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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30127설교 / 출애굽기3장6-10절 / 네조상의하나님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3.01.27|조회수89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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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6-10

네 조상의 하나님

 

지난 시간에 출애굽기 31절 이하 5절의 말씀을 봤는데, 오늘은 그 부분을 먼저 정리하고 본문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애굽의 고된 노동이 점점 심해져 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때서야 들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미 듣기 전부터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을 성취할 때가 가까이 왔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세우고자 하시느냐? 모세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이 모세와 관련해 우리가 지난주 살폈던 내용은 여호와의 사자는 누군가 하는 것을 먼저 살폈습니다. 개혁자들의 공통된 해석은 중보자 되신 성자께서 성육신 전에 나타나신 것으로 해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반드시 그렇게만 해석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체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성자로 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 앞에 나타나신 분이 여호와의 사자이기 때문에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성자, 혹은 성령일수도 있다는 게 어거스틴의 견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한 위격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십니다.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가 누군가 했을 때 위격으로서는 개혁자들이 말한 성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어거스틴이 말한 성자 또는 성령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가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분리할 수 없으신 하나님 자신이 모세를 부르시기 위해 모세 앞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 나타나셨을 때 특별히 보이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모세 자신도 이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칼빈은 가시떨기나무가 이스라엘 백성과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더 핑크는 모세 자신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이상 불에 타 사라질 가시떨기나무와도 같은 존재가 인생임을 드러낸 것과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사라지며,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떻게 되느냐? 사라지지 않습니다. 타지도 않습니다.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누구냐? 바로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인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은 적이 있느냐? 한번도 없습니다. 인류가 시작할 때부터 교회는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인 이상, 교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겁니다. 혹 애굽이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듯한 일들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상 결코 소멸되지 않는 것이 바로 교회임을 알리고자 하셨던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이신 이 놀라운 광경은 내가 이스라엘과 함께 할 것이다는 걸 드러낸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 눈에 보이듯 드러내고자 하신 사건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일이었던 겁니다. 정확히는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지만, 그래서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 번성케 하신 역사가 있었지만, 이제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출애굽 시키시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까지, 아니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자기 백성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자 가장 먼저 출애굽, 즉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준비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부름 받고 있는 사람이 지금 모세인 겁니다.

그러면서 모세를 부르시는 내용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자세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우리가 살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은혜의 내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르심 자체도 은혜이지만, 부르셨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지 않고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은혜가 모세에게 주어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은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 땅 자체가 거룩해서 거룩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반면 모세는 여전히 점과 흠이 있는 존재라는 걸 드러내셨던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부름을 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것이 점과 흠이 전혀 없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말씀하는 것처럼 종국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고전13:12).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점과 흠이 있는 자로 서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주고 계시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느냐?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경외함과 순종함으로 나아간다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 때문에, 즉 그분이 우리의 지혜요, 그분의 우리의 의요, 그분이 우리의 거룩이요, 그분의 우리의 구속이기 때문에(고전1:30) 그분 안에서 마땅히 경외함과 순종함으로서만 나아가야 되는 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세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게 뭐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존경과 순종을 전인으로서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게 됩니다. 6절 상반부만 보시면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사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은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신기해 가까이 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그가 취해야 할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세 자신은 자신을 부르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말씀하신 게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후 말씀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고자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 15입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실 때 네 조상의 하나님으로서 소개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과거 그들의 조상,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기억하도록 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요, 약속하신 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역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모세의 경우 40년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오랜 기간 동안 미디안에 두셨습니다. 모세의 경우 첫째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습니다. “타국에서,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2:22, 18:3) 달리 말하면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겁니다. 단순히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뭔가 하실 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즉 가나안으로 가야 할 것을 그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둘째 아들의 이름을 뭐라고 지었느냐?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엘리에셀로 소개합니다. 그 뜻이 뭔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18:4). 다시 말해 미디안까지 쫓겨 오게 될 때 그 일조차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를 보호하신 역사임을 고백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 세월이 40입니다. 애굽에서 40, 미디안에서 40,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겁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이 때 모세가 어떤 반응을 하느냐?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1절을 보시면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400년 동안 애굽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다가 4대만에 가나안으로 오게 될 것이라(15:13,16)는 약속이 거기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 약속만 들어 있는가? 아닙니다. 창세기 12장에 있는 말씀도 들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1-3) 뿐만 아니라 이삭에게 하신 말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26:4)는 말씀도 들어 있는 겁니다.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꾸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28:13-14)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하신 그 말씀을(12:1-2) 이삭도, 야곱도 받은 것입니다. 단순히 그들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손들과도 약속하신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을 때 어떤 반응을 해야 합니까? 적어도 아들들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순종을 해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있었다면 그 약속을 성취하시겠다고 할 때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지금 모세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어떤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시간 이스라엘을 향한 고된 노동이 더욱 심해졌을 때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렀다는 내용을 잠시 봤습니다. 1장에서는 부르짖었다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2장에서는 부르짖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물론 1장에서는 부르짖는 자들이 있었겠지만 성경은 1장과 2장의 분위기를 달리하듯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부르짖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좋아졌다는 말인가?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갈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69절입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실제로 2장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약속에 근거하여 부르짖었던 부르짖음이 아니었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은 탄식이었습니다(2:23). 쉽게 말해 더 이상 절망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한 상태였고, 그런 상태에서 마치 최후의 수단이라도 잡아보고자 했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선 원망이 섞여 있는 부르짖음이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에 대하여 호소하는 부르짖음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르짖음에도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들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기억했다고 해서 잊었다가 기억한 것이 아니라, 한번도 잊지 않고 계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성취시키고자 그들을 생각하셨던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많은 부분 하나님의 이름만 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지식과 상관없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 조상에게 약속하신 바 그것을 믿고, 의지하고자 하는 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현실에게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큼은 약속하신 바를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지금 모세를 부르고 계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로 생각할 내용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조상의 하나님으로 소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란 사실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약속한 하나님이며, 이삭과 약속한 하나님이며, 야곱과 약속한 하나님이다. 다시 말해 나는 아브라함과 약속한 사실, 이삭과 약속한 사실, 그리고 야곱과 약속한 사실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고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역시 믿음 생활을 하다보면 믿음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참된 신자라면 믿음이 완전히 바닥이 나는 경우는 없겠지만, 현상적으로 봤을 때 세상의 여러 가지 고된 일로 인하여 믿음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상태는 어떠냐? 마치 모세와 같고,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을 부르긴 부르지만 그때 부르짖는 기도란 어떤 면에서 그 고된 현실을 벗어나게 해 달라는 간구밖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정당한 자세보다는 다소 한쪽으로만 치우쳐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본문을 통해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네 조상의 하나님으로 소개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그리고 이삭에게 약속하신 말씀,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알리십니다. 잊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성취하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 분이라고 알리십니다. 정확하게는 이스라엘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은 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 속에서 무엇을 소망하길 바라셨느냐? 약속의 하나님을 소망하길 바라셨습니다. 소망을 가지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인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니 노골적으로 말해 애굽으로 들어갔을 때부터 400년 후에 출애굽한다고 하면 그 400년 가운데는 노동만 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지라도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 한분만을 소망하며 인내하면서 주어진 그 시간을 살아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시간이 오래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하나님 앞에 정당한 신앙을 보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은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있고, 소망이 있어야 인내할 수 있는데, 현실이라는 문제 앞에 믿음을 잃어버리니까 하나님에 대한 소망도, 그 소망으로 인한 인내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고난이 찾아오면 찾아올수록 그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보다는 원망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현실을 원망하게 되고, 그런 현실을 만든 사람을 원망하게 되고, 결국 우리가 표현은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 기도한다 할지라도 무조건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게만 해 달라는 기도 외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처럼 모세에게 직접 찾아오신 것처럼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선포되는 말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약속하신 바를 잊지 않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잊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약속하신 바를 성취시키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혹 우리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셔야 됩니다. 400년 안에서 죽어간 그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일하고 계셨듯,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바로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택한 백성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됩니다.

마땅히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언약의 하나님, 그리고 그 언약의 말씀을 오늘날 구약과 신약으로 주셨는데,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 예를 들어 현실이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현실만 바뀌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여전히 말씀만 붙잡고,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만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고 알렸을 때 모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6절 후반부에 보시면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맨 처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모세를 부르고 계신 분이 인생과는 구별된 분임을 직시할 수 있도록 알려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모세를 부르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모세가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모세는 점과 흠이 있는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아가지만, 경외함 없이 함부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런 분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거에도 말씀하셨던 하나님, 그러나 과거에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니라, 지금 네 앞에서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 단지 약속만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성취하시기 위해 네 앞에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모세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두렵기 때문에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분이 모세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7절과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앞서 말씀드렸지만 모세의 경우나 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보편적으로 볼 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근심을 내가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부르시느냐?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계시며,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 듣고 계시며, 그들의 모든 부분에 대해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내가 내려가서단순히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행하실 것이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구체적인 실행이 뭐냐?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 갈 것이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단순히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며,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내 마음까지 알고 계신다고만 생각하지 마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며,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며, 내 마음을 알고 계신 분이시기도 하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친히 구원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땅인 가나안까지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히 행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 종종 이런 오해를 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이미 그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오랜 기간동안 애굽의 종처럼 살았습니다. 모세의 경우는 그런 이스라엘을 위하여 4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고자 했습니다. 아무런 소명이 없었던 게 아니라, 내적인 소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80세가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듯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40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세월을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뭡니까?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근심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단지 건져내는 정도가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바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여보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여전히 자기 백성들을 주목하시고,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것 같고,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도 않는 것 같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내 욕심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쪽에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겁니다. 기도를 하는데, 기도에 대한 응답 내용을 내가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을 안 하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다는 걸 확신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때론 기도한대로 응답하기도 하시지만, 때론 기다릴 것을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어떨 때는 거절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걸 인정하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시되,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응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구해야 할 기도는 내 생각,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할 줄 아셔야 됩니다. 실제로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어려움을 주셨다면 그것을 통해서도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달라고까지 기도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남기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우리의 원대로 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빨리 내려놓으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원망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고민하시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인성으로서의 연약함만을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처럼(26:39) 우리 역시 그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듣고, 알고 계신다는 사실, 나아가 친히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란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듯 보이는 그때도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대하십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입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나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위하여 누구를 세우고자 하시느냐 하면 모세를 세우고자 부르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앞서 살핀 것처럼 모세는 11절에서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다음 주에 다시금 보도록 하겠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전체적인 장면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80세나 된 모세를 불러 사용하고자 하시는가? 이미 40세 때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자 한 바가 있었는데, 40년 후에 사용하고자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보자면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면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즉 어떤 면에서 지금 출애굽의 역사, 구원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 홀로의 일임을 더욱 더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JS). 오늘 본문에서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행할 것이라는 걸 더욱 드러내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고린도전서 1만 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9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19-21) 하나님의 구원의 특징이 무엇인가? 지혜 있는 자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총명 있는 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사용하시는가? 미련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 일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26절 이하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 능력이 있는 자, 문벌이 좋은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게 초점이 아닙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있건 없건, 육체를 따라 능력이 있건 없건, 육체를 따라 문벌이 좋건 좋지 않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있어 유일한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으로 넘어가시면 어떤 말까지 하느냐? 5절 이하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5-7)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40세 사용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자 했을 때 사용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으로 보자면 하나님께서 80세 때 부르시지만 그때는 못 하겠노라 말할 때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이 하나님 홀로의 일임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고린도전서대로 하자면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신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그것도 하나님 홀로 그 일을 이루신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80세가 된 모세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떤 자로 서야 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식과 야곱의 하나님, 다시 말해 그들과 약속하셨던 하나님, 그런데 그 약속을 지금은 누구에게 주시느냐?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 주고 계신 겁니다. 마땅히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 자로, 그리고 그 말씀을 하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어려움이 길지라도, 혹 그 어려움 속에서 죽어 이 땅에서는 우리의 생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약속하신 말씀에 있어서는 변함없이 지키시는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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