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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0702설교 / 마태복음16장1-12절 / 어찌떡에관함이아닌줄깨닫지못하느냐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7.07.02|조회수57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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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12

어찌 떡에 관함이 아닌 줄 깨닫지 못하느냐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신 것과 오병이어 사건과 동일한 뜻을 가진 칠병이어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을 보시면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을 다시금 언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경우 마태복음 14장에서 기록하고 있고 칠병이어 사건의 경우 마태복음 15장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두 사건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이 떡이라는 데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저들의 배고픔을 생각하시고 그들을 먹이셨지만 실제로 주고자 하셨던 것은 저들의 영적인 굶주림을 채워줄 영적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주님께서 복음을 증거 하시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사실에 대하여 사람들이 깨달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을 쫓아온 무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 오병이어라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지만 무리들은 들었던 말씀보다 육신의 것을 채워주셨던 것, 즉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만 그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영적 지식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무리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예로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보려고 하다가 빠진 것과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14:31) 그러나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 즉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실 때 저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하여 무서워하였는데, 그 일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6:52) 오병이어라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그 마음이 둔하다는 것이요, 그 마음이 둔하다고 하는 만큼 믿음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럼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을 접하고는 믿음이 성장했는가?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과 관련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까지 하였는데, 그런 고백 이후에는 좀 더 나아졌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난 시간 살핀 칠병이어가 그 부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르지 않는 사건인데도, 오병이어 사건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기억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 두 번의 경험이라면 믿음이 성장했는가? 오늘 본문 9절과 10절에 근거하자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오병이어 사건이나 칠병이어 사건에 대하여 기억하지 못하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리들처럼 먹고 배부른 까닭에만 기억한다면 그것 역시 그 마음이 둔하다고 지적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건 자체, 다시 말해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들이 먹었다, 칠병이어로 많은 사람들이 배불렀다는 것으로만 기억한다면 사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쫓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오병이어나 칠병이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주고자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적을 행하실 때 기적 자체가 아니라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있어 표적은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고전1:2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표적들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보이셨지만 그들은 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주고자 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뻔히 드러내 보이셨던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함께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분파는 서로의 견해차가 다른, 그래서 대립적인 관계 속에 있는 자들입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경우 자신들의 전통에 대하여 대단한 열심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사두개인들은 그런 전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기록된 율법만을 받아들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그 모든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었느냐 하면 현재의 삶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노선이 전혀 다른 두 분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두 분파가 지금 함께 나아와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2312절에 보면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역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까지의 표적을 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여주시기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칠병이어 사건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면 모세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준 것과 같은 그런 표적 보이기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6:30-31 참조).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이런 요청이 건전한 생각으로 요청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여주시기를 청하고 있지만 그 마음에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미 그런 생각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험하여 그에 대하여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행하시는 바를 통해 그가 가르치시는 바를 믿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그들이 가르치던 교리들이 힘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들의 것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표적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준 것과 같은 그런 표적이 전혀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표적을 보이셨지만 저들이 그런 표적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 어떻게까지 말하였는가? 노골적으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절과 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내일의 날씨에 대하여 대기의 움직임을 보고서 예측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이지만 그들 역시 하늘을 보면서 날씨를 예측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하는 등 날씨를 예측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보면서 날씨를 예측하면서도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요, 분별할 수 있을 만큼의 표적을 보이셨다는 의미입니다.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족하지 않은 정도만이 아니라 충분할 정도의 표적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한 말씀이 그대로 너희 눈앞에 펼쳐지고 있고, 그런 역사들을 볼 때 지금이 메시야가 왔다는 것을 분별해야 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책망을 하고 계신 겁니다.

매튜 풀 주석에서는 이 부분을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들을 나열하면서 설명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성경을 관찰해서 거기에 계시된 나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도출해 내는 데에는 무디고 아둔할 뿐이다. 너희는 메시야에 관한 모든 표적들이 내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얼마든지 다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야곱이 예언한 대로(49:10) 유다의 규가 떠나고 입법자가 유다의 발에서 떠났을 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7:14)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5:2)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4:5) 나보다 앞서 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엘리야의 능력과 영으로 왔다. 나는 이사야서 35:5-6의 예언대로 이 땅에 와서 눈먼 자들로 보게 해주었고, 말 못하던 자들로 그 혀로 찬송하게 해주었다. 이 모든 것들은 지금이 메시야가 임한 때라는 것을 보여 주는 표적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러한 일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의 무리답게,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수많은 표적들이 있는데도, 그 표적들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이제 내게 와서, 너희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해 줄 표적을 구하고 있다.”

실제로 마태복음 2장에 의하면 헤롯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2:4-5). 그들이 알았다는 것은 구약을 통해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많은 소문을 퍼졌을 때 예수님에 대해 주목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의만 기울인다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예수님임을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보여 달라고 말했기 때문에 표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표적을 보이시되 충분히 보이셨지만 그들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지만(4:17) 그들은 그들 스스로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야 하고 슬피 울면 가슴을 쳐야 했지만(11:17)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것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서 진리 앞에서도 그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로 있었습니다. 그들이 배웠던 가르침, 그들에게 익숙한 교훈들, 그것들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진리 앞에서도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로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를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진리가 우리 앞에 펼쳐지면 진리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자세여야 합니다.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익숙할 정도로 배워왔고 오랫동안 해 온 것이 있기 때문에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한 예로 히스기야 시대 때 히스기야가 모세 시대부터 분향해 온 놋뱀을 조각낸 일이 있었습니다. 놋뱀이라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로 인하여 불평하다가 불뱀이 나와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을 때 그 해결책으로 주신 것입니다. 놋으로 만든 불뱀 모양을 보는 자는 살리라(21:8). 더군다나 이 놋뱀은 누구를 예표 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3:14 참조), 이런 놋으로 만든 불뱀 모양이 모세 시대부터 히스기야 시대까지 분향되어 왔던 겁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런 역사적인 무게와 어떻게 보면 전통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내려온 것을 조각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 모든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가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개혁주의와 관련하여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 되어야 한다(Reformata 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말이 있는데, 교회의 방향이 이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빛을 비추었지만 그 빛을 보지 않기 위해 마치 눈을 감은 자들과 같았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4절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이 말씀은 마태복음 1239절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데,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하고 있는 만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그들을 포함한 모든 세대가 하나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영적으로 하자면 간음한 자와 같은 그런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과 거리가 먼, 철저히 타락해버린 그런 모습이란 것입니다. 표적을 보여주고 그런 표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주었지만 예수가 곧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로, 그리고 표적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표적을 요구하는 저들에게 더 이상의 표적을 보이지 않아도 핑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말씀하셨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하자면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배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역시 사흘 동안 죽음 아래 있다가 다시금 부활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많은 표적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저들에게 표적 중의 표적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알리신 것이고, 이 표적 앞에서도 믿지 않는다면 다른 표적들을 다양하게 보여줘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당시 저들은 분명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뜬금없이 요나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표적 중의 표적은 장차 있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이런 말씀을 통하여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이후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들은 어떻게 했느냐? 끝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 소문을 만들어 낼 정도였습니다(28:12-13). 오늘 본문에서 시험하러 온 그들의 마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그만큼 악하고 음란한 세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선민이요, 선민 가운데서도 종교 지도자 위치에 있다고 하는 자들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이런 말씀 앞에서 교훈 받는다고 할 때 우리가 저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말씀 앞에서 철저히 살피셔야 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말씀은 그냥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만큼 주의하고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난 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셨는데, 연이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누룩에 관한 교훈입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가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어 배에 떡 한 개밖에 없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8:14).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의 논쟁이 있었고,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가르침 아래 있는 모든 세대에 대하여 분명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 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면 당연히 그들의 교훈 그리고 그에 따른 어떤 자세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누룩에 대하여 말씀하셨다고 해서 떡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주의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영적 문제로서 교훈하고 계신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적인 교훈이 아니라 육적인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떡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고, 때마침 예수님께서 누룩에 관해 말씀하시기 때문에 떡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착각했던 겁니다. 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뭐냐? 8절 이하 1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을 경험했지만 전혀 경험하지 않은 것처럼 반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았고 실제로 제자들은 떡을 떼어 주면서 신비로운 체험을 했지만 마치 보지 못한 자로서 반응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경험을 하기만 하면 믿음이 성장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경험을 했지만 경험한 것과 상관없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다 나음을 받았지만 그들 모두가 참된 믿음을 가졌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17:18 참조). 때문에 주님께서 책망한 것은 단순히 경험한 사실 한 가지가 아니라 총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병이어 이후 오병이어와 관련하여 말씀하신 것, 그리고 기록되지 않았을지라도 기적이 있다면 기적만이 아니라 분명 말씀도 증거 하셨을 것인데, 그런 말씀을 듣고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까지 하였지만 그런 고백이 무색할 정도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런 의미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분명한 것은 지금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영적으로 듣지 못하고 육적으로 듣고 있다는 것이고, 육적으로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은 육적인 문제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쳤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는 분명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6:25).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으로 염려하게 된 제자들 앞에서 두 번이나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셨고, 칠병이어를 통해서는 남자 장정만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실제 수는 두 배 이상이 될 것입니다. 오천 명, 사천 명에 비해 오병이어, 칠병이어는 굉장히 작은 것이지만 그 작은 것으로 모든 사람들을 다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최소한으로 먹이신 것이 아니라 배 불리 먹고 남음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떡 없음에 대하여 염려하더란 것입니다.

결국 저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그렇게 나아진 모습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 앞서 마가복음에서는 떡 한 개만 있다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마도 이런 기록은 예수님께서 이것으로도 능히 제자들을 먹이실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조차 없을지라도 예수님은 없는 가운데 있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시란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예수님,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없는 가운데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은 했지만 여전히 현실만 바라보는, 그래서 떡을 가지고 오지 않음으로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대하더란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염려하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던 것처럼 염려한다고 해서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6:27). 우리는 우리 아이가 키 작으면 염려합니다. 그래서 우유라도 먹여 보려고 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키 크는 주사도 맞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참 클 때 우유를 많이 마시면 실제로 아이들이 좀 커더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100%가 아니면 유효성은 우유 자체에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유를 먹지 말라고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편을 통해, 그리고 그 외 우리가 음식을 잘 먹음으로 인해 키를 크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구라는 것입니다. 주체는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란 겁니다.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6:30)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근심과 염려는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말씀보다는 이 세상,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현실에 우리의 눈을 돌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경우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였습니까? 경험만이 아니라 말씀 또한 누구보다 많이 들었습니다. 듣고서 깨닫지 못하면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하여 설명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을 주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지는 못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믿음이 작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어쨌든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고, 보이시고 또 보이셨지만 믿음이 작은 자들에게 다시금 주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설명하시는데,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입니다.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여러분,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핵심은 떡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즉 그들이 교훈에 관해서입니다. 왜 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는가? 비교해서 보자면 주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것이라면 그들의 교훈은 결코 생명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삼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참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훈을 먹고 마신다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것이기에 분별하라, 분별하여 합당치 않다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바리새인들과 관련해서는 이미 살핀 바 있는 것처럼 저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전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교훈을 주의하라, 저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어떤 자들인가?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라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자들이라는 겁니다. 겉으로는 종교성을 띤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오히려 온갖 악이 가득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이 가르친다고 할 때 그들의 모든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23:15) 그들의 가르침은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가르침이란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교훈을 주의하라, 저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어떤 가르침을 가르쳤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영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가르침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율법을 통해 윤리만을 강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세상만 바라본다는 것은 그만큼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인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군가? 사두개인들인 겁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 드리지만 이런 모든 가르침에 대하여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런 모든 가르침에 대하여 삼가야 합니다. 분별해야 하고 합당치 않다면 배격해야 합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기독교는 윤리를 말하지만 윤리에만 머무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아니 창조 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작정하셔서 작정하신대로 실행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그분이 어떤 자들을 선택하시기로 하시고 또 어떤 자들은 버리시기로 정하셨다면 거기에는 어떤 변화도 없이 작정하신 바에 따라 다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죄가 섭리 안에서 나타나지만 죄의 저자가 아니심을 믿으며,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타락했지만 그런 타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서 종국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것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도 중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믿음에 합당한 삶을 강조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가? 어떤 면에서는 이 땅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아 그 말씀에 반하는 것이면 끊임없이 개혁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데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막고 있는 경우들이 있으며,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외식하는 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주의해야 하고 삼가야 합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하나님의 단순한 진리와 사람들이 스스로 관념으로 만들어낸 허구적인 것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신분과 칭호가 존귀하다고 아무리 자랑할지라도 자기들의 창안과 하나님의 말씀을 혼합하거나, 어떤 이질적인 것을 가르치는 자들은 배격되어야 했다.”

꼭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진리에 위배되는 모든 가르침은 우리가 배격해야 합니다. 주의하고 삼가야 합니다. 특히 칼빈이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지는 것으로 말했을 때(기독교강요 초판 헌사, 12:6에 대한 설명), 그런 해석에서 이탈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뭔가 조금이라도 돌리고자 하는 성경 해석, 하나님의 것을 조금이라도 인간에게 돌리고자 하는 그런 해석들, 굉장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서두에서 오병이어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의 믿음과 관련하여 언급한 바가 있지만, 결국 믿음과 관련하여 많은 말씀을 듣고 또 많은 표적들을 보았다고 해서 믿음이 주어지고 자라나는 것은 아니란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은 철저히 무능력할 뿐입니다. 주고 주고 또 주셔도 받지 못하는 자들로 있을 뿐입니다. 누가 주셔야 하는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보시면 제자들이 다시금 주님에 대하여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바가 있는데, 이런 고백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 17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는 고백될 수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는,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시지 않고는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눈으로 목도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목도했다고 해서 믿음으로 살았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신명기 29 3절과 4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보았다고 해서 본 것에 대하여 깨달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보았다고 해서 본 그것으로 믿음으로 반응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주지 않았다고 해서 믿음으로 살지 못한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줘야 할 의무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빚도 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믿음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시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보이시며 말씀하셨지만 인간 스스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스스로의 잘못으로 그런 결과를 만들어 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정당하게 인간에 대한 지식을 안다면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 홀로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의 것으로 돌리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해석, 저런 해석들이 나타나지만 많은 부분 인간에게 뭔가를 조금이라도 돌려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빙크가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를 비교하면서 말했던 것 중 하나가 루터주의는 인간론적으로 생각한다면 개혁주의는 신론적으로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로 생각하지만, 개혁주의는 그 주체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이르느냐?” 이런 시각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주의 말씀을 통해 배우고 교훈 받아야 할 것이 이런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부분이 이런 내용입니다. 다만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체라는 생각 때문에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는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게을러도 좋다는 뜻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명령을 따라 행하시되, 바리새인들처럼 외적으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까지 행하시는, 그러나 그렇게 행한다고 해서 내 공로라고 여기지 마시고 주의 은혜를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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