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출애굽기 2장 1-10절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과 준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릴 때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박해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를 이루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더욱 번성케 하시는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를 알 리가 없는 애굽 왕은 어떻게 해서든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함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은밀하게 그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히브리 산파 두 사람을 불러 아들이면 죽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제대로 되지 않자 이제는 공개적으로 아들이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을 했던 것이 지난 시간 우리가 살폈던 내용입니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한 레위 가정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시면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여기 보면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굽 왕의 칙령이 떨어지고 난 뒤의 일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는 아론이라는 형이 있었고, 또한 누이인 미리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도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따라갔다고 되어 있는데, 애굽 왕의 칙령이 떨어진 때는 적어도 아론이나 미리암이 태어난 뒤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1절에서 모세의 부모에 대한 부분은 애굽 왕의 칙령이 떨어지고 난 뒤의 일이 아니라, 이미 칙령이 떨어지기 전의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레위 가정에서 모세가 태어났다는 것과 어떤 면에서 모세를 좀 더 조명해 주는 그런 의미에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혼하여 모세를 낳을 때의 상황이 어떠했냐 하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다 죽일 것을 공식적으로 명령할 때인 겁니다.
특히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낳고 석 달 동안 숨겼다는 것은 당시 아들이면 죽이라는 명령이 어느 정도 철저히 시행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이 정확하게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남자 아이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그런 위기 속에 살아갔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레위인 가정은 아들을 숨겨 키우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숨겼다”고 되어 있는데, 단순히 외적인 모습으로만 생각하기보다는 부모로서의 정, 자식에 대한 정으로 할 수만 있다면 살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남자 아이가 태어난 모든 집이 이렇게 하다가 들켜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모든 부모가 자기 자식에 대해 보편적으로 사랑의 마음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대한 히브리서의 내용을 보면 이렇게 말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니까 석 달 동안 그를 숨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오늘 본문에서처럼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숨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그렇게 숨겨 키우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했을 때 그 전체를 믿음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믿음이라고 할 때 자주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믿는 자 쪽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같은 경우도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모세 부모의 믿음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믿음의 시작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반드시 믿음보다 하나님 지식이 선행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약속하시는가?” 이런 지식이 선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 지식을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인하여 철저히 부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시편 14편을 인용하자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혹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지라도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만물의 으뜸인 사람이 으뜸보다 못한 피조물들을 역으로 섬길 뿐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의 증거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먼저 나타내셔야 합니다. 이걸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를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바꿔놓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드러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도 바꿔놓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이야기할 때 믿음의 시작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믿음은 결코 사람으로부터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 의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주셔야 믿음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을 이야기할 때 인간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옳은 이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믿음을 말한다면 방금 말씀드린 이런 인식을 반드시 총체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서가 아이를 숨긴 것에 대해 ‘믿음으로’라고 했다면 그것은 부모의 믿음을 칭찬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다는 증거와도 같다는 걸 먼저 살펴야 됩니다. 물론 성경에서 믿는 자에 대해 칭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믿음이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단순하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모의 마음을 붙들어 주심으로 석 달을 숨겨 키우되, 두려워하지 않고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깝게는 무엇을 통해서냐? 자녀에 대한 정, 부모로서의 정,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아이에 대한 모습이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물론 “이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후반부에 말한 “자녀에 대한 정, 부모로서의 정, 그리고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한 것을 믿음이라고 볼 수 있는가?” 했을 때 그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자들로 있었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 아이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도록 기도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는 차원에서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가 믿음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아이의 아름다움을 보고,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주시는 자녀에 대한 부모로서의 정으로서 숨겨 키우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로서 그렇게 숨겨 키웠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독 모세의 가정을 주목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원인인 줄로 착각합니다. 모세를 숨겨 키웠다면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확인하려 하고, 혹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면 모세 부모의 믿음은 죽음도 불사하는 믿음이었다고 합니다. 원인을 다 어디에 두느냐 하면 사람에게 둡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살폈지만 히브리 산파 두 사람이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과한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성만 생각해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을 알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을 섬길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패성입니다. 히브리 산파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할 때 이런 부패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여건도 되지 않았습니다. 300년 가까이 그렇게 지내 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들 스스로의 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 산파가 왕의 명령을 어겨 다시금 불러 갔을 때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거짓을 고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신앙을 고백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백성들을 붙잡지 않으면 어떤 선도 내놓을 수 없다는 걸 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혹 하나님의 편을 들더라도 거짓으로 편들만큼 인간이란 점과 흠이 항상 자리하고 있는 존재란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부패하고, 썩어 있는 자들인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선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 부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을 숨겼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믿음은 그들의 탁월함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 앞선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시대 때부터 약속하신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모세라는 인물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알 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네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획하시고 무엇을 진행해 나가시는지 그들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약속하신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원한 작정을 따라 그 실행으로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레위 지파의 한 가정을 붙들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히브리 산파와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인간의 한계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3절과 4절을 보시면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달리 말하면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그들은 결국 아이를 버리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 모세 부모의 행동은 믿음의 행동, 혹은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칼빈의 해석을 따르고자 하는데, 칼빈은 부모의 행동이 믿음의 행동,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행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로서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면서 하나님께 맡겨야지, 그런 의무는 등진 채 무조건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어떻게 말하느냐?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답 속에는 무엇인가 들어있지만 그것으로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부모가 모세를 강에 띄운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맡긴 행동이었나?” 할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 해석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걱정을 하나님 품에 던져 버리는 것이 주된 위안이 된다.” 내가 근심, 걱정하고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위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한편으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고 천직의 한계를 범하지 않고 그들 앞에 놓여진 길을 피해서 가지 않을 때 적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무관심이나 게으름의 핑계로 삼는 것은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다. 모세의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아이를 안전하게 돌봐주시리라는 소망을 갖았어야만 마땅했다.” 쉽게 이해하자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신앙의 내용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고 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이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만 일하시는 게 아니라, 사람도 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기 때문이다”는 신인협력을 철저히 거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홀로 일하신다는 것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 양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홀로 일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신비로운 예정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사람과 유기하신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불변하다.” 그러면 대부분 어떤 반응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유기하셨다면, 그리고 그 선택과 유기가 불변하다면 굳이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면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유기하셨다면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지 않을 것인데, 굳이 전도할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 안에서는 어떤 일까지 있었느냐 하면 전도 때문에, 그리고 선교라는 명목 때문에 이런 예정에 대한 내용은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배 때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하고 있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 중 예정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거나 수정하여 고백하는 자들도 있게 되었습니다(컴벌런드 장로교 고백서).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예정을 말하지 않는가?”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예정에 대해 말씀하셨다면 왜 말씀하셨는가?”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내 생각을 넣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 있는 말씀처럼 이 말씀을 제해서도 안 되고, 이 말씀 외에 더해서도 안 됩니다(계22:18-19).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자로 있다면 이런 예정의 내용 앞에 믿음보다 앞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또한 선택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어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택자인지, 또 누가 유기자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명하신 그 명령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듯이(롬10:14) 먼저 믿은 자가 그런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길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 공로냐?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하는 자는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구를 사용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또 그 도구를 통해 믿게 하시는 분도 실제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인 자신을 부른 것, 그리고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 때문에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을 냈는데, 돌아보니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고전15:10).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홀로 일하신다고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모세의 부모가 어떤 마음에서 아이를 물에 떠내려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 자체가 이미 믿음의 정당한 열매는 아닌 것입니다. 혹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떠나보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부모로서의 의무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들짐승들에까지도 자기 새끼들을 보호하고 아끼려는 직관적인 본능을 크게 넣어주셨기 때문에 그것들을 흔히 자기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새끼들을 지키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이 자신의 충성과 보호를 완전히 의탁한 그 자녀들을 버릴 정도로 공포로 인해 몰인정하게 된다는 것은 더욱 더 야비한 일이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모세를 강에 떠내려 보낸 사건은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행동, 혹은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행동으로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긴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누이로 하여금 따라 가 보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모로서의 의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인가? 인간의 믿음이란 그렇게 연약하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한결같지가 않습니다.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그렇게 넘어지기가 쉬운 존재인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이렇게 반응하길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기 때문이겠네요!”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적인 타락성, 우리의 전적인 부패성을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야 할 이유가 있는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다면 거기에 걸맞은 심판을 하셔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피조물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모든 것은 고려하지 않으시고, 누구는 택한 백성으로 누구는 유기한 백성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되, 때로는 그 은혜를 잠시 거둬 가시기도 하셔서 우리의 존재됨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십니다. 어떤 존재입니까?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가진 믿음이라곤 그렇게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한결같지 않고, 흔들리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그렇게 넘어지기가 쉬운 존재인 겁니다. 아니 연약하다, 한결같지 않다, 흔들리기가 쉽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지 않으면 우리로부터는 어떤 믿음도 내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에게는 죄 외에 어떤 선한 것의 원인도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기 위해 누굴 준비하느냐 하면 이스라엘로 보자면 원수와도 같은 애굽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것도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고 명령한 바로의 딸이 이스라엘의 한 남자 아이를 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입니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하심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 명한 것은 애굽 왕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이 누굴 보내시느냐? 애굽 사람입니다. 그것도 오늘 본문에 보면 애굽 왕의 딸입니다. 분명 왕의 명령을 알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당시 모세만 태어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세 외에도 아이들이 태어났을 것이고, 왕의 명령이 있었다면 실제로 죽음을 맛본 아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나일 강에 던져져 죽는 일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기 위해 나일 강으로 왔다는 것, 나일 강가를 거닐다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가져오게 한 것, 그리고 그 속에 있는 히브리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모세라는 인물을 세우시기 위해서 간섭하시고 간섭하신 역사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은 어디까지 말하느냐? 7절 이하 9절을 보시면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러니까 아이를 물에서 건져 내자 누가 나타났냐 하면 모세의 누이가 나타난 겁니다. 그가 나타나 하는 말이 뭐냐?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달리 말하면 바로의 딸 입장에서 볼 때 히브리 여인이 때마침 나왔다는 것은 그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반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살리기 위해 젖을 먹이고자 한다면 당연히 동생으로 의심해 볼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이 없습니다. 물론 성경이 모든 것을 다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과정 속에서 일이 순탄하게, 마치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라고 묻자,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의 누이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와서 모세에게 젖을 물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일에 대해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 세상의 만물이 우연처럼 펼쳐져 보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 있는 것은 피조물 가운데 어느 것도 없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까지 확인하게 하시는가? 원수의 마음까지도 친히 움직이셔서 모세를 보호하도록 하시는 것까지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누굴 사용하기까지 하시는가? 모세의 민족으로 보자면 원수까지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 이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부인을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기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신론자들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때, 인간의 이성이 강조될 때 하나님의 창조는 믿는다고 하면서 섭리에 대해서는 부인을 했는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만 하시고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겼다고 말하는 부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쉬고 계신다. 그리고 자연만물 가운데 있는 것은 법칙과 같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말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이미 창조의 역사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창조만 하시는 게 아니라 창조와 더불어 섭리도 하신다는 걸 드러내셨습니다. 여러분, 질문 한 가지 하겠습니다.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특히 광합성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양이 방사하는 빛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럼 식물이 먼저 창조되었겠습니까? 아니면 태양이 먼저 창조되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논리로 풀자면 태양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조의 역사 안에서는 무엇이 먼저냐? 식물입니다. 식물의 경우 셋째 날 만드셨고, 태양은 넷째 날 만드셨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식물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식물이 자라기 위해 태양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사실은 무엇이냐? 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넷째 날 만드신 태양이라는 도구가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주체인 것입니다.
개혁자 중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사람은 이것에 대해 이런 질문과 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질문이 뭐냐 하면 “이러한 피조물들의 성장이 하늘의 물체들의 영향으로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하늘의 물체인 태양, 달과 별들을 만드시기 이전에 먼저 풀, 곡물과 나무를 만드실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정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식물들이 자라는 것과 하늘의 물체들의 작용을 함께 묶어서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들을 숭배하고, 그 가운데서 주님을 잊는다. 주님은 여기에서 모든 것들이 그 분을 의지하고 있으며, 하늘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주님이 그것들을 만드셨지, 하늘의 물체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섭리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하나님 손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4편 9절에 보면 어떤 말씀까지 있느냐?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바닷가 가 보면 바닷물이 모래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금 내려가는 걸 보게 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이 물의 경계를 누가 정하시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물이 한번이라도 가만히 있는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매번, 매순간마다 움직이면서 선의 경계를 달리합니다. 그런데 그걸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달리 말하면 매번, 매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주관하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신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까지 하셨던 겁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5:17)
그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중 비인격적인 피조물만 다스리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본문에서처럼 원수의 딸까지도 그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의 마음도 움직이셔서 그로 하여금 자기 딸의 아들로 자랄 수 있도록 허락하기까지 하셨다고 봄이 정당할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공주의 딸로 어떻게 키울 수 있겠습니까? 움직이신 겁니다.
잠언 16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악인조차도 어떻게 하시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이걸 오해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악의 저자이신가?” 이렇게 물어선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고백을 통해서도 고백했지만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불의와 허물과 죄를 용서할지언정 불의와 허물,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속성상 악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이후 보이지 않는 천사의 타락이 먼저 있었고, 타락한 천사의 유혹을 받아 인간이 자발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능력과 지혜로서 악한 자들까지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보자면 요셉이 경우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내용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됩니다. 미워해서 결국 그를 팔게 되는데, 그가 나중에 어떤 자로 서게 되느냐 하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됩니다. 그가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풍년과 흉년을 내리셨고, 흉년 때 누구와 만나게 하시느냐? 자기를 팔았던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야곱의 가정을 그 흉년에서 지켜 보호하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지켜 보호하시기 위해 누구를 앞서 보내셨는가? 요셉을 앞서 보내셨습니다. 요셉 역시 그것을 고백합니다. 창세기 45장 5절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런데 요셉을 앞서 보내실 때 누구를 사용하시느냐 하면 요셉을 형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하실 때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 대하여 악한 자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놀라운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선을 유지하시지만, 악한 자를 사용하시면서도 선을 유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걸 로마서 8장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롬8:28).
오늘 본문 가운데 그런 하나님의 은밀한 간섭이 있는 겁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를 위하여,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친히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실 때 원수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걸 확신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답답해 보이는 현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이 꼬일 때가 있습니다. 풀려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거두신 적이 없으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모세를 준비하고 계신 것처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세를 준비하고 계신 것처럼 모든 관심이 그의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잊지 마셔야 됩니다. 일이 꼬이고 있지만, 또 풀려지지 않는 것처럼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자기 백성들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1)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지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의 궁에서 40년 이라는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아이가 자라났다고 하고 바로의 딸의 아들로 자라났다고 되어 있지만, 그의 이름이 뭐냐 하면 모세입니다.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입니다. 한편으로는 바로의 딸, 애굽이라는 나라의 공주의 아들로 자라나게 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그의 이름을 통하여 인을 치듯 그렇게 남겨 두신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실상 그 왕의 딸은 전혀 이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태생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람의 나귀 입에 말(words)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 여자의 혀에도 영향을 끼치셔서 그녀가 감추기를 원했던 바로 그 일을 공개적으로 크게 증가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녀는 모세가 자기와 함께 있어 줄 것을 원했지만, 그녀 자신이 그로 하여금 자기 민족에게로 되돌아 가도록 지시해 주고 안내해 준 사람이 되었다.” 바로의 딸의 경우 물에서 건져 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이름을 지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 때문에 모세가 애굽 백성이 아니라는 걸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란 것이고, 그것이 곧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석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은 모세의 왕궁 생활에 대해 일일이 다 열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묵하고 있습니다. 왕궁에서의 삶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다만 왕궁에서의 삶이 부요한 삶이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 우상들 가운데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침묵하고 계시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은 은밀히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걸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침묵하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답답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답답함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나도 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놓지 않으십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듯 보이는 그때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부디 이런 사실 앞에 우리가 참으로 의뢰해야 할 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면, 그리고 원수들까지 주관하신다면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