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3장 18-23절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태복음 13장은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마태복음 13장 35절에서 시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처럼 감춰져 있던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이 천국 비밀과 관련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비밀한 그 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시고자 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 마태복음 13장 10절 이하 17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어떤 자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자들, 그들에게만 천국 비밀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 비밀이 허락된 자들에게는 더욱 넉넉하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으로 있다는 것도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 없는 사람들, 유기 된 자들에게는 결코 천국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으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인생 가운데 천국 비밀을 깨달았다고 할 만한 외형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또 있는 것까지 빼앗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할 수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빚진 자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 탓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들의 잘못을 말씀하시는데, 구약 백성의 예로 하자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귀는 듣기에 둔하며 눈은 감은 자로 있어서 있는 것까지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죄로 벌하시는 것이요, 공의의 형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계실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이런 이해 속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해설입니다. 우선 18절에 보시면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8장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4장 14절에 의하면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씨를 뿌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뿌린다, 그 말씀을 전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 때문에 비유의 내용으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씨를 뿌리는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불러 복음을 전하게 하셨기 때문에 사도들 역시 씨를 뿌리는 자입니다. 사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복음의 일꾼들,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씨를 어디에 뿌리느냐 하면 땅에 뿌리는데, 땅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시면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이라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설과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네 가지 듣는 자의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지난주 말씀에 비춰보자면 궁극적으로는 두 부류, 즉 택자와 유기자로 나눌 수 있지만 교훈적인 측면에서 좀 더 다양하게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네 부류에 대해서는 길 가에 떨어진 부류가 있고,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부류가 있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부류,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부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칼빈은 이 비유를 요약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네 가지 듣는 자들을 열거하셨다. 첫째는 씨앗을 자기들 속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 번째는 받아들이는 것 같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만다. 세 번째는 잡초 때문에 숨이 막혀 버린다. 이렇게 되어 네 번째 부류가 남게 되는데 이들은 결실한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씨를 뿌린다고 해서 무조건 결실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지만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결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오직 택자 외에는 결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기자들의 경우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또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을 수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에서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구체적인 해설은 무엇인가? 19절에 보시면 길가에 떨어진 부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여기 보면 천국 복음을 듣는다고 말합니다. 듣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귀는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귀는 있을지 몰라도 영적 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는가? 지난주 본문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주시지만 주고자 하지 않으시는 자들에게는 주지 않으시기 때문에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도 말씀하시는가 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그럼 악한 자는 누군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의하면 사탄, 혹은 마귀라고 일컫는 영적 존재들입니다(막4:15, 눅8:12 참조). 그들이 말씀이 마음 밭에 뿌려질 때 곧바로 빼앗아서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사탄이나 마귀가 말씀이 마음 가운데 떨어지게 될 때 즉시 떨어지는 씨앗을 빼앗아 간다고 해서 악한 자, 즉 사탄이나 마귀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인가 했을 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어떤 자들은 말씀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는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지난주 본문을 통해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가 있는 반면 허락되지 않은 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탓을 돌릴 수 있는가?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말씀을 받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어떤 표현으로까지 말씀하시는가? 15절 후반부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렵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표현 자체가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 때문에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만큼 그들의 죄악이 크다는 것이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서 벌하실 만큼 그러하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공의를 실행하신다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고 해서 악한 자, 즉 사탄이나 마귀 탓을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을 때 하와는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따 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주어 먹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따 먹었느냐고 했을 때 아담은 하와 탓,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는 하와를 주신 하나님 탓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와 역시 뱀이 자신을 꾀어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뱀만 형벌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뱀도 형벌을 받았지만 하와도, 아담도 형벌을 받았습니다. 아담의 경우 하나님 탓을 했지만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들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누구 탓을 한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에는 죄악 된 마음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이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이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19절 말씀이 누구 탓을 하도록 하기 위한 말씀은 아니란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욥을 시험할 때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악인들을 사용하여 욥의 모든 재산을 다 빼앗습니다. 그러면 욥에게 있었던 일은 하나님 탓인가? 하나님 잘못인가? 하나님이 악의 저자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언제나 그의 선한 뜻과 목적을 가지십니다. 욥기 결말 부분에 가면 욥이 그것을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하나님께서 욥의 시험을 허락하신 것은 바로 이 고백을 받아 내기 위한 시험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 뜻과 목적이 악할 뿐입니다. 욥을 넘어뜨려 하나님을 욕하도록 하게 할 목적으로 시험하였던 겁니다. 사탄만이 아니라 사탄의 사주를 받은 악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았다고 해서 악인들의 마음속에 악한 뜻과 목적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19절에서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 마음의 문제이지 악한 자 탓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자, 다시 말해 사탄과 마귀는 그들의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앗을 가져갔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리고 그들 스스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악한 자로 불리는 사탄, 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구원의 원수로서 마치 굶주린 새처럼 복음이 전파되자마자 찾아와서 그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 싹을 내기 전에 잡아채가기 위해서 급히 달려드는 존재라는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유기자들만이 아니라 택자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사탄에 대하여 우리의 대적이라고 말하면서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하심 가운데 있는 자들조차 넘어뜨리기 위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하여 무엇을 권면하느냐?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벧전5:8).
따라서 19절 말씀이 분명 유기자들에 대한 말씀으로 있지만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대적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누군가? 그들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들입니다(엡2:2). 베드로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는 사자와 같아서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란 것도 아셔야 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고 말하는데, 영적인 존재들과의 싸움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장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말씀으로만 이겨낸 것처럼 우리 역시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3-17) 중요한 것은 진리의 허리띠나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는 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것들이란 사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때 무엇을 통해 주시는가? 말씀을 통해 그런 것들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만큼 말씀이 중요합니다.
말씀과 더불어 한 가지를 더 언급하자면 에베소서 6장 18절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결국 우리가 무장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말씀과 기도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다고 할 때 그 대상은 유기자들입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볼 때 택자들도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깨닫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자로 있는 것은 아닌가 잘 살피셔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1장 18절에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런 자가 말씀 앞에서 깨닫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 보면 말씀 사역자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서 설교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바른 신학으로 바른 교회를 세우고 바른 생활을 지향한다고 하는 목사들조차 분명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 설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목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말씀의 깨달음을 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의 깨달음을 주셔야 하기 때문에 그분께 기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 일을 위하여 부지런히 말씀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무지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무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요, 마귀가 기뻐하는 바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고 주고 또 주고자 하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말씀의 깨달음 역시 주고 주고 또 주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 뜻을 따라 우리는 주님께 구하고 또한 말씀에 대하여 연구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가르치는 자로 부름 받은 목사만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교회를 향하여 성도를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자라가는 일에 있어서 성도는 제외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일주일의 삶은 ‘자라가라’고 말씀하신 것과 얼마나 연결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는 있습니까? 그리고 들었던 말씀에 대하여 다시금 살피는 일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 위하여 말씀을 읽고 들은 말씀에 대하여 다시금 살피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열심을 내십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는데(행17:11), 들었던 말씀에 대하여 그날만 상고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렇게 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까? 말씀으로 씨름하시는 일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 자녀들도 함께 앉아 있지만 자녀들이 어리다고 해서 그들은 제외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말씀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혹 어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때문에 부모들은 자녀들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를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왔다는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되고 말씀으로 거듭난 자라고 한다면 그 말씀으로 자라가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의 깨달음이 있는가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 밭인 돌밭에 대하여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이 말씀 역시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분명 유지자들, 다시 말해 천국 비밀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고 유익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여기 보면 돌밭에 뿌려진 자들도 말씀을 듣기는 듣습니다. 듣는 것뿐만이 아니라 즉시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길가에 뿌려진 자들보다는 나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무엇으로 넘어지느냐 하면 말씀으로 말미암아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일단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면, 시편 19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시19:7-9) 이런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으로 말미암아 넘어진다는 것은 말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넘어진 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을 때는 믿음으로 받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참된 믿음인가 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들은 어떤 반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말씀으로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견디는 자요, 환난이나 박해 가운데서도 말씀으로 서 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견인의 선물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특히 33절 이하를 보시면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런 놀라운 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36절과 37절을 보면 이런 일들도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러나 그들이 가진 믿음이 거짓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환난이나 박해가 그들의 믿음을 없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8)
여러분,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견인의 선물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되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중도에 포기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포기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분은 불변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그런 일이 결코 없습니다. 혹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외형이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계시의 방식을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리시는 것이지, 작정하신 바가 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로 하자면 돌밭에 뿌려진 것과 같은 자요, 혹은 이후에 나오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것과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면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할 때 무엇을 방편으로 그 일을 하시는가? 유기자들의 경우 말씀으로 넘어지지만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말씀으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조금 전에 시편 19편을 언급했지만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킵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기쁨으로 받았다가 그 기쁨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박해가 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게 합니다.
시편 105편 19절에 보면 어떤 말씀도 있느냐?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7절과 18절에 보면 요셉이 억울하게 종으로 팔린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말씀이 나오고 있는데,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요셉이 팔린 것이 억울한 일입니다. 답답할 수 있는 일이요, 분노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말씀으로 단련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힘들고 지칠만한 기간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를 말씀으로 단련하고 계신 시간이었고, 그만큼 그로 하여금 인내케 하신 역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면 환난이나 핍박이 있을 때 말씀으로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더욱 그 말씀으로 서는 자,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좀 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에게는 견인의 은총이 주어지기 때문에 끝까지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들, 예를 들어 말씀과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무시하는 일이 있다면 잠시 잠깐 혹은 오랜 시간동안 죄 가운데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르면 그들이 받은 은혜들과 위로들의 얼마를 박탈당하게 되며, 그들의 마음이 강퍅케 되며, 그들의 양심이 상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거나 실족케 하며, 그들 자신에게 일시적인 심판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언급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7장 3항).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말씀으로 단련 받는다고 생각해야 하고, 그 말씀으로 이겨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이 되기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세 번째 밭인 가시떨기와 관련해서는 22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여기도 보면 말씀을 듣는 자로 있다고 말하지만 결실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유기자에게 돌려질 수밖에 없는 그런 부류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로 말한 길가보다는 나은 자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듣고서 깨닫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으로 말미암아 뭔가 땅에서부터 나오는 모습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어질 때 뭔가 자라나는 것처럼 보이는 외형이 있고, 또 뿌리 내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오는 그런 외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길가의 경우 말씀을 곧바로 빼앗아 갔다면 가시떨기는 그런 모습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자라나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는가? 가시떨기 때문에 자라나지 못하고,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가시떨기가 그 자라나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시떨기와 관련하여 성경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데, 마가복음 4장 19절에서는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외에 기타 욕심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8장 14절에서는 이생의 염려, 재물 외에 향락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서 나가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그리고 기타 욕심과 향락 앞에서는 그 말씀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분 신자가 넘어지는 경우도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박해와는 거리가 좀 되지만 22절과 관련해서는 굉장히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염려를 내려놓아야 하는데, 말씀을 듣고 들어도 세상 염려가 가시지 않습니다. 물질만능주의라고 말하는 것처럼 물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세상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욕심은 얼마나 많은지, 이 땅에서 누리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이더란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요일2:15). 왜냐하면 세상의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요일2:16). 이런 것들이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을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미워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성도들이 그 마음을 어디에 쏟느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그 마음을 쏟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세상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이요,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있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길은 성도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 길은 누가 걸어가는 길이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 유기자들이 걸어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택자들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염려를 떨쳐 버리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서정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재물이 유혹이 있지만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에서의 삶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땅이 우리의 본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히11:13-14 참조). 우리의 본향은 어디인가? 하늘에 있습니다. 성경은 그곳을 더 나은 본향이라고 말합니다(히11:16). 하늘에 있기 때문에 골로새서에서는 위의 것을 찾으라고도 말씀하기도 하는 겁니다(골3:1).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욕심은 버리고 또 버려야 하며,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많은 부분 절제를 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세상의 것이 말씀을 막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가시떨기가 있어서 말씀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핀 바 있지만 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무엇으로 시험하였습니까? 40일 동안 굶주리신 예수님께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다 주겠다는 것으로 시험하였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런 것으로 시험하였다면 그의 몸 된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한 시험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시험에서 넘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염려는 많은 부분 여기에서 멀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공중의 새도 보고 들에 있는 꽃들도 보지만 그것을 통해 교훈하시는 말씀보다 오히려 세상의 염려가 말씀보다 더 강한 형태로 있습니다. 너희는 공중의 새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시고 들의 백합화와는 비교도 할 수는 그런 대상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작은 자로 있습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들도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믿음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30)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앞에서 그 믿음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믿음이 작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이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 길은 너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시고 또 알리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들이고, 허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주고 주고 또 주어 넉넉하게 되는 자로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그만큼 자라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시기를 원하시며, 젖만 먹는 자가 아니라 단단한 음식까지 먹을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유기자와 관련된 내용 속에서 우리 자신을 비춰보았다면 오늘 본문 23절은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본래 우리가 좋은 땅이어서 좋은 땅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땅을 마음으로 비유하고 있지만, 본래 우리의 마음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바와 같았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 우리인데, 그런 우리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도 여전히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게 여겨주고 계신 겁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주시는가? 말씀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10:17).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결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를 통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갈5:6),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단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으로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우리가 가야 할 자리가 여기입니다.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통해 하신 말씀, 즉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이 한순간 되는 일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결실하게 하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헛되이 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깨닫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고,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았다면 그 말씀이 여러 가지 어려움과 힘든 가운데서도 힘이 되어야지 말씀 때문에 넘어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것 때문에 말씀이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고 해서 세상의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고 해서 세상적인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물로 온 세상을 덮으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오직 노아의 식구 여덟 명 외에는 산 자가 없을 만큼 그렇게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럼 세상에 가득했던 죄악 된 모습이 조금이나마 좋아졌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더욱 변해야 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을 때까지,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우리 역시 동일한 열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