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4장 22-33절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지난 시간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사건 자체만 보더라도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떡을 떼어 나눠주면 나눠준 부분이 없어져야 하지만 나눠주고 나눠줘도 계속해서 나눠줄 수 있는,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는 그런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신 바는 예수님 자신이 곧 생명의 떡이라는 데 있습니다. 먹이신 것은 육신을 위해 먹이셨지만 실제로 주고자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시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8장을 통해서도 교훈하셨던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들의 육신을 위해서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교훈하고자 하셨던 바는 무엇인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먹이는 것은 육신을 위한 떡이지만 그것을 통해 교훈하고자 하시는 바는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이시는 것은 육신의 필요를 따라 떡과 물고기를 먹이셨지만 교훈하고자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을 먹어야, 예수님 자신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았는가?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적어도 예수님을 찾았던 무리들, 다시 말해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던 무리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어떤 면에서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의 가르침을 좀 더 세세하게 받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면서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도 행하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견고한 믿음이었는가? 그렇지 못 했습니다. 오병이어와 관련해서만 보더라도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하셨지만 어느 누구도 시험을 통하여 믿음을 드러낸 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그럼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고 난 뒤는 어떤가?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시면 칠병이어가 나오는데,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칠병이어를 행하시는 자리에서 오병이어를 잊은 것처럼 그렇게 반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오병이어의 참 뜻을 알았다고 할 수 있는가? 매우 어렵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통하여 떡과 물고기를 나눠주도록 하셨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떡을 나눠주면 없어져야 하지만 주고 주고 또 줘도 없어지지 않는,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는 굉장히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 연속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제외하고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이 오병이어 사건과 함께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우선 오늘 본문 2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여기 보면 ‘즉시’라는 단어와 ‘재촉하사’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보셔야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여 배를 타고 다른 곳, 마가복음에 의하면 ‘건너편 벳새다’라는 곳으로 보내셨는데(막6:45), 왜 그렇게 하셨는가?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무리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14절과 15절을 읽어 드리면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약간 더 비교하자면 마가복음 6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인 벳새다라는 곳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와 작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막6:45-46), 예수님 자신을 임금 삼으려는 무리를 보내시기 위해서 혹은 그들을 피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제자들 입장을 생각해 보자면 무리들의 반응에 대하여 제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서 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한다면 거기에 동요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자들을 먼저 재촉하여 보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제자들이 어떤 고백을 하느냐 하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는데, 마태복음을 통해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장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6:52) 그러니까 지금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한편으로는 저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시는 사건이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있는데,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고백하고 난 뒤 칠병이어 사건에서 전혀 이런 고백에 합당한 모습으로 반응하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알리시면서 믿음을 주시고자 본문의 사건을 준비하고 계셨던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다시 말해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였지만 여전히 그 마음이 둔한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리시기 위하여 재촉하여 바다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더불어 한 가지를 더 말할 수 있다면 오늘 본문 23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떠나 홀로 기도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분으로서 자신보다 높으시고 크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신성으로서는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기도를 받으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럼 왜 인성을 따라 기도를 드리시는가?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신 분으로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차원에서 기도를 드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다는 것을 기도라는 것을 통해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인 것입니다.
특별히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한다고 할 때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 그것이 유혹의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고자 기도하러 올라가셨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혹에 대하여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교훈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분으로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는다고 할 때 이런 핵심을 놓치고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셔서 기도 하셨다,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기도하셨다는 외적인 것으로만 신앙의 내용인 양 올무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분의 뜻을 구하고 그분의 뜻대로만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 기도요, 그런 차원에서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온다는 고백이 기도인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분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가 주체가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주체라는 것입니다.
산에서 기도한다, 밤이 새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기도를 들으시는 분보다는 기도하는 자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그것 자체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 기도를 들으시는 분보다 기도하는 자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경우 산에서 기도하는 것과 그렇게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뭔가 대단한 것처럼 인식하는 일들도 있는데, 주의를 해야 합니다. 초점이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춰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본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는 분명 그분은 신성으로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지만 인성을 취하신 분으로서 기도를 드리며,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고 따르고자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에 있는 벳새다라는 곳으로 보내신 것은 억지로 붙잡아 임금 삼으려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기 위해서, 혹은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 어쩌면 아직까지 바른 믿음 위에 서 있지 못한 제자들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좀 더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고, 올라가셨을 때 날이 저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저물매’라는 말과 오병이어의 사건이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때 오병이어 사건은 해가 저물어 가는 때를 말하는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 ‘저물매’라고 되어 있는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난 뒤 저녁이 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매튜 풀 주석에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저녁이라 불리는 것이 두 개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데, 지금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저녁이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건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은 24절 이하를 통해 잘 말씀해 주고 있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절부터 26절을 보시면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우선 예수님과 떨어져 먼저 바다로 나간 제자들의 경우 바람이 거세게 불게 됨으로 파도가 치게 되고,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재촉하여 저들을 보내신 것은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잠시 동안 태풍에 밀려다니고 위험 중에 있도록 그렇게 그들을 보내셨던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본래 참 하나님이셨지만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는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관련해 신성에 따라서 하는 말과 인성에 따라서 하는 말로 구별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기도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신성을 따라서는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지만 인성을 따라서는 기도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신성으로서는 분명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시지만 인성을 따라서는 성부와 성령보다 작으십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예수님은 신성을 따라서 모든 일을 아신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인성을 따라서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와 관련해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는데(마24:36), 신성으로서는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성을 따라 말씀하실 때는 이렇게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구별을 한다고 해서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거나 나눠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칼케돈 신조(451)를 통해 고백한 것처럼 인성을 취하신 이후부터 그분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이나 전이나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경우도 예수님은 분명 신성을 따라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바람과 바다조차 잔잔하게 하셨다면 능히 바람과 바다조차 일으킬 수 있는 분으로서 제자들을 보내셨던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오늘 본문 33절을 위해서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오병이어를 통해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하셨지만 여전히 그 일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는 저들에게, 오히려 마음이 둔하여 있던 저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밤 사경’이라는 것은 대략 해가 뜨기 세 시간 전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고 난 뒤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 때가 ‘저물매’라고 말하는 저녁이었습니다. 물론 그 시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밤중이었다고 하더라도 꽤 오랜 시간을 고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 입장에서는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이고, 어쩌면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에게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음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오셨던 겁니다.
놀라운 것은 꽤 오랫동안 폭풍 속에서 씨름하고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오셨다는 것이고, 이런 광경을 본 제자들은 결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서워하며 놀라 소리까지 지를 정도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굉장히 놀란 것이고 기겁할 정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당연한 반응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마가복음은 분명 이 사건과 관련해 책망조의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마가복음은 그들이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주석합니다. “떡의 기적 중에서 그들은 충분히 가르침을 받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계시며 어떤 필요한 상황에는 자기 백성을 위해 온갖 준비를 갖추시는 데 유의하고 계심을 배웠을 것이다. 이제 그들의 우둔함은 책망을 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 그 현저한 실 예가 보여 졌고 현재 그들의 눈앞에도 나타나 있는 하늘의 권능을 그들이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깜짝 놀란 것은 그들이 가진 우둔의 과오 때문이었다. 앞서 나타난 기적으로부터 유익을 얻어야 할 것인데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떡을 많게 해주신 사실이 거울처럼 선명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망각한 점에 있어서나 마음을 기울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각하지 아니한 점에 있어서 그들의 우매는 책망을 받아야 했다.” 지금 예수님은 무엇을 보여주고 계셨느냐 하면 그분의 신성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오병이어 사건도 마찬가지고,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원한 것이란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깨닫지 못했는가?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의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들이 떡을 많게 해주신 기적에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르게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적은 멈추었지만, 기적보다 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벧후1:19-20 참조).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그분은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등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 지식과 관련된 내용이 우리 안에 심겨질 때마다 믿음의 성장 혹은 믿음의 견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두려워 할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그런 자세가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믿음은 그런 모습 가운데 있는가?
여러분, 참된 신자라 할지라도 그 믿음은 매우 미약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17장에 의하면 믿음과 관련하여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는 것으로 말씀하시는데(마17:20), 우리의 믿음이란 겨자씨 한 알 만큼도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눈으로 목도하게 하셨지만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지 않으신 것과 같습니다(신29:3-4).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 탓이라고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마가복음을 통해 책망하고 계시는 것처럼 충분히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알려주셨지만 우리 마음의 둔함이 그런 사실에 대하여 막고 있을 뿐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없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려지고 있지만 그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히4: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지식에 있어 자라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지식에 합당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시도록,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 알도록 기도한 것처럼(엡1:19) 우리 역시 그렇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 소리칠 때 예수님께서는 즉시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2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자신을 보여주셨지만 보지 못하는 제자들, 아니 유령인 줄 알고 있는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의 음성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두려워하고 있는 그들 마음에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배가 풍랑 가운데 있을 때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신 사건을 살펴 본 바가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마8:27).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결코 거짓일 수 없으며, 심지어 바다 위를 걸어오신 것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단지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으로만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어떤가? 마태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마8:26).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의 가르침도 받고 또 가르침 받은 말씀에 대하여 복음을 증거 하고 능력도 행했습니다. 뭔가 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보자면 과연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요, 실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배우고 경험한다 한들 나아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탓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이요, 그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태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쩌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서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분이 우리로 하여금 로마로부터 해방하여 다른 모든 나라 위에 세우실 분으로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리고자 하시는가? 인성을 취하셨고 때문에 참 사람이시지만 그러나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기도 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나타내고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믿음 없는, 그래서 둔한 그들에게 또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고 보여주어 가르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밝히셨을 때 제자 중 한 사람인 베드로가 약간의 용기를 낸 것처럼 이렇게 요청합니다. 28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이 말에 대해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우선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분명히 알리셨지만 여전히 의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칼빈은 이런 베드로에 대해 그의 신앙이 무르익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매튜 풀 주석의 경우는 자신의 믿음이 그렇게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에 대해 칼빈의 경우 약간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일반적인 해석은 견고하지 못한 믿음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발휘한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의 경우 여기서 베드로의 남다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다른 사람은 물 위를 걷고자 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걸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본문에 대하여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이미 들었었다. 그렇다면 왜 의심하고 당황했던가? 적고 연약한 그의 믿음 중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소원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기의 분수를 지켰어야 했으며 그리스도께로부터 믿음을 더 얻어 그 믿음의 인도와 안내로 마침내 모든 장애를 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신앙의 날개도 없이 날고 싶어 했으며 그리스도의 음성이 자기 마음에 확고해지도록 하지도 않고 발밑의 파도를 어떤 견고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의 의욕이 좋은 행동 원리로부터 솟아나온 것만은 의심이 되지 않으나 이 의욕이 그릇된 과잉 행동으로 전락되었으므로 칭찬할 만하지 못하다.”
개인적으로는 칼빈의 해석과 시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주의하도록 한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보면 믿음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욕심과 관련하여 말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믿음대로 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해석에 의하면 베드로가 그런 모습인 겁니다. 주께서 ‘나’라고 말씀하시고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 그대로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시거든’이라고 말하면서 의심하였고, 의심에서 나아가 과한 요청까지 했던 겁니다. 우리도 비슷한 모습일 때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을 믿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말씀에 대해서도 이 말씀이 참이라면 이렇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세상의 것과 맞물려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때문에 이런 자세는 칭찬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으로 교훈 받아야 할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신다는 것이 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시면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그러나 신앙의 자리에서 무엇을 요청했을 때 그 요청에 대하여 수긍해 주신다고 해서 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처럼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서를 통해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호세아서를 통해서는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호13:11)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들어주신다고 해서 다 기뻐하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요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요청을 허락하셨지만 칼빈의 해석을 따른다면 결코 기뻐하셔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시는가?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구한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심으로 우리를 더 잘 보살피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에게 양보하심으로서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것을 우리의 경험으로 확실히 알게 하시기도 하십니다(칼빈). 베드로의 경우는 후자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일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듯 실제로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시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셨는데, 여기서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 때문에 과도한 경솔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혼자 물 위를 걸어 오셨지만 베드로의 요청에 베드로조차 물 위를 걷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베드로는 물에 빠지게 되는데, 30절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도 견고한 것이 아니라 의심 가운데 있었고, 그런 가운데 경솔하게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주님을 보면서 걸었으나 바람을 통해 일어나는 풍랑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다 위에 계시는 분이 예수님인 줄 알았는지 빠지는 즉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3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물 위를 걸었는데 의심함으로 빠진 것에 대한 책망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만 하신 책망, 단순히 베드로 개인에게만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모든 제자들을 의식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풍랑으로 인하여 어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찾아 오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 곧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는가? 하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실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심이 베드로로 하여금 경솔하게 요청하는 일이 있게 하였고, 그 일로 인하여 놀라운 경험을 하였지만 곧바로 믿음의 작음을 드러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32절과 33절을 보시면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오늘 본문의 경우 마태복음 8장에 있는 말씀처럼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배에 함께 오르자마자 바람이 그쳤다는 것은 그 일이 바로 주께서 행하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권능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을 통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런 고백이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이 뭔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에 이어 칠병이어 사건이 있을 것이지만 칠병이어 사건을 통해서도 마치 오병이어를 경험하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갔으며, 부활 이후 승천하실 때도 여전히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전체적인 내용 속에서 보자면 뭔가 확연히 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가 하면 배우고 배우지만 그리고 제자들의 경우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경험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월등하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말씀을 통한 배움이 있고 또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끊임없는 간섭과 역사를 보면서도 우리의 믿음이란 언제나 연약함, 부족함, 때로는 의심 가운데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가르치고 가르치시며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8장에서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셨지만 그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아니라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말했다면,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비슷한 사건 같지만 드디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받아내고야 마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 모두의 신앙은 베드로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견고한 믿음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족하며 의심 가운데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 속에 역사하셔서 믿음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게 하십니다. 주님께로 가겠다고 하면서도 주님이 아닌 바람과 바람으로 인해 일어나는 풍랑을 보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자초하는가? 우리 스스로가 자초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판 웅덩이에 우리 스스로가 빠지는 꼴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분이 누구시냐? 바로 주님이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부르짖었지만 부르짖었다는 것은 오늘날 쉽게 말해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원인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부르짖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붙들고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부르짖었다는 것은 주께서 그 마음에 그런 믿음의 분량을 넣어주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부르짖었기 때문에 건져주셨다가 아니라, 부르짖지 못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건져주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도 하지 못한 채 물 속에 빠져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예수님께서 가만 놔두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핵심이 아닌 겁니다. 오히려 부르짖었다는 것을 통해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부르짖을 수 있도록 지켜 보호하신 역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 풍랑 가운데 몰아넣기도 하시며, 몰아넣으실 때 우리를 위하여 기도 하신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할 때,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셨다고 할 때 제자들을 풍랑이 일어날 바다로 보내신 것으로만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은 큰 바람이 불어올 것을 진실로 알고 계셨으며 자기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에 등한하지 아니하신 것 같다.”고 주석하기도 합니다. 위험이 올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들을 막은 것이 아니라 보내셨고, 그런 가운데 인성을 따라 기도하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가? 바로 제자들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저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역시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때로는 풍랑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만 그런 일을 위해 중보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기에”라는 말에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런 지식을 얻게 하시고 그런 지식에 합당한 믿음을 만들어 가고자 풍랑을 일으키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풍랑과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풍랑만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그분은 인자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인성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지만 그분은 승천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 이유에서 풍랑과 같은 일 속에서 우리가 불러야 할 분은 바로 주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고, 주님을 부르는 자로 있다면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시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