됩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여기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떠나기까지 머물라고 할 때 합당한 자는 정확하게 어떤 대상으로 말씀하고 있는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12절과 13절을 함께 보시면 이렇게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그러니까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떠나기까지 머물러야 하지만, 실상 평안을 빌었을 때 평안을 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을 빌었을 때 평안을 받는 자에 대해서 합당한 자로 말할 수 있다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더라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들은 반드시 너희를 영접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앞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도 드렸지만,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반드시 합당한 자를 붙이겠다는 말씀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사역 가운데 너희를 대접하는 자가 있으니까 의식주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11절에 있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보면 이런 말씀을 근거로 해서 어떤 선교 단체에서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고 전도 여행을 행하는 방식을 그대로 취하기도 하는데, 좀 주의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사도라는 직분을 가진 자,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70인도 보내시는데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비상직분 안에서 이해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런 말씀들에 대해 모든 사역자들에게 일정하고 확정된 규칙으로 규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방식이라고 다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의 표로서 이적과 기사가 멈추었다면 다른 부분도 그런 내용이 분명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거지순례다 뭐다 하는 식의 전도방식은 성경에 있기 때문에 괜찮다가 아니라, 성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으로 주시는 말씀인가를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면 사도를 보선하기 위해 사도행전에서는 제비뽑기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럼 성경에 있기 때문에 제비뽑기를 오늘날에도 해도 괜찮은가? 실제로 한때 합동측에서는 총회 선거 때 그런 방식으로 취하기도 했는데, 그런 방식을 오늘날 취해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은 한시적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세우실 때 그때는 제비뽑기 방식을 취했지만(1:26) 이후로는 투표방식으로 사람을 뽑게 됨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14:23, ‘택하여(ceirotonevw[케이로토네오] : 손을 들어 투표하다, 투표로 임명하다)).

그러므로 사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1절은 사도들에게 의식주에 대한 염려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가 되라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런 교훈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들이 있을 때 너희가 떠나기까지는 거기에 머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영원히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전제로서 하고 계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영원히 머물지 않고 떠나기까지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사도들은 떠날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저 머무는 동안 편안하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으면서 그곳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이고, 그 일이 마쳐지면 곧바로 다른 성으로, 다른 마을로 가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유대 지역을 위한 복음 사역이 급하게 진행되어야 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될 때 12절과 13절은 그들이 만나는 대상들에게 평안을 빌어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사도들의 경우 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는지, 누가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대상으로 있는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모든 만나는 자들에게 평안을 빌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평안이라는 이 말은 소위 유대인의 인사법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평안이란 행복하게 되는 것, 잘 되기를 바라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사도들이 평안을 빌어 주어야 한다고 할 때 이런 의미에서의 평안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평안을 비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 27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바로 이 평안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을 빌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안을 빌어줄 때 그 양상은 두 가지로 나눠진다고 말씀하십니다. 13절에 의하면 합당한 자와 합당하지 않는 자, 달리 표현하자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눠지게 됩니다. 만약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에게 빈 평안이 그에게 그대로 임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평안이 사도들에게 돌아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사실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저들에게 빈 평안이 사도들에게 돌아온다는 말씀은 좀 난해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평안이라고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복음을 거절하게 되면 그 평안이 평안을 빈 자들에게 돌아온다고 말하기 때문에 평안을 빈 자들에게 그 평안이 더해진다는 말인가?

이 부분은 에스겔 3의 내용을 통해서 좀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거기 보면 에스겔로 하여금 파수꾼의 사명을 잘 감당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18절과 19만 보겠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쉽게 말하면 너는 너에게 지워진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불렀다면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가감 없이, 또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이라면 모든 말씀에 대하여 성실히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악인이 죄를 짓고 있는데도 그것을 못 본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악인이 죄를 짓고 있는데도 못 본채 한다면 그것은 선지자에게 주신 그 의무를 다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도 책망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의무를 다한다면 결코 책망 받을 일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오늘 본문 13절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네가 해야 할 의무를 등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네가 전하지 않은 탓으로 있다. 그러나 전하기만 하면, 성실히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만 하면 너의 잘못이 아니다. 전했는데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화가 있을 뿐 전한 자는 그 의무를 실행한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과 평안하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14절에서는 그들이 평안을 빌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벌리라이것은 초대의 성격에서 영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결국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을 거절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을 거절하는 것, 그것을 지금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저주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실행되기도 했는데, 옛날에 우리나라도 보면 소위 반갑지 않은 사람이 왔다가 쫓아 보내게 될 때 소금을 뿌리기도 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발에서 먼지조차 떨어뜨려 버리듯 더 이상 이 집과는 이 성과는 관계가 없다는 의미, 끊어진 자라는 의미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니라단순히 발에서 먼지만 떨어뜨리니까 별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교하여 말씀하시는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보다 더 심각한 죄악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창세기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당합니다. 그들이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당하는데, 불이 떨어져 그 모든 곳이 멸망하기에 이릅니다. 창세기 19에 있는 말씀을 읽어드리면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19:24-25)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악이란 이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그 심판 역시 더욱 무서운 심판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 역시 누가 구원의 대상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혹 우리와 관계된 사람 중에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자라 할지라도 평안을 빌어주고, 복을 빌어주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라도 선을 베푸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믿지 않는 것이 나중에도 믿지 않으란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경우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 선 인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죽이기 위해서 여행도 떠났던 사람입니다. 이 시점에서만 본다면 교회의 원수요, 그리스도의 원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틀에서 보자면 그렇게 핍박하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선택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원수 같은 자라 할지라도 그가 바로 내 형제요, 내 자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원수처럼 행동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요, 한 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우리는 평생 먼저 복을 받은 자로서, 먼저 하나님과 평화한 자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며, 평안을 빌어주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평안을 빌어줬는데 현실에서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돌아오는 것이 욕이기 때문에 13절에서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합당하지 아니하면 평안이 돌아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거짓된 말씀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로는 욕을 먹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깨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아니 오히려 주를 위하여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것 자체가 복이요, 평안인 것입니다(5:11). 때문에 외형으로 있는 그것으로 복이다, 아니다”, “평안이다, 아니다를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사도들의 경우 대부분 그들의 외형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자들로 있었습니다. 만약 외형으로만 판단하자면 그들은 불행한 자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복된 자가 되었고, 그들의 마음에는 큰 평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떤 말까지 하게 되느냐 하면 사도행전 54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외형은 능욕 받는 일이지만 그 마음은 주를 위한다는 것 때문에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평안이란 외적인 것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사실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으로 인하여 평안을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의 평안이 곧 우리의 평안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뭘 하느냐? 의식주에 대한 염려가 항상 우리 앞에 있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안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통하여 줘야 할 평안도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도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이, 이제 우리의 세상적인 본성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금과 빛이라고 할 때 우리 삶이 진실로 이러한 삶으로서 저들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11,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느냐?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11:33-38) 믿음의 삶이란 때론 놀라운 일을 행하기도 하지만, 때론 그 세상과 동화되지 않음으로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물론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히브리서 11 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한마디로 말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은 다 무엇과 연결이 되어 있느냐 하면 소망과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그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이 땅에서의 소망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13절 이하를 보시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3-16)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겠다고 말씀하신 그곳이었습니다. 아니 이것도 상징적입니다. 그들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삶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이런 삶으로서 세상 앞에, 불신자들 앞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저들에게 주어야 할 복음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아니 교회가 성도에게 주어야 할 말씀이 이것이어야 하고, 또한 부모가 우리 자식에게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이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걸 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기에만 참된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 외에 세상의 것은 결코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참된 평안과 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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