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5장 29-39절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으로 시비를 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실상은 외식하는 자, 즉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지난 시간 살핀 이방 여인의 경우는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시대적으로 보자면 이방인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활짝 열려 있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간청에 대하여 무언의 거절을 하셨습니다. 또한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유대인의 경우 하나님의 자녀라 칭해지고 있는 반면 이방인은 개와 다를 바 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 취급을 받고 있지 못하는 그런 모습으로까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주의 은혜를 구하는 일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간절한 마음과 끈질김으로, 그러나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에 대하여 겸손히 인정하는 자세로 주의 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처럼 자신에게도 그런 은총을 주시도록 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인의 신앙 이면에는 분명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미 구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결국 이런 대조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당시 스스로를 선민이라고 말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거절하는 형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 외인일 수밖에 없었던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고 구약에서부터 약속된 다윗의 자손으로, 다시 말해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받아야 할 자들이 받지 않고, 받지 못할 자들이 받게 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졌는가? 그렇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까지는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그때서야 비로소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에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이 이방 여인에 관한 사건은 장차 있을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서언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왔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그런 시대에서도 이방인의 구원을 말씀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런 사건을 통해 혈통도 아니요, 육정도 아니요, 사람의 뜻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믿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라 칭해지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 사건 이후 마태는 또 다른 기적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가 읽은 본문은 두 가지 사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체적인 어떤 사건에 대한 것보다는 치유 사건에 대한 요약을 기록하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오병이어와 다르지 않는 칠병이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경우 이미 다른 본문을 통해 살펴본 바가 있기 때문에 그런 내용들을 다시금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29절 이하 31절을 보시면 가나안 여인이 있던 지역에서 떠나 다시금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몇 차례 언급했던 치유 사건에 대한 요약을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15:29-31) 마가복음에 보면 가나안 여인에 대한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 사이에 귀 먹고 말 더듬는 한 사람에 대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막7:31-38), 아마도 여러 치유 사역 가운데 한 가지만 선택하여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곳에서 있었던 모든 사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런 말씀이 자주 등장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의 주된 사역이 이것인 양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마태복음 4장으로 가시면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런 요약은 마태복음 9장을 통해서도 반복되는데,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크게 두 가지로 사역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치는 사역인데, 무엇을 가르치셨느냐? 천국 복음과 관련된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육신의 약한 부분을 고치시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사역 가운데 예수님의 초점은 어디 있느냐 할 때 가르치는 것, 다시 말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신의 이름의 의미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는데(마1:21), 죄에서 구원을 얻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가?”라고 의문을 가졌을 때 이런 대답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 그러니까 예수님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병든 자들을 위해 오셨는데, 그들이 누군가? 지금 바리새인들이 말하고 있는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의 육적인 질병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병들었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 자신이 의사라고 소개할 때, 그것은 단지 육적인 질병을 고치기 위해 오신 의사가 아니라 영적 질병을 고치기 위해 오신 영적 의사로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가? 특히 복음서를 보면 그렇게 병을 고치는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지만 의도치 않은 결과들도 분명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16절과 17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왜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셨는가? 천국 복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오신 예수님께서 굳이 왜 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하시는가? 17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아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뭐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해당 본문을 다룰 때도 말씀드렸고 마태복음 14장 마지막 부분을 다룰 때도 재차 말씀을 드렸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내용은 단순히 우리의 육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만 말씀하시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부분이 이사야 53장 4절인데, 4절과 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물론 4절에서 질고를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병을 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은 인용한다고 할 때 이 부분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5절은 무엇을 보여주는 사건이냐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실제로 이사야 53장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가 인용하기도 하는데(벧전 2:24-25 참조), 십자가 사건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읽어드리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결국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많은 귀신들을 쫓나내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신다는 것은 단순히 육적인 문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시적이긴 하지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고, 때문에 한시적으로 그리고 제한적으로 육신의 질병까지 실제로 짊어지는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육적인 것을 통해 영적인 것을 내다보도록 하는 방식을 비상시대에 한해서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만나를 먹이시면서 만나가 아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신 방식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할 때 그분은 육신을 위한 의사가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 영혼의 의사란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육신의 질병을 고치지만 그것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영혼의 질병을 고치시기 위해 오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만이 의사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누가 병들었는가? 사실 모든 인류가 병들었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가 되었습니다. 혹 병들었다는 말을 잘못 오해해서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인간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것처럼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병이 들었을 뿐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느냐?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엡2:1). 육신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구원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어떤 것이라도 내놓을 수 없는 자,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인 것입니다. 병들었다고 할 때도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무엇 하나 할 수 없지만, 주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 우리가 병들었다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죽었던 우리를 성령을 통해 살려내심으로 우리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내가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밀하신 역사, 즉 우리를 살려내시는 그런 역사 없이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로 찾아온 것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주를 찾아왔지만 주께서 믿음을 칭찬하신 이상 그런 믿음을 선물론 주신 역사가 언제나 앞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믿음을 칭찬하셨기 때문에 여인의 믿음이 대단하다는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거기에 하나님을 놓치게 되는 일이 있게 될 뿐입니다.
한편 모든 자가 병들었지만 모든 자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로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것이 그들 스스로가 병들었다,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그것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렘17:9). 쉽게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면 괜찮은 사람인 줄 착각합니다. 저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런 괜찮음이 마치 죽어서도 괜찮은 곳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과 악을 말할 때 그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 베자의 요리문답을 통해서도 살펴봤지만 하나님 자신께서 명하신 것이 오직 선한 것이며, 그분께서 금하신 것이 악한 것입니다(베자의 소요리문답 제5부 2문). 하나님께서 선악과 명령을 하셨을 때 그 대상은 아담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후손들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지키지 않아도 다 지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 우리들의 모습은 율법의 어느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죄만을 내놓고 있는 존재입니다. 혹 자기 스스로 죄를 짓지 않은 유아라 할지라도, 심지어 태중에 있다할지라도 아담이 인류의 머리인 이상 모든 사람은 죄책과 부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적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31절 하반부에 보면 많은 치유 사역을 본 무리들이 그것을 보고 놀랍게 여겼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저들의 구원까지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할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단지 기적의 역사가 너무 기이하여 혹은 놀라워서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판단하여 이렇게 말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적 앞에서 노골적으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 일을 한다고 말한(마12:24) 바리새인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는 달리 무리들이 놀랍고도 기이한 일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모든 곳에서, 다른 자가 아닌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기적과 관련해서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섭리의 역사를 통해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5장 섭리에 대한 부분을 보면 통상적으로는 섭리 안에서 방편들을 사용하시지만, 그가 기뻐하실 때에는 방편들 없이, 방편들 너머, 방편들을 거슬러 자유롭게 일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3항). 기적이란 어떤 면에서 방편들 없이, 방편들 너머, 방편들을 거슬러 일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하시는 것이나 방편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나 하나님 편에서는 매 한 가지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기적이라고 해서 신기해하고 놀라워하고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방편들 없이, 방편들 너머, 방편들을 거슬러 일하시는 것만 기이한 일이 아니라 실제로는 방편들을 사용하시는 것도 기이한 일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매일 매일을 사는 것도 놀라운 일이 틀림이 없습니다. 자고 있는 동안 숨을 쉬는 것도 그렇고 일어나서 숨을 쉬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신비로운 일입니다. 매일 매일 일상의 삶을 살면서 반복되는 듯 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그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며, 때문에 매일 매일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야 할 자들임을 아셔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고전10:31), 다르지 않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모든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봉독으로 민수기 말씀을 읽었지만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민21:4),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한상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힘들면 원망 불평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는데,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의 인도하심을 잘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평탄한 길만 주시지 않습니다. 어려움도 주십니다. 인생 길에 있어 험한 길도 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길을 가면서도 원망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반응을 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32절 이하 39절은 칠병이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14장에서 언급한 오병이어 사건 다르지 않는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오병이어나 칠병이어나 그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떡임을 알리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적 자체는 앞에서 본 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신 사건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이적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우리가 병인을 고쳤다고 했을 때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인 의사라고 했듯이, 오늘 본문 역시 단지 예수님께서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최소 4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병이어에서 살핀 것처럼 예수님만이 바로 생명의 떡임을 알리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마태복음 14장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확인했지만 다시 한 번 더 확인하자면, 요한복음 6장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6장 14절과 15절부터 보시면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여기 보면 오병이어 사건 직후 이들이 그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그 선지자’란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말씀인데(신18:15,18), 그 약속하신 말씀의 당사자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데, 바로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 한 것입니다. 바로 세상의 임금을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다고 했을 때는 분명 세상의 임금을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구약과 연관시켜 ‘그 선지자’라 부르고 있지만 그들의 방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을 보면 왜 이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러니까 지금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이적,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최소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사건 때문이라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금 이들은 예수님이 이런 표적을 통해 구약의 모세 사건과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모세 시대 때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 40년 동안 배 굶지 않고 먹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저들의 지도자로 삼게 되면 이제 먹을 양식은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임금 삼기 위해 계속해서 쫓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약을 보면 만나를 먹지만 40년 동안 만나를 먹게 되었을 때 그들이 그것으로 만족했느냐? 오늘 성경봉독으로 읽은 말씀만 보더라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민21:5) 광야 40년 길에 비해 아직 그 년 수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미 그들은 만나에 대하여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저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해서 삼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오병이어의 기적을 매번 누린다고 합시다. 그럼 그들에게 만족이 있는가? 인간은 그렇게 쉽게 만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놀랄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놀라서 감사와 찬송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원망과 불평으로 반응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란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번의 놀라운 경험이 예수님을 이 세상 임금 삼으려고까지 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인간에 대하여 무지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32절과 3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3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단순히 기적, 동일한 말로 이적,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알리고자 하신 핵심은 바로 예수님만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결단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실 수 있는가? 35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실 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을 베푸실 때 재료의 수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가 아니라 칠병이어입니다. 먹이신 수에 있어서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경우 남자 장정만 오천 명입니다. 그러나 칠병이어의 경우 남자 장정만 사천 명입니다. 또한 남은 것에 대해서도 다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경우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남았습니다. 반면 칠병이어는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차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는 많고 적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 더 고급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은 어떤 수단에 의해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병이어, 칠병이어가 아니라 일병일어 일지라도 충분히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실 수 있습니다. 아니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나님, 창조 역사에서부터 친히 모든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믿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란 사실을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가 되셨다가 성자가 되셨다가 성령이 되셨다가 하는 그런 분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부는 성부이고, 성자는 성자이고, 성령은 성령이십니다. 한 하나님 안에 삼위로 계시되, 삼위로 계시기 때문에 세 분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시기 때문에 성육신 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셨습니다. 성육신하셔서 참 사람이 되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참 하나님이기도 하시다는 겁니다.
어쨌든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요1:3). 그런 분이 어떻게 없는 가운데 있게 하시는 그런 놀라운 일을 못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오병이어를 통해 많은 사람을 먹이시든, 아니면 칠병이어를 통해 많은 사람을 먹이시든, 아니면 아무 것도 없이 많은 사람을 먹이시든 주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알리시기 위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 생명은 예수님을 먹고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왜 오병이어와 비슷한 사건을 다시금 기록하고 있는가? 사복음서 모두를 통해 오병이어를 알리고 있는데, 굳이 칠병이어를 기록할 이유가 있는가? 사실 성경의 어느 구절도 중요하지 않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리고 단 한번만 언급하는 말씀일지라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반복과 그 반복을 통해 강조가 되고 있다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그리고 오늘 본문의 칠병이어 사건이 그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참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자면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여기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가 이미 사흘이나 되었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들은 사흘을 굶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본문은 단지 그들이 광주리들에 담아서 가져온 양식이 사흘째가 되어서 거의 다 떨어져서,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매튜 풀). 어떻게 해서 사흘 동안 먹을 음식을 싸 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무리들이 모일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셨을 것이고, 또한 말씀과 함께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는 일을 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흘이나 주님 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굉장한 열심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는데, 무엇보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불쌍히 여기셨는가? 사흘 동안 싸 가지고 온 것을 다 먹고 이제는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는데 돌아가다가 쓰러지지나 않을까란 생각에 불쌍히 여기셨던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당시 저들의 육신의 상태에 대해서도 돌아보시며 생각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긍휼의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역시 없는 자들을 향하여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은 주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구제의 성격에 있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긍휼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할 때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기 위한 마음으로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오병이어 사건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오병이어 때는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좀 더 나아졌는가에 대한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하냐? 3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여러분, 우리는 마태복음 14장에서 오병이어 사건을 살핀 바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5장에서 칠병이어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적인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자들의 경우 오병이어를 목격한 증인이요, 단지 봤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친히 떡과 물고기를 나눠주면서 놀라운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굶겨 보내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어떻게 반응했느냐 하면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더란 것입니다.
약간 비교하자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반응을 했습니다(마8:27). 그러나 바다 위를 걸어오신 사건에서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반응을 하기도 했습니다(마14:33). 즉 신앙에 있어 조금의 자라남도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뜻을 알리고 있는 사건 속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을 고백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자라남은 그렇게 빠르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고자 하시면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보통은 많은 시간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나게 만드십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자라나는 시간동안 주님께서는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누이 알리시는데, 그렇게 알리시면서 인간의 부패성, 인간의 무능력 등을 보게 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를 더욱 의지하게 하심으로 믿음이 조금씩 자라나게 하실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오병이어 경험을 했으면 칠병이어 때는 달라져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걷겠다고 말한 베드로처럼 물 위에서 주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의해 넘쳐나는 파도도 보는 자들입니다. 땅 위에 두 발을 디디고 살면서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바라보면서 사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얼마나 밝은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더 밝은 자들입니다. 이런 모습 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믿음이 발휘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오병이어 때도 그랬지만 칠병이어 때도 시험하시고 또 시험하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를 확인시키시며, 동시에 우리가 어떤 자리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라십니다. 즉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심으로 한편으로는 좌절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자이구나!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전혀 다르지 않는 반응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 없음에 대하여 좌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믿음으로 살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거기에 주님의 일하심이 있는 겁니다.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34절 이하를 보시면 비록 제자들은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지만, 오병이어와 동일한 역사로서 다시금 역사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마15:34-38) 그리고 39절에서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병이어 사건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다른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분명 동일한 사건을 앞서 경험하고서도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린 양 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 우리 자신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쉽게 망각하는 것은 아닌가를 다시금 돌아보셔야 합니다.
앞에서 섭리에 대하여 말하면서 기적만이 아니라 일상저인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항상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소위 일반은총이라고 해서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런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일반은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은혜에 대하여 쉽게 망각할 때가 많은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달로 말하면 그분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하여 항상 감사하는 것이 믿음에 합당한 반응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모습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을 주시고 또 주시는 겁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되 때로는 그 은혜를 거둬 가심으로 우리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게 하시고 구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자로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삶이 되도록 자신을 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핀 말씀은 치유 사건에 대한 요약과 오병이어와 동일한 뜻을 담고 있는 칠병이어 사건입니다. 사건 자체는 분명 육신의 것을 고쳐주시고 육신을 위하여 먹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육신의 것을 고쳐주셨지만 주께서 진정으로 고치고자 하시는 것은 영적인 것이며, 먹이신 것은 육신을 위하여 먹이셨지만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양식은 그리스도 자신이요,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완성될 나라에서는 우리 영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체와 함께 온전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의 육신은 점점 쇠약해져 간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고쳐주시고, 또한 그분 자신과 그분의 말씀을 계속해서 먹이시는 이유는 육체와는 달리 우리 영혼을 살찌우며 주님 앞에서 자라나 장성한 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의 뜻을 따라 장성한 사람이 되기까지 자신을 돌아보시되 자신의 무(無), 즉 없음과 하나님의 유(有), 즉 있음, 그러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충만하게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더욱 주의 은혜를 구하면 그분의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마음으로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