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0장 24-33절
몸과 영혼을 멸하실 이를 두려워하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을 보내는 모습이 마치 이리 가운데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 안에 있지 아니한 자들은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 가운데서는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미움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 사람들이 사도들을 공회에 넘겨주며, 회당에서 채찍질 하는 일로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가족으로부터 좋지 못한 일들을 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저들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느냐?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 이후 오늘 본문 24절과 25절은 고난과 박해에 대해 그것이 마땅한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일반적인 이해로 하자면 제자가 선생보다, 또 종이 상전보다 높지 못한 것은 자명합니다. 왜냐하면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며 상전이 종에게 명령하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상전 같으면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9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32절 이하 34절에 보면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치셨을 때, 단지 질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 못하게 하는 귀신까지 쫓아내셨을 때, 거기 있던 무리들은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알세불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금 보게 되겠지만 마태복음 12장으로 넘어가시면 동일한 말을 거기서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24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무엇이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서는 쫓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지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치유 사역, 특별히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다고 할 때 그 모든 일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고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혹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예수님 자신을 바알세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즉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는데, 그 집 사람들이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이런 이해 속에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 그러나 제자가 그 선생 같고, 또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다는 것은 예수님조차 바리새인들로부터 바알세불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 있는데 선생을 따라다니는 너희에게 그런 일이 없겠느냐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앞서 여러 가지 박해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장차 예수님조차 박해를 받을 것이고, 그렇게 예수님도 박해를 받는다면 하물며 예수님을 쫓는 너희는 그 박해를 피할 수 있느냐? 없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제자가 그 선생보다,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고 할 때 제자가 그리고 종 된 자가 아무리 큰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선생보다 그리고 상전보다 더 큰 박해를 받는 경우는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한다고 할 때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난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과 비교해 봤을 때 더 크고 강한 것으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좀 더 넓게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고난 이후 영광을 받으셨던 것처럼 사도들에게 역시 고난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제자로서 스승이 가신 그 길, 그것도 하나님께서 한없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그것보다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길을 사도들이 걷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럼 이 말씀이 사도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 복음대로 산다고 할 때,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있다고 할 때 동일한 적용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세상이 받을 수 없는데, 그분을 따라간다고 하는 우리를 어떻게 받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쫓아가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만큼만 쫓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도 오늘 본문에서 족하다고 하실 만큼만 쫓아간다면 그것보다 더 합당한 모습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에 비하면 너무나도 부족한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분을 쫓아간다는 말을 하기도 부끄러운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해서 쫓아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족한 것을 알지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 속에 세상으로부터,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세상의 원리로부터 대접받을 일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도에게 있어서는 영광의 길임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고, 또한 사도들 역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그러니까 선지자들조차 그 길을 걸어갔던 겁니다. 박해이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어려움과 어려움으로 인한 답답함, 때때로는 낙심되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답답한 일도 없고, 낙심되는 일도 없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움도 당하고 답답한 일도 당하고 낙심되는 일도 당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답답해 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복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상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최고 상급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며, 이 땅에서는 점과 흠이 있는 자로 살아가지만 죽음 이후 완전한 성화 가운데 있게 될 존재로 있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목적을 완성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움과 답답함, 낙심되는 일이 있지만 바로 그 길이 영광의 길이요,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보다 더한 고난은 결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지 않으셔도 될 분이 우리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특히 십자가 상에서의 짐이란 모든 택자의 죄 짐을 지셨기 때문에 그 무게가 지금 우리가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앞서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도록까지 기도했던 것입니다(마26:39). 십자가상에서는 마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기도 하셨던 겁니다(마27:46).
예수님의 생애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때가 되어 성육신 하셨습니다. 이미 성육신 자체가 비하인 것입니다. 자기는 낮추신 것! 본래는 참 하나님이시지만 그런 하나님이 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본래는 율법 위에 계시지만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면서 그 모든 율법에 순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미 살핀 바 있는 마태복음 8장 20절에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기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삶의 모습이 바로 이러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본래는 영광의 주이시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 아래 나셔서 그런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어떠합니까? 물론 지금도 주를 위하여 어려움 가운데 놓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없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비교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보면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걸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미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미움이 그리스도 때문인가? 복음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 때문에 미움을 받는 일이 더 많습니다. 특히 오늘날 목회자들, 물론 일부이긴 하지만 그들에 대한 시각이 너무 좋지 않은 가운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영광, 자기 부를 위해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이런 부분에 있어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있다면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보다 더한 고난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자로서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복이요, 영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함이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충분하지만 그리스도와 몸 된 교회가 분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와 같다면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믿음만이 아니라, 야고보서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나타나는 열매여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을 따라 우리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대한 욕심을 철저히 버리셔야 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주님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물론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염려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만큼 주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염려하는 만큼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주를 의지하지 못하는 만큼 하나님 지식에 있어 부족한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적인 의미에서 무신론자와 같습니다. 이것을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면 우리의 삶도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감사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제자임이 증거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러한 고난이 그리스도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받는 것이어야지, 우리의 욕심이나 탐욕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라면 감사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한편 이런 말씀 때문에 주께서 주시는 것에 대하여 다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지만 주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가? 복음인가? 아니면 세상의 원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 이런 부분을 다시금 살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의 원리, 복음의 원리로 살아간다면 마태복음 10장으로 들어와 우리라 살폈던 말씀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 평안을 빌어주는 것, 지혜와 순결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끝까지 견디는 그런 모든 것이 우리 삶에 있어 나올 수 있도록, 그것이 열매로서 맺어질 수 있도록 자신을 더욱 철저히 살피고 또 살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26절과 27절을 보시면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오늘 본문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24절, 25절과 함께 생각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너희 역시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이 영광의 길이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보다 더한 고난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26절과 27절과 관련해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복음이 감추어져 있고 숨겨져 있지만, 때가 되면 그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란 겁니다. 아무리 복음에 대하여 미워하고 박해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런 방해가 복음을 막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이 누가복음 12장에서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이런 전제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3절만 보겠습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여기 보면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는 바리새인의 어떠함을 드러내셨는데, 간략하게만 말하자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1:39). 그런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장에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했을 때 그들의 외식, 즉 어떤 행동적인 면만을 말씀하시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1절과 12절에 보면 누룩이 곧 저들의 교훈과 관련되어 있는 것임을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12장 역시 그들의 어떤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의 출처라 할 수 있는 그들의 가르침까지를 포함한다 할 수 있는데, 그런 누룩에 대하여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하면 박해뿐만 아니라 거짓 가르침이 횡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음이 감추어져 있는 그대로, 숨겨져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께서 명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주의 명령의 따라 담대히 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27절 말씀처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특히 마태복음 10장 19절과 20절에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셨느냐?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실 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사도들의 몫인 것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실상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 이런 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28절로 오시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지금은 감추어져 있지만 장차 드러날 것이고, 지금은 숨겨져 있지만 장차 알려지게 될 때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 무엇이냐? 몸을 죽이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몸을 죽이는 이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다시 말해 영혼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멸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성경은 영혼의 소멸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혼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창조가 되었다면 창조된 이후로는 불멸하는 존재로 있습니다. 그러나 불멸한다고 할 때 어디에서 불멸하는가? 누구와 함께 불멸의 삶을 사는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있습니다. 본문에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지옥에서 악한 영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소위 영원한 형벌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심판하시는 심판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인간은 어떤 존재냐? 혹 그에게 심판권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인간의 육체를 해하거나 멸하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심지어 복음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사도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성도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육체는 죽을지 몰라도 영혼은 저들과 달리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것이고, 때가 되면 영광의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죽음 자체가 두려워할 만한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죽음을 통하여 이 땅에서 이룰 수 없는 완전 성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죽음 자체가 나쁘게 적용될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귀중히 여긴다고 말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시116:15).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시각도 달리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죽음이 형벌로 있습니다. 죄의 형벌로서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죄의 형벌조차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냐? 모든 자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에게만 그런 역사를 펼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몸까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대상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세상을 더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영혼에 대하여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상을 더 두려워하더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혼이 아닌 육체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그런 대상만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정신과 얼마나 먼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의 특징이란 무엇인가? 이 땅에서는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아닙니다. 죽음을 향해 가지만 부활의 소망까지 내다보며 사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기 위해서 발버둥만 칠뿐입니다. 주님 때문에 죽겠다는 각오보다는 주님으로 인하여 더 잘 살아보겠다는 그런 사고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죽음이라는 것을 내놓을 때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죽음 이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서 이 땅을 살아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7장을 통해 성도의 삶과 관련하여 말하면서 가장 먼저 자기 부인의 삶을 말했습니다. 특히 2항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속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근심 걱정을 버리라고 명령할 때에, 성경은 소유욕과 권세욕과 명예욕을 우리의 마음에서 씻어버릴 뿐 아니라, 인간적인 영예에 대한 야심과 갈망 그리고 그 밖의 더 깊이 숨어 있는 해독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부정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섬기려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역의 출발점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시는 자기 부정이다(마 16:24 참조). 이 자기 부정이 일단 제자의 마음을 점령하면, 그것은 우선 자만이나 교만이나 허식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탐욕이나 욕망이나 방탕이나 나약이나 그 밖에 우리의 이기심이 빚어내는 죄악들을 전연 허용하지 않는다(딤후 3:2-5 참조)...” 나아가 3권 9장에서는 내세에 대하여 묵상할 것을 말했는데, 2항에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과도히 사랑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 둘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따라서 영원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이 악한 족쇄를 부수어 버려야 한다...” 4항에서는 “현세 생활에 대한 잘못된 애착을 억제한 것만큼, 더 좋은 생활에 대한 욕구를 강화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가 죽을 운명의 인생을 생각할 때에는 그것은 원래 비참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 동시에, 더욱 큰 열성으로 곧 내세의 영생을 명상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칼빈의 글을 인용하고 있지만 단지 칼빈이라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그리고 십자가를 지라고도 말씀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만 지라고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있을 영광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이 아닌 죽음 이후의 삶을 소망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강요 3권 7, 8, 9장이 그러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의 삶이 이러하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요한일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5-16)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고 할 때,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간다고 할 때 지나가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 자가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오히려 영생을 받은 자로서 영원한 것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당연히 이 땅에 있는 것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고, 그것들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두려워한다고 할 때 어떤 마음이 자리하고 있느냐? 이런 면에서 보자면 세상의 것이 우리 마음의 소망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빨리 버리셔야 합니다. 소유욕, 권세욕, 명예욕 다 버리셔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 거기에 우리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이 일을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는데(고전10:31) 그런 정신으로 모든 일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만의 유익을 위한 일로 있는가?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나만의 유익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뒤 29절에서는 이런 말씀을 덧붙여 설명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28절만 보자면 복음의 적대자들이 언제든지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지만, 사실 그것도 아니란 것을 이런 말씀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시로 하자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렸는데, 하나님의 뜻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잡을 수 있는 일이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미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무엇 하나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소위 해충이라고 해서 징그럽게 여기는 것들을 잡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잡을 때 우리는 우리의 순발력이 뛰어나다, 혹은 손이 빠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기 때문에 잡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아니하면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심지어 천천히 기어가는 벌레조차 천천히 기어가기 때문에 언제든지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때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한 예로 마음은 잡고자 하지만 잡으려고 하는 그때 허리가 삐끗해서 넘어진다면 실상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29절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잡힐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좀 더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30절에서는 이런 말씀까지 하십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십니다. 다 아실 뿐만 아니라 머리털 하나가 나고 빠지는 것조차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란 것입니다. 최근에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머리에 부분적인 탈모가 좀 생겼습니다. 의학에서는 탈모의 많은 비중이 유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전이라고 말하는 거기가 최종적인 답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조차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빠질 수 없습니다.
31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비록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미워하며 박해하는 일이 있지만, 그리고 그런 일을 통해 저들은 사도들의 몸을 상하게 하거나 죽음으로까지 내 몰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뜻 없이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새조차 하나님의 뜻 없이는 잡히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너희는 참새보다 귀한 존재가 아니냐?
그런데 이 말씀과 비슷한 맥락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우리는 이미 산상수훈을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부터 보겠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26-32)
결국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염려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지식의 부족, 아니 앞서도 언급했지만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무신론자와 같습니다. 알기는 알지만 행함이 없는 삶!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여기시는가를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창조 역사만 보더라도 인간을 모든 만물보다 으뜸으로 만드셨습니다. 물론 죄가 인간을 모든 피조물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누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신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다시금 본래 자리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아까워하시겠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인 겁니다. 참새조차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조차 내어주실 만큼 사랑의 대상으로 있는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
동일하게 참새보다 귀하다면 참새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머리털까지 새신 바 되시는데 복음을 미워하고 복음 때문에 박해하는 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친히 보호하시지 않겠느냐?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한다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사도와 관련해서도 좀 더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경우 대부분 박해로 말미암아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오늘 본문의 경우 무조건 살려주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해로 인하여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죽음이 하나님의 뜻 없이,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참새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귀하게 여기시는 만큼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조차 그들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인류 모두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참새보다 귀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만 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박해가 있을 때 그런 박해를 전혀 받지 않는 자로 있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핀 것처럼 끝까지 인내하라는 것은 박해를 통한 어려움이 분명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이란 28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육체적인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참새보다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도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저들은 몸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까지 멸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을 받으시며 장차 부활할 때까지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도록 하시는 역사가 있는 겁니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은 사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32절, 33절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은 사도들의 시대와는 달리 종교적 자유가 있는 시대입니다. 복음 때문에 죽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세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던 그런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사도들이 박해를 당할 때, 그리고 복음을 증거 하지 못하도록 압박했을 때 사도들은 결코 복음을 부인하지도, 그리스도를 배반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는 잠시 부인하는 것처럼 비춰졌지만, 그래서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 도망가는 형태로 있었지만, 부활 이후 성령의 특별한 임재가 그들 위에 있었을 때 그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판단하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행4:19).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행5:29). 이것이 우리의 삶의 원리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란 말씀은 이런 측면에서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서든지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혹 그런 고백을 통해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그들의 신앙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일가는 영광과 신앙의 독특한 면으로 취급되고 있는데 당연히 그래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칼빈 시대, 종교개혁 시기에 니고데모주의라는 것이 있었는데, 가톨릭 교회의 예배와 가르침에 대해 현실적으로 그 속에 머물면서 마음만은 주께로 향하고자 했던 정신 아래 있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교리적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속히 참된 신앙을 고백하면서 나와야 했지만,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피난처가 어디였느냐?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가 밤 중 은밀하게 주께 나온 그 태도가 그들의 피난처요, 도피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 대하여 칼빈은 비판을 했는데, 특히 저들이 피난처요, 도피성으로 삼고 있던 니고데모와 관련해서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가 아니라 요한복음 19장에서 주님을 장사하기 위해 아리마대 요셉과 더불어 주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요구한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은밀히 찾아온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오히려 공적으로 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칼빈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 즉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고 할 때 이런 니고데모주의자들을 의식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칼빈 당시 신앙을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하찮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제일가는 영광과 신앙의 독특한 면으로 취급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속으로만 말하고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다 보면 기껏해야 신앙의 불을 끄고 말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 다가 아니라 반드시 공적으로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참된 신앙을 알면서도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때문에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 앞에서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로 소명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의 내용을 지향한다고 할 때 부교역자들의 경우 담임 목사의 사역 방향에 따라 그 내용을 숨기는 이들도 있는데, 굉장히 주의해야 될 부분입니다. 혹은 청빙을 받아 간 교회가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할 때 그런 내용을 펼치는 것에 있어서 과하게 조심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 말씀 앞에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혜롭기 펼쳐내야 합니다. 기존 교회가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대립하는 것은 지혜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혜를 따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눈치를 보는 식으로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합니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고백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록 그런 공적 고백은 사람들 앞에 행하는 것이지만, 그 고백을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사람은 우리의 이런 고백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런 고백 때문에 미워하고 해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보자면 교회가 교회를 핍박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목사가 목사를 핍박하고, 심지어 죽음에로까지 몰고 가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성도 사이에 신앙고백과 관련하여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부인한다면, 그것도 끝까지 부인하는 자로 있다면 마지막 때 하나님 앞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는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까지 행한 자들조차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데(마7:22-23), 주를 부인하는 자들을 어떻게 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만큼 이 땅에서 우리는 주를 시인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다만 사람들 앞에서 시인한다고 할 때 단지 입술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7장 21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