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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0716설교 / 마태복음16장21-28절 / 사람의일을생각하는도다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7.07.16|조회수63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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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21-28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사도들의 경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과 관련하여 살폈습니다. 그들의 고백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야요, 메시야인 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성을 취하셨지만 결코 인자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도 고백하고 있는데, 이런 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백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원인이 어디 있느냐 했을 때 그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들의 신앙고백,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사도들이 무엇을 증거 했는가? 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 터요 반석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그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의미까지 내다볼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자신을 반석으로 하는 교회, 좀 더 가깝게는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마귀가 교회를 흔들고 무너뜨리려고 할지라도, 그래서 혹 교회 자체는 흔들리고 무너지는 듯 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주님께서 반석이신 이상 그리고 반석이신 주님께서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이상 결코 요동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천국 열쇠권을 교회에 맡기셨는데, 그 목적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터 위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 안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만 서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치리회를 두시되 교황 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고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신자들이 아니라, 말씀 사역자를 중심으로 한 회에 천국 열쇠권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주의 진리에 반하는 일에 대하여 천국문을 닫을 때 단지 지상에서만 닫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늘에서도 닫힐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주의 진리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천국 문을 열어주는, 단지 지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천국문을 열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신앙고백을 하거나 회개를 하는 것이 참된 신앙고백, 참된 회개라는 전제가 따르지만 그만큼 그리스도의 터 위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 천국 열쇠권을 회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런 천국 열쇠권의 사용은 결코 권력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악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방편, 즉 사랑의 원리, 긍휼을 베푸는 마음으로서 행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내용으로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면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베드로를 대표로 한 사도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고백한 이후로부터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시되, 특별히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하여 알리시고 가르치기를 비로소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을 보면 이런 말씀도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20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분명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그 대답으로 볼 때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더 알려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저들에게는 아직까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런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분명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시는데, 정작 그의 제자들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아들이 이 땅에 와서 고난을 받고, 죽게 되겠으나 결국 다시 살아날 것까지 알리고 계십니다. 때문에 지금 이 21절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지금 알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너희는 알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리신 내용이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고 할 때 다른 어떤 사람보다 제자들이 먼저 자신의 모든 사역의 핵심에 대해 알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저들의 가르침이 교회의 터가 되게 하시길 원하셨고, 바로 그 일을 위하여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가 아니라 특별한 직분, 바로 사도로서 그 소명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먼저 세우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가르쳤다는 것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육체적으로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 이후 예수님은 승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이지만,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그들에게 알리실 것이기 때문에(16:13) 더더욱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의 핵심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내용을 가르치실 때 비로소가르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한 마디로 하면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해야 될 사역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이 비로소 가르쳐졌다는 것은 앞에서는 전혀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증거가 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53장만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미리 예언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구약이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구약에서부터 증거 되지 않았던 내용을 비로소 가르친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복음의 충만함은 증거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첫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셨을 때 이미 그때부터 복음의 충만함은 드러났습니다. 다만 판명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구약의 경우 충분했지만 그것이 마치 안개 속에서 보는 것과 같았다면 신약의 경우는 마치 안개가 사라진 것과 같은 모습으로 더욱 분명하게 본다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 비로소 가르쳤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사실 제자들의 경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그렇게 순수하지는 못 했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6장에서 무리들이 땅의 임금을 삼으려고 했던 것처럼 제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생각을 완전히 벗겨내지는 못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모든 나라 위에 이스라엘이 군림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강했던지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천국에서 누가 큰가로 싸우고, 20장에서는 어머니까지 동원해 좌의정, 우의정 시켜달라고까지 하면서 다투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가느냐?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아니 승천하시기 전까지 생각의 변화가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그것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듣고 배우면서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떤 질문을 하느냐?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1:6) 물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그들에게 변화가 있게 되지만, 그만큼 그들 생각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부터 있어 왔지만 보다 더 판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시고자, 그리고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고자 신앙고백 이후 그 내용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후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면 이런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너희 역시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 하기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오하되 부활이 있음을 알고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을 주시기 위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저들이 알고 있는 거대한 위풍이나, 큰 부유, 세상의 즐거운 갈채 속에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칼빈). 주님이야 말로 지상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치욕적인 죽음이지만 그것이 곧 복음이요,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중요한 내용으로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성령이 오시기까지 그들의 생각이 변하지 않겠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그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셨던 겁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서 비로소 그의 고난, 죽음, 부활을 가르치시지만 이후 말씀을 보면 이런 내용을 반복해서 세 번이나 가르치십니다. 모르기 때문에 안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하실 때까지 끊임없이 가르치셨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하느냐? 22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사실 22절만 보게 되면 베드로의 이런 반응은 예수님에 대한 선한 의도, 충성심, 일편단심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스승이 고난 받고 죽음에 이른다는 데 누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만류는 상당히 칭찬받아 마땅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3절처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엄하게 꾸짖음 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내가 네 마음 다 안다라는 음성을 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여러분, 오늘 본문 23절은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선한 의도, 충성심, 일편단심에 대하여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는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선한 의도이지만, 충성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그리고 일편단심으로 말한 것이지만, 그런 주를 위한 열심이 실제 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로서 판단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스승에 대한 공경이 어떻게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 거기에 있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인간 편에서 정당한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사탄의 역사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이해는 성경의 여러 부분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우선 마태복음 10으로 가시면 예수님께서 노골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34절부터 보시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4-39)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세상의 윤리와 도덕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성경 자체만 봐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2:18)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당연히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가족 간에도 평화해야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일반 세상 사람들도 그들 속에 있는 양심에 따라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친근해야 할 사람을 원수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이치에 어긋난 일인데, 왜 주님은 이런 말씀까지 제자들에게 하셔야 했는가? 그것은 분명 평화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신앙과 연결되었을 때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가치로 발현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 안에 있지 않고 신앙 밖에서의 평화는 하나님 앞에서 헛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약으로 설명 드리면 하나님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 사랑이 실천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웃 사랑이 실천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을 과연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원리와 같습니다.

 

좀 더 실제적인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그리고 많은 종교들 사이에 하나 되고자 하는 연합 운동이 많습니다. 들어보셨을 텐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정의되고 있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 뭐냐 하면 절대 진리를 부정합니다. 당연히 기독교가 말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는 이 시대가 받을 수 없는 분위기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대신 너희만 진리라고 말하지 말고 너도 나도 다 진리로 인정하자고 말합니다. 산을 올라갈 때 한길만 있는 게 아니다. 이쪽으로도 올라가고 저쪽으로도 올라가지만 결국 정상에서 동일하게 만나는 거 아니냐! 그래서 불교, 천주교 할 것 없이 연합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라고 표방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이런 모임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성경으로부터 정당화될 수 있는 내용이냐 하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연합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좋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를 부정하면서까지 연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냐 했을 때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와 종교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는 기독교라고 말하지만 교리적으로 다른데 연합하고자 하는 단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1999년 천주교회와 루터세계연맹 사이에서 의화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아는 칭의 교리가 루터교와 천주교가 다르지 않다는 선언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듯이 종교개혁의 큰 시발점은 15171031일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비텐베르크성 정문에 붙여진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루터는 로마 카톨릭, 오늘날의 천주교와 달리 이신칭의라는 교리를 내놓았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이지, 카톨릭이 말하는 것은 믿음에 행위가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행위로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칭의에 대한 내용이 카톨릭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럼 카톨릭이 수정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카톨릭은 그대로입니다. 누가 변했는가? 루터교가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2006년 세계 감리교회 협의회가 열렸는데, 그때 감리교 역시 천주교회 대표자들과 루터교회 대표자들을 모아 그들의 선언문에 동의하였습니다. 아마 루터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펄쩍 뛸만한 일이었을 겁니다.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죽음을 불사하고 이신칭의를 외쳤는데, 이제 그런 내용을 다 낮춰버리고 서로 손을 잡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가야 할 자리는 루터주의 자리도 아닙니다. 이신칭의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바빙크의 평가에 의하면 루터교는 인간론 중심이라면 개혁교회는 신론 중심입니다. 때문에 이신칭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까지 끌고 올라가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루터주의와 손을 잡을 수도 없으며, 행위공로를 인정하는 카톨릭과는 더더욱 연합할 수 없음이 자명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니라 연합이라고 하면 무조건 좋다는 사고방식 아래 얼마나 많은 연합이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김해 지역이면 김해 지역에 있는 기독교 연합회가 있어 장로교, 감리교, 오순절 할 것 없이 다 연합 운동을 하더란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비단 기독교 전체에 대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각 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후서 6 14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4-16) 물론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와는 상대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71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 이상 우리를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해를 따라 개혁자들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6:14)는 말씀을 근거로 우리의 결혼에 대한 원리로 믿지 않는 자와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금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 원리가 강합니다. 믿음보다는 조건이요, 성품보다는 능력입니다. 그리고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믿지 않지만 저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라고요. 물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는 인정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의 정당한 원리 안에 있는 것은 아니란 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밖으로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한 것과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치닫고 있는 겁니다.

 

조금 전에 율법의 요약과 관련하여 잠시 언급했지만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행에 대하여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세상도 반길만한 내용입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자들의 선행을 통해 믿는 자들이 자극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14:23)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저들의 선행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진 몰라도, 그리고 믿는 자들 역시 자극을 받을 진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등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뭔가를 했으나 무로 돌아가 버릴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 뿐 아니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선행이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믿는 자로 있을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단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결코 성경이 말하는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혹 부모 공경에 있어 부모를 공경하여 부모의 마음이 즐겁긴 하겠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거나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만 기쁘게 할 뿐 하나님은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모든 일은 자기 의만 쌓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저 열심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의도면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충성심, 일편단심이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사람의 일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대략 100년 정도 되었는데, 처음 복음이 증거 될 때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성격의 내용이 있긴 하지만, 그나마 좀 더 자라났다면 예수님을 닮자는 성화 부분에 대한 강조가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가 되는 점은 예수님을 닮자, 거룩해 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오로지 우리 쪽에서만 그 원인의 확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논리 속에도 들어와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고, 그것이 다인 줄 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우리 교단이지만 공부를 감리교에서 한 목사님 밑에서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도 종종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은혜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혜와 같은가? 여러분,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같은 은혜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는다. 물론 성경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알고, 그것만 말한다면 결국 자기로 원인을 삼고, 자기를 원인으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신율법주의가 바로 그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선물로서의 믿음입니다(2:8). 그런 선물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외에는 주지 않습니다(13:48).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내 스스로 나의 죄를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괜찮은 자들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깨닫는다? 잘못 배우신 겁니다. 우리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이것은 놓쳐 버립니다. 오로지 행해야 한다는 것만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교리는 무시된 채 실천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적용이 강조되고, 성화를 이야기할 때도 내가 해야 한다는 쪽에서만 전해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다 펠라기안이요, 다 반펠라기안이요, 다 알미니안입니다. 인간에게 원인과 공로가 있다는 식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식입니다. 예정론을 말하지만 거기에도 공로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것만 강조되고 있다면 그것은 다 베드로의 열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열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이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시면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려분별이 없는 열심은 사람들을 움직이고 강요하기까지 하여 하나님을 자기의 뜻에다 굴복시키려고 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한다... 이 행위는 상당히 칭찬받을 만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아무리 그럴 듯한 이유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베드로의 열심보다는 그리스도의 판단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좋은 의도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로 유효한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얻는다

여러분, 열심히 좋은 것이긴 하나 잘못된 열심, 하나님 지식을 좇아 하지 않는 열심은 오히려 사단의 역할로서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가장 유사한 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아예 반대편이면 분별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유사하면 분별하기도 어렵습니다. 열심히 고속도로를 달려 목적지 서울을 향해 가야 하는데, 부산을 향해 가고 있는 방향으로 열심히 달린다면 얼마나 헛된 열심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다시금 이미 가르쳤던 말씀, 앞에서 잠시 확인했지만 이미 마태복음 10장에서 동일한 의미의 내용으로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다시금 하십니다. 24절과 25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한 마디로 말하면 너희의 가는 길은 너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상의 방식, 세상의 원리, 세상의 뜻으로 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부인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세상의 방식과 원리에 젖어 있고, 그것이 너무 낯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바가 다 세상적이요, 취하는 방식이 다 세상의 원리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것을 부인하는 자리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좆는 것, 이것이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는, 세상의 원리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원리가 우리에게는 가르쳐지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목숨을 잃으면 무조건 찾는 게 아니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잃느냐?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 잃을 때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셔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지성을 거부하고 육신의 온갖 정욕을 끊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도록 우리가 온전히 무()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말씀이 내 속에 떨어져도 그 말씀이 온전히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지성이 그것을 방해하고, 내 육신의 온갖 정욕이 그것을 방해하고 말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온 것처럼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게 되는 것이고,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래는 유기자에 대한 말씀이지만 택한 백성들이 마치 유기자와 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 있기에 더더욱 주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에 보시면 동일한 본문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23절과 24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태복음에서 없는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게 날마다라는 단어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주님을 좇아야 되는데, 그게 언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날마다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많이 생각하는 자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되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십자가를 지되 날마다 십자가를 지도록 우리에게 명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위로가 있다는 것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때, 그것이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내놓는 것일 때 오히려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주님 자신도 고난 받고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겠지만 그러나 영원한 죽음이 아닌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알려 주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해해서 내가 여기서 죽으면 여기서 생명을 얻는다는 논리로 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면 많이 한 만큼 돌려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를 위하여 봉사를 하면 그 봉사의 대가를 여기서 다 받는다는 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 세상적으로 잘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공식 아래 젖어 있어 꼭 세상의 평가 방식이 하나님의 평가 방식인 양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를 주셨지만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은 만나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만나를 먹이시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사는 줄 알게 하시고자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동일한 원리 속에서 오병이어 사건 역시 그것 자체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밝히시는 데까지 나아갔던 겁니다. 성경은 세상 원리가 아닙니다. 돈 먹고 돈 먹기 식이 아닙니다. 그것까지도 부인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주를 위하여 드린 것, 주를 위하여 헌신한 것, 그것 자체만으로 만족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복된 내용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세상의 복을 받지 못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는 등의 쓸데없는 이야기로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인내하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과 새 힘 그리고 용기와 위로함을 주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26절을 보시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여기서는 세상 모든 사람의 공통된 생각을 말씀하시는데, 온 천하보다 한 사람의 목숨, 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는다고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가치는 모든 것보다 한 사람의 목숨, 한 사람의 영혼이 가장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선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그런 가치 있는 목숨, 가치 있는 영혼도 구원과 상관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온 천하보다 한 사람의 목숨, 그 영혼이 중요하지만 그런 영혼도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을 따르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며 산다면 그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 모두가 주님을 따르되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이런 자들은 그의 구원이 취소되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다시금 버려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며, 이미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비참이요 결코 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구원을 보장 받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부르셨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1:4).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자기를 부인하셔야 합니다. 구원 받았고 구원에 대한 보장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끝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고, 십자가를 진 상태로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따르는 것, 분명 어려운 삶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의 본성을 죽이는 것, 내 생각을 거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27절을 보시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주님께서는 결코 쉽지 않는 그 길을 인내로서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서 마지막 심판 때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앞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지만 결국 부활하실 것을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입니다.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행위구원을 말씀하기 위한 것인가? 아닙니다. 그럼 공로주의에 대한 것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단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따라오도록 격려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분명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공로나 나의 구원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그분의 의지에 있습니다. 그 뜻을 따라 선택된 자들,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믿음을 통해 받아들이는 자들, 그러나 믿음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도 주님께서 앞서 준비하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자들, 그들이 구원 받습니다. 성경의 보편적인 표현을 따르자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구원 받았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살게 하시고, 이 땅에서 살면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때문에 야고보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행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 행함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상급이라는 것을 통해 우리를 격려하기도 하시는데, 그런 차원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급에 대한 이해가 나의 공로에 대한 상급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상급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상급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런 은혜를 따라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였지만 그때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한다면 결코 나의 공로에 대한 상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때 상급도 은혜의 상급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그런 차원에서의 상급을 약속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격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힘들겠지만, 그리고 이 땅에서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상급을 예비해 두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쫓을 것을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 절인 28절을 보시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던지 주님께서는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어떤 이들은 곧 있을 변화산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 시작이 나타나고, 이후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 더욱 충분히 보여 주실 것이라고 이해합니다(칼빈). 매튜 풀 주석에서는 여기에서 우리 구주께서는 자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후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은혜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여, 열방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게 되실 것을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표현하셨다고 말하는데, 이런 일이 마지막 날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각 사람은 행한 대로 보응하신 그분 앞에서 인내와 성실과 충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서 열심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 의만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기를 지며 주님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열심, 베드로의 진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바른 뜻에 대한 분별과 진리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뜨겁다 하더라도 사람의 일로 뜨거우면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진심어린 마음이라도 진리 위에 서 있지 않는 경우 역시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조건 열심이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셔야 하고, 그 뜻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진심도 진리 위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열심보다 진리가 먼저 파악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일에 더욱 힘쓰시되, 주의 말씀 앞에 진지함으로 그리고 간절함으로 받되,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날마다 상고하는 여러분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나 말, 행동이 그런 말씀에 합당한가에 대해서도 살피셔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자신의 뜻을 부인해야 하고 주님의 뜻만을 따르도록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아니 실상 우리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하나님의 일보다,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뜻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하셨기에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자신을 부지런지, 날마다 살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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