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0장 21-23절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되, 특별히 유대인들을 향하여 한시적으로 보내시면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내실 때 장차 어떤 일까지 있게 된다고 말씀하시느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저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양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고, 복음을 증거 할 때 적지 않은 난관과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향하여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의 방식이라 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리’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도 이리로 돌변해서 반응하도록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하여 선으로 갚는 방식 그리고 죄악 된 방향이 아니라 순결함으로 거룩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저들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복음 때문에 공회에 끌려가는 일이 있고 때로는 회당에서 채찍질 당하기도 하겠지만, 심지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는 일도 있겠지만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복음을 증거 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인데, 21절을 보시면 복음 때문에 어떤 일까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느냐?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앞서는 공회 혹은 회당, 심지어 총독들과 임금들까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세상 권력자들로부터의 핍박, 혹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의 박해를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을 말씀하시는데, 형제라 할 수 있는 자들끼리, 부모와 자식 사이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똘똘 뭉쳐야 하는 관계로 있습니다. 남이 아니라 나 자신과도 같은 대상이 바로 가족입니다. 가장 가깝다면 가까운 대상, 그만큼 소중히 여겨야 할 대상이 바로 가족입니다. 그러나 복음 때문에, 주의 이름 때문에 가족이라는 그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오늘 시대를 통해 보자면 21절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어떤 특수한 상황 속에 있지 않는 한 이런 일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때 북한의 체제 아래 21절과 같은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쉬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뜻은 그만큼 복음 때문에, 주의 이름 때문에 가장 가깝다면 가까운 대상으로부터 좋지 못한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마음의 각오를 더욱 단단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어떤 말씀도 하시느냐? 마태복음 10장 3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물론 이런 말씀을 오해하셔서 “예수님께서는 화평이 아니라 싸움을 위해서 오셨다.” 이런 의미로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화평을 위해 오셨습니다. 다만 화평의 일차적인 대상이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본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핀 바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언제나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환영을 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환영 받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친 사건 속에서 돼지 떼가 몰사하게 되었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마8:34). 반면 마태복음 9장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는 무리들이 두려워하면서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9:8). 물론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보고서도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저들의 무지함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은 귀신을 쫓아냈던 그 지방 사람들의 반응과는 분명 상반된 반응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언제나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환영 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베드로전서에서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베드로전서 2장 7절과 8절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여러분,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배이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엇과 같은가? 부딪치는 돌이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은 바로 후자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한편은 믿음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를 보배로 여기지만, 다른 한편은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으로 여기느냐? 부딪치는 돌이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로 여깁니다. 한쪽은 보배로 여기지만 다른 한쪽은 돌, 바위로 여기기 때문에 이미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한쪽은 무엇을 주더라도 바꿀 수 없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다른 한쪽은 무엇을 주지 않더라도 버려야 할 것, 아니 버려야 할 것인데 무엇을 준다고 하면 당연히 그 무엇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면 화평이 아니라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것인데, 그것이 단지 세상의 권력자나 혹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 인하여 당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지난주 살핀 말씀처럼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말 앞에서, 그리고 그만큼 가깝다는 의미에서 이런 저런 모습을 다 보이면서 살아갑니다. 어쩌면 우리의 본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 복음을 선물로 받았을 때, 그리고 그것이 진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바라며, 그래서 함께 영생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반대하고 적대시하게 되면 오늘날에는 21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삶의 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일들로 부딪히게 되는 것은 사실로 있습니다. 한 예로 가족 모두가 믿지 않을 때는 주일에 무슨 일을 해도 괜찮았습니다. 특히 주말에 함께 여행을 가거나 휴가를 즐기는 일에 있어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예수를 믿고 믿음 생활을 하게 되면 주일에 무엇을 하는 문제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일, 즉 오늘날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로 갈등을 일으킬 때도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족보다 예수가 그렇게 좋으냐고 따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이 자주 일어나게 되면 믿음 생활 하는 쪽에서도 그런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대처하고 또 순결함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있기보다는 가족들도 잘 아는 그런 옛 본성이 나타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믿음 생활을 할 때,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어려움이 생길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복음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변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변호하는 그 일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앞서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36절을 봤지만 37절 이하를 보시면 그런 자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여러분, 복음 안에 있다고 해서 가족과 무조건 등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을 무조건 박해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혹 등지는 일이 있고, 박해와 같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 쪽에 서야 할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땅한 바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가장 기본적인 질서가 가정 안에 있지만 그런 질서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질서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최근에 기독교강요 4권 마지막 장인 제20장 국가 통치에 관해서도 살펴봤지만,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 대하여 순종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종, 혹은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세에 순종한다는 의미에서 세금을 내거나 국방의 의무와 같은 일을 이행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맨 마지막 32항에서 이런 마땅한 순종에도 불구하고 예외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순종한다는 것이 더 위에 있는 권세자, 절대권을 가진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왕들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들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결코 순종해야 할 바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박해를 받을 때, 그리고 그런 박해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지 못하도록 했을 때 뭐라고 말했느냐?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 동일한 의미에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원리입니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가족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이웃 사랑의 첫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로 시작하듯이 그만큼 가족은 사랑의 대상으로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사랑이 하나님 사랑 위에 있을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가족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방향이라면 당연히 하나님 사랑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가족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혹 가족조차 복음에 대하여 대적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처럼 죽음에로까지 내모는 일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지혜와 순결을 유지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어쩌면 가족으로부터 이런 일을 당하면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큰 상처가 되다보니 배신감이라는 것이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하는가? 지혜와 순결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즉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방식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입니다. 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거룩함을 나타내는 방식, 이것이 성도의 삶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2절로 오시면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사도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고백하는 자들, 그리고 그 복음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세상의 원리는 미워하는 것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가르쳐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끝까지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본성으로 하자면 미움에 대하여 미움이 답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주님은 미워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끝까지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가? 이런 과정을 통하여 결국 구원의 완성을 맛보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의미에서 누가복음 21장 19절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기도 하느냐?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계시며, 영생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런 영생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예비 된 장소, 즉 천국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어려움과 힘든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끝은 영원한 행복과 안전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박해와 같은 일이 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리와 같은 자들을 보면서 두려워해야 할 자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양은 양을 인도하시는 목자를 보면서 평안을 누리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비록 험하다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게 되고, 또한 그런 세상 속에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만나게 되겠지만 우리의 시각이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하는가?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날 성도가 주님 안에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보다는 우리를 위협하는 이리를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들의 생을 보자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해서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무조건 안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도가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행5:41). 능욕 받는 것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에게 주어진 평안이란 외적인 안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요14:27) 목숨까지 내어 놓으면서도 그 마음은 평안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의 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이라면 결코 평안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혹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은 결코 그 평안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그리고 세상의 미움 속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목자 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리를 보고 있다는 반증과도 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야 할 자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목숨을 유지하는 그런 자리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마태복음 10장 39절에 있는 말씀처럼 주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잃을 각오를 해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다고 해서 실제로 그 목숨을 잃어버리느냐? 외적으로는 그럴 수 있는지 몰라도 천국을, 영생을,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폐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의 백성들이 주의 이름으로 산다고 할 때 이런 각오까지 해야만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것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분명 인내 자체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주님을 바라본다고 해서 주님이 대신해서 인내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이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는 견인의 은총을 받아야지만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견인의 은총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면 그 백성 된 자들은 견인의 은총을 받은 자로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물론 견인의 은총을 받았다고 해서 넘어지는 일이 전혀 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넘어지기도 합니다. 넘어져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견인의 은총은 아주 넘어진 상태 그대로 있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넘어졌을지라도, 넘어져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십니다. 일으켜 주셔서 다시금 인내하면서 살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결과라는 것 또한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인내가 마치 조건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조건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에서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1) 문맥으로 하자면 욥의 인내를 말하기 때문에 욥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말씀하시고, 또 성경은 욥의 인내를 말씀하고 있지만, 그 결말은 무엇인가? 욥이 대단하다가 아니라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사실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인내했기 때문에 인내한 우리 자신이 초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즉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하는 자리에 이끌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초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이미 위로함과 감사의 내용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조건인 것처럼 생각해서 “내가 무조건 인내해야 하는구나!” 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견뎌야 한다는 부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함과 감사의 내용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주를 의뢰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끝까지 견뎌야 하지만, 다시 말해 끝까지 견뎌야 할 만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미움도 당하는 일이 있게 되겠지만 주께서 견인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으로 있기 때문에 염려가 아니라 확신 속에서 주를 더욱 의뢰함으로 인내할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로 오시면 끝까지 견디는 것과 관련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을 더하십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사실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만 생각한다면 박해 앞에서 피하라는 말씀은 뭔가 맞지 않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매튜 풀 주석에서는 “나는 이 본문이 복음의 일꾼들이 박해의 때에 피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회의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박해 앞에서 무조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그런 모습으로만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광주리를 성벽으로 내려 피하기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행9:25). 그래서 매튜 풀 주석에서는 “나는 이 본문이 박해를 피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근거로 보는 데에는 회의적이지만, 어떤 경우들에 있어서는 박해를 피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이 없다.”고도 말합니다. 칼빈의 경우는 오늘 본문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박해에서의 도피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점은 도피하는 자들을 무분별하게 모두 정죄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온갖 종류의 도피가 여기에 허용되는 것으로 볼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럼 박해에 대하여 피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가?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박해를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인 경우에는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매튜 풀 주석). 이 부분과 관련해 칼빈이나 매튜 풀 주석이나 어거스틴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매튜 풀 주석이 좀 더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호노라투스(Honoratus)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문제를 잘 말하고 있다. 사역자들은 성급하거나 경솔하게, 또는 겁이 나서, 다른 곳에 가서 편안하게 살고 싶어 박해를 피하여 도망쳐서는 안 되고, 박해를 피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교회를 배신하는 행위가 되어서도 안 되며, 박해가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우에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역자들 중의 일부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박해가 일어났고, 그들이 없어도 교회를 돌보는 데 별 문제가 없는 경우에는, 교회의 동의를 얻어서 박해를 피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해석이 모든 경우를 다 담고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 피하라고 할 때 단지 안전을 위해서 피하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선 본문을 통해 죽을 각오까지 할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피하라는 뜻은 분명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3절에서 피하라는 것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것처럼 복음 전파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할 때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앞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런 의미에서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놓일 때 단지 내 유익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길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닌 겁니다. 그 길을 가야지만 내가 살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하는 방향이 아니라면 성도는 결코 그 길을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다만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면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고 난 뒤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을 때,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진 역사가 있습니다. 그럼 흩어진 모든 자들, 박해 때문에 피한 자들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피한 자들인가? 그렇게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피했지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도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도망하는 일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더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성도의 삶에 있어 연약함이 나타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물론 이것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더불어 혹 나에게 그런 연약함을 발견하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더욱 살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앞선 말씀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넘어졌을지라도 하나님은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견인의 은총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미 오셨기 때문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신 말씀은 최소한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말씀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으로도 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사도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이후 재림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인자가 오리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이하 매튜 풀 주석 참조)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마태복음 24장이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그 부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17절에서 약속된 성령의 오심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고서, 이것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모든 해석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것을 특별히 사도에게 주는 위로의 말로 본다. 그리스도께서 절망의 시기에 위로를 주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들에게는 온 세상에 복음의 가르침을 전파할 막중한 사명이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숨겨졌던 자신의 영광과 위엄을 실지로 사도들에게 비춰 줄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온 유대를 다 돌아다니기 전에 자신께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에 앞서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비록 승천하셨기 때문에 육신적으로는 함께 계시지 않으시지만 신성으로, 그러나 신성과 인성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전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박해가 있을 것이고, 그런 박해를 때로는 피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래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옮겨 다녀야 할 때가 있겠지만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오셔서 위로함을 더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실 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리 가운데 있는 양들에게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면 양으로서는 얼마나 큰 위로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역사는 사실 사도들에게만 주시는 위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심지어 성경은 어디까지 말씀하고 있느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가르칩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그런 고난 속에서 위로함이 넘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어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며, 그의 영이 함께 계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대로 살고자 하는 삶은 분명 이 세상의 원리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을 거스른다고도 할 수 있는 삶입니다. 주의 지혜를 따라 산다고 할 때 세상은 더럽고 죄악 투성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런 가운데서도 순결과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항상 이런 외형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보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내하면서 주의 것만을 내 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께서 주의 백성으로 부르신 자들에게 견인의 은총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주께서 견인의 은총을 베푸시기에 우리 역시 끝까지 인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로서 인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양으로서 목자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리를 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시각은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으로만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특별히 우리의 영혼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