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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0305설교 / 마태복음13장1-17절 / 천국비밀이너희에게는허락되었으나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7.03.05|조회수1,58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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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1-17

천국 비밀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다시 말해 죄의 짐으로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함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자들처럼 반응하였습니다. 진리의 교훈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받지 못하는 자들로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거짓되고 자의적인 전통만을 고수하는 자들로 있었습니다. 표적을 통하여 그가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도리어 그들은 귀신의 힘을 빌려 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고 있으며,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뿐만 아니라 그 세대를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대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라 말할 수 있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누군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족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오늘부터 보게 될 마태복음 13장의 내용은 대부분 비유로서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비유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하자면 1절 이하 9절이 비유 자체에 대한 내용이고, 10절 이하 17절이 왜 비유로서 말씀하시는가?”, 즉 비유의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다음 주에 확인하게 될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해설이 18절부터 23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비록 비유 자체에 대한 내용이 1절 이하 9절을 통해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에 대한 해설을 예수님께서 직접 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비유 자체에 대한 부분은 다음 주에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한 부분인데, 우선 1절과 2절을 보시면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가 바닷가에 앉으시자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모여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을 때 수많은 무리가 따랐는데(4:23-25),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모여 들었다는 것은 그분이 전하시는 천국 복음을 듣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기 위해서 모여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 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3절 이하 8절이 비유 자체를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오늘 설교를 통해서는 이 부분을 상세하기 다루지는 않겠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하면 씨앗이 넓게 뿌려질 때 그 씨앗은 떨어진 곳마다 모두 결실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돌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런 땅은 결코 결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좋은 땅에 떨어질 때만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것에 대한 해설을 예수님께서 직접 해 주시기 때문에 그 해설과 동떨어져 설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해설에 앞서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한 이해 없이 비유 자체만을 해석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런 이해 없이 본문을 해석한다고 할 때 보통 어떤 해석으로 치닫게 되느냐 하면 좋은 땅이 되자는 식의 해석으로 결론 나기가 쉽습니다. 길가와 같은 밭,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와 같은 밭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열매를 맺자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10:12).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의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본문이 그것을 말하기 위한 비유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 9절로 오시면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분명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을 보기 위해서 오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듣기 위해,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은 들을 귀가 있고 볼 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 듣지 못하는 자들, 보지 못하는 자들의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들 역시 보지 못하는 눈을 뜨고 듣지 못하는 귀가 열렸으면 하는 마음, 그래서 보고 듣기 위해 왔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육신의 귀로 듣고, 육신의 눈으로 보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귀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10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보통 비유라고 하면 어떤 일을 다른 것에 빗대어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마태복음 1335절에 보면 시편 782절을 인용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비유란 감춰져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분들은 비유에 대하여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감춰져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좀 더 쉽게 설명하는 것이 비유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가를 묻는 것은 큰 무리라 하는 자들이 들은 비유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4:10)라고 되어 있는데, 제자들 외에도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제자와 더불어 비유에 대해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의 경우 비유에 대하여 이해를 하고 있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마가복음의 내용을 보자면 그들 역시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 않았나 됩니다. 분명한 것은 비유 자체로서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많은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제자들이 비유의 내용이 무엇인지, 마태복음에 의하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비유란 결코 쉽게 설명하는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시고, 그 비유의 뜻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데, 1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태복음 1335절에 근거하자면 감춰져 것을 드러내는 것이 비유의 목적이지만, 그 말씀보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주고자 하는 자에게 주기 위하여, 그리고 주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지 않기 위하여 비유로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 그들에게만 주기 위하여 비유로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1335절은 주고자 하는 자에게 감춰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것이 비유의 목적으로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절에서는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느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그러니까 비유를 통하여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에게만 주고자 하시는데, 있다고 해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자들에게 더욱 더 주시기 위하여, 달리 말하면 그들만이 말씀을 통한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비유로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반대로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천국 비밀이 허락되지 않은 자는 결코 말씀의 유익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로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정리하자면 비유의 목적은 감춰져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있는데, 드러내기 위한 것, 다시 말해 깨닫도록 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만 드러내시고 깨닫게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자들, 그들에게만 드러내시고 깨닫게 하실 목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보자면 1절 이하 9절의 비유 속에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 그리고 허락되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 나아가 알고 있는 자가 받아 더 넉넉하게 되는 자는 8절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라고 말하는 바로 그 대상이 분명합니다. 그럼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지 않은 자,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알고 있지 않은 자,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도 있지만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자는 누구냐? 4절에서 말하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라고 말하는 자입니다. 5절에서 말하는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라고 말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말하는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라고 말하는 자입니다. 바로 그들이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지 않은 자요, 알고 있지 않은 자, 혹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있을지 몰라도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시는 그 대상으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길가와 같은 땅, 흙이 얕은 돌밭, 가시떨기가 있는 밭에서 좋은 땅이 되자는 그런 의미의 비유는 아닙니다. 오히려 10절 이하를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유기된 자들을 전제하여 말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만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 받게 되고, 또 받은 자로서 더욱 더 채워주심으로 넉넉하게 되는 자로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비유로 말씀하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역시 예수님께서 해설해 주시지 않는 이상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 깨달을 수 없으며, 예수님께서 해설해 주실지라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가 아니면 결코 그 유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를 뿌린다고 할 때, 그리고 어떤 땅에 뿌리느냐에 따라 그 열매가 달라진다고 할 때 그런 기본적인 상식이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상 주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깨달지 못하고 그 유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요, 천국의 비밀이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 오신 분들이 있고, 또 그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설교들을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본문에 대한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본문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해설해 주신 부분도 읽어서 이 내용 자체가 다소 익숙할 수 있습니다. 익숙하다보니 아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상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지 않으면 결코 받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혹 깨닫고 그 유익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면 반드시 천국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런 자들에 대해서만 무릇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할 때 본문은 어디까지 말씀하시느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마치 요한복음 10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 비밀을 알고 생명을 얻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바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1:17)는 말도 가능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보자면 택자라 할지라도 길가와 같을 수 있고, 돌밭과 같을 수 있고, 가시떨기와 같은 곳일 수도 있습니다. 유기자들에게 돌아갈 내용이 이 땅에서 택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는 현상도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택하신 자들에게는 좋은 밭으로서 결실하도록 하시는 역사를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약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로마서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8:28).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8:30). 다만 그것을 어떻게 이루시느냐? 비유를 말씀하시는 목적이 천국 비밀을 알게 하심으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있는 자들이 더욱 더 받아 넉넉하게 할 목적으로 있기 때문에 1절 이하 9절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의 해설인 18절 이하 23절이 교훈이 되게 하셔서 이루시는 방식으로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내용을 약간 언급하여 말씀드리자면 지금 예수님께서 씨를 뿌린다고 할 때 씨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씨가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18절에 보면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오는 해설이 씨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누가복음 8장에서 언급이 되고 있는데, 11절에 의하면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씨가 다양한 밭에 떨어질 수 있지만 우리는 어떤 자냐? 본래 좋은 땅이어서 좋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셔서 좋은 땅이 된 것입니다. 우리 자체로만 보자면 지금도 좋은 땅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여겨주신다는 측면에서는 의인이요, 성도요, 좋은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을 때 유기자들처럼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그 말씀을 빼앗기거나 막히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화롭게 하시고야 만다는 사실을 이루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살피겠지만 예수님께서 해설하신 내용으로 하자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말씀을 듣고 잠시 잠깐 기쁨으로 받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으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등으로 말씀의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교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화롭게 하시고야 만다는 사실을 이루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반면 유기자들은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비유 자체와 그 해설을 비교해 볼 때 길 가에 떨어진 것에 대해서는 아예 천국 비밀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돌밭이나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는 분명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20) 말씀을 듣는 자로(22)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 비밀을 어느 정도 아는 자요, 그런 의미에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할 만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6:4-5).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말씀의 유익을 누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12절에서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있지만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택자들을 향한 비유의 목적은 천국 비밀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받아서 더 넉넉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며, 유기자들을 향한 비유의 목적은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를 통해 잘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볼 수는 있습니다.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귀로서 듣고 눈으로 그 말씀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으로 말미암아 빛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볼 수 있고, 성령에 참여 한 바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보았다고 할 수 있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들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말씀에 대하여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시는 분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마태복음 12장을 통해, 그리고 그 앞선 말씀을 통해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사실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과의 분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하면서 율법의 진의(眞儀)도 드러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도 보여주셨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상의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희를 위하여 수많은 이적과 기사 등을 나타낸 적이 있었느냐고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는데(4:32-34)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시대만큼 그렇게 많은 기적과 기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르게 깨달아야 할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반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따르는 자처럼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그들이 곧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냐? 오늘 본문을 따라 이해하자면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들, 그리고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비밀한 내용을 계속해서 받아 넉넉하게 되는 자가 알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가라지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 빼앗기게 될 자가 가라지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지금 당장 분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에게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가 아닐까 의심하라는 의도에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여러분이 이런 말씀 앞에서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가 아닐까라고 의심하고 계시다면 많은 부분 여러분은 알곡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다시 말해 말씀에 대한 유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가 알곡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알곡에게만큼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고 주고 또 주고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자로 있어야 하는가? 받고 받고 또 받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 깊이와 넒이에 있어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만큼이면 됐다고 말하도록 하신 적이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쭉 정리한 노트가 있다고 말하면서 더 이상 성경을 연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한 적이 있는데, 굉장히 교만한 말입니다. 이미 오늘 본문 12절과는 전혀 맞지 않는 정신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고 주고 또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모른 채 주고자 하시는 분의 것을 받지 않으려는 자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는 것으로 끝나도록 하지 않으시고, 더욱 풍성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13절로 하자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은 주시는 이의 역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성령의 신비적인 해석을 받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깨닫게 되는 일도 아니란 것입니다.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지만 그때도 하나님께서 주셔야지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우리는 말씀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서신서 안에 기도의 내용을 기록한 부분들이 있는데, 기도의 내용 가운데 그 첫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을 구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1 17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 9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그러므로 여러분,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로 있다고 할 때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0, 60, 100배의 결실이 있을 때까지, 로마서 표현처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분이 주고자 하시는 것에 대하여 받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있도록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 기도의 1순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일용할 양식과 관련해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 자녀들의 잘됨, 건강 이런 것이 기도의 1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기도의 1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로 오시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내용으로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혹 저들이 하나님 탓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까지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우선 이사야의 말씀은 이사야 69절과 10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책망 가운데서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징계를 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징계를 내리신다고 해서 그들이 회개하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거나 듣거나 깨닫거나 회개하거나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의 완악함이 들려지는 말씀에 대하여 막았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자신의 타락한 마음을 따라 행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런데 내버려 두신다고 해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의 인용이 이사야 6장이라 말씀을 드렸는데, 이사야 6장은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시는 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사야의 소명장입니다. 이사야를 세워 보내시지만 보내시는 대상이 어떤 자들이냐? 그들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보지 못하는 자, 듣지 못하는 자가 된 자들이란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 탓이라고 핑계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들의 완악함 때문이며, 그런 완악함 가운데서도 선지자를 계속해서 보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15절에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라고 말씀하신 이후의 내용,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결국 하나님 탓이 아니냐?”라고 묻도록 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드러내고 있는 말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죄로서 벌하시는 성격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본성은 나보다 남을 탓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 탓이라고 할 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 탓을 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죄악 된 본성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탓을 하도록 하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실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 것처럼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이시지만 정죄를 받게 되는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대상은 택자라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자가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선택이 이중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육적 이스라엘이면서도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가 하면, 육적 이스라엘이지만 영적인 이스라엘은 아닌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상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끝까지 깨닫지 못한 자들은 육적 이스라엘이라고는 말할 수 있으나 영적 이스라엘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택자는 아닌 겁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시는 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시는 자들은 택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이켜 보는 자가 택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지 않는다? 끝까지 완악함을 가지고 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볼 때 우리의 연약함과 남아 있는 부패성 때문에 유기자들에게 돌려지는 말씀이 우리에게 확인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이 땅에서는 너무나도 자주 확인이 된다는 데 답답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에게 자주 확인이 되는 그러한 모습이 결코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30, 60, 100배의 결실을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시며, 있는 자에게 더욱 넉넉하게 주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받는 자로 있어야 되지, 말씀이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막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진정한 복은 눈으로 그 말씀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귀로 그 말씀을 듣는 데 있습니다. 단지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의 귀로 듣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보고 영적인 귀로 듣고 그 말씀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셔야지만 가능하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자기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신다는 데 놀라운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여러분이 천국 비밀을 깨닫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이미 받았다는 것이고, 그런 선물을 이미 받은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복을 받은 자로서 이 땅의 것에 대하여 무엇이 부러우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는 이 복이 너무나도 익숙하다보니 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줄 수 없는 것, 하나님 지식과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있도록 더욱 구하고 구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주일성수가 많이 해이해져 있고, 그 가운데는 세상 일 때문에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세상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는 자리가 가장 복된 자리라는 것은 인정한다면 어떻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주일을 어기겠습니까? 비교적인 차원에서 주일 말씀 듣는 것보다 세상의 것이 우위에 있기 때문에, 말씀보다 세상의 것을 더 큰 복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가장 큰 복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는 것, 그리고 깨닫는 것, 깨닫는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복으로 있습니다.

 

16절에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난 뒤,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여기 보면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다,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다고 말하는데, 그럼 이들은 14, 15절과 같은 부류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16절과 17절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과 관련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백성과 신약 백성에게는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 때문에 지금 너희는 본다고 한다면, 그리고 듣는다고 한다면 더더욱 복된 자로 있다는 것을 알리시는 말씀입니다.

그럼 구약 백성과 신약 백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11을 보겠습니다. 13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39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여기 보면 이 사람들, 즉 구약 백성들 가운데 히브리서 11장에서 언급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대표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그렇지 구약의 모든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분명합니다. 증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 대하여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구약 백성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약, 신약할 때 이라는 말이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은 왜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약속 자체를 말한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취와 관련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분명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림자로서 받았을 뿐입니다. 오실 그리스도로서 약속 받은 것이고, 실제적인 성취의 완전함을 분명히 보고 들은 자로서 받은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본 자들로 있습니다. 그럼 구약 백성들의 구원은 불완전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았지만 그것을 환영했다고 말합니다. 그림자로서 보고 믿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믿었다는 것과 믿음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에 있어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듣고 있는 것만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뭔가 모자란 것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 비해 더욱 분명하고 확실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신다면 우리의 구원의 내용에 있어 저들보다 부실하거나 뭔가 모자라게 주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저들에게 구원의 모든 내용들을 다 주신 것처럼 보다 분명하게 보고 듣는 우리에게는 결코 구원의 내용에 있어 부실하거 모자라게 주실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더 확고하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복을 누리는 자들인 겁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백성들은 누군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되 구약의 백성들보다 더 분명하게 아는 자들입니다. 멀리서 보고 그림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 보는 것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구약과 신약을 비교해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영화의 단계에 가서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도 희미할 뿐입니다. 그때는 더더욱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고전13:12). 그러나 구약 백성과 비교해 볼 때 신약 백성들의 복이란 그만큼 더욱 분명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비유와 관련해서는 다음 주에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아무나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만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아니 히브리서 말씀처럼 유기자들도 말씀 앞에서 깨닫는 바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유익되기보다는 말씀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택자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는 것처럼(벧전2:7-8) 말씀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말씀이 반드시 유익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있어서 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소유로 가지는 것이 가장 복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복을 여러분들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땅한 자세는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더더욱 그 말씀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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