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3장 44-52절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를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 시간까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곡식과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와 누룩에 관한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말씀이 각 사람의 마음에 떨어져 자라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미미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반드시 자라나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자라나고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을 주관하는 듯 보이는 사탄의 역사도 분명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요소들까지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잠시 잠깐 내버려 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알리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보화 비유, 진주 비유, 그리고 그물에 관한 비유입니다. 우선 44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여기 보면 천국을 보화로 비유하고 있는데, 세상의 관점에서 보화란 가장 가치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런 보화에 대하여 지금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그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무엇인가? 천국, 그러나 단순히 장소적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들,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 중에 하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천국 자체가 가장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천국이 최고의 상급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는 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스스로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상급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또한 영생을 주시고, 그 영생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자로 부르셨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천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천국보다 더 큰 상급이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 차원에서 천국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보화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천국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감추인 보화’로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미 우리가 살핀 바 있지만 마태복음 13장 11절에 의하면 천국에 대하여 ‘천국의 비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즉 천국은 마치 비밀과 같아서 아무에게나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자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알려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천국 복음이 모든 자들에게 전파되는 것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유효성은 누구에게만 있느냐?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거나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란 측면에서 지금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44절의 말씀은 천국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발견한 후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가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 보면 보화를 발견한 후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뭔가 지불해야 할 것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이미 처음부터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화에 관한 비유도 보면 사람이 보화를 찾은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 편에서 보면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작정의 실행으로서 섭리의 역사가 있는 겁니다.
칼빈의 주석을 보면 ‘샀다’는 이 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하늘의 생명을 구입하기 위해 어떤 값을 치르는 것을 의미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사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산다고 할지라도 산다는 의미는 ‘돈 없이’, ‘값 없이’ 사는 것이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비유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천국을 발견한 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천국 복음이 그 마음에 심겨진 자는 천국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천국을 다른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세상에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어떤 것도 천국과 비교해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천국을 발견한 자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어떤 자세로서 살아가는가? 세상의 어떤 것도 천국을 소유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세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 말씀드리자면 바울의 고백과 같은 자세로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9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각오로 살아가는 자, 오늘 본문으로 대입하자면 천국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 때문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도 해로 여길 수 있는 자세, 그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아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5절과 46절도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진주 하나는 분명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진주마다 그 가치에 있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다 할 수 있는데, 고대 기록에 따르면(양용의, 마태복음)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의 어머니에게 6백만 세스테르티우스, 곧 백오십만 데나리온짜리 진주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 하루 품삯이라고 하니까 대략 4,000년인 넘게 일해야 하는 금액입니다. 클레오파트라의 경우 1억 세스테르티우스, 곧 이천오백만 데나리온짜리 진주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백오십만 데나리온이 4,000년 동안 일해야 한다면, 이천오백만 데나리온은 대략 16배 정도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가치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매우 귀한 보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부터 좋은 진주의 경우 그 가치기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 진주를 구하는 상인이 지금까지 구해보지 못한 진주를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하여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라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보화 비유나 진주 비유는 천국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우리의 모든 소유를 팔아도 아깝지 않을 정도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세상적으로 볼 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수 있다고 하는 자세, 이것이 천국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그런 자세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한 모습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이 우리를 유혹하는 경우가 많고 우리는 그런 유혹에 너무도 쉽게 우리의 마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날 말씀을 듣고서 결실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원인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기타 욕심들, 그리고 향락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염려하는 대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 못하는 것으로 염려하기보다는 우리 육신의 문제로 염려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성도들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세상의 기준을 따라 물질이란 생각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의 말씀 때문에 물질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고 하면서도 세상 일을 주일까지 가지고 오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아니 오늘날 주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나도 퇴색이 되어버린 모습으로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성도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보면서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면서도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이란 끊임없이 이 땅을 바라본다는 데 있습니다. 마치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가면서 조금만 힘들면 애굽이 좋았다고 말한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습니다. 롯의 아내처럼 무슨 미련이 있는지 멸망해 가고 있는 소돔을 뒤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계속해서 뒤돌아본다면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그런 결과만 기다릴 뿐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다가 결국 광야에서 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과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비유, 즉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를 통해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그리고 어디에 참된 가치를 두어야 하는가? 천국,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에 참된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천국 말씀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든,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든,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것이란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이 우리에게 참된 가치로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 인하여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내 이익 때문에 주일, 주의 말씀을 듣는 일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일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내 날이 아닙니다. 주님의 날입니다. 주의 날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경건의 의무를 행해야 하고, 자비의 의무를 행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 주일은 주님의 날이고, 나머지 6일은 나의 날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은가? 나머지 6일도 엄밀하게 말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에서 주님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 육체를 위하여 일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일하는 것 자체가 불법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말씀과 상관없이, 주일의 정신과 상관없이 살아선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과 함께, 말씀과 더불어,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 안에서만 나머지 6일을 사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주일만이 아니라 6일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특별히 들었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말씀 중심으로 살고자 할 때 영적인 보화들은 우리의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보화가 우리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본성을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즉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옛 마음과 불법적인 욕심들과 정욕들만이 아니라 부와 명예와 쾌락들과도 결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5-16)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세상에 속한 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 방해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만큼 값을 치러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을 다 지킨 것처럼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19:21)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것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오히려 그에게 근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사랑 때문에 재물을 버릴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재물과 재산을 다 버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이를 미워하면 저를 더 사랑하는 것이고, 이를 중히 여기면 저를 경히 여기는 것입니다(마6:24). 때문에 하나님을 가장 큰 상급으로 여긴다면, 하늘에 속한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로 있다면 이 세상의 것은 언제든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니 각오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진정한 가치를 아는 자들은 그 가치 때문에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가치 있는 것을 산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아직도 진정한 가치로 여기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과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육신을 입고 사는 존재로서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우리 안에 너무나도 깊이 자리하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대로 살아선 안 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 살아선 안 되고 말씀 앞에서 우리의 본성을 죽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해 주십사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사모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에 있는 말씀처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골3:2), 오히려 땅의 것, 육신의 정욕이라든지 안목의 정욕이라든지 이생의 자랑과 같은 것은 끊을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47절 이하 50절은 앞서 살핀 비유 가운데 곡식과 가라지 비유와 동일한 내용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세상에는 분명 택한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함께 살아갑니다. 천국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들, 혹은 전가 받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 혹은 그렇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 하는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 확신을 가졌지만 여러 면에서 흔들리거나 적어지거나 일시적으로 멈추는 때도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8장 4항에 의하면 구원의 확신을 보존하는데 있어서 게으름으로써, 양심을 상하게 하며 성령을 근심케 하는 어떤 특별한 죄에 빠짐으로써, 갑작스러우며 격렬한 어떤 유혹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빛을 거두셔서 어두움 가운데 행하며 빛이 없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을 겪게 됨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분명히 구별될 것입니다. 방금 읽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부활체로서 영원히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수치스럽게 부활하여 결국 풀무 불이란 곳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때가 있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때 풀무 불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구별된다는 것 때문에 위로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바로 앞에 있는 비유와 함께 생각하자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 가장 가치가 있기 때문에 세상 것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배설물처럼 여기면서 살아가겠지만, 그리고 그만큼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겠지만, 또한 그런 삶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 때는 어떻게 되느냐? 악인과는 달리 의인으로서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큰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라지의 경우 곡식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곡식에 대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들은 곡식을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때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 나라에게 해와 같이 빛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이겠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 위로 때문에 저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우리를 향하여 불법을 행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견뎌야 한다는 것도 교훈 받아야 할 사실로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비유의 대한 말씀인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를 전체적으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그물 비유를 보면 곡식과 가라지 비유만큼은 아닐지라도 동일한 의미에서 분명 선택과 유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유기는 불변합니다. 그러나 불변하기 때문에 택자들이 게을러도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부지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를 가르치시는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육신을 입고 사는 자들로서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런 자로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좀 더 친숙한 말로 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차원에서 이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취소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번 구원하시기로 하신 자들에 대하여 결코 구원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성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이 땅에서는 그것을 다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주셨기 때문에 될 때로 되라는 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을 살펴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화 비유, 진주 비유로 교훈하자면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들만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물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물 비유를 보면 각종 물고기를 모은다고 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 좋은 것, 혹은 선한 것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선한 것과 못된 것을 구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선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과 더불어 지금 이런 말씀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느냐? 열매를 찾고 있다는 것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열매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2) 지금 12절 말씀인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은 앞서 빌립보서 2장 12절 말씀인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과 동일한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중 아무도 완전히 서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결코 선 줄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섰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은혜의 방편인 말씀을 주셨는가? 특별히 구약의 많은 기록들을 남겨 놓으셨는가? 우리에게 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구약의 백성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셨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물론 성례로서 먹고 마신 것과 참된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전서 10장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성례로서 먹고 마신 것을 말합니다. 그들 중에 참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자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는 성례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고 할 때 그들은 다 구원 받는 백성으로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의 성례로 이해하자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가? 성찬에 참여한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매 주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내 부모가 예수 믿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란 측면에서 행함, 다시 말해 성화의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의 사건들을 보면서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 우리는 그러한 자들이 되지 말자고 교훈하고 있는 겁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로 보자면 신약 성경을 통해 기록된 내용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비유를 살펴보고 있지만 그 비유를 통해서도 이런 교훈을 하신다는 겁니다. 즉 그물 비유를 통해 마지막 때가 있다는 것도 말씀하시지만, 그래서 우리에게 위로도 더해주시고 많은 어려움 가운데 인내할 것도 권면하시지만, 보화 비유나 진주 비유를 통해서는 마지막 때 우리에게 보장된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나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마치 보화와 같고 좋은 진주와 같은데, 너희는 그렇게 여기고 있는지를 물어보십니다. 좋은 것, 선한 것으로 분류되고 있는가를 물어보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것입니까? 아니면 하늘에 속한 것입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마지막 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영광스럽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간다는 불변의 진리가 여러분을 나태하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때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심겨져 자라나야 하고, 또한 그 말씀에 합당한 결실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것, 선한 것이 여러분의 열매로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51절과 52절은 모든 비유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결국 왜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느냐 할 때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여기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택자 외에는 없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분명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리고 비유를 해설해 주실 때 분명 가룟 유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가룟 유다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유익이 가룟 유다 자신에게 있었느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그들에게만 유익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 칭해지는 사도들에게 한 가지 권면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너희가 깨달았다면 너희만 깨달은 자로 있지 말고 특별히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 다시 말해 말씀 사역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집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집주인의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것과 옛것에 대해서는 신약과 구약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과 율법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칼빈의 경우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새것과 옛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각 사람의 이해에 지혜롭고 적합하게 적응하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말씀의 분배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새것이든 옛것이든 주께서 깨달았느냐고 말씀하실 때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러나 거짓된 깨달음이 아니라 주의 진리에 합당한 깨달음을 내놓아야 할 책임이 바로 말씀 사역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자신의 양이 아니라 말씀 사역자들은 주님의 양을 먹이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으로 먹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세상의 것으로 먹여선 안 되고, 오직 하늘의 것으로 먹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으로서 말씀 사역자들의 가르침을 비유하고 있는데, 불에 타 없어질 나무, 풀, 짚이 아니라 결코 사라지지 않을 금, 은, 보석과 같은 가르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때문에 말씀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할 때 주님의 곳간에서 내 오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불어 말씀 사역자로부터 배우시는 여러분 역시 그런 가르침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재미를 찾아선 안 됩니다. 설교를 통해 거저 우리 마음이 시원해지기만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심리학, 상담학처럼 설교를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에 합당한 가르침, 그 안에만 머물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 안에서 우리는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큰 골격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책망한 사실도 우리는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삶을 말하며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율법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기 때문에 열매 없음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책망한다고 해서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가? 히브리서는 징계가 없으면 친아들이 아니라 사생자에 불과하다고까지 말씀합니다(히12:8).
새것과 옛것에 대하여 신약과 구약, 혹은 복음과 율법이라고 한다고 할 때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곳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이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과 감격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가르침 앞에서 우리 삶의 부족함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완성된 자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부족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완성케 하신다는 약속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그렇게 하시느냐?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다만 말씀 사역자가 이 모든 것을 설교를 통해 매번 전할 수 없지만 그런 틀을 갖추고서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다고 할 때 결코 그 말씀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복음과 함께, 복음의 다른 형식으로서의 율법으로 여러분의 삶을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으면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것, 선한 것을 열매로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못된 것이 우리의 열매로 있는가?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로서 복음의 말씀이 각 사람의 마음에 떨어져 자라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미미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반드시 자라나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신 그 사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인간적인 표현이고 좀 잔인할 수 있지만 이 땅에서 거룩하게 하는데도 안 되면 죽여서라도 성화의 완성을 만들고야 마십니다. 죄의 형벌로서 죽음이 있지만 그 죽음조차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유익하도록 하시고야 마시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해져 가며 열매를 맺으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부디 성경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이 사실을 외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로서 그에 합당한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