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1장 28-30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난 시간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살폈습니다. 언뜻 보면 복음 전파가 있고, 또 복음 전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하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복음을 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숨기시면 결코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셔야지 만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난주 본문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셨다고 할 때 복음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사람의 지혜와 슬기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한다는 것은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이 아무리 어린 아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면 그 주고자 하시는 바를 막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뜻, 그리고 그분의 의지대로 된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지대로 된다고 할 때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으로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계시의 말씀을 통해 아들을 알리시며,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아들을 알게 된 자, 물론 하나님께서 숨기시지 않고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이 바로 그들입니다. 바로 그들이 아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되는 자들로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믿는 것이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길이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입니다. 28절을 먼저 보시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선 무거운 짐이라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생활적인 면에서 힘들고 어렵고 지쳐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 예를 들어 물질이라든지 아니면 질병이라든지 그런 육신의 일로 고통당하는 자들, 바로 그들을 부르고 계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이 짐에 대하여 율법의 짐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율법을 해석하는 자들이 율법의 진의(眞意)를 밝히기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들을 만들어 지키도록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장만 보더라도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는 것으로 시비를 걸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어 나오는 말씀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도 나오고 있는데, 이런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이 예수님 당시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눅11:46) 바로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지금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할 때 율법의 짐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과연 그러한 의미에서 말씀하셨는가? 일단 칼빈은 짐을 율법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협소하게 해석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약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했을 때는 단지 율법의 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이 짐은 무엇인가? 죄의 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마1:21).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전파하셨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으며(마4:17), 예수님께서 친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 역시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마9:13).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르고 계신 자들은 바로 죄의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을 부르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라고 할 때 지난주 본문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보다는 어린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그 대상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셨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초청한다고 해서 초청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이 아니란 것입니다. 반면 어린 아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자들, 나타내셨기 때문에 나타내신 바를 알 수밖에 없는 자들, 그들이 초청의 대상으로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의 교리까지 끌고 올라가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선택된 자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은 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들려지는 형태로 있습니다. 좀 더 세세하게 말하면 역사 속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반계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주어지지만, 특별계시에 대해서는 역사 속에서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계시가 주어지지 않는데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전파한다고 할 때 반드시 선택된 자들에게만 증거 되느냐? 그렇지 않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게 들려진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려진다고 해서 믿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지난주에 살폈던 바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시면 외적으로는 들릴 수 있지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고 계신 것은 외적으로는 모든 죄인을 부르고 계신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유효성을 생각해 보자면 그리고 예정론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백성들을 부르고 계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답하는 자, 달리 말하면 유효적 소명 가운데 있는 자, 그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을 왜 부르시는가? 그 목적이 ‘쉬게 하리라’는 데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참된 쉼이 없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지만 참된 쉼을 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든 인류는 아담의 타락 이후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 출생할 때부터 죄악 가운데 출생합니다. 다윗은 그런 의미에서 시편 51편을 통해 이런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즉 모든 사람은 죄에 대한 책임을 그 스스로가 가지고 있으며, 본성의 부패를 지니고 출생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는데 왜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집니까?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범했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죽음을 겪게 되는 모든 일은 이런 면에서 죄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고, 그 죄책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할 때 성경의 표현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9절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우리가 죄인이라고 할 때 ‘죄 아래’ 있다는 표현은 어떤 면에서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죄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상태로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이 마치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분명 아담의 타락 이후 자연적으로 출생한 모든 사람들이 다 죄 아래 놓여 있지만, 다시 말해 죄의 짐을 지고 있지만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리고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혜가 있다고 하는 자들, 슬기롭다고 하는 자들은 죄의 짐이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반면 복음의 역사를 통해 주께서 나타내 보여 주신 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심각한 죄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어떤 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죄의 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그 짐을 지고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니 죄의 짐을 지고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실 때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모른다면 결코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인데, 죄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지금 예수님의 이 초청은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 죄 아래 있는 자들이다. 죄에 짓눌러 너희 스스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자다. 단순히 생활적인 면에서 힘들고 어렵고 지쳐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또한 율법의 짐을 지고 있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 “양심이 영원한 죽음의 죄의식으로 고통을 받고 내적으로는 비참 때문에 심히 괴로워 기진맥진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칼빈).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자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을 보시면 이 부분에 관해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18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18-25)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할 때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본래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자들이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너희는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더란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제 1계명이 그것 아닙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그러나 죄악 된 본성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오히려 피조물들, 그것도 인간보다 못한 피조물들을 섬기더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생각해 보자면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질서를 파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섬기더란 것입니다. 좀 고급하면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되어 자신만을 믿고 살아가더란 것입니다. 때문에 죄 가운데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
그런데 이런 죄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했을 때 로마서 1장 26절 이하는 하나님께서 그들 스스로의 욕심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 때문에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겁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9-31) 문제는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알고 있지만, 죄 아래 있는 자들, 그것도 하나님께서 숨겨두시기로 하신 자들은 그런 일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에 대하여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롬1:32). 그러니까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국가를 통하여 법을 정하고 그 법을 따라 판결하는 일이 있지만, 인간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핑계를 대고 정당화시키려 합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숨기신 것이 아니라 나타내 보이신 자들은 이상의 모든 말씀이 우리의 본성과 관계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죄임을 깨닫게 되고, 죄의 무게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복음의 부르심 앞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고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떠난 안식은 결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시 말해 죄의 짐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나 외에는 결코 안식을 맛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나에게로 오는 자만이 진정한 안식을 맛볼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 55장을 보면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좀 더 분명히 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1절과 2절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기 보면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이것이 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함께 생각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 안식을 맛보게 되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이사야 말씀에 비춰보자면 예수님께서 내게로 오라고 하실 때 그 의미는 거저 베푸시는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돈 없이, 값없이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함께 생각하자면 너희는 죄의 짐을 지고 있지만 내가 그 짐을 대신 져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짐은 죽음으로서만 값을 수 있지만 그것을 내가 대신하여 값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오라는 말씀에 우리는 가기만 하면 됩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자, 바로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안식을 맛보는 이 주일을 보내는 것은 돈 없이, 값없이 받으라는 이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갔기 때문입니다. 믿으라고 말씀하실 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주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께서 숨기시지 않고 나타내셨기 때문이라는 것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달리 말하면 영원 전부터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이런 모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체를 통틀어 우리는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즉 믿음이 공로가 아니라 선물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은 여기까지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과 관련하여 좀 더 풍성한 내용을 제공합니다. 29절을 보시면 안식과 관련하여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안식에 대한 약속을 한다고 할 때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안식을 포함합니다. 그때는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에 있어서도 안식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영혼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함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에 앞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요, 마지막 때까지 죽지 않은 자들은 부활체와 동일한 모습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 심판 이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안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을 입은 자로서 영원한 안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것도 말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땅에서부터 그 안식을 맛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29절과 30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리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즉 지금 주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말하지, 너희 마음과 육체가 다 쉼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서의 참된 안식은 주께서 말씀 하시는 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 앞에서만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이 성립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일단 본문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칼빈의 주석을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육신생활에 탐닉하기 위해 핑계를 대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오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 양심에 참혹한 수고를 가진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평화로운 기쁨을 약속하실 때에 그들이 자기 멍에를 메는 조건 밑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구조자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이렇다: 그리스도가 죄를 면제해 준 것은 하나님을 모신 자들이 거리낌 없이 범죄하도록 한 목적이 아니라, 그의 은혜로 일으키신 바 되었으니, 이제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그만큼 육신의 방종을 제어하게 할 목적이었다.”
여러분, 분명 주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사야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거저 베푸시는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돈 없이, 값 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는 목적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주의 멍에를 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목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야고보서의 경우 행함에 대한 강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 2장 1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말합니다. 24절로 가서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내용 때문에 루터의 경우 야고보서에 대하여 지푸라기 서신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야고보서의 경우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톨릭의 교리가 그것입니다. 구원은 믿음 +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자체가 충돌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 외에 다른 교리가 올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지금 야고보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분명 행함에 대한 강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생각하는 것처럼 믿음과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행함이 아닙니다. 가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구원의 원인으로서 행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으로서 그 믿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측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미 믿음 안에 무엇을 목적하고 있는가? 행함이라는 것을 목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말까지 할 수 있느냐 하면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까지 할 수 있는 겁니다(약2:22). 뿐만 아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까지 할 수 있는 겁니다(약2:26).
이것을 좀 더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에베소서 1장인데, 4절과 5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왜 우리를 영원 전부터 택하셨는가? 그리고 때가 되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는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목적 때문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분명 구원은 은혜입니다.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저 주신다고 할 때 목적하는 바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도 영원 전에 택하실 때부터 그런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바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인 겁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목적을 어떻게 말씀하기도 하시는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도 말씀하십니다(롬8:29). 원문에 의하면 단순히 본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후서 1장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고도 말씀합니다(벧후1:4). 이전 번역으로 하자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시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아무런 목적 없이 초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영원한 안식을 염두 해 둔 것이긴 하나 그 시작이 어디서부터냐? 이 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시작이요, 끝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하는 바에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뭐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에 앞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입으신 분으로서 인성으로서의 뜻이 분명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이것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분으로서 지금 “내게로 오라”고 한 대상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는 더 이상 너희 뜻대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이신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도 그런 자가 되라는 것이고, 그것을 위하여 배우고 또 배우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의 멍에’가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칼빈을 비롯하여 몇몇 주석을 살펴봤을 때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어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여 부르실 때 목적하는 바가 있으며, 그 목적하는 바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도 하시느냐?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이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하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을 이루기까지, 그리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리에 이를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이냐? 참된 안식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부름 받은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이라고 할 때 그 목적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어떻게 평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목적하신 바를 알고 목적하신 바를 따라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참된 평안을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목적하신 바가 있고 목적하신 바에 따라 나아간다고 해서 이 땅에서 완성의 모습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불완전함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되고 때로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 주님의 말씀은 거짓된 말씀인가?
이 부분을 잘 분별하셔야 하는데, 우리의 불완전함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되고 고통을 받는 것은 우리 마음에 안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원한 안식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칼빈은 “쉼을 얻으리니”라는 말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평탄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십자가 아래서 싸울 것을 면제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연단이라는 의무 아래서 그들을 훈련시키며 그들을 멍에 아래 두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쉼이라고 해서 마음의 평안만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니 궁극적으로는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책을 짊어지셨는데, 어떻게 평안이 없겠습니까? 비록 부패성으로 인하여 죄를 짓고 있지만 그 죄가 나로 하여금 영원한 형벌에 이르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참된 평안을 빼앗아 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땅에서는 연단을 받게 됩니다. 때로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해서 안식을 빼앗긴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 안식의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애통함이 있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땅한 자세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애통함이 더더욱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주를 의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쉼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따라 배울 때,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할 때 거기에 안식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자리에 어떻게 안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주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도, 아니 주의 말씀을 진지하게 배우지 않으면서도 안식이 있는 것처럼 사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안식을 맛본 자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거짓된 안식만 있을 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했지만 결국 그들이 말한 평안이 참된 평안이 아니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 모든 일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어디에 참된 평안이 있는가? 어디에 참된 안식이 있는가?
놀라운 것은 30절에서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것은 우리의 부패성 때문이지 주님의 말씀이 결코 지킬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부패성이 남아 있는 한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거짓되지 않음도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르실 때만 은혜로 대하시고, 부르신 이후로는 은혜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다 맡기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의로, 그리스도의 거룩을 내 거룩으로 여겨주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 거룩을 위하여 주께서 친히 일하시기 때문에 내 멍에는 쉽게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나 혼자서 라면 어떻게 주의 멍에가 쉽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주의 멍에가 쉽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참된 안식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되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주님의 안식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영원한 안식, 다시 말해 완전한 안식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나아가게 될 때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예비해 두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