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태복음

170604설교 / 마태복음15장10-20절 / 이것이야말로사람을더럽게하느니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7.06.04|조회수960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510-20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음으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지적에 대한 내용을 살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라 함은 율법과 관련하여 오랜 시간 구전으로 전해오는 것들을 기록하여 정리한 것들인데, 그들은 이 전통을 통하여 율법의 정신을 세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3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결과밖에 낳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만큼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계명을 좇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로 있었는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좀 더 분명하게 교훈하고자 하셨는지 무리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무리를 불러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전까지는 말씀하신 대상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면 지금은 그들로부터 무리로 옮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의 대화에 대하여 무리들이 들었는지 아니면 듣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예수님께서 무리를 부르신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무리들을 가르치고 교훈하시기 위함인 것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경우 그들의 잘못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강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불러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전통은 무엇인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불결하거나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불결하거나 부정한 것을 만졌을 때 그것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물로 씻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지는 것을 통해 불결하거나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외적인 것 자체가 부정한 것으로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구약을 보면 이런 말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법과 관련해서만 보더라도 분명 부정한 것을 먹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율법의 진의를 일부 말씀해 주신 것처럼 여기서도 동일한 뜻을 드러내고자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보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관한 규례가 레위기 11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한 것은 먹되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정한 짐승인지, 무엇이 부정한 짐승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일한 짐승에 대하여 창조 역사를 통해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만물을 지으실 때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을 다 만드시고 난 뒤 그 모든 것에 대하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1장에서는 정한 짐승,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창조의 역사 속에서는 바로 그것들을 보시면서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창조 역사와 레위기 11장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물론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이 짐승으로 하여금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나누었는가? 레위기 11장에 보면 어떤 외적인 것으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것들의 외적인 모습이 바뀌었는가?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분명 레위기 11장은 외적인 것에 따라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구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다기보다는 처음 창조될 때부터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실상 그런 외적인 것 자체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 기준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1장에 의하면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먹을 수 있지만 그것 중 하나라도 안 되는 것은 먹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처음 창조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기 때문에 모든 짐승이 다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으로 있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짐승에 대해서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으로 만드셨지만 어떤 짐승에 대해서는 그런 모양이 아닌 짐승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레위기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그런 외적인 것이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 기준이냐? 한편으로는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기준이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냐 했을 때는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창조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생물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으로 구분될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외적으로 말씀하신 그것이 기준이 되기는 하나, 다시 말해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 기준이 되기는 하나, 그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분명한 기준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기준이요, 그분의 말씀이 기준으로 있다는 것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을 때 그리고 그것을 지키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핵심은 순종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레위기 11장을 생각해 본다면 먹는 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부정하게 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부정하게 하는 실제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규례와 저런 규례를 정하신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방금 레위기 11장 말씀에 대하여 설명 드렸는데, 같은 레위기 11 45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거룩은 그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이요, 총체적인 거룩입니다. 정한 짐승을 먹으면 그것으로 거룩하고, 부정한 짐승을 먹으면 그것으로 부정하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볼 때 총체적이라기보다는 한 면만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고,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이런 외적인 것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율법은 분명 외적인 강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외적인 강조가 있기 때문에 율법은 그것만을 강조하는 형태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알리시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주께서 말씀하신 것에 순종하라는 것이고, 그런 순종이 마음을 다하기까지 하라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명령을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지금 바리새인들이 착각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런 총체적인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외적인 것에만 치우쳐 있었다는 것입니다. 손만 씻어 될 문제가 아니고, 또 잔과 주발과 놋그릇만 씻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너희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너희 자체가 거룩해야 한다고 알리신 것인데,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율법의 외적인 것만 보다보니 율법의 진의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의 진리를 드러내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치우치다보니 결국 어떤 일이 생기게 되었는가? 그들의 전통과 가르침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막고 폐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한 가지는 전 성경에 대한 이해 없이 어느 한편만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혹 그런 강조가 다른 편의 말씀을 폐하는 성격으로 있는 것은 아닌가를 주의하셔야 합니다. 율법을 통하여 외적인 면을 말씀하시는 것 때문에 그것을 통하여 내적인 면을 보지 못한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자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가 인간으로 하여금 열심을 내지 못하도록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려고 하는 자들의 오해일 뿐입니다. 개혁신앙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율법과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에 대한 강조가 율법을 폐하는가?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세울 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한편에 대한 강조가 다른 편을 폐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가 구약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약간 언급한 바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구약을 보면 대부분 외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너희가 복을 받을 것인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28:3-6)는 식으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도 장로들의 전통의 뿌리는 구약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고, 그 내용은 외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이것이 바로 구약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구약의 설득 방식은 먹는 것, 마시는 것과 같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실제로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외적인 방식으로 주셨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외적인 것이 머물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만나 사건이 그것입니다. 먹이시는 것은 우리 육신을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결코 외적이지 않습니다. 신명기 82절과 3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외적인 것이 실제로는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여 세균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그런 것을 통해 우리가 아프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손을 씻으면 세균이 죽고, 그러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그런 측면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세균으로 인하여 질병이 오는 것을 부정하다고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의도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더럽게 하는 것이 뭔가?” 여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라 말씀하시는 겁니. 외적인 것이 부정해서 그 부정이 외부로부터 내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부정함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란 것을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2절을 보시면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였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이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경우 이렇게 말함으로 혹이라도 예수님께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는 마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너무 엄격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고 할 때 그것이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파견된 인물들이라면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왔을 것이고, 또 당시 유대인들 사고 속에는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삶의 틀로 있었기 때문에 그 틀을 깨거나 파괴하는 듯 보이게 되면 큰 해를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유순하게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예수님께로 나아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경우 예수님의 가르침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태복음 13장으로 통하여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을 때 저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요,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로서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교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저들은 바로 그런 부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던 진리를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저들이 걸림이 될 줄 아셨습니다. 그럼 걸림이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진리를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혹 저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예수님 자신을 해롭게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분이 가지고 계신 진리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이고,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진리에 대하여 걸림이 되거나 혹은 디딤이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그의 서신서를 통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7-8)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것 때문에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혹 그것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물론 진리라는 것 때문에 무분별하게 전하는 것이 무조건 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개혁신앙을 따른다고 할 때 기존 교회에 들어가서 이것이 맞으니까 무조건 따라 와야 된다는 식으로 하는 것은 결코 덕스러운 방식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 때문에 넘어지는 자들을 고려한다는 측면에서 진리를 내려놓는다면, 그리고 진리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측면에서 진리를 내려놓는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뱀처럼 지혜롭게 가르치되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대하여 어느 것 하나도 내려놓지 않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시는데, 13절과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의 가르침이 저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인 양 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저들의 가르침은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은 결코 뽑힐 것이 되지 못하지만 지금 저들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심으시지 않은 가르침,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심으시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뽑히게 될 가르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교회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특히 가르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는 것으로 심는 것이 아닌가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하면 저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범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으로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심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율법의 근거하여 내놓은 것이라 할지라도 주의 것이 아닌 이상 뽑힐 것이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24:35) 하나님의 것이 아닌 이상 다 사라져버릴 것이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는 사라지지 않을 말씀만을 전해야 합니다. 주께서 주신 것을 그대로 증거 하는 것, 이것이 말씀 사역자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귀에 좋은 말을 듣기 원하기 보다는 좋은 말이든, 좋지 않은 말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에 합당한 말씀이라면 듣기를 즐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혹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면 우리는 그 위로에 감사해야 할 것이고, 혹 책망의 말씀을 주신다면 그런 책망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약에서부터 말씀을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책망을 듣기보다는 평안하다는 말을 듣기 좋아함으로 참된 가르침에서 떠나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런 성경의 역사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구약을 곰곰이 살펴보십시오.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은 책망을 합니까? 죄에 대한 책망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진노의 말씀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그런 책망이 아니라 평강을 외쳤습니다. 잘 될 것이라고 말했고, 진노가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 말을 듣기 좋아했는가?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 거짓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날 없는가?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어떤 말들이 있었느냐 하면 죄에 대한 설교를 사람들이 꺼려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보다는 위로를, 격려를, 마치 상담하듯 그렇게 설교하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듣기 좋아할 말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분들의 경우 책망의 말씀에 대하여 안 좋은 시각을 가지는 분들이 있지만 단순히 책망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한 책망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징계라고 할 때 아버지로서 징계하시는 것이고 고치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이지, 단지 책망으로 끝내기 위한 것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는 것은 다 뽑힐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그냥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두라는 말씀 안에서 이미 그들의 결과가 다 말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혀 신경 쓸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종교지도자들로서 상당한 위치에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다는 것이요, 혹은 그들이 불쾌감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주석에 보면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으면서(살전2:15) 오직 너희 양심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기를 바라는 자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럼 왜 저들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는가? 그들은 앞 못 보는 맹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맹인으로 있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맹인이면서 맹인인 자들을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만큼 무지하다는 것이고, 무지함을 넘어 그들은 매우 교만한 자들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자신이 맹인일 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인도한다고 하니 이것보다 무지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지함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이것보다 교만함도 없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들은 버림받은 자들이고, 또한 버림받은 자들로서 그들 스스로 진리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로 있기 때문에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까지도 함께 묶어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면에서 가르치는 자들만이 아니라 가르침 받는 자들 역시 그들 스스로의 무지함, 그리고 고집과 악의로서 가르치는 자들을 따라갈 뿐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가르침 받는 자들 입장에서는 가르치는 자 탓을 하고 싶을 수 있겠으나 주님께서는 가르치는 자도 맹인이요, 가르침 받는 자도 맹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 때문에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그들 스스로가 맹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 탓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 스스로가 그 자리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책망보다는 평안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그들이 인간을 높이는 교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럼 저들과는 달리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맹인이 아니라 보는 자들로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뭐냐? 저들은 맹인이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거절하는 자로 있지만 우리는 주의 진리를 거절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받는 자들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말씀의 유익을 얻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편 1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참된 성도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습니다(1:3). 혹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엄격하게 질책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아니 우리 수준이 항상 미달이기 때문에 자주 그런 말씀을 받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음으로 알고 그것으로도 유익을 얻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겁니다.

물론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해서 전혀 말씀의 유익을 받지 못하는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 말씀의 유익을 받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다고 할 때, 가라지는 전혀 유익을 받지 못하는 자들로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익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최소한 그런 외형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익은 일시적일 뿐이라는 게 그 특징입니다. 잠시잠깐일 뿐입니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반석 위에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견디질 못합니다. 세상의 염려, 재물의 이익과 관련된 유혹이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견디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진수성찬이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그것을 거절하고 부인하기 때문에 결코 진리의 열매로서 결실하지 못합니다. 누가 결실하는가? 누가 끝까지 말씀으로 말미암은 유익을 누리는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만 입니다.

 

계속해서 15절을 보시면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베드로가 이렇게 요구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7:17)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을 향하여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무리들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제자들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의 유익이 반드시 모든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동일하게 있는 것은 아니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에게도 얼마간의 유익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택하신 자들 역시 말씀을 받지만 유익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말씀을 듣는 이곳에서도 그 유익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진리를 정당하게 전한다고 할 때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유익을 맛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유익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의 경우는 전혀 유익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그 마음에 새기셔야 가능합니다. 주께서 주셔야지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설명해 달라는 제자들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1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즉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이 없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아서라고 핑계 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무지함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고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르신 그 자리에 안주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이 땅에서 성화의 싸움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런 싸움을 통하여 좀 더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으로 자라나길 원하십니다(8:29 참조). 자라나길 원하시기 때문에 어린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도 하시는 것이고(고전14:20 참조), 그렇지 않을 때 책망도 하시는 겁니다. 한 예로 히브리서 5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시되 전혀 성장이 없는 것은 아닌가를 정직하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성화와 관련하여 말씀드렸지만 하나님 지식에 있어 성장이 있는가? 그런 지식에 합당한 거룩함이 더해지고 있는가? 혹 하나님이 주체로 계시다는 개혁신앙의 내용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게으름을 조장하지는 않았는가?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신앙은 총체적이어야 하고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한편이 강조되는 것 때문에 다른 편이 폐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 제자들을 책망하시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요청에 대하여 거절하지 않습니다. 17절 이하를 보시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5:17-20)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의 핵심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은 외적인 것,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 접촉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그것도 부정하다고 말씀되고 있는 그런 종류의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저들은 외적인 것 자체가 더럽고 그것을 접촉하면 더럽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 배를 거쳐 뒤로 해서 내버리는 것이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배설물이 더러운 것은 맞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으로 더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음식법 역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말씀하셨지만, 그리고 정한 짐승은 먹을 수 있고 부정한 짐승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말씀하셨지만 그것 자체가 핵심으로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의 순종 여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정함과 부정함이 있는 겁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더럽게 하는가?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인데,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인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과 같은 것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의 더러움이란 외적인 것이 우리 내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 내부로부터 외부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 배를 거쳐 뒤로 내보내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 나오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더럽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한때 신종인플루엔자로 굉장히 시끄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신종플루로 죽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때 어떤 홍보를 했느냐 하면 손을 잘 씻어야 한다는 홍보를 자주 했습니다. 나갔다 오면 손을 씻어야 하고, 더러운 것을 만지만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청결해야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종플루가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 때문에 청결해야 한다는 강조가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는 죄가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 아무리 더럽고 추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더러운 것이 뭐냐? 우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과 같은 것들입니다

문제는 신종플루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데 성도라고 하면서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외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안에서부터 나오고 있는 생각과 말과 어떤 표현들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셨습니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5:22)하셨지만 이것이 더럽다, 혐오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5:28)하셨지만 우리는 그런 말씀의 해석에 대하여 알고는 있지만 더럽다, 혐오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굉장히 무뎌져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7:9) 이 세상 모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담의 첫 범죄 이후 자연적 출생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모든 자들이 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배우지 않아도 이미 우리 속에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아느냐?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거짓되고 부패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가장 더러운데도 그것보다 다른 것을 더럽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말씀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 이런 저런 모양으로 더럽다고 생각되는 것을 볼 때마다 그것보다 더 더러운 것이 인간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죄악된 것들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들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 이유와 관련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17:13) 그러니까 주님을 버리고 되면, 주님을 떠나게 되면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돌아볼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왜 그들이 그 마음을 모르는가?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런 마음을 왜 모르는가? 주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주님께 붙어있는 것만이 우리 스스로를 정확하게 보는 길이요, 또한 그분께로 나아가야지만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자들로서 그들의 마음을 결코 정확하게 볼 수 없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눈이 있어 자신의 외적인 모습은 볼 수 있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보는 일은 그리스도 없이는, 그리고 그분의 말씀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더럽게 하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 있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때가 되어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왜 부르심을 받았는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더더욱 자신의 마음을 살피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패성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죄악된 것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라 할지라도 악한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혹 외적인 살인, 외적인 간음을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으로부터 그런 죄와 방불한 죄를 짓는 일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 우리 밖으로 나오고 표현되기도 하는 겁니다. 때문에 성도는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셔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살피셔야 하고, 그 말씀을 통해 좀 더 성화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간혹 마음이 우리의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 그 마음을 붙잡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그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잠언을 통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4)고 말씀하시지만 실상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 잘 압니다. 때문에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불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명하시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4:20-21)고도 말씀하십니다. 근원적으로는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것을 통해 마음을 지키도록 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말씀에 착념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또한 읽고,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부패함과 거짓으로부터 떠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