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출애굽기 2장 23절-3장 5절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
모세의 인생을 생각할 때 40년, 40년, 40년 세 단계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왕궁에서 40년, 미디안에서 40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는 세월이 40년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리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데, 사도행전 7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그가 언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을 가졌느냐? 40세 때입니다. 출애굽기 2장으로 하자면 11절 이하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7장 30절에 보면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애굽에서 도망하여 미디안에서 살았던 해가 몇 년이냐 하면 40년입니다. 그의 나이로 보자면 80세가 되었을 때 소위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 중에 출애굽기 3장 1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34장 7절에 의하면 그가 120세에 죽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가 소명을 받고 사명을 감당한 년 수가 몇 년이냐 하면 40년인 겁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하자면 출애굽기 2장과 3장 사이에는 8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누가 나타나시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물론 그가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살 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모세가 애굽에 있을 당시 애굽의 왕이 죽었다고 알립니다. 다시 말해 잔인하디 잔인한 그 왕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던 새 왕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을 더욱 괴롭게 했던 것처럼, 다시금 새로운 왕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알리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 이하 25절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방금도 말했지만 출애굽기 1장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났을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압박은 지속적으로 있었습니다. 애굽의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감독을 세우고,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지켜가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어떤 일이 있었느냐? 일만 더욱 과중될 뿐이었습니다.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잔인하디 잔인한 명령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핀 사내 아이면 나일강에 던져 죽일 것까지 명한 사건이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왕이 죽은 겁니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희망을 가질 법도 한 시기였습니다. 아니 그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에서 살아보길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새로운 왕이 올라 왔을 때 그 상황은 어떤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아니 희망이라는 씨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더욱 더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희망을 가지다가 그 희망이 빼앗겼을 때는 더욱 낙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노동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고, 그 마음은 더욱 더 무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인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출애굽기 1장에서는 나오지 않던 내용이 여기에서 나오는 걸 보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는 일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1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전혀 부르짖지 않았는가? 아니 아무도 부르짖지 않았는가?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있었고, 그나마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장에서 기록하고 있지 않는 내용을 여기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박해가 컸다는 것과, 동시에 그런 박해 속에서 이스라엘이 견딜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이제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 400년 동안 애굽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다가 4대 만에 가나안으로 오게 될 것이란 말씀(창15:13,16)을 성취하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걸 어느 정도 보여주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금 보시면 순서로서는 부르짖고,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말합니다. 24절에서는 그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마치 순서가 우리 편에서 부르짖어야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뭔가 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도해야지만 그때서야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기도하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성경도 그렇게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보다 앞서 준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가 있었다는 것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약속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잊은 적이 있는가? 한번도 없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는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지만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지키신 것처럼,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인 겁니다. 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입니다. 잊었다가 부르짖으니까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기억하고 계시지만 저들로 하여금 부르짖게 만드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알게 하심으로 이제는 그 부르짖음에 긍휼로서 응답하겠다는 의미로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본문의 표현 때문에 인간이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마치 우리의 기도가 앞서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큰 착각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마치 부르짖어야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처럼 알리시는 건 무엇 때문인가? 어떤 면에선 우리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며, 언제든지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시는 분임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 우리의 모든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르짖기 때문에 우리에게 열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이 없다는 걸 깨닫도록 하기 위해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을 찾고 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리고 그 어려움이 계속해서 지속이 된다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하나님밖에 없음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어려움 속에서만 하나님을 부르지 마시고, 항상,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께 구하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부르짖음 가운데 응답이 있다면 우리의 부르짖음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때도 하나님의 긍휼이 앞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주시며, 찾아내며,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마7:7). 우리의 기도보다 무엇이 앞서느냐 하면 기도하면 들어 응답할 것이란 약속을 먼저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사람을 세우시게 됩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모세입니다. 1절을 보시면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기서 우리는 맨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80세의 모세를 만나게 됩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40년, 그리고 미디안에서 40년을 생활하고 난 뒤의 모습입니다. 애굽에서 살 때는 호화롭게 생활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에 보면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했다고 되어 있는데, 처음 40년 동안은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자기 동족을 돌아볼 생각이 나서 도와주려고 하다가 그만 쫓겨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처음 40년과 이후 40년은 대조적인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선 40년이 호화로운 생활이었다면 이후 40년은 거친 광야에서 양무리나 치는 그런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도 80세가 되었어도 여전히 그런 생활을 계속해서 하고 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특히 이런 대조는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와 이제 80세가 되었을 때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5절에 보면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못하였더라”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40년 전 그가 동족을 돌아보려고 했을 때 단순히 자기 생각으로서 그렇게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세우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디안으로 도망 왔을 때 그 기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40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그의 아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출애굽기 2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그러니까 끊임없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통해 되뇌었습니다. 게르솜, 그가 지금은 미디안 땅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그곳은 타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살기 때문에 그곳이 자신의 거주지가 아니라, 그곳은 객으로서 살고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시금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걸 항상 염두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40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따라서 미디안에서의 생활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기간이 오래 되다 보니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느끼고 있을 때라 할 수 있습니다. 40세 때의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행동하는 자였지만, 80세 때의 그는 오늘 본문 이후의 내용을 쭉 볼 때 더 이상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시기인 겁니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80세가 되었을 때는 그런 열정도 다 식어졌을 때인 겁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양무리를 치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호렙산은 시내산이라고도 하는데, 그 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산, 다시 말해 여기 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산으로 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언제 기록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 기록된 말씀으로서 남길 때 이미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에서 율법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그 산을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는 그런 명칭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호렙산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산에 오른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무리를 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엇을 보게 되느냐 하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맨 처음 사도행전 7장 30절을 읽어드릴 때 언급했지만 이 여호와의 사자를 사도행전에서는 천사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후의 내용, 즉 4절에서는 ‘여호와’라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4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단순히 천사로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 천사라고 할 때 피조물로서의 천사를 의미하는 내용도 아니란 걸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그럼 모세 앞에 나타난 분은 누구냐? 하나님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14절 말씀만 보더라도 이 스스로 있다는 말은 결코 피조물에게 돌릴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의 고유한 속성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 사도행전에 따르면 천사로서 인식할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 자신이 나타났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의 본질 또는 그가 실체로서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출33:20).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사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냐?”에 대해 개혁자들의 공통된 해석은 이 나타난 분이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은 아니지만, 현현의 방식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의 경우도 성도들은 약속된 중보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어떤 교제도 가질 수 없다고 주석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여기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를 성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런 해석에 대해 우리가 받을 수 있는데, 동시에 한 가지 더 생각할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반드시 성자만을 의미하는가 했을 때 어거스틴은 달리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어거스틴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몇 분으로 계시는가?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한 분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시는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으로 신명기 6장 4절을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신성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배 중 마지막에 축도를 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합니다. 이것에 대한 말씀이 어디 있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로 존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물론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삼위를 말한다고 해서 세 하나님이라고 말하느냐?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고백하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다시 말해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은 권능과 영광에 있어 동등한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중 어떤 위격이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이시며, 동일본질이기 때문에 권능과 영광에 있어 동등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란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각 위격의 고유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자이신 예수님의 예로 설명하자면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 하신 분은 성자이신 예수님이시지, 성부나 성령께서 성육신 하신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일체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유성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 성경은 삼위일체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 이런 내용들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3항을 고백했는데, 바로 그 내용입니다. 우선 성부에 대해서는 ‘나셨다’, 혹은 성부를 ‘보내셨다’라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부를 전 신성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성자에 대해서는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말이 하는데,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 14절과 18절입니다. 먼저 14절을 읽어드리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8절도 읽어드리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여기서 ‘독생하신’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본질로서는 성부보다 작지 않으시지만 성경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설명할 때 성부에게서 나신 분, 그래서 성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경우 본질에 있어 성부보다 작지 않으며, 성자보다 작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고,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는다는 말이 성경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보면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는다는 걸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는 성령을 성자의 영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성경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성부를 제1위격, 성자를 제2위격, 성령을 제3위격으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1위격, 2위격, 3위격이라고 해서 성부가 더 높고, 성자가 그 다음이고, 성령이 마지막이냐?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동등하십니다. 동등하지만 위격 상호간의 관계가 성경을 통해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삼위일체라는 신비롭고도 어려운 이야기를 하느냐? 칼빈과 개혁자의 경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분이 중보자로서 성자라고 이해한다면, 어거스틴의 경우 꼭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성자의 경우 분명 성자만이 성육신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성부가 성육신하셨다거나, 성령께서 성육신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육신 전에 피조물의 형태로 나타난 사건이 있다면 무조건 성자로서만 이해해야 하는가 할 때 어거스틴은 그렇지 않다고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실체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성자로서만 볼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설교 시간에 그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는 피조물의 형체를 취했고, 하나님의 사자라 불렸기 때문에 적어도 성부로서 해석할 수는 없다고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는 분은 누구냐? 성자도 보냄을 받습니다. 성령도 보냄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이 아니라면’ 반드시 성자로서만 해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어거스틴의 입장입니다(삼위일체론 2권). 당연히 구약에서 피조물의 형태로서 나타났다면 개혁자들의 경우 대부분 성자로 해석하지만, 어거스틴의 이해를 가진다면 성부일수도 있고, 성자일수도 있고, 성령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아니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분리하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 일하시기 때문에, 구약에서 현현하실 때도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렇게 현현하실 수 있는 겁니다. 때론 분명히 위격 고유성이 드러나는 본문도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성자로만 보는 것에 대해 어거스틴은 일찍부터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말했던 겁니다.
이런 내용들이 좀 어려울 수는 있지만 조금씩 들으면서, 그리고 저희 교회가 이런 내용들을 함께 공부하게 될 때 다시금 정리해 나가면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형체를 취하여 모세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실체로서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피조물의 형체로 나타나 보이신 겁니다.
물론 모세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신기한 현상을 보면서 가까이 가게 되었는데, 그 신기한 현상이 뭐냐 하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걸 보게 되었던 겁니다. 신명기 33장 16절에 보면 이 떨기나무를 가시떨기나무로 소개하는데, 일반적으로 이해하자면 다른 나무들보다 더 빨리 타들어가야 할 나무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타지 않더란 겁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4절 중반부까지를 보시면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오늘 본문과 관련해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인가?” 했을 때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 중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칼빈의 경우 떨기나무가 천하고 멸시받는 백성과도 같다고 주석합니다. 즉 그들에 대한 애굽의 압제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시지 않는다면 그들 모두 불살라질 수밖에 없는 나무와 같다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셔야지만 불꽃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개혁주의 역사 속에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아더 핑크라는 사람의 경우 이 떨기나무를 모세 자신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즉 40년 전의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할 수 없었던 공부와 왕궁에서 부를 누리며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버렸던 사람, 그만큼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열정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미디안 땅에서 한낱 가시떨기나무일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했던 그런 모든 열정을 꾸준히 유지시킬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다는 걸 알리는 것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모세는 누군가? 마치 잠시잠깐 불살라지는 가시떨기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가시떨기를 모세로 해석하든,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하든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 사실은 한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다 가시떨기나무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결코 불이 붙더라도 타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선한 열심에 있어서도 식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모든 인생이 가시나무와 다를 바 없는 인생입니다. 모세의 경우 4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위하여 열정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읽은 본문 이후를 보면 하나님께서 부르시지만 가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란 증거를 보여주기도 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다 무엇과 같으냐 하면 가시떨기나무와 같습니다. 부러지기 쉽고, 타기도 쉽습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결코 불이 나무를 해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성도는 어떤 자냐?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고백하는 자인 겁니다. 하나님만을 나의 힘으로 삼는 자입니다. 하나님만이 피난처요, 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인 겁니다(시46:1,3).
오늘 본문에서 모세 앞에 펼치신 이 놀라운 광경은 “내가 이스라엘과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는 사실을 마치 그림으로서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것을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광경이 너무도 신기해서 가까이 가려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 중반부부터 5절입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때 모세는 놀라지도 않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을 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이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으로 말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비록 하나님의 실체로서는 아니지만 이사야의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 그 반응이 이렇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 베드로의 경우도 물고기를 잡을 때 인성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신성으로서의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이게 보편적인 반응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 용서함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실 때 자신이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부리심에 응답을 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고 말했을 때 두려워했다, 얼굴을 가렸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면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비록 이사야처럼, 그리고 베드로처럼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았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죄인임을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점과 흠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임을 인식하면서도 죽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니 오늘 본문의 모세의 경우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긍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동일한 은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는 내 앞에 나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두렵고 떨림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두 번이나 부르시는 걸 보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모세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지만, 동시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에서 모세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십니다. 왜 그런가? 바로 이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우선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규명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왜 가까이 나오지 말라고 하시느냐? 그곳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땅 자체가 거룩해서 거룩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거룩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 인간이, 그것도 죄인이 가까이 나아올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보편적으로 보자면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로 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가까이 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나가도 될 만큼, 아무런 경외함도 없이 그렇게 나가도 될 만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도 말씀하시는데, 신을 벗는다는 것은 존경과 복종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하여 존경과 복종의 마음을 가지도록 할 때 외적인 행동을 함으로서 그런 마음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른을 대할 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처럼 외적인 행동이 마음의 자세를 나타낼 때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자세인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외적 형식이 반드시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 외적 형식은 많이 지키는 듯 했지만 마음이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망을 듣습니까? 외식하는 자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사야의 경우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는 드리고, 제물은 많이 가져오지만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이 있다고 해서 외적인 형식은 무시하고 무조건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전인을 받으시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마음이 먼저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어디에 담아야 하느냐? 형식에 담는 것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쉬운 예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누워서 예배를 드린다면 과연 마음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존경과 복종을 드릴 수 있는가? 어쩌면 그런 모습이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기 쉬울 것입니다.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형식에 담을 때 더욱 합당한 자세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요구하시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와 긍휼 때문에 너무 쉽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걸 주의해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리고 그런 마음을 외적인 모습으로 담지도 못한 채 나오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주의해야 할 자세입니다.
실제로 개혁자 중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사람은 제1계명을 내적 예배로, 제2계명을 외적 예배로 규정할 때 2계명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내적 예배만이 아니라, 외적 예배도 함께 가야 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는 외식적인 예배입니다. 그것은 이사야가 탄식했던 것처럼 탄식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가지고 나오면 된다는 사고도 거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적 예배만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외적 예배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2계명과 관련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자의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것 금하고 계시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이상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외적으로 경배하는 것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날 열린 예배라고 하여 사람의 입장을 자꾸 반영하여 예배의 형태를 바꾸는 경우들이 있는데, 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구약으로 하자면 다른 불을 분향함으로 죽임을 당한 나답과 아비후의 길을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희 교회의 경우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명한 방법,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방법을 따르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을 참고하여 이런 예배 형식으로 드리고 있지만, 이런 형식으로 드릴 때 반드시 거기에 여러분의 마음을 담아 드려야 한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경우 제2계명을 해석하면서 이런 표현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몸으로 하는 가장 적합한 행위는 무엇인가? “말씀을 읽을 때는 서고, 기도할 때는 겸손의 증거로서 무릎을 꿇고 우리의 눈을 밑으로 향하고, 우리의 확신의 증거로서 눈을 위로 향하는 것 등이 있는데, 우리가 질병에 걸렸을 때, 또는 비슷한 이유로 인해서 우리가 할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한다.” 물론 오늘날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역시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교회의 경우 일어설 때가 있고, 앉을 때가 있기도 한데, 분명한 뭐냐?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것을 담아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읽을 때 일어서느냐? 그만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도 무릎을 꿇는 것, 머리를 조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감히 우리의 머리를 들 수 없다는 겸손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럼 기도할 때 위로 올려다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진다는 표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멋이라는 이유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모자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주의하셔야 합니다. 일반 사회도 보면 어른에 대한 공경의 차원에서 어른 앞에 나오면 모자를 벗는 법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온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만이 우리의 통치자이심을 고백하는 자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머리의 주관자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고백으로 나오는 자들인 겁니다. 왜 모자를 쓰지 않아야 되느냐? 이런 고백이 우리의 외적인 모습 가운데 있는 겁니다. 내 머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결국 의식의 목적은 뭐냐?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 마음에 올바르고 진지하게 깨달아져서 그에 합당한 경외를 올려 드리고, 그가 그의 권위와 더불어 존경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걸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도록 명령받는 이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보다 더 경외하면서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준비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은총을 베푸시는 역사인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구약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경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에 있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곧바로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나답과 아비후가 그렇습니다.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너무 준비 없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기는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을 준비하지 않고 나올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준비 없이 나오는데도, 마음을 쏟지 못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죽지 않는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 마음도, 몸도 준비 없이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주실만큼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와 긍휼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걸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방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더욱 겸비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도 예배 순서가 있는 것이고, 순서를 정할 때 성경이 명하고 있는 것만 넣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때 “다른 교회들이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니까 이렇게 하자”는 건 다른 불을 분향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를 말씀하셨다면 우리 역시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앞선다는 걸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와 긍휼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아무렇게나 드려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교훈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의 자세를 다시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러한 예배가 주일에, 그리고 주일 외 6일의 삶 가운데서도 더욱 풍성히 나타나기를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불러 결국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나타내고자 하신 바가 이 말씀에 축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