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장 1-3절
안식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내용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되 권능의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 6일 동안 창조하시되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아름답게 지으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1-2)로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지만 그 일하심이 무엇으로 연결이 되느냐 하면 안식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안식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보통 6일 동안의 창조, 6일 동안의 일하심이 있기 때문에 안식을 단순히 쉰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합니다만, 정확하게 말하면 안식은 쉰다는 의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단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에 안식하셨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멈추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섭리로서 그 만드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로서는 분명 더 이상의 창조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선 여전히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그의 권능으로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며, 모든 피조물을 아끼고 번성하게 하시는 일을 계속해서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멈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조의 맨 처음 내용에서부터 이 사실은 드러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 빛을 만드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명하시매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을 주관하게 하는 태양은 언제 만들어졌느냐 하면 넷째 날에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논리로 하자면 태양이 있어야 빛을 있습니다. 태양 없는 빛을 상상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태양도 없이 빛을 만드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단 넷째 날 태양으로 하여금 빛을 주관하도록 하셨지만 최종적인 원인은 누가 쥐고 계시느냐? 하나님이 쥐고 계시다는 걸 드러냅니다. 즉 태양 없이도 빛을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태양 없이는 빛을 빛으로서 유지할 수도 없다는 게 일반 상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태양 없이도 빛을 빛으로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란 것도 이 첫 창조물을 통해 드러내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태양이 있어야 빛이 있고, 태양이 있어야 그 빛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태양이 없이도 빛이 있을 수 있고, 태양이 없이도 빛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또한 그 빛을 빛으로서 유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첫째 날 창조를 통해 무엇까지 말씀하고 있느냐 하면 창조뿐만 아니라 동시에 섭리도 그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역사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만 하시고 섭리하지 않으셨다면 그 빛은 곧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cf.시104:29). 그런데 그 빛이 빛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창조하신 것에 대하여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6일 창조 전체를 다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물이 자라는 데는 반드시 태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창조의 순서는 식물이 먼저고 태양이 나중입니다. 식물은 셋째 날, 태양은 넷째 날입니다. 왜 굳이 이렇게 창조하셨는가?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결코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분명 태양 없이는 빛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태양 없이는 식물이 자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가까운 방식 안에서 이해하는 사고일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 먼 원인은 어디 있는가? 태양으로 하여금 빛을 주관하게 하셨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그 빛조차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비춰지고 있는 겁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물이 자라나는 것 역시 태양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창조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만물이 만물 그대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이지는 않지만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일 창조는 창조 자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동시에 섭리로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끊임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6일 동안 창조하실 때 창조와 더불어 섭리로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6일 창조 이후 안식하셨지만 그것이 곧 아무 것도 안 했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창조 자체는 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지만 섭리로서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안식하셨다고 해서 그분의 일하심을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닌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일하심으로 인해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 논쟁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이지만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근거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쉰다는 그런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럼 안식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들의 창조를 마치셨다는 의미에서 표현되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의 창조는 없다. 일 자체를 안 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시던 것을 마쳤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완성하셨다는 의미입니다. 6일 동안의 창조의 역사를 마치고 완성하셨다는 의미에서의 안식인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 3절에 이 날을 어떻게 여기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다른 날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복된 날이요, 거룩한 날입니다. 그러나 그 날들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구별하신 날, 그 날이 바로 일곱째 되는 날입니다. 물론 구별되었다고 말할 때 나머지 6일과 7일은 단절된 그런 의미로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고 말하는 이 날은 6일과 연속된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구별되지만 앞선 6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6일의 참된 의미가 어떤 면에서 안식을 통해 완성을 알리는 성격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의 의미는 3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셨다는 데 있는 겁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다 만드시고 난 뒤, 달리 말하면 창조를 다 행하시고 난 뒤, 그 모든 일을 완성하시고 난 뒤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안식과 관련하여 좀 더 생각할 것은 이 첫 번째 안식 안에 마지막 안식인 영원한 안식을 미리 담아서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JS 설교 참조). 어떤 점에서 그런가? 첫 번째 안식이 창조를 다 행하시고 난 뒤, 모든 일을 완성하시고 난 뒤라면 마지막 안식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다 행하시고 난 뒤, 구원의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난 뒤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안식이나 마지막 안식이나 무엇에 대한 안식이냐 하면 모든 것을 다 행하고 난 뒤, 완성하고 난 뒤 안식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종말, 즉 성도의 죽음에 대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죽음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성화의 완성이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화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상태가 성도의 죽음의 상태인 겁니다. 이런 죽음과 안식의 관계에 대해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히브리서 4장에서도 비슷한 의미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9-10) 그러니까 죽음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란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의미, 다시 말해 첫 번째 안식 안에 마지막 안식인 영원한 안식까지 미리 담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도덕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0장에서는 그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 하면 창조에 둡니다. 출애굽기 20장 11절을 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같은 내용을 다시금 증거하는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의 근거를 창조에 두지 않고 구속에 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명기 5장 15절을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같은 안식일이지만 하나는 창조에 근거를 두고 있고, 하나는 구속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안식일의 명령 안에는 창조와 구속을 함께 생각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창조의 완성을 통한 이 안식 안에는 무엇까지 염두해 둔 안식이냐 하면 마지막 안식인 영원한 안식까지 내다보고 있는 안식의 내용인 것입니다. 창조의 완성을 통한 안식이지만 그 안이 이미 성경 전체로서 보자면 구속을 통한 안식, 그 구속도 그저 이 땅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안식을 고스란히 담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성격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비록 창조를 통해서는 다 완성되었다고 알리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이지만 궁극적인 안식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내용으로 있는 것이 첫 안식 안에서 함께 이해해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첫 안식 자체가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6일 창조가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6일 창조는 분명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 이뤘고,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친 데 있습니다.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조 안에서만이 아니라 창조 안에 구속의 완성까지를 다 포함하여 말한다고 할 때는 여전히 구속의 완성까지 가야 할 미완성이 그 안에 있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여러분, 하나님께서 분명 6일 동안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그 만물에 대하여 평가하셨습니다. 죄악된 것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으뜸으로서 다스리게 하셨을 때 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시느냐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십니다(2:17).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고, 만약 먹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뭐냐? 이미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명령하시고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외적으로는 복과 저주가 갈려져 있는 것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변할 수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이 명령 앞에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변한다는 건 뭐냐? 창조 자체로서는 분명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지만 아직 궁극적인 완성은 아니었다는 걸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죄를 지을 가능성도 없어지게 됩니다. 죄 자체가 없습니다. 유혹도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도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처럼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며,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안식, 영원한 안식에서는 사실 명령 자체가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선택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서만 선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안식의 차원에서 보자면 첫 안식은 보시기에는 심히 좋은 상태였고, 창조의 완성은 알려주고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완성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럼 이런 안식의 개념이 첫 안식과 마지막 안식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첫 안식과 영원한 안식 사이에서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구약으로 하자면 안식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로는 안식 후 첫날이 안식일, 주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날은 어떤 날인가? 이 부분을 첫 안식을 통해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 안식 안에 마지막 안식, 영원한 안식을 담고 있다면 첫 안식과 마지막 안식 사이에 있는 모든 안식일 역시 바로 첫 안식과 마지막 안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살펴야 됩니다.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창조의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맨 처음 서론적으로 시작하면서 창조의 대략적인 내용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되, 권능의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6일 동안 창조하시되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아름답게 지으셨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이 무엇을 한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창조의 맨 마지막에 지어진 존재로서 그 모든 것을 선물로 누리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인정하십니까?
특별히 인간을 모든 만물의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만큼 모든 창조의 초점은 누구냐?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을 위해 무엇을 주셨느냐 하면 모든 피조세계를 주신 겁니다. 인간을 위해 모든 만물을 앞서 창조하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창세기 22장에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서야 비로소 여호와 이레, 예비하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를 통해 이미 그런 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앞서 준비하신 하나님! 첫째 날부터 인간을 지으시기 전까지 모든 만물을 다 만드시고 마지막에 가서야 인간을 만드시면서 그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이렇게 볼 때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창세기 22장에 가서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성격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 여기에 인간이 한 일이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그럼 구속의 역사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구속에 있어서도 인간이 한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맨 첫 사람인 아담은 죄가 없는 가운데서도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죄에 대한 책임과 부패함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만 그런가? 아담을 모든 인류의 대표로 세웠기 때문에(롬5:12) 아담 이후 자연적으로 출생하는 모든 인류가 다 죄책과 부패성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보통 이것을 원죄라고 하는데, 이 원죄를 가지고 있는 이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먼저 찾는 자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이하를 읽어드리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부르십니다. 부를 때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라 택자들에게 만큼은 그 부르심이 효과를 발휘하도록 부르십니다. 유효적 부르심! 그리고는 믿음을 주시고, 믿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증거하는 것은 구속의 단 1%도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창조의 역사처럼 우리는 ‘무’와 같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여기까지 오도록 하신 겁니다. 이사야 65장 1절에서는 재밌는 표현도 있습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묻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지 않는데 어떻게 찾아냄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였지만 찾아냄이 되었다는 말은 인간 스스로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내도록 하신 역사까지도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창조와 마찬가지로 구속 역시 하나님 홀로 행하신 역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이 첫 안식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이것만큼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홀로 다 하셨다는 걸 드러내는 날이다. 거기에 인간의 공로가 조금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드러나야 할 날입니다. 창조의 안식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니 구속의 안식을 통해서도 역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너희는 ‘무’와도 같은 자다. 어떤 피조물도 스스로 뭔가를 한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뭔가를 보탠 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을 보내는 정신은 오로지 주님만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날입니다. 모든 초점이 누구에게 집중되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한 분 하나님,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찬송도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만을 높이는 찬송이 되어야 하고, 기도 역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공예배를 통해 목회적인 기도를 하긴 하지만 그런 내용조차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이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칼빈의 이해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만 근거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기 때문에 그분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발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예배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의 예배인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있다면 오늘날 사람이 주목하도록 하는 예배의 모든 방식은 폐지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나눈다고 하는 간증, 그러나 외형일 뿐 결국 사람이 드러나는 그런 방식은 주일에 합당한 방식이 아닙니다. 아니 예배의 요소로서도 결코 합당한 방식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면서 그저 아이들 재롱잔치나 하듯 하는 그런 일도 사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걸 빨리 근절시켜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즐거워하는 모든 방식은 사라져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이 발견이 되고, 그리고 그분이 명하신 방식으로서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예배 방식인 겁니다.
예배하면 빼 놓을 수 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전 성경인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에 초점을 두었느냐 하면 예배를 드리는 자의 열심 쪽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신6:4-5). 그러나 그런 자세가 이런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내가 찬송했기 때문에,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내가 성경을 읽고 헌금을 드렸기 때문에, 내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원인으로 있지 않습니다. 내 쪽에 이유가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공로 때문에만 받아지는 역사로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홀로 다 행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또한 말씀을 듣는 모든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신 결과물로 있을 뿐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주일에 봉사하고 섬기는 것, 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봉사, 모든 섬김, 그리고 모든 구제, 외형은 우리가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칭찬도 해 주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이지, 주의 은혜 없이 독자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이해가 있다면 당연히 봉사와 섬김, 그리고 구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만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마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듯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세로 있게 되는 겁니다.
예배를 드릴 때만, 주일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에서 6절을 읽어드리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지금 읽은 말씀대로 하자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뭐냐?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부르시는 것까지만 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하는가? 물론 우리도 그 일을 위해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방향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태양을 통해 빛이 나오고, 태양을 통해 식물이 자라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원인, 최종적인 원인,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런 거룩한 삶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는 어떤 말씀도 하시느냐?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20:7-8)
그걸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느냐?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할 것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에스겔 20장을 보시겠습니다. 10절부터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사람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겔20:10-12)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시고 특별히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요, 에스겔의 말씀대로 하자면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법은 무엇을 위해 주시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을 위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많은 법들 가운데 한 가지를 특별히 말씀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인줄을 알게 하는 날이라고 그럽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사실 우리의 매일의 삶을 돌아보면 별로 거룩하게 살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으로 빗대어 말하자면 날마다 원망, 불평입니다. 그러다가 주일에 오면 무엇을 듣게 됩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그 모든 말씀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에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물론 자라나 결실을 맺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외형으로 있습니다. 변화가 없는 듯 보이고, 이런 모습 때문에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닮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뭐라고 기도하셨느냐?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그리고 이런 안식일의 내용이 실제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펼쳐지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해 때로는 주일에 교훈도 하시고, 때로는 주일에 책망도 하십니다. 그러나 다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 역사냐?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으로 바르게 하고, 의로서 교육을 하기 위한 역사일 뿐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안식일을 허락하신 이유, 오늘날 주일을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이 사실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완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일을 아무렇게나 보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찬송을 통해, 기도를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이 사실을 계속해서 인정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더욱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안식일, 즉 하나님 홀로 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더러 일하지 말라, 일상의 일을 멈춰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가? 여전히 일상의 일에 매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되, 온전히 그분 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로서 주일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먹고 산다는 목적으로 주일까지 여전히 그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욕심일 뿐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매일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만큼, 하루 분량만큼만 줍도록 하신 사건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매일 매일 줍는 일, 귀찮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다음날의 몫까지 미리 줍지만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전에는 안식일의 몫까지 줍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그 말씀 그대로 하지 않고 안식일에 나갔지만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먹고 마시는 문제, 욕심을 부려봤자 썩을 뿐입니다. 이 세상 것이 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지고 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그 백성이 지킬 수 있도록 나머지 6일 동안 다 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오늘날 주일까지 일한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우시는 만큼으로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거기에 여러분이 욕심이 들어가 6일 동안의 일을 주일까지 가지고 오는 일들이 있는 겁니다. 굉장히 어리석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안식일, 주일은 하나님 홀로 일하신다는 걸 드러내는 날입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분이 일상의 일을 멈추십시오. 그럼 그 날만 그런가? 아닙니다. 그런 정신이 나머지 날을 주장하여 살도록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출애굽기 16장에 빗대어 설명 드리면 6일 동안은 분명 나가서 주워야 합니다. 노력이 있어야 하고,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과 열심을 통해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열심을 다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주시는 분이 누군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걸 주일을 통해 더더욱 기억하도록 해야 합니다. 안식일, 주일은 바로 그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날입니다. 내 열심도, 내 노력도 결국 주의 은혜임을 깨달아 아는 것! 여러분이 주일을 보낼 때 이런 사고를 가지고 보내셔야 합니다. 주께서 다 하신다. 에스겔 말씀대로 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하신다. 이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첫 안식과 마지막 안식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첫 안식을 통해 마지막 안식까지 다 드러내 보이신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안식도 마찬가지라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첫 안식 안에 그 의미가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안식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셨다, 즉 창조하시던 모든 일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셨습니다. 피조물의 도움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창조를 통해 드러낸 것입니다.
창조가 그렇다면 구속은 어떻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자면 아직까지는 완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구속이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 다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안식은 여전히 하나님 홀로 그 모든 일을 완성하신다는 것을 배우는 날입니다. 이걸 여러분이 철저히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안식의 의미인 주일만큼은 내 모든 일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내가 일주일동안 생활하는 것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하는 것으로 있지만, 주일만큼은 이것이 더욱 드러나는 날이라는 것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니 일주일동안 생활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일하는데 어떻게 죄의 방향으로 가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짓기도 하고, 죄와의 싸움을 싸우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매 주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철저히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완성시켜 가는가를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우리와 더불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일하신다는 것을 철저히 배우시고 인정하는 자로 계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돌릴 수 있는 영광이란 하나도 없다는 걸 배우셔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다 돌리며 사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