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출애굽기

130303설교 / 출애굽기4장10-17절 / 할말을가르치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3.03.10|조회수777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출애굽기 4장 10-17절

할 말을 가르치리라

 

계속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모세는 세 차례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거절을 해 왔습니다. 출애굽기 3장 11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소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거절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해 두 번이나 거절했습니다. 첫 번째는 출애굽기 3장 13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다고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없다는 것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4장 1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났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는 것으로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친절히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것이 반드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되, 건져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미 약속하신 바 가나안 땅에까지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애굽 왕의 반대가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반대 속에서도 반드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야 말 것임을 말씀하셨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친히 보여주기도 하셨는데, 결국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드러내 보여주셨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모세가 다시금 두 번이나 더 거절하게 됩니다. 먼저 10절을 보시면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기 보면 모세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뢰고 있습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주께서 주시는 소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전 성경인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말에 능치 못한 자라고 되어 있는데, 단순히 생각해 보자면 말을 잘 하는 달변가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튜 헨리 경우 “그는 웅변가는 아니었다”고 주석하기도 하는데,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모세가 하고 있는 이 말이 거짓이나 겸손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인 아론이라는 사람을 붙여주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14). 만약 거짓으로 고하거나 겸손이었다면 굳이 아론을 붙여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붙여주셨다는 건 그의 말이 거짓도 아니요, 겸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는 걸 짐작하게 합니다.

따라서 지금 모세가 자신의 말 잘 하지 못함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건 어느 정도 사실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세 스스로 판단할 때 그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였고, 그런 의미에서 감히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일을 맡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을 통해 주께서 주고자 하시는 소명을 뿌리칠 목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심지어 모세의 말을 좀 더 주의해서 보면 본래 말 잘 하지 못하는 자였지만 주께서 명령하여 보내고자 하시면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10절을 보시면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서 명령하신 후라고 할 때 그때가 정확하게 어느 때를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모세는 소명을 받기 전과 소명을 받은 후가 분명 달려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달라졌는가 하면 그렇지 않더란 겁니다. 여전히 입은 뻣뻣하고 혀는 둔하더라. 그래서 감당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소명과 관련해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완벽한 자를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부족한 자를 부르십니다. 뭔가 없는 자를 부르십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자요, 없는 자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변한다는 건 부족함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식에 있어 더 많은 지식을 가진다면 그것은 부족한 지식이 채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모든 지식을 다 가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지식의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지식을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능력이 적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연습하고 연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르는 것이 없으며, 못할 능력이 없으십니다. 달리 말하면 지혜와 지식에 있어 변화가 없으며, 능력에 있어서도 변화가 없으십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그가 변화하는 한 하나님 앞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없는 자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범하고 난 뒤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할 때는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선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자가 아니라 없는 자와 같다고 말하는 게 더욱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자를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시고자 할 때 왜 부족한 자들, 없는 자들을 부르시는가? 무엇보다 소명을 받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되어지는 그 일로 인하여 결코 자기를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런 말까지 합니다. 지난번에 확인한 바 있는데,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이미 우리의 부르심만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혹 세상적인 의미에서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문벌이 좋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상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철저히 하나님 홀로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소명과 관련해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부족한 가운데 부르셨다면 채우시면서 사용하셔도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시지 않고 사용하신다고 말하는가? 모세의 질문으로 하자면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로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한다면 말을 좀 잘 하게 하셔서 쓰셔도 될 텐데, 왜 그냥 그대로 쓰시는가?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해 항상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을 채워가면서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채워가면서 하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앞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즉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는 건 바울이 남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바울이 남보다 잘나서가 아닙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자일뿐입니다. 혹 그의 학식이 남다른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그 학식도 누가 주셨느냐?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계시를 받는 것이 지극히 크다는 건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렇게 사용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계시와 더불어 무엇을 주셨느냐 하면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그것으로 인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8절과 9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 잘하지 못하는 모세를 사용하겠다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 잘하지 못하는 모세를 말 잘하게 만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겠다고 하시는 것은 다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모세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자신의 일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인간이 자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석의 번역이 정확한지 어떤지 몰라 개인적으로 약간 수정해서 말씀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거의 합당치 않게 보이는 도구가 특히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의 대사로 택하셨다면 그를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웅변에 능하도록 (만드실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러 보내실 때, 그의 더듬거리는 혀를 (고쳐주실 수도 있었다). 더듬거리는 사람에게 말하는 임무를 내리는 것은 비웃음거리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가 부수적인 도움없이도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시면서 그의 영광을 더욱 크게 빛나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명을 주실 때, 아니면 어떤 일을 맡기실 때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조건 거절하는 건 결코 옳은 자세는 아니란 걸 아셔야 합니다. 엄밀하게 말해 하나님은 우리 없이 일 하실 수 있습니다. 반드시 사람이라는 도구가 있어야 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길 기뻐하시고, 그리고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부족하지만, 또 연약하지만 사람들을 세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할 때 가져야 할 자세는 우리가 행하는 자로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주체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대상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넘어질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그런 자로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말 못함으로 인해 소명을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세 번이나 거절하려 했고, 다시금 거절하려고 자신의 약점이라면 약점을 들춰내고 있는 겁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사람의 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럼 입을 지은 분으로 끝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입을 지을 뿐만 아니라, 입을 지었기 때문에 입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자면 하나님은 입을 짓기도 하셨지만 그 입을 막을 수 있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귀를 만드신 분이시지만 그 귀를 듣지 못하게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눈을 만드신 분이시지만 그 눈을 보지 못하게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입이 달려 있기 때문에 달린 입으로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는데, 말하고 싶지 않는데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말하는 그 입도 말 못하는 자로 만드실 수 있고, 듣는 귀 역시 듣지 못하고, 보는 눈 역시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입술까지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 입술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저주하는 말까지 다 하나님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죄를 짓지도, 죄를 만드시지도 않으십니다. 혹 입술에서 저주가 나오고, 악한 말이 나온다면 그것은 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그 말을 하는 사람 스스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역으로 입술에서 선한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혹 죄가 나온다 할지라도 죄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비록 죄를 조성하신 분은 아니시지만, 죄를 다스리는 분으로 계신 겁니다. 이런 구분은 분명히 갖춰 놓으셔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리고자 하신 사실은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을 그 뜻대로 다스릴 수 있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너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네 입을 지은 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네 귀를 짓고, 네 눈을 지은 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말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걱정하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12절을 보시면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을 잘 하든지, 아니면 말을 잘 하지 못하든지, 혹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할지라도 그 모든 차이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잘 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꺼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낙심꺼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시는 분이 그분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분의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다르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으로 하자면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실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실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실 수 있는 겁니다. 비록 달란트를 주시는 건 다르게 주시지만,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충성입니다. 충성할 때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23)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대한 내용이 나와서 한 가지 풀어놓고 가자면, 거기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실 때 ‘각각 그 재능대로’(마25:15)란 표현이 있습니다. 마치 표면적으로는 다섯 달란트의 경우 다섯 달란트를 받을 만하니까 받았고, 두 달란트 역시 두 달란트를 받을 만하니까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 때문에 달란트를 주실 때 인간의 재능을 미리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주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있더라도 그 의미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만큼 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때 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은 받은 것으로서 충성하는 것이지, 달란트를 받은 자끼리 비교하면서 자랑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 다른 사람과 비교해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그런 방식도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부족하고 모자란 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족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한 가지 더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받은 자라도 그에게서도 부족한 것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적게 받은 자라 할지라도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모세에게는 말을 잘 하는 그런 모습으로 세우시지는 않았지만, 모세에게는 이런 표현을 돌릴 정도로 온유한 성품을 주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이스라엘을 이끄는 데 있어 말은 잘 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완악함을 마치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품을 수 있는 마음은 그에게 더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 있어 중요한 것은 말을 잘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지 않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말은 잘 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엉뚱한 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것입니다. 말은 잘 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고 또 할 말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 가운데 보면 말을 유독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도 잘하고, 재치 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것으로 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목사의 직무를 올바로 행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구약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것을 전하지 않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교리를 전하지 않는 자, 그저 사람의 귀만을 즐겁게 하는 자는 다 거짓 목사입니다. 감히 말하지만 그들의 입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은 좀 못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것만을 전하는 자, 그가 복된 자인 겁니다.

성도들도 이런 면에 있어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말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목사 중 말 잘 하는 사람과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말 잘 하는 사람의 설교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말을 잘 하고, 잘 하지 못하고는 부차적인 문제란 걸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성도는 설교자가 진리를 전하고 있느냐, 아니냐 여기에 모든 초점이 모아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것만을 전하고 있느냐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할 말을 가르쳐주신 것으로 말하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말을 잘 하고, 못 하고는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부족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목사의 경우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부족한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그런 것은 소홀해도 괜찮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목사로서의 합당한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말을 잘 하지 못한다면 꾸준히 연습하고 연습함으로 좋아질 수 있는 데까지는 좋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연구도 해야 하고, 신학적인 기반을 쌓아가도록 열심을 다 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소홀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정목사님을 강사로 해서 청년부들에게 예배에 대해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개혁주의 예배에 대해 강의를 했는데, 오늘날 예배와는 다소 다른 형태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형태로서 말씀하셨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때 그 강의를 들으시던 어른 중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처럼 공부를 한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지, 누가 그렇게 합니까?” 뉘앙스 자체가 어떻냐 하면 따지고 묻듯, 그리고 기분이 좋지 못하다는 듯 그렇게 물었습니다. 물론 개혁주의 예배의 형태에 있어 한국교회가 소개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내용이 소개가 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면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거절하듯 그렇게 몰아붙이는 식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게 예배하고 있느냐? 사실 그렇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말씀이 정당하게 들려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말씀의 바른 선포와 함께 성례가 정당하게 시행이 되고,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는 곳이라면 신앙 고백에 따라 참된 교회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좀 더 합당한 방향와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몰랐다면 그렇게 해야 하고, 또 모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안주하는 자가 되는 게 아니라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에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그때는 부족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합당한 자세는 아닌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로 오시면 하나님께서 네 입과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모세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도 묻고 저것도 물었지만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 답변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반응합니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전과는 달리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14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모세가 믿음으로 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향한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노를 발하긴 하시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변경함 없이 이루고자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은 것입니다(삼상15:22). 가장 좋은 것은 뭐냐?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씀을 거스르게 되면 노를 발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노를 발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변경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불순종에 대해 노를 발하시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다시 말해 말씀하시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불순종 한다면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매를 대시더라도 반드시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때문에 노를 발하신다는 것은 적어도 택한 백성들에게 있어선 은혜의 또 다른 표현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모세를 향하여 모세의 형인 아론에 대해 말씀합니다.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모세의 입과 함께 하셔서 할 말을 가르치지만, 더하여 모세에게 형 아론을 붙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단순히 모세가 계속해서 거절하니까 어쩔 수 없이 아론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과 모세가 대화를 하고 있는 가운데 아론이 모세를 만나러 나오고 있는 중인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대신하여 양을 이미 예비하셨던 것처럼, 모세를 위하여 누굴 예비하셨느냐? 아론을 예비하셨던 겁니다.

이 아론과 관련해 오늘 본문 15절과 1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는 아론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는 그런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해서 말 잘 하는 사람이 말해야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모세가 말을 잘 하지 못하니까 아론을 세우신 것이고, 아론을 세우셨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좀 더 효과적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세우신 것은 모세를 돕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과 더불어 아론의 입과도 함께 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누가 주체냐?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말하는 자는 다 도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체가 되신다는 게 중요한 원리로 있습니다.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며, 아론의 경우는 말을 잘 하지만 그때도 역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게 중요한 겁니다.

이와 관련해 좀 더 직접적으로 이해하자면 마태복음 10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도를 세우시고, 그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19절과 20입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사도들의 경우 비상직분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장차 어떻게 되느냐 하면 복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재판을 받는 자처럼 사람 앞에 서게 될 것인데, 그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할 말을 그 입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는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실제로 사도들의 경우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도망갔던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던 자들이었고, 베드로의 경우 예수님에 대하여 저주까지 하였던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실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복음의 증인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당시 유대 사회가 가지고 있던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물었느냐 하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물었습니다. 지상 왕국을 꿈꾸고 있었고, 지상 왕국을 꿈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난 뒤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자 어떻게 되었는가? 담대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여겼고, 또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을 합당히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과 아론의 입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말하는 이는 그들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한 것을 말하는 이상 그들은 다 도구일 뿐입니다. 주체는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행할 일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그들 자신에게도 유익이 없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행할 일을 가르쳐주실 때만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로서 합당히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16절에서 아론이 모세의 입을 대신하고,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론의 경우 육체의 질서로 하자면 모세의 형이지만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서는 아론보다 위에 있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해 디모데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말씀인데, 12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그러니까 디모데의 경우 목회자입니다. 아마도 목회자로서 디모데는 다른 목회자들보다 나이가 좀 어렸던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볼 때도 나이가 어린 목회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지 않도록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목회자 뿐 아니라 성도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어리기 때문에 어리다는 이유로만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이로 보자면 세상의 질서를 따라 분명 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명을 따라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론의 경우 육체의 질서로서는 분명 모세의 형이지만, 하나님은 아론으로 하여금 모세를 돕는 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 아래 두신 것입니다. 때문에 동생이라는 이유로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실제로 아론이 누이인 미리암과 함께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기도 하셨습니다(민12장).

그리고 여기 보면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인 반면 아론은 말을 잘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권위 있게 하셨다면 그 질서에 순복해야 하듯이 오늘날 이런 면에 있어서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목회자들 중에 보면 말을 잘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 일반 성도들 가운데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 성경 지식에 있어서도 목회자보다 더 나은 자가 있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정상적인 방법으로서 목회자를 세웠다면 그 권위를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헛되게 전하는 것도 인정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걸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말을 잘하기 때문에, 하나님 지식에 있어 낫기 때문에 목사가 아닌 성도가 설교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라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결국 오늘 본문 전체를 볼 때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주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도구로서 모세는 그가 가르치는 말씀대로만 전하고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모세를 사용하실 때 그에게 말 잘 하는 아론을 붙여주시지만, 소명의 질서로 보자면 하나님께서 말 잘 하는 자가 아닌 말 잘 하지 못하는 모세를 더 위에 세우십니다. 비록 육체의 모습으로는 아론이 형이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을 이끄는 자로 세우시길 기뻐하시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과 같은 자로서 권위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말씀하시는데, 앞선 본문에서 살핀 것처럼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이 다시금 지팡이가 되는 그 지팡이입니다. 목자로 있을 때는 아무런 권위가 없는 듯 보이는 그런 지팡이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이상 바로의 금홀보다 더 권위를 가지는 상징과도 같은 지팡이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팡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낱 지팡이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은 더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할 말을 가르친 그대로 전해야 하고, 또 할 말을 가르친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모세의 경우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처럼 끊임없이 거절했습니다. 거절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바뀌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뜻을 정하신 이상 결코 그 뜻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절, 거절, 그러면서 불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걸 배우셔야 합니다. 무엇이 가장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것인가? 순종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은 것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순종보다 더 복된 것이 없다는 걸 배우셔서 가르치신 대로 행하며 사는 성도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