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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211설교 / 마태복음12장14-21절 / 꺼져가는심지를끄지아니하기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6.12.12|조회수77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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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14-21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지난 두 주에 걸쳐 안식일 논쟁을 살폈는데, 이런 안식일 논쟁을 통하여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 잘못된 것임을 인식해야 했습니다. 일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일하지 않는 선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말씀과 상관없이 이런 규칙 저런 규칙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인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잠시 살펴 본 것처럼 그들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반응하느냐? 오늘 본문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완악함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경우 율법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자신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정상적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가르치는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할 때 잘못 가르치게 되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습니까?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로서 정당한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반응하느냐? 자기 자신들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이고자 의논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해석이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반박할만한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살핀 것처럼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잠잠할 뿐이었습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박할 수 없으면서도 받아들이지는 않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춰보자면 분명 그들의 율법 해석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나지만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모습이 그들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나느냐? 반박할 수 없기 때문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려 두면 자신들이 쌓아올린 모든 전통을 무너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반응에 대하여 너무 의아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실과 진리보다는 자기가 해롭게 되지 않는 쪽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실을 말하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있다면 사실보다는 자기 자신이 해롭지 않는 방향으로 뭔가를 꾸민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분명 잘못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면 그 잘못 때문에 혼이 날까 하여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되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가? 사실과 진리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같은 내용과 관련하여 마가복음 3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3:6) 헤롯당에 대하여 성경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없지만, 헤롯당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의 대리자인 헤롯을 옹호하면서 헤롯과 로마 황제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열심을 보였던 파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 우호적인 사람들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어떠한가? 반로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정치적 입장에 있어서는 분명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36절에서 어떤 말씀을 기록하고 있느냐? 바리새인들이 그들끼리만 의논한 것이 아니라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일 것에 대하여 의논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적대적이요 어떤 면에서는 원수와도 같았지만,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는 일에 대해서는 원수의 원수가 친구라는 말처럼 그렇게 그들과 협력하고 공모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 12에 보면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마가복음 3장과 다르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보면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동일한 일을 본다. 재판관들은 도둑과 그밖의 다른 범죄자 문제에 있어서는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달리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욕하면서 이리저리 치밀어댄다. 신앙에의 증오가 악인들을 친구로 만드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전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었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파괴하는 문제라면 머리를 함께 싸매는 것이다.”

오늘날도 보면 교회, 목사라고 하면 얼마나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은지, 특별히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서로가 몰라도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왜 저들이 그렇게 비판하는가? 어떤 면에서는 교회가, 목사가 세상 앞에서 잘못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면 때문에, 너무나도 세속적인 면이 많기 때문에, 특별히 돈 문제 등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이것은 교회가, 목사가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과 진리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적대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를 향한 비난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혹 우리의 구별되지 못한 모습 때문에 이런 비난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자신을 더욱 더 돌아보는 일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가르치는 정당한 말씀 앞에서 저들이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저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를 향하여 비난하는 것은 비단 교회가 잘못했다는 것의 문제만이 아니라 진리의 문제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향한 비난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비난인 것이고, 그런 만큼 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일 것에 대하여 의논했다고 할 때,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원수였던 헤롯당과 함께 의논했다고 할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지 않으셨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예수님께서는 분명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참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신성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부터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십니다. 완전하며 구별된 두 개의 전 본성들, 즉 신성과 인성은 칼케돈 신조(451)를 통해 고백하는 것처럼 혼합되지 않으며, 전이되지도 않으며, 나눠지지 않으며, 분리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연합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성을 통해 아시는 것을 인성이 모른다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지금 저들은 분명 예수 몰래 죽이고자 의논했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사실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느냐?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죽이고자 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게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 말씀을 통해 친히 알려주신 것처럼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26:53). 또한 여러 기적을 통해 보여주고 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서도 생명을 보전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두려워서 떠나셨겠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떠나가신 것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죽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그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떠나가셨던 겁니다.

칼빈은 이런 설명을 하면서도 다음의 내용을 덧붙여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주님께서 피하셨다기보다는 하늘의 권세가 그의 생명을 보전한 것이 더욱 분명한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원수들이 그가 계신 장소를 찾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으슥한 곳에 숨지 아니하셨으며, 큰 무리를 거느리고 계셨고, 누구나 자신이 계시는 장소를 잘 알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피하셨던 것은 그들이 분노의 불을 붙이고 있을 때 그들의 눈 앞에서 떠나 나오셨던 것 뿐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거기를 피해 떠나셨지만 그들을 피해 숨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15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떠나셨지만 여전히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무리 중에 병든 자들이 있다고 할 때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치유 사역을 행하신 것입니다. 한편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병을 고쳐주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주된 일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이 주된 일로 있기 때문에 병을 고치셨다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육신의 안식을 주시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영적인 안식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목적으로 있다는 것이요, 그 일을 이런 방식으로서 드러내셨던 겁니다.

다만 이처럼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면서 일하셨지만, 정작 16절에서는 어떤 말씀도 하시는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니우리는 마태복음 84절을 통해 이와 비슷한 말씀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말씀을 드렸느냐 하면 기적이 초점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측면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이 기적이라는 것을 통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신 기적과 표적이 뿌리를 내려서 적절한 시기에 열매를 맺기 원하셨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세상에 주신 바 된 구원자이심을 증명하는 신중한 목적 밑에서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기 때문에(칼빈) 기적 자체가 초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매튜 풀 주석에서는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죽으시기 전에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으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하신 일들을 다 수행하시기 위하여 모든 지혜로운 수단들을 동원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시려는 일환으로 이런 당부를 하신 것으로서도 설명합니다. 그가 행하신 이적들이 모두 다 널리 알려지게 되면, 큰 소동이 일어나서 바리새인들을 더욱 자극하고 격분하게 만들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를 죽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음모는 더욱 신속하게 진행될 것이었기 때문에 피하시고 기적에 대하여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를 하셨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시는데, 이 일은 이사야서를 통해 예언한 바를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서 말씀하십니다. 17절 이하 21절이 그것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선 이 말씀은 이사야 42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부분인데(42:1-4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속자이자 택함 받은 자들의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자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부의 뜻, 그러나 성자 자신이나 성령의 뜻과 다른 뜻이 아니라 동일한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들을 위하여 기꺼이 구속자로서, 택함 받은 자들의 머리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부께서는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7)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뻐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시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직무를 수행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을 통해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되신 것입니다(2:6-7). 율법 아래 나셨고(4:4) 모든 율법을 성취하시되(5:17 참조),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겁니다. 다만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셨습니다(3:34). 오늘 본문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럼 성령을 한없이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역을 하시는가? 여기 보면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을 이방에게 알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을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서에 보면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42:1)고 하면서 정의로서 말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심판이라는 단어는 정의, 판결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고 합니다. 칼빈의 경우는 이사야서의 말씀에 대하여도 정의보다는 심판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는데, 심판이라고 하면 마치 재판석에 앉은 재판관이 판결하는 그런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지만 칼빈은 훌륭한 통치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핵심은 분명 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1:21). 그러나 구원과 심판, 구원과 정의가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세우시기 위해 오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의 나라가 의로 충만하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무너진 의를 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그렇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누군가? 유대인들의 경우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사상 때문에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제외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사야서를 통해서 예언한 바는 이방에까지 그 대상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고, 한량없이 받으신 성령으로서 사역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의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이요, 그 의를 위하여 결국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죽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직 택자들만을 위한 죽음이요, 때문에 택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공평과 의로 충만한 나라, 질서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것이란 겁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역이라면, 그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의를 세우게 될 모든 사람들 역시 성령으로서만 하나님의 의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공의는 그 출처가 성령이시며 하나님의 권세에 의해 유지된다. 그러므로 어떤 제왕도 성령에 의한 교훈을 도외시하고는 법의 질서를 확립 혹은 유지할 수가 없다... 주님은 어떤 적당한 것을 음성과 글로써만 가르치지 아니하시고 성령의 은혜로 의의 규범을 지키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내적으로 조성시키신다.”

 

계속해서 보시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행하실 때 어떤 성격으로서 행하시는가를 말씀해 주시는데, 심판이라고 하기 때문에 뭔가 두려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절을 다시 보시면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지상의 심판자는 그 모습이 어떠합니까? 화려합니다. 그 화려함으로 자신의 높음을 자랑합니다. 왕이 나타났다 하면 온갖 잡다한 소리와 외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으로 오지 않으셨으며, 또한 그렇게 사역하시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화려함과는 멀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자신은 쇠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흥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예수님 자신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흥하는 그런 분은 아니셨던 겁니다.

이런 겸손과 온유하심은 오늘 본문에서 어떤 모습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는가? 오늘 본문의 경우 바리새인들, 그리고 헤롯당까지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지도 않았으며, 기적을 일으켜 위협하지도 않았습니다. 하고자 하신다면 할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피할 뿐이었습니다. 피한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멈추셨는가?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예수님 자신에게로 와야지만 참된 안식이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일 속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성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앞서 인간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사랑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길 좋아하는가? 자기 자신을 알아주길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길 좋아합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왼 손도 알아주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1-2)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자기 사랑, 물질에 대한 사랑, 자랑과 교만, 비방까지의 내용인데, 이것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자기 사랑은 자신의 외적인 것을 치장하기 위해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외적인 것을 치장하게 되면 자랑할 수밖에 없고,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방하게 되는데, 그만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주기를 그리고 높아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겸손의 모습, 온유한 모습으로 서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통해 교훈하신 바를 교훈 받을 수 있는데, 빌립보서 2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오늘 본문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당연히 성도는 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통하여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온유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욕하고 해하려 하고 때로는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있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대하여 혈기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하며, 칼에 대하여 칼로 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잡혀 가실 때 베드로는 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방식은 망하는 길입니다. 성도의 길은 그 길이 아닙니다. 악에 대하여 선으로 갚는 방식, 언제나 온유함을 잃지 않는 모습,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매우 연약한 자들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온유하심은 자기 백성이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을지라도 결코 꺽지 않으시며 끄지 않으십니다. 20절을 보시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세상의 방식은 강한 자 중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하여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약자의 살은 강자의 먹이가 된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스펙을 쌓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미 죄인 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의 모습이 이 지상에서는 연약함과 부족함이 있지만 그런 자들의 연약함 때문에, 부족함 때문에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으십니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는 그분의 인내도 볼 수 있는데, 만약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엄격함만으로 대하신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의 완성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자주 비틀거리고 넘어지려고 하고 때로는 넘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넘어졌기 때문에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우시고 부축하시며 정신을 차리게 하심으로 더욱 강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시느냐?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입니다.

특히 이사야서를 통해서는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라는 말은 없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42:3)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오히려 정의를 반드시 시행하실 것인데, 언제까지 그 일을 하시느냐? 하시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태는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 대하여 인내로 대하신다는 것이요, 인내만이 아니라 그들이 이길 때까지 그들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셔서 결국 완성품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21절에서는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의미는 18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이요, 이미 이사야서를 통해 예언된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사야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말씀에 대하여 살펴봤지만 왜 이 말씀을 하시느냐?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는 말씀과 관련해서 이 말씀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왜 나타내지 말라고 하시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하시고 온유하시며 자기 백성들을 향해 인내로 대하시는 분이심을 알리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19절과 20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는 자로 있으며, 심지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자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의하면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하는데,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피하셨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인 겁니다.

그러나 겸손하시고 온유하시며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인내하신다고 해서 아무런 힘이 없으신 분이신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며, 의가 충만한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 앞에서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겸손과 온유하심을 본받아야 하며, 나아가 우리를 향한 겸손과 온유하심이 인내함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우리 역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 나가야 합니다(12:1).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일은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라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까지나 무한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때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지막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생각해 보십시오.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하라,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 끝끝내 돌아오지 않아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본분을 다하지 않음으로 버려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릴 수 있느냐? 결코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본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 유대인 안에 있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보자면 분명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구약에도 보면 분명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주어지는 일들이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구약 이후 신약에서 본격적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형태로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말씀이 오늘 본문을 통해 인용되고 있다면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 인내라는 말씀 때문에 우리 자신이 결코 해이해질 수 없다는 것도 배우셔야 합니다. 주님의 겸손과 온유, 인내를 본받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고 해서 또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고 해서 상한 갈대라도 좋다, 꺼져가는 등불이라도 좋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꺾지 않으며 끄지 않으시는가? 좀 더 단단하게 하시고 밝은 빛을 비추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겸손을, 온유를, 인내를 배우셔야 합니다.

칼빈의 주석을 보면 그런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는데, 이 부분만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지 않은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의 약점에다 적응시키실 때 그의 무한한 선하심을 받아들이자. 그렇게 하면서 자기 결점에 빠져 들어가지 말고 오리혀 우리 일생이 이리저리로 밀려다니거나 미풍이 불 때마다 흔들거리는 갈대처럼 흔들리지는 자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 전진하자. 사탄의 갖가지 공략에 맞서서 강건하게 서고 우리 신앙이 연기를 피우면서 약한 불꽃으로 가물거리지 않고 빛난 광채를 발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성숙한 자들로 성장하자. 그리스도의 모든 일군들은 자신의 처신 방법을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에서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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